♣복음말씀의 향기♣ No3847
5월4일[부할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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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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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OTnAVv8byw
[서울대교구 오승언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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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의 악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에 대한 교부들의 정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는 공동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와 미움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더 나아가서 숙명이요 운명인 듯합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세상은 사실 하느님 창조의 손길이 담긴 걸작품이요, 우리 모든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 공동체로서 거룩한 대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입니다. 죄와 악으로 기운 세상, 기본적인 상식이나 식별력을 상실한 세상, 하느님 아버지를 등지고, 그분의 뜻과 전혀 별개의 노선을 추구하는 악에 물든 세상을 일컫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위로와 축복이 충만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리는 기쁨과 은총도 클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받게될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와 고통도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 같은 경우 주님으로 인해 받는 매질과 돌팔매질, 배척과 모욕, 투옥과 죽음을 더 없는 기쁨이요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고통이 다가올때 마다 더 크게 찬양하고 더 큰 목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지는 당면한 일상적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과 시련을 당연시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무시당하고 오해받을지라도, 그러려니 하고 너그럽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 때문에 고통과 박해 앞에 설 때마다,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친절한 팁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세상의 악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 그 사악함이 너무나 지나쳐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그저 착한 사람 흉내만 내서도 안되겠습니다. 악의 세력들의 농간 앞에 웃고 있어서만도 안되겠습니다. 때로는 단호함과 결연함도 필요합니다. 뱀처럼 슬기로움도 요청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서 필요한 덕행! 곧 인내의 덕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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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시를 거부하겠다>
“지시를 거부하겠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이들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지시는 무엇일까요? 경쟁하여 이겨야 하고, 좋은 대학과 직장에 취직해야 하며, 넓은 아파트에 살고 높은 권력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정신없이 사는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뒤돌아볼 시간을 가지라는 것은 곧 세상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당신을 미워하였듯이 당신의 제자들 또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박해했던 그 세상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거스르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만히 있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은 그 반대입니다. 움직이고 새로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힘을 따르다보면 이렇듯 세상에게 박해를 당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다면 한번쯤은 자신을 뒤돌아 볼 일입니다. 세상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반드시 저항세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저항에서 오는 고통을 받기 싫어서 그냥 주저앉아서 그 물살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서 물살을 거슬러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숨이 남아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열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정만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열정을 보시고 올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물이 흐르는 곳의 끝은 항상 되돌아 올 수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기다린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폭포를 지나면 바다로 나아가 미아가 되어버려 더 이상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없음도 생각합시다.
이 세상이 종국에 가게 될 곳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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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수영을 배우려면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론으로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물속으로 들어가서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필기시험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기시험입니다. 직접 차를 몰고 운전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장롱면허’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을 해 보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운전해 보지 않으면 면허증이 있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메주고리예에서는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하였습니다. 파티마에서는 묵주기도와 행렬을 함께 하였습니다. 루르드에서도 성체강복과 묵주기도 행렬을 함께 하였습니다. 몬세랏에서는 성무일도를 함께 했습니다. 예전에는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일정이 바쁘기도 했고, 숙소가 성지에서 멀기도 했고, 미처 모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함께하면서 성지순례가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림의 떡은 보기는 좋지만, 그 맛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림의 떡은 보기는 좋지만, 결코 먹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말만 앞서고 행동이 없다면 참다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은 하지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저 사람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은 자기들도 하느님께로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성모님의 메시지 중에도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과 멀어지고 있다. 그들이 신자들의 영혼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있다. 그러니 주교와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제게는 ‘죽비’처럼 따갑게 다가왔습니다. 성지순례의 기회가 있어서 몇 번 더 왔지만, 성지순례를 준비하는 마음은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성지순례의 마음가짐은 설명하지만, 정작 저 자신은 여행객에서 순례자로, 순례자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려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은 성화 되지 않았으면서 남을 성화시키려고 하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분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곧 지치게 됩니다. 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신앙이 식어버립니다. 즐거웠던 일들도 시들해지고, 성당에 나오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화 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도할 수 있으며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고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화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연결될 때, 주님 곁에 머무를 때 성화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화 된 신앙인은 박해받을 수 있고, 고독할 수 있으며, 십자가를 지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고, 그 길이 영광과 부활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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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8-21: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8절)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고난을 겪으셨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먼저 세상의 미움을 견디셨다. 우리가 세상의 비난을 받고 귀양을 가고 고문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일을 겪으셨다. 