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
합치 결정을 내림으로써, 앞으로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합법적으로 병역을 기피할 수 있게 되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용어도 잘못되었다. 양심적이 아니라 종교적이라고 고쳐야 한다. 이번 결정
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기독교 특정 종파 신도들에 대한 명백한 특혜로 헌재의 커다란 실수다.
단지 군에 가기 싫어서 계획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할 작정인가? 국
가라는 집단생활에서 자유는 의무를 수행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개인의 자유가 집단의 생존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전 국민이 병역의무를 수행하여 나라를 지키는데, 자신이 믿는 종교의 왜곡
된 교리를 핑계로 나라를 지키는 의무를 수행하기 싫은 사람은 당연히 대한민국을 떠나야 한다! -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하루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보고 듣고 생각한 내용을 기록한 일기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
로도 전쟁의 최고 지휘자가 일기를 남긴 사례는 「난중일기」가 유일하다. 충무공의 일기에 ‘난중일
기’라는 제목을 붙인 사람은 정조 때 실학자 유득공이었다. 정조는 재위 19년(1795) 규장각 검서 직을
겸하고 있는 유득공에서 『이충무공전서』 편찬을 명했는데, 유득공은 충무공의 문건을 모두 수집하
여 14권 8책으로 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제5권부터 제8권까지 충무공의 일기 부분의 명
칭을 「난중일기」라고 붙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에 일어났는데 1월 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충무공이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이미 거북선을 건조하고 함포인 지자포와 현자포를 시험발사하는 등 왜놈들
의 침략을 내다보고 이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중일기」에는 공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개인사와 충무공의 감정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날짜와 날씨만 쓰고 만 경우, 단 한두 줄로 간단
하게 마친 경우, 며칠 또는 몇 달씩 건너뛴 경우 등 보통사람의 일기처럼 부실한 구석도 많다.

임진왜란 내내 못난 짓만 골라 하던 선조가 충무공을 전라좌수사에 제수한 것은 전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현명한, 그야말로 ‘神의 한 수’였다. 1589년 정읍현감(종6품)으로 있던 충무공은 진도군수(종4
품)에 제수되었다. 정6품-종5품-정5품을 건너뛴 4계급 특진이었다. 사간원에서 반대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충무공이 진도로 떠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정3품)에 제수했다. 이 역시 정4품과 종3품
을 건너뛴 3계급 특진이었다. 본인은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삽시에 7계급 특진을 한 것이다. ‘선조가
진두군수 이순신을 초자(超資)하여 전라좌수사에 제수했다’는 기록을 보면, 분명 알고도 의도적으로
여러 품계를 뛰어넘는 특진을 시킨 것이다.

선조는 여러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재가 모자라 부득이 취한 조치라며 명을 거두지 않았다.
충무공은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권관(종9품)으로 관가에 발을 들여놓았다. 순차적
으로 직급이 올라 36세에 장군 반열인 전라좌수사 휘하의 발포 수군만호(종4품)에 제수될 때까지만
해도 평탄했다. 그러나 1581년 경차관 서익의 모함으로 훈련원 봉사(종8품)로 강등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전전하던 충무공은 1586년 궁궐의 말[馬]을 관리하는 사복시의 주부(종6품)로 승차했다. 주
부 재직 16일 만에 충무공은 유성룡의 천거로 다시 만호(종4품)로 승차하여 함경도 두만강 하류에 있
는 녹둔도 둔전사의로 부임했다.
그 직후 충무공은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후퇴했다. 이순신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때도 유성룡이 나서서 함경병사 이일이 이순신의 증원군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 패전했
다고 변호하여 겨우 교형(絞刑)을 면했다. 다시 함경도로 돌아가 백의종군하던 충무공은, 1588년 여
진족을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아 전라도 조방장과 선전관을 거쳐 1589년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던 것이
다. 1590년에는 고사리진 첨사(종3품)와 만포진첨사(정3품)에 제수되었지만 언관들의 반대상소로 무
산되기도 했다. 1591년 2월 선조가 온갖 반대를 다 물리치고 충무공을 전라좌수사에 제수한 이면에
는 이런 기나긴 사연이 있었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충무공은 전임 좌수사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부하들을 조련시켰다. 하루하루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면서 모든 부하들을 자기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만들었다. 부하 군관들을 조련
시켜 거북선의 설계도를 그리고 나무를 베어다 건조하여 배를 만드는 일도 직접 수행하도록 했으며,
다른 군관들에게는 지자포와 현자포를 거북선에 설치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적함을 격파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여 사격훈련을 하도록 했다. 준비가 끝나자 충무공은 모든 장병들뿐만 아니라 관할지
역의 백성들도 참여하는 실전훈련을 시켰다. 이 훈련은 훗날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군민(軍民) 합동
작전으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간간히 점심시간 맥도널도에서 햄버거를 사먹으며 보는 풍경 입니다. 마신 빈컵은 별도 보관장소 표시에 놓아야 하는데 이것마저 일반 쓰레기통에 한꺼번에 버리는 젊은이들이 있어 분리수거 환경개선은 요원 하기만 합니다.이번 월드컵 일본팀이 묵었던 라커룸을 깨끗이 청소하고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써붙여 놓은 메너야 말로 바로 일본의 국력 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순신을 7계급이나 특진시켜 전라좌수사에
제수한 것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외치게 만든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읽은 김종대 판사의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라는 책에는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을 "정성, 사랑, 자력, 정의의 내면적 가치가 충무공의 인격을 이루고
이 인격을 원천으로 해 저절로 상황에 맞게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발현된 정신적 자세와 힘"으로
표현하였습니다.재판관이 존경하는 충무공의 연구에 오랜 시간 정성을 다 바친 책을 읽으면서
많은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