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수묵화지만 현대미술과 통해… 해외서 더 주목받아”
56년 화업 한국화 거장 박대성 화백
올해 獨-카자흐 등 4개국서 개인전… LA선 BTS RM이 사진 올려 화제
6·25때 왼팔 잃고 그림에 매진… 故이건희 회장 ‘월급화가’로도 작업
13×5m 대작 ‘코리아 판타지’ 준비… “세계가 공감하는 그림 그리고 싶어”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에서 박대성 화백이 자신의 작품 ‘불국설경’(1996년)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보였다. 박 화백은 “전통 한국화가 촌스럽고 낡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내게 ‘육갑을 떤다’고도 하더라. 하지만 해외에선 한국화에 상상 이상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2022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청명하지만 쌀쌀했던 11일 오전 경북 경주시 남산 솔숲자락.
‘한국 수묵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77·사진)의 작업실은 뭔가 정겨운 냄새가 진득했다. 책상과 책장을 가득 채운 고서와 한지, 붓. 바닥엔 물고기 한 마리가 그려진 한지가 놓여 있었다.
이날 작업실엔 반가운 손님도 찾아왔다. 박 화백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이순자 씨(65)였다. 2007년 시민 대상으로 박 화백이 무료 그림수업을 한 ‘우리 그림 교실’ 1기 수강생. 그때부터 연을 이어온 이 씨는 “해외 일정으로 바쁘셔서 잠깐 오셨다기에 냉큼 찾아왔다”며 반가워했다.
올해 6월부터 8월까지 카자흐스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박대성 개인전 ‘THE ETERNAL’.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 제공
실제 박 화백은 올해 눈코 뜰 새 없다. 3월 독일과 6월 카자흐스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9월 하버드대와 다트머스대에서 연달아 개인전이 열렸다. LACMA 전시는 지난달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관람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화제가 됐다. 박 화백은 “10월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과 내년 미 뉴욕주립대, 메리워싱턴대에서도 전시가 잡혀 있다”고 했다.
“22일에도 미국에 갑니다. 해외에서 주목받는 이유요? 전통 수묵화지만 현대미술과 통하는 게 있어서죠. 평생 탐구한 ‘보이지 않는 뿌리’에 관객들이 진정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박 화백이 말한 ‘뿌리’란 무엇일까. 그는 문화의 정수가 글자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 제사 지방문과 병풍을 따라 그린 그는 중국, 대만에서 서예를 배웠고 상형문자의 원형을 찾아 히말라야도 다녀왔다. 박 화백은 “인류의 근간인 상형 속에 삼라만상이 들어있다. 그 자체가 최고급 디자인”이라고 했다.
국내외를 오가는 와중에도 박 화백은 큰 프로젝트 하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가로 13m, 세로 5m 규모의 대작을 구상하고 있다. 화폭엔 백두산과 한라산, 금강산을 뼈대로 한반도 암각화와 벽화를 그려 넣으려 한다.
“마지막 대작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경주솔거미술관 ‘몽유신라도원도’(11.5×5m)보다 클 거야. 제목은 정해뒀어요. ‘코리아 판타지’. 수묵화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공감하는 작품이 됐으면 합니다. 이르면 올해 말쯤 완성될 거예요.”
박 화백은 “마지막 대작”이지만 동시에 “첫발”이라고도 했다. 앞으로의 그림은 세계를 염두에 두겠다는 뜻이다. 그는 “이젠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나아갈 시점”이라며 “더 단순하게 시원하게,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폭발력 있는 작품을 그리겠다”고 했다.
원로 작가로서 새로운 시도가 두렵진 않을까. 박 화백은 “인생은 원래 고행이다. 타성에 젖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껄껄 웃었다. 그는 6·25전쟁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그도 왼팔을 잃었다. 하지만 박 화백은 “팔을 잃은 건 화가로서 운이 좋았다”고 했다.
“집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지. 불운을 잘 다루면 어떤 운보다 더 큰 행운이 됩니다. 그 덕에 1984년 가나아트에서 1호 전속작가가 됐고,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월급화가로도 일할 수 있었죠. 예술가는 억척스러워야 해.”
박 화백은 청년에게도 “고비라고 느껴지면 붓을 잡아보라”고 권했다. 꼭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다. 붓을 스승으로 삼으면 스스로 깨닫는 게 있다는 조언이다.
“붓은 연필과 달리 마음대로 잘 써지지 않아요. 가고자 하는 길을 잘 따라 주지 않는다고 할까. 그래서 필법(筆法)이란 게 존재합니다. 각자 나름대로 얻는 게 있을 겁니다.”
경주=김태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