저주받은 세상은 하느님과 화해한 세상, 교회를 박해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9절) 주님의 제자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도 현세에 살지만, 그것은 우리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 세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같은 행동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똑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은 진리의 원수들과 싸워야 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온갖 종류의 박해를 당하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사악한 자들이 방자한 말로 그분을 공격했고, 온갖 말로 당신을 모욕하였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이 받으신 모욕과 굴욕적인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그분께 싸움을 걸더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니까 제자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미 제자들에 앞서 당신이 먼저 박해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20절)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그분이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이 각자 자신의 행실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박해를 받으셨다. 우리도 그분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면 박해를 당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다. 이것 모두가 역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21절) 그 모든 일은 세상이 당신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고 우리의 말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즉, 세상은 주님 대신 우리를 미워하며, 주님 대신 우리를 박해하고, 세상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완전히 다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으로 주님을 닮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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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고별 담화’가 계속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제자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시며 앞으로 제자들이 받게 될 고난을 예고하시는데, 예수님의 착잡한 심정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또한 당신처럼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이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인도 고통받는데, 하물며 종이 고통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지가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의 고통은 스승과 ‘연결’되어 있고, 스승에게 ‘종속’되어 있기에 겪게 될 것이지만, 이는 복음적 열매를 맺게 하는 은총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종속성’(하느님께 속함)은 독서에서 그대로 발견됩니다. 바오로와 티모테오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지시하시는 내용을 따릅니다. 이는 ’성령’, ‘예수님의 영’, ‘하느님’이라는 주어가 제시되는 문장에서 확인됩니다. 그들은 아시아에 가려고 하였지만 “성령께서 …… 막으셨으므로”, 그리고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계획을 바꾸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곳으로 향합니다. 독서에 나오는 주어들(성령, 예수님의 영, 하느님)은 바오로의 선교 여행을 이끈 이는 바오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초대 교회의 경이로운 선교 사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이루신 기적이요 성과임을 밝혀 줍니다.
내가 어디에 속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어렵고 신중하여야 할 일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는지에 따라 삶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속하기,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사람들이나 세상이 좋아하는 일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기, 이것이 영성 생활의 기본입니다. 놀랍게도 하느님께 속하여 그분께서 바라시는 일을 할 때 우리 삶은 비효율적으로 소모되지 않고 최상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오로 선교 여행의 결실이 이를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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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5,18-21)
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라는 말씀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은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니까 예수님의 신앙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움’은 적대감과 박해를 뜻합니다. ‘미워하거든’은, 뜻으로는 ‘미워하는 것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적대감과 박해는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시작되어서 계속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너희보다 먼저’ 라는 말은 ‘박해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박해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알아라.” 라는 말씀은, “알고 있어라.”, 또는 “깨달아라.”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종교박해는 예수님의 신앙인이기 때문에 겪는 일이다. 그러니 인내하여라.”라는 뜻입니다.
2) 세상 사람들은 왜, 예수님과 신앙인들에게 적대감과 반감을 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자기들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편이 다른’ 사람들을 낯설어 하는 것은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닌데,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무조건 거부감과 혐오감부터 가지는 것은 잘못이고 죄입니다.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적이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적대감과 반감도 죄가 되지만, 그 ‘편 가르기’가 더 큰 죄이고, 종교박해는 ‘대단히 큰 죄’입니다.>
싫으면 그만이지, 왜 예수님과 신앙인들을 박해할까? 자기들에게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기들이 살아온 생활 방식, 기존 질서와 체제, 가치관 같은 것들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자기들의 영역에서 제거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종교박해입니다. <유대교의 박해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는 황제의 통치 질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고, 조선시대 때의 박해는 조선의 사회 질서와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사이비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3) 박해자들이 ‘편 가르기’를 한다고 해도, 신앙인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박해자들도 그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되고, 구원의 대상이며, 선교 대상입니다. 그들도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마태 10,16), 이 말씀에는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는 것은, ‘양들’도 살고 ‘이리 떼’도 사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에 박해받고 죽는 것이 무서워서 ‘양들’이 ‘이리 떼의 악한 힘’에 굴복하고, ‘이리’로 변해버린다면, 그것은 ‘양들’도, ‘이리 떼’도 함께 멸망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또 세상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미움 받고, 박해 받는 것은 분명히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긴 한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차지하려면 참고 견뎌야 할 십자가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이 말씀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여라.”입니다.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자들도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자신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지만...... 따라서 박해자들도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신앙인들의 형제이고 이웃이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면서 저주하는 기도를 하면 안 되고, 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도 안 됩니다. 박해자들은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해도, 신앙인들은 그들에게 사랑과 평화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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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정민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십자가의 길>
예수님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미움과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의 운명이 당신의 운명과 똑같은 것이 되리라는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에 대한 세상의 미움과 박해의 결정체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가야 한다는 사실, 그분이 가신 길을 우리도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
피할 수 없는 삶의 십자가 때문에 찾아와 면담을 청하는 교우에게 결국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 사목자로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안타까운데 듣는 사람이야 얼마나 더 안타깝겠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것이 삶의 진리이고 신앙의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내려놓고 도망가라고 말해주는 것은 거짓 목자의 일입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공동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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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과 우리 신앙인은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하나 됨의 자리를 미움과 박해로 소개합니다. 미움의 대상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서로 하나이고, 박해의 대상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은 일깨웁니다.
