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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Ladies Code 주니 ♡
*이 글은 리오넬 메시 디스글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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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하면 당연히 펠레와 마라도나 메시 그리고 크루이프와 베켄바우어를 말한다.
그리고 현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한다면 당연히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포지션은 무엇인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포지션은 인사이드 포워드, 윙 포워드라고 하고
리오넬 메시의 포지션은 '제로톱' 혹은 '펄스 나인'이라고 한다.
이 중 리오넬 메시의 포지션인 '제로톱' 혹은 '펄스 나인'의 '최초'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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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e 9
리오넬 메시의 위치는 대체로 중앙 공격수이다.
쉽게 말해 원톱 스트라이커/포워드인 셈이다.
그러나 리오넬 메시의 실제 플레이를 보면 기존에 호나우도나 세브첸코, 반 니스텔루이와는 다른 공격수이다.
보통의 공격수는 대체로 박스 안에서 기민한 움직임을 이용한 골사냥 및 공간 창출을 하거나, 제공권을 이용한 승부
뒷공간 침투, 위치선정을 이용한 골사냥을 주로 한다.
하지만 리오넬 메시는 좀 다르다.
리오넬 메시는 기존의 중앙 공격수들과는 다르게 '펄스 나인'이라고 불린다.
펄스 나인이란, 가짜 9번이라는 뜻이다.
리오넬 메시의 플레이를 살펴보면 기존 공격수들과는 다르게 최전방에서 공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미드필더 지역까지 내려와 동료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핀 후 동료 선수들에게 스루패스를 선물하거나,
동료 선수들이 최전방에 공을 던져주면 2선에서 침투하여 골을 성공시키곤 한다.
우리는 이런 리오넬 메시를 보고 '가짜 9번' 혹은 '펄스 나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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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스 나인의 창시자는?
사람들이 잘못 알고있는 부분 중 하나가 펄스 나인의 창시자에 대한거다.
펄스 나인의 창시자에 대해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 과르디올라가 만든거 아닌가요?"
혹은
"00년대 스팔레티가 로마에서 만들었죠. 아니예요?"
그러나 이는 잘못 되어진 정보다.
펄스 나인의 창시자는 스팔레티도 과르디올라도 아니다.
펄스 나인의 시초는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0년대의 오스트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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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남자 마티아스 진델라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라고 하면 바로 이 남자 마티아스 진델라가 거론된다.
마티아스 진델라 (1903~1939)
마티아스 진델라는 1918년 헤르타 비엔나라는 클럽에 유소년으로 입단했고,
1924년 FK 아우스트리아 빈으로 이적하면서 짧지만 굵은 역사를 시작한다.
1924년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데뷔전을 치룬 진델라는 이듬해인 25년 오스트리아 컵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은퇴할때까지 FK 아우스트리아 빈에서만 뛰면서 5번의 컵대회 우승과 1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진델라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는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진델라는 데뷔 후 바로 자신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1926년 리그 우승을 차지할 당시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의 활약을 눈여겨 본 당시 오스트리아의 감독 '휴고 메이슬'이 그를 오스트리아 국가대표로 부른다.
휴고 메이슬 (1881~1937)
휴고 메이슬은 진델라를 오스트리아로 불렀고, 1926년 9월 28일 체코 슬로바키아와의 친선전에서
그를 기용하기 시작한다.
체코 슬로바키아전에서 풀타임 활약한 진델라는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넣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휴고 메이슬은 진델라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티아스 진델라의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였다.
그러나 마티아스 진델라의 신체적인 능력은 센터 포워드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최전방 공격수라고 하면 뛰어난 몸싸움과 결정력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뛰어난 제공권은 덤으로 가져야만 한다고 봤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델라는 '결정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몸싸움'과 '제공권' 측면에선 정말 별로였다.
마티아스 진델라가 종이 남자라고 불린 이유도 이 부분에서이다.
그는 몸싸움이 약했고, 신체 조건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상대편 선수들이 거칠게 다루면 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종이 남자'라고 불렀다.
진델라는 몸싸움과 신체적인 조건, 제공권 면에선 정말 별로였다.
그 시대가 원하는 최전방 공격수의 조건에 전혀 부합하지 못한 선수였다.
그러나 진델라는 그 시대의 최전방 공격수들이 가지지 못한 무기가 있었다.
그 것은 바로 '패스'였다.
하지만 당시 최전방 공격수에 어울리지 않았던 진델라를 두고 휴고 메이슬은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최전방 공격수에 두어야 잘 할 것같은 선수인데.. 최전방에 세워 놓기만 하면 몸싸움을 자꾸 지기만 하고.."
그래서 메이슬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한가지를 생각해냈다.
마티아스 진델라를 최전방에 놓긴 하지만 아래로 내려와서 플레이를 시키는 방식
바로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펄스 나인'의 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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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대표하는 최강의 팀
1930년대를 대표하는 나라는 여러 나라가 있다.
