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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3(주)
* 시작 기도
(대상 18:13)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주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하나도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이를 깨닫고 곧바로 엎드려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시 32:3-6)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죄를 깨달을 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자신의 죄를 깨닫자 그 자리에 엎드려 회개한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시고 그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나는 다윗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런 나를 우리 주님께서는 진멸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공의로 심판하셔서 무덤에서 생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늘 이 주일에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자로 삼으소서.
예배하는 처소마다 주의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옵소서.
성찬식 가운데 보혈의 은혜가 넘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수 8:1-9
제목 :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3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3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여 매복하되 그 성읍에서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준비하라.
5 나와 나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올 것이라. 그리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6 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추격하며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거든
7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너희 손에 주시리라.
8 너희가 그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였느니라 하고
9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매복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에서 잤더라.
* 나의 묵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고 여호수아를 격려하신다.
그리고 모든 군사를 데리고 아이로 아이로 올라가라 하시며 아이 성에 대한 재공격을 명하신다.
이 전쟁은 아이 왕과 그 백성들 그리고 성읍과 그 땅 모두를 이스라엘에게 붙이셨음을 선언하시며 승리의 확신을 주신다(1절).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 공격 전술과 전리품의 처리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와 같이 이들을 철저하게 진멸할 것이다.
다만 아이 성의 탈취물은 여리고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이 마음대로 취하라고 하신다.
무엇보다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배치할 것을 명하신다(2절).
이에 여호수아는 군사 3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한다.
너희는 아이 성 뒤에 매복하되 성 가까이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3-4절).
나와 함께 나를 따르는 주력 부대는 1차 공격 때와 같이 그들을 친 후에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 하여 아이 성 군사를 성 밖으로 유인하라고 한다(5-6절).
바로 그 때 복병들은 성을 점령하고 불살라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지시한다(7-8절).
여호수아의 지시대로 매복할 군사들을 보내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들과 함께 잤다(9절).
여호수아는 아이 성 1차 전투에서는 보기 좋게 패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물론 아간에게 있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여호수아 자신에게 있었다.
그것은 아이 성을 공격하면서 하나님께 묻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정탐꾼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대하 20:15)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정탐꾼들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전략적으로 분석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들은 정탐 결과 아이 성은 작기 때문에 이삼천 명만 보내면 될 것 같다고 하였다.
굳이 모든 사람을 다 보내서 그들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삼천 명만 보내서 전쟁을 한 결과 군사 36명이 죽고 전쟁은 패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여호수아가 한 일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다.
(수 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한 원인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이 성 사람들하고 다시 싸우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상상을 항상 초월하신다.
같은 전쟁이라도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 이유는 전쟁의 성패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묻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께 잘 묻고 잘 순종하는 사람이다.
같은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물었다.
전쟁의 대상도, 전쟁의 장소도, 모든 환경이 같되 시간만 다를 뿐이다.
나 같으면 어제와 오늘의 상황이 똑같기 때문에 어제처럼 그냥 진행을 할 것 같은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항상 물었다.
(삼하 5: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삼하 5:22-23)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이번 아이 성 전투를 통해서 여호수아도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1차 전쟁에서 패했지만, 2차 전쟁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기습작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정탐꾼들은 3천 명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그와는 전혀 다르게 3만 명을 동원하여 전쟁을 치르게 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3만 명이 아니라 300명으로도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3만 명을 동원하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쟁은 숫자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와 사람의 뜻이 아니라 철저하게 겸손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진정한 겸손임을 알게 하신 것이다.
‘겸손’이라는 찬양이 있다.
그 가사의 일부는 이렇다.
참을 수 없어도 화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조건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것.
칭찬이나 비난 가운데서도 침묵하며 살아가는 것.
말씀 순종하기 어려울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겸손은 겉사람이 드러나지 않고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
말씀을 순종하기 어려울 때에도 믿음으로 순종하며,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에 주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맡기는 것이다.
나의 강함이나 나의 겉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강함과 함께 나의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 중에 최고의 사람은 당연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닌 게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또한 완전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 주님께서는 창세전의 세계에서나 사람으로 오신 이 세상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창세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그리스도는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 안에서 거하셨다.
아들은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그 복종을 받으시므로 자신의 사랑을 다 내어주셨다.
아버지의 내어주시는 사랑의 본질이 바로 영광이다.
이처럼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곧 철저하게 창세전부터 아버지께 복종하여 사랑 안에 거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이름은 다른 말로 ‘예수아’이다.
예수아는 곧 예수님의 이름인 ‘예수’와 동일하다.
구약의 여호수아와 신약의 예수의 이름은 같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수아가 예수와 동일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면에서는 여호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를 보아야 한다.
여호수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에게는 영생을 주는 생명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영생을 주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는 구약의 인물 설교를 자주 했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순종을 했으니까 우리도 그를 본받아 순종하자.
그렇게 하면서 구약의 인물을 들어서 얼마나 많이 교훈적인 설교를 했는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면 은혜와 감동이 밀려오기도 하고, 성도들은 은혜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기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영생을 맛보고 누리는 일은 언감생심 상상할 수도 없다.
요셉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서 형통하게 되어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서 이 땅에서 형통한 자가 되어 총리와 같은 자리에도 올라가고 부자가 되자는 식의 설교를 하면 성도들은 한껏 고무되어서 모두가 한 목소리로 ‘아멘~’을 외치며 화답한다.
세상에 주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잘 되라고 축복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아 사라지고 없어지고 쇠하고 말 이 세상의 것, 즉 무상성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탐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을 들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행해서 부자가 되었으니까 우리도 부자가 되자는 것은 성경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이다.
성경은 결코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은 항상 영생에 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나는 이 영생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쯤으로 치부하여 그 가치를 현저하게 깎아내린 자였다.
아니 깎아내린 정도가 아니라 그 의미와 가치를 완전히 부정한 자이다.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부터 세상의 법칙에 지배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법인 영생을 맛보고 누리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할 때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도 온전히 소망가운데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생을 이 땅에서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썩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않는 씨인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날마다 이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곧 영생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복음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알아야 영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영생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전에는 알지 못하여 영생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곡해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무엇보다 잘 알기에 날마다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지 않을 수 없다.
나 비록 연약하며 자주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과의 교제에서 비롯된다.
말씀 안에서 날마다 복음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나의 일상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하므로 오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영생을 알지 못하던 자가 이제 영생을 맛보고 누리는 자가 되었나이다.
나 비록 연약하여 자주 불 가운데 넘어지고 자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복음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 안에서 복음으로 교제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구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전에는 구약의 상황과 인물을 보면서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 나도 그렇게 살기를 구하였으나 생명이 없었나이다.
이제 구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므로 내 안에 살아 있고 항상 있는 썩지 않는 씨인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이 있사오니 이 복음으로 주님과 교제할 수 있음이 축복임을 아나이다.
나의 연약함을 하감하여 주시고, 나를 주의 손으로 붙잡아 오직 주의 구원의 도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기쁨 되기를 원하오니 이 한 몸 주의 도구로 사용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