대개 세상은 고통이나 미움, 또는 환난과 다툼을 싫어하고 회피합니다. 신앙인 가운데 더러는 웃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세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되지요. 슬프지 않고 기쁘게 살아야겠지요.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 뒤에는 그만큼 슬프고 힘든 삶이 진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박해를 즐기신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고통과 박해를 기꺼이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위할 줄 아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바꾸어 버립니다. 특히 고통의 문제와 배고픔의 문제 등을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으로 치부해 버리고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그분과 함께 고통과 박해의 자리에 하나가 되는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와 사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배부름이 누군가에게는 배고픔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신의 웃음이 누군가에게는 쓰라린 눈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 가난과 불행 등의 부정적 상황은 서로서로 챙겨 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이기적 행태의 결과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루를 살아가는 개개인에 대한 비난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이루시는 친교와 신앙인의 일치로 세상의 비난을 이겨 내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어느 자리에서 하나이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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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아니, 제자들은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15,1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존재론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 당하는 또 다른 이유를 “당신 이름 때문”(15,21)임과 “세상이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기”(15,21)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모든 미움과 박해가 반드시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한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렇습니다. 마치, 배들이 항구에 안전하고 평화롭게 매어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험한 바다로 나아가 모진 풍파와 싸워가며 항해하라고 만들어진 것처럼,
제자들은 교회 안에 안주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고기잡이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그러니, 우리는 고난과 미움은 제거해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신앙을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서도 유혹을 없애달라고, 악을 제거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바로 그 순간이 주님께 의탁하고 믿음의 순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이처럼, 세상의 유혹과 악이 우리의 영적 싸움의 공간이듯, 세상의 미움과 박해는 오히려 우리 사명의 실현을 위한 어장이 됩니다. 사실, 고난이 닥친 가장 위기의 순간이 바로 가장 적절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기만 한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께로 향하기만 하면, 그 어떤 고난의 순간도 바로 은총의 순간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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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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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5,18)
묵상 나눔에서 ‘저에겐 참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없습니다.’라는 표현이 어떤 분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그리고 섭섭함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르겠습니다. 단어 하나를 이렇게 삽입했었다면 좋았으리라 봅니다. ‘저에겐 참된 우정을 나누는 세상적인 친구가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나 여러분 모두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서 뽑힌 사람들,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벅찬 감격이고 축복받을 일입니까? 우리는 뽑힌 사람들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별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17, 14)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세상에 뽑으시어 주님에게 주신”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서 뽑혀 하느님께 속한 사람인 우리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우리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다른 시선 곧, 삶의 목적과 가치 그리고 삶의 태도와 행동 양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다른 존재 태도로 살아야 하고 다른 가치관과 다른 삶의 형태를 취해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내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뽑아주시고 선택하신 하느님의 뜻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견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당신의 사람으로 당신의 구원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들의 삶에 어려움이 시작된다고 보입니다.
오늘 복음의 밑그림은 목요일의 복음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15,1-8)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보듯이 불성실한 가지는 잘려 나갈 수도 있으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그 가지는 나무와 모든 생사를 같이 나눈 한 운명공동체입니다. 공동운명체의 중심인 나무(=스승이자 벗이신 예수님)와 가지(=세상에 뽑힌 제자들이며 벗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는 필연적으로 나무가 겪을 일을 가지 또한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이 겪게 될 세상의 미움과 증오, 그리고 박해와 죽임은 필연적이라는 점입니다. 즉 나무가 겪게 되는 모든 것은 가지 또한 겪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더욱 복음서를 편집하던 시점에서 볼 때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15,18) 하고 언급하면서 이런 배경에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미움을 받았기에, 제자들 역시 스승에게 속해 있기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그 사랑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즉 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처럼 세상의 가지들과 어울려 지낸다면 세상의 환대와 사랑을 받을 것이지만,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자체가 아직도 스승 안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의 서두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제자들에게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13,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말씀을 제자들이 깨달아 알고 실천할 때 행복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마치 종이 되어 종들과도 같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지만, 종이 주인보다 결코 높을 수 없습니다. 주인을 태운 나귀의 착각은 자유라지만, 때론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도 있어 왔습니다.
