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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기레이다(예쁘다), 주니코!"
오늘 첫 일정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센슈(千秋)공원입니다. 아키타 영주 사다케 요시노부(佐竹義宣)가 1604년에 쌓은 구보타(久保田)성을 공원으로 꾸며놓았습니다. 시내 도로와 마주한 바깥해자에는 연이 가득합니다. 연꽃은 졌어도 반짝이는 푸른 연잎이 싱그럽습니다.
아키타 센슈성의 망루.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사다케 동상과 신사가 나오고 높은 곳에 망루가 서 있습니다. 일본의 이름난 고성(古城)에는 보통 천수각(天守閣·덴슈카쿠)이 있죠. 망루 겸 지휘부로 쓰이는데, 에도 막부가 아무 성이나 천수각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구보타성에도 천수각처럼 생긴 망루가 있는데 오스미야구라(御隅櫓)라고 부릅니다. 무기고 겸 망루로 쓰였다는군요.
망루 앞에 서니 사방이 훤하게 펼쳐지는데 나무가 시야를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잘 보일 것 같습니다. 100엔의 입장료 때문에 태성 총무가 주저하는 빛을 보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입장료 1천 원을 아끼게 됐습니까? 여러 사람이 고집을 부려 돈을 내고 망루 위로 올라갑니다.
이곳을 지배한 사다케 가문 역대 영주들의 이력을 소개해놓았다.
돈을 낸 값을 할 만큼 조망이 좋습니다. 사다케 가문 가계도와 역대 영주들의 이력들을 전시해놓고 부대의 행렬도 미니어처로 만들었네요. 의자에 앉아 구보타성을 소개하는 영상도 관람합니다.
벽에는 아키타 미인상의 선호도를 조사하는 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젊은 여성 6명의 사진을 두고 대원들의 품평이 한창입니다. 대부분 눈매에 눈길이 먼저 가는데 치과의사 동규는 치열에 관심이 많더군요. 누군 성질이 고약할 것 같고, 누군 남자들에게 잘해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상철이가 “우리가 이러쿵저러쿵한다는 사실을 얘들이 안다면 ‘내가 이러려고 포스터에 등장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고 말할 것”이라고 동정합니다.
망루를 나서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도중 정형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우리 아직까지 점프샷을 한 번도 안 찍었잖아. 여기서 한 번 해보자”라고 말합니다. 몇몇이 무릎이 시큰거린다는 둥 허리가 안 좋다는 둥 핑계를 대며 슬금슬금 빠집니다. 태성이는 한 번 뛰어보더니 “손바닥이 찌릿해진다”며 겁을 냅니다. 어쨌든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몇 컷을 건졌습니다.
아키타 센슈성에서 대원들이 점프 샷을 시도하고 있다.
공원을 나오니 시민시장 이정표가 보입니다. 갑표가 “사과가 유명한 고장에 가니까 사과 깎아먹을 과도를 가져오라고 해놓고 한 번도 못 써먹었어”라고 말합니다. 시장 풍경을 구경할 겸 과일도 살 겸 들어갑니다. 아오리 사과를 사고 난 뒤 병래와 저는 영수를 따라 기리탄포를 집어듭니다.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끓여먹을 심산입니다. 4인분에 1천 엔이니 싼 편이네요.
다른 대원들이 “집에 가져가기 무거우니 오늘 밤 호텔방에서 라면포트에 끓여 먹자”고 강권합니다. 병래는 흔쾌히 그럴 용의가 있다고 말하는데 저는 속으로 “깜박 잊고 차 트렁크에 놓고 내렸다고 말해야지”라고 다짐합니다.
각자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보는데 태성이가 제게 다가와 말합니다. “여기 도시락이 무척 싼데 사들고 가서 트레킹할 때 먹으면 어떨까?” 도시락 코너에 가니까 정말 싸고 푸짐해보입니다. 사시미와 스시가 없어서 그런지 아오모리역의 에키벤에 비해 가성비가 갑입니다. 개당 400엔 대입니다. 혹시 스시 도시락이 있는지 다른 곳을 돌아봤는데 그건 안 보이더군요. 입맛대로 각자 도시락을 한 개씩 고르고 튀김도 몇 점 따로 샀습니다. 미소시루(味噌汁)도 사람 수대로 포장해줍니다.
아키타 시민시장에서 파는 도시락.
승용차에 올라 주니코(十二湖)로 향합니다. 우리가 보는 세 번째 호수군요. 호수의 규모는 작았지만 산책길로는 으뜸입니다. 앞에 본 두 호수가 천지나 산정호수를 방불케 한다면 이곳은 경북 청송의 주산지를 닮았습니다.
시라카미(白神) 산지에는 너도밤나무 원시림 속에 크고 작은 33개의 호수가 있고 이 가운데 12개 호수가 손에 꼽혀 주니코라고 불린답니다. 우리는 주차장과 기념품가게가 있는 교로로 삼림물산관 앞에서 출발해 1,8㎞를 걷는 원점 회귀 코스를 택합니다. 아오이케(靑池), 게토바노이케(鶏頭場の池), 와키쓰바노이케(沸壺の池), 오치쿠라노이케(落口の池), '가마이케(がま池) 5개의 호수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단풍이 살짝 물들려고 하는 호숫가를 배경으로 희용 대장이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있다.