쥐세페 메아차의 이탈리아와 호세 나사찌의 우루과이이다.
이 두 나라는 모두 월드컵 우승 팀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사람들은 이 두 나라를 1930년대 최강의 나라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1930년대 최강의 나라를 저 두 나라가 아닌
'환상의 팀'이라고 불리는 마티아스 진델라의 오스트리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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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부르는 별명
마티아스 진델라라는 최전방 공격수를 얻은 휴고 메이슬의 오스트리아는 차원이 다른 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진델라는 펄스 나인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진델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 한다.
펄스나인을 적용한 진델라의 오스트리아는 경기당 평균 3.0이 넘어가는 골 폭풍을 선보였고,
2년동안 무려 84골을 집어넣는 미친 득점력을 보인다.
그런 팀을 본 사람들은 오스트리아를 기적의 팀 혹은 환상의 팀이라고 부른다.
진델라의 오스트리아는 1931년부터 , 1934년 6월 3일 이탈리아한테 패배할때까지
무려 25경기 19승 5무 3패를 기록했다.
그들은 막강한 화력을 보이며 1934년 월드컵에서 우승후보 0순위로 꼽힌다.
하지만 34년 6월 3일 4강전에서 만난 개최국 이탈리아에게 0-1로 패배하면서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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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의 이유
이후 진델라의 오스트리아는 부진의 늪에 빠져 들었다.
그 부진의 원인은 '진델라 거칠게 다루기'라는 것에 있다.
진델라가 몸싸움이 약하고, 신체적인 조건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상대팀은
오스트리아 특히 진델라를 매우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고,
요즘과는 다르게 파울에 대해 관대하던 그 시절에 거칠게 다루는건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갔다.
그 덕분에 진델라의 몸은 점점 약해졌다.
거기다가 오스트리아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과 더불어, 경기장 상태도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했고,
그래서인지 오스트리아가 실행하고자 했던 패스는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스트리아는 점점 약해져만 갔고, 진델라도 더불어 약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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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 속의 부적절한 끝
이후엔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지배했고,
오스트리아의 선수들 대부분은 히틀러의 나치로 강제 이적 당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을 매우 강력한 축구 팀으로 만들길 원했다.
그래서 나라를 점령할때마다 뛰어난 선수를 강제로 이적시켰고, 강제로 나치로 만들었다.
진델라도 예외는 아니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진델라에게 독일로 옮기길 권유했다.
그러나 진델라는 오스트리아를 떠나길 거부했고, 진델라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 된 이후
부상 혹은 나이가 많아서 독일 대표팀으로 출전할 수 없다고 대충 둘러댔다.
히틀러는 그런 진델라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39년 1월 2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위대한 축구선수가 생을 마감한다.
마티아스 진델라는 1939년 1월 23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일산화 탄소 중독'이였다.
그러나 진델라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1. 일산화 탄소 중독
2. 오스트리아가 합병된 것에 대해 분노로 인한 자살
3. 히틀러는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진델라를 좋게 보지 않았고, 그를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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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나치에 의해 분해 되어버린 오스트리아는 예전 명성을 잃어갔고, 점점 무너져갔다.
그리고 1930년대 오스트리아는 점점 역사속으로 사라져만 갔다.
그렇게 펄스 나인의 역사도 사라져만 가는 듯 싶었다.
그러나 20년 뒤에 한 남자에 의해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 남자는 구스타보 세베스라는 헝가리 대표팀의 감독이였다.
그는 '난도르 히데구그티'라는 선수를 이용해서 펄스 나인을 새롭게 재탄생 시켰고,
진델라와 휴고 메이슬의 오스트리아가 남기고 간 족적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구스타보 세베슈 (1906~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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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가짜 9번
우리는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잘못 되어진 정보를 알고, 그게 후세로 넘어 간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잘못 된 정보를 제공받게 되어 버린다.
펄스 나인의 시초를 적은 이유도 그래서이다.
펄스 나인 혹은 제로톱이라고 불리는 이 전술은 00년대 스팔레티 혹은 10년대 과르디올라가 만든 전술이 아니다.
펄스나인 최초의 선수 또한 프란체스코 토티도, 리오넬 메시도 아니다.
펄스나인은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0년대 오스트리아가 최초로 실행시켰다.
비록 그들의 전술인 펄스 나인은 끝맺음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20년 뒤엔 헝가리의 세베스와 2000년대 펩 과르디올라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세베스와 과르디올라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펄스 나인을 재탄생시킨다.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펄스 나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리오넬 메시를 말할 것이다.
아니 리오넬 메시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최초의 펄스나인은 리오넬 메시가 아닌 '마티아스 진델라'이다.
첫댓글 좋은 글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좋아요 찾고 있었음 ㅋㅋㅋ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