본문 그대로 이해하자면 세상이 주는 미움과 박해 가운데서 이를 극복할 힘은 ‘친구와 친구’의 관계보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종은 결코 주인이 받는 것 이상은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조금은 섭섭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깊은 속뜻을 헤아려 보자면 주님이 바라시는 바는 박해 가운데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으면 그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승화되며, 이 사랑은 ‘친구인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가장 큰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랑할 기회를 주님께서 기꺼이 허락하고 계십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뽑힌 제자들인 저희가 당신의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면서 당신께 대한 사랑으로 이 모든 시련과 박해를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드리고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격려하셨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 뽑아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뽑아 선택하신 까닭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고 그 응답은 또 다른 사랑의 일치와 친교를 이룰 것입니다.
“주님 사도 바오로의 기도가 저의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당신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제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음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도록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고 이 모든 일을 통하여 당신 이름이 영광 받길 바라옵니다. 아울러 사도 야고보의 다음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기며 살렵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 4, 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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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또 글을 씁니다. 백색 소음이 더 집중된다고 해서 카페를 찾기 시작했는데 정말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며칠 전에도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월요일이라 카페가 열리는 10시에 맞춰 갔습니다. 인기있는 카페라서 그런지 벌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래도 비어 있는 자리를 발견해서 커피와 빵을 주문했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으로 커피도 제일 큰 것으로 주문했지요. 그러나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여학생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1) 떠들어서. 2) 난동을 부려서. 3) 너무 예뻐서? 4) 눈길을 두기 힘든 복장이라서?
사실 바로 옆에 앉아 있었지만, 이 여학생의 대화는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 속에 자주 등장하는 ‘욕’ 때문이었습니다. 욕을 얼마나 찰지게 하는지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이어폰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제 귀는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아마 평소에 이런 욕을 말하지 않고, 또 듣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경이 너무 쓰여서 결국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의 찰진 욕을 듣지 않으니 이제 살 것만 같았습니다. 욕이 익숙한 여학생에게는 서로를 향한 친근함의 표시일지 모르겠지만, 간접적으로 듣고 있던 저에게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상처를 줘야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다른 이에게 이렇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이 박해하고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세상의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서 풍요로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넘쳐납니다. 이런 세상의 틀을 따르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해와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주님께 속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 속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사랑에 집중합니다.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게 됩니다. 자기가 사랑받지 못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자기의 세속적 이익이라면 악과 함께하는 것도 꺼리지 않지만, 주님께 속한 사람은 악을 철저하게 미워하고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더 높아지려는 욕심보다는 다른 이를 더 높이려는 겸손으로 무장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주님께 속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시와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 되셔서 구원의 영광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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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맞은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크게 이루었다고 해도 선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 회장이 술집에서 폭행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선생과 학생만 있고,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줄을 세우며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자기 입맛에 따라 좋고 싫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너만 고고하냐?' '잘났냐?'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증거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 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 옳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의 삶이라는 일깨움을 되새기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갚아 주시길 다짐하며……사랑에 사랑을 더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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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벗이기를>
요한 15,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벗이기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 역시
사랑받기를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나 역시
미움받기를
그리하여
나 언제나
당신의 벗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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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오늘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이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야하는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자기들의 계획에 따라 어떤 지역으로 가려고 했다가 여러 사정이 생겨서 그러지 못하게 되면, 그건 성령께서 원치 않으셔서 막으시는 거라고, 주님께서 품으신 뜻과 달라서 그분이 당신의 영을 통해 자기들을 다른 길로 이끄시는 거라고 생각하며 즉시 다른 길을 찾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주님께 열심히 기도까지 해가며 청하던 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절망하며 주님을 원망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요. 자기 뜻과 욕심이라는 ‘작은 그림’ 안에 갇혀있지 않고 주님의 뜻과 섭리라는 ‘큰 그림’을 보며 나아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도 그런 마음자세를 지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당신 뜻을 충실히 따르는 만큼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겠지만,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일은 그저 우연히, 혹은 운이 없어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위해 미리 세워두신 당신의 큰 계획의 일환으로 일어나게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르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불운’이라고 부르는 일이 닥쳐도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재수 없는 일이 생기느냐’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 없는 이들이 시련과 고통이라고 부르는 일을 마주하더라도 ‘당신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왜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일을 겪게 하느냐’며 주님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물 흐르듯 잘 풀리는 일은 ‘아 이게 주님의 뜻이구나’ 생각하며 따라가고, 커다란 난관이 가로막은듯 꽉 막힌 일은 ‘아 이건 주님이 원하지 않으시는구나’ 생각하며 다른 길을 찾으면 될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을 살피기보다,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될 때가 더 많은 듯 합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그들이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말에 흔들릴 때가 많은 겁니다. 주님의 뜻인 ‘숲’을 보지 않고 세상의 뜻인 ‘나무’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 뜻을 보라고 하십니다. 아름답고 큰 숲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무 몇 그루 뽑힌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지요. 다 그 숲을 만드시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 뜻에 따라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 세상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주님 뜻을 선택하여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과정에서 시련과 고통을 겪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뽑힌다는 것은 주님께 꼭 필요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특별히 선발되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모판에 있던 모를 뽑아 논에 심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라는 참된 행복의 나라에 우리를 심으시려고 이 세상에서 뽑으시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뽑혀나가는 것은,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는 데에는 아픔과 고생이 따르지만 그 과정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에 심겨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힘들어도 주님 뜻을 따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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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우리의 존재 이유-
“온 누리 반기어 주님께 소리쳐라.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시편100,1-2)
오늘 복음은 짧지만 초대교회같은 박해상황이 아니기에 이해하기도 어렵고 좀 불편합니다. 현재 우리 교회가 제대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은 우리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과연 교회가 세상과 동화(同化)되어 점차 세상과 하나되어 부패(腐敗)되어 가는 경향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교회가 세상에 속화(俗化)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역할을 상실한다면 존재이유의 상실일 것입니다. 세속화로 무디어져 교회 감각을 많이 상실한 현대 교회가 아닌가 생각될 때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또 세상 한복판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속에서 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의 고백을 통해, 말그대로 총체적 위기의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참 막막하게 생각됩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보려해도, 부정적이, 비관적이 됩니다. 각자도생의 사회, 국내의 정치현실, 사회현실, 교육현실, 군대현실, 모두가 소리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같습니다. 다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교회는 과연 책임이 없나 묻게 됩니다.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자의 현실 진단에 공감했습니다.
“위기의 본질은 가치와 지향, 비전과 신뢰의 상실에 있다. 그려면 남는 것은 눈먼 탐욕뿐이다.”
다음 독일의 문호, 괴테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무한한 욕망따라, 한계없는 삶이 지옥이라는 것이며 오늘의 현실에 대한 진단같기도 합니다.
자주 묻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교회가 과연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함은 물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는지 묻게 됩니다. 세상과 사이좋게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지 묻게 됩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신자 정치가들이요 정당이라면 교회의 가르침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에언자적 교회라면 세상과의 적당한 불편은 필수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박해도 받고 때로 순교자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세상과 하느님의 적대적인 대립은 구원 역사의 근본적인 면을 이룹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배경을 이루는 박해시대에는 세상의 미움의 대상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데 현재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으로 사랑한다 말씀하시는데 과연, 하느님께 속한 우리 삶인지, 또는 세상에 속한 우리 삶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무서운 것은 외부의 박해하는 적이 아니라, 내부의 배신과 변절, 분열의 적임을 역사를 통해 배우고 현재에도 목격하곤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따라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내적일치의 공동체가 우선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에, 하느님께 속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상의 사랑을 받는다면 뭔가 문제가 있음에 분명합니다. 정말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의 삶이라면, 세상을 떠난 삶이 아니라 세상 속의 삶이라면, 때로 세상과의 불화와 불편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현상일 것입니다.
정말 영향력있는 정치가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찾았을 때 용기있게 쓴소리를 낼 수 있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지요. 예전 김수환 추기경은 달랐습니다. 명실공히 시대의 어른이었고 추기경의 발언은 큰 반향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당시 시국이 어려울 때는 추기경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요즘 교회의 눈치를 보고 교회를 어려워하는 정치가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좌파나 우파가 아닌 진정 용기있고 정의로우며 평화를 사랑하는 예수님파 참된 교회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대로 세상과 불편해야하고 불편할 수뿐이 없는 우리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신원이 드러납니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의 존재로 예수님 친히 뽑아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불편해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의 창조한 본연의 좋은 세상에서 아니라 악으로 날로 부패해져가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과 운명공동체일 수 뿐이 없겠습니다. 주인이자 스승인 예수님따라 살다보면 예수님이 겪었던 박해와 고통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요, 이는 바오로 사도는 물론 초대교회 지도자들이나 무수한 순교자들이 그 좋은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행적을 보면 그 고난의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참 자유로워 보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님께 속한 그 자유로움일 것이며 박해를 받거나 순교한 분들 역시 예수님께 속했기에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이들 바오로 일행의 행로를 보면 성령의 인도에, 예수님의 영에 따른, 또 주님의 환시에 따른 삶이 바로 자유로운 삶의 비결이었음을, 또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의 선교가 자유로운 하느님의 섭리이자 주님의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께 속한 자로서 우리 역시 성령께 귀기울이고 성령에 따라 살 때 참으로 자유로운 삶임을 봅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을 찾아야 할 절박한 시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을 알지 못한 무지에서 기인한 박해였음을 봅니다, 역시 무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았더라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정말 열린 눈으로보면 예수님의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이신데 무지에 눈이 가려 예수님도 하느님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음 한 마디로 정의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말씀을 믿어야 무지의 어둠에서, 미궁(迷宮)에서 벗어나 흔들림없이 예수님의 길을 통해 진리이자 생명이신 아버지께 이를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되어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문득 개신교 칼바르트 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잊지 않고 명심하는 말마디입니다.
“성서를 읽듯이 신문을 읽고, 신문을 보듯이 성서를 본다.”
성서를 읽는 마음으로 깨어 신문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매일 미사라는 거울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며 미사를 봉헌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 너희는 알라,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 백성이어라, 기르시는 그 양 떼이어라.”(시편 100,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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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께 뽑히고, 세상에서도 뽑히는>
주님에게 뽑히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고 성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뽑으신다고 다 좋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도 주님께 뽑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뽑히는 것을 다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 따르면 주님께 뽑히는 것은 세상에서 뽑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내가 너를 이 세상에서 뽑아버렸다!
이 세상에서 완전 퇴출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뽑혀도 좋습니까?
잡초라도 자기가 있던 밭에서 뽑히기 싫어합니다. 무릇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뿌리를 단단히 내리지 않습니까? 또 다른 이유에서도 뽑히기 싫어합니다. 주님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이 세상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좋게 이해하면 그야말로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합니다. 나쁘게 얘기하면 신자 대다수가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이럴 경우 주님께 뽑히는 것은 OK, 세상에서 뽑히는 것은 NO입니다. 주님께 뽑히기 위해 세상에서 뽑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입니까?
이것을 진지하게 자문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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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요한15,20)
<본분과 신원!>
오늘 복음(요한 15,18-21)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미움을 받으셨고, 먼저 박해를 받으셨고, 먼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런 의미의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네가 지금 고통과 시련 속에 있다면,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종인 우리를 위해 먼저 고통과 시련 속에 계셨고, 또 이를 이겨내셨음을 기억하면서 고통과 시련을 잘 이겨내라.'
오늘 독서(사도 16,1-10)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이들과 복음 선포자들이 겪은 박해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를 잘 이겨낸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박해를 통해서 복음이 더 멀리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스테파노를 죽이는 박해가,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전해지게 했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가 겪은 박해가, 복음이 더 멀리, 아시아를 넘어 유럽(마케도니아)으로 전해지게 했습니다.
사도들의 성령 체험 이후 주인이신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확고한 믿음이 가져다 준 결과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118,23)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이 아니라, 종(협력자)입니다. 본당 신자들은 본당 사목자의 종들(협력자들)이고, 본당 신부는 본당 공동체의 종(협력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목자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협력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필요한 우리의 본분이요 신원입니다. 이 본분과 신원을 망각하지 말고, 본분과 신원에 맞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하느님의 종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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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I_WQUNFW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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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 19)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뽑으신
하느님
선택의
최전방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돌이켜보아도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다시
만나는
선택의
은총입니다.
우리를 뽑으신
예수님의 계획을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신뢰는
선택으로
드러납니다.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의
선택으로
우리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예수님께서 직접
뽑아주십니다.
사람의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상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을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뽑아주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따뜻한 위로의
마음이 많습니다.
망설이고
언제나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오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선택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선택으로
새로운 창조가
되고 색다른
희망이 됩니다.
갈라설 수 없는
하느님의
선택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선택의 감사이며
실천으로 화답하는
끝없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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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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