출발 전에 비치 파라솔 아래 앉아 도시락을 꺼내 먹습니다. 맛도 훌륭합니다. 가성비만 좋은 게 아니라 가심비도 괜찮습니다. 기념품 가게에는 우동을 파는 작은 식당이 있긴 하지만 비길 바 아닙니다. 답사객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봅니다. 도시락을 안 샀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습니다.
주니코 트레킹에 앞서 아키타 시민시장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고 있다.
도시락을 까먹으며 제가 70년대식 아재 개그를 늘어놓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마음 좋은 사람 이름이 뭔지 아니?” “뭔데?” “내 벤또 니 까무라.” “푸하하!” “ 그 사람보다 더 마음 좋은 사람이 있어.” “누구야?” “내 마누라 니 하라.” “까르르”
여기서 동규가 무리수를 둡니다. “도끼로 이마 까, 깐 이마 또까, 안 깐 이마 골라 까….”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 집니다. 대원들이 마치 못 들을 얘기를 들은 것처럼 뜨악한 얼굴로 동규를 노려봅니다.
주니코 산책길을 따라 걷고 있는 대원들.
가벼운 차림으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차가 다니지 않고 사람도 적어 걷기 딱 좋습니다. 단풍이 덜 물들긴 했지만 숲속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특히 아오이케는 잉크를 풀어놓은 듯 선명한 코발트색이 인상적입니다. 어쩜 저런 빛깔이 나는지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낙엽이 수북히 쌓인 길을 밟는 느낌도 좋습니다.
아오이케(靑池) 앞에서 병래 대원이 정형 대원의 모습을 찍고 있다.
대원들은 연신 절경을 향해 폰카 렌즈를 들이댑니다. 병래는 풍경보다 대원들 얼굴에 관심이 많습니다. 파인더에 눈을 바짝 붙인 채 셔터를 눌러댑니다. 병래는 저더러 “너는 웃는 모습이 영 어색해. 그리고 얼굴 밑에 살집이 많아 사진이 잘 안 나와”라며 아쉬움을 표합니다.
가장 욕심을 내는 대원은 정형입니다. 멋진 풍경만 등장하면 병래를 부르며 찍어 달라고 성화입니다. 병래는 귀찮아하면서도 자신의 솜씨를 알아주는 친구가 고마운지 선선히 응합니다. 이번 원정을 통해 모델 정형은 사진작가 병래의 페르소나가 됩니다.
주니코 트레일을 가볍게 산보하듯 걷는 대원들.
길을 걷다가 제가 이런 말을 꺼냅니다. “이효리의 이름 효리를 줄이면 ‘횰’이래. 정유미의 유미는 ‘윰’이고 그래서 윰블리라고 하잖아. 난 희용을 줄여 ‘횽’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원들이 화난 표정을 짓습니다. 태성이가 “횰이나 윰까진 괜찮았는데 너까지 끼어드니까 갑자기 불쾌해진다. 예쁜 친구들 이미지 망친다. 아무데나 네 이름 갖다 붙이지 마라.”라고 핀잔을 줍니다.
다른 친구들도 “맞아, 맞아” 하며 태성이를 거듭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자기 이름 두 글자로 한 글자를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란다”라며 득의양양해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셀럽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의 이름만 줄임말이 가능하답니다.
주니코 트레킹 도중 갑표 대원이 병래 대원에게 찍힌 모습.
하염없이 계속 걷고 싶은 길이지만 야속하게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 밤을 보낼 아오모리현 히로사키(弘前)시로 향합니다. 해안도로가 나타납니다. 바로 옆으로는 철도가 지나갑니다. 동해 바다를 끼고 달리는 영동선 망상역~옥계역 구간이나 정동진역~안인역 구간을 닮았습니다. 잠시 차를 멈추고 바다 풍경을 감상합니다. 때맞춰 기차가 지나갑니다.
동규가 “이쪽이 동해가 맞지? 일본 애들은 자기네 서쪽 바다를 동해라고 하자니 황당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엄밀히 말해 이곳은 태평양과 동해의 중간인 쓰루가 해협 인근 해역이죠. 내가 “독일과 네덜란드 북쪽의 북해(North Sea)도 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에서 보면 남쪽이고 덴마크에서 보면 서쪽, 영국에서는 동쪽인데도 국제적으로 북해라고 하잖아”라고 답합니다.
상철이가 “그러면 서해는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봅니다. 동규가 “황해라고 하잖아”라고 하니 “아! 그렇구나”라며 주억거립니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은 동해를 중립적인 청해(Blue Sea)라고 부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고 보충 설명합니다.
동해와 일본해 지명을 둘러싼 한일 간 논쟁을 얘기하다 보면 독도가 빠질 수 없죠. 제가 “일본이 독도를 왜 먹으려고 하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친구들은 경제적·군사적 가치와 상징적 의미 등을 주워섬깁니다. 제가 독도를 일본 애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묻자 ‘다케시마’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그걸 거꾸로 해보라고 했죠. “마시케다?”라고 하자 제가 “말 그대로 ‘맛있겠다’고 생각해서 먹으려고 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친구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실소를 짓습니다.
이왕 내뱉은 김에 한마디 더 합니다. “대마도는 일본어로 뭐라고 하느냐?” “쓰시마지.” “그걸 거꾸로 해봐라.” “마시쓰.” “거 봐. 대마도도 원래 우리 땅이었는데 일본이 빼앗아 먹고 나니 맛있거든. 그래서 독도도 먹으려고 하는 거야.”
아오모리에는 곳곳에 이런 삼나무 가로수 길이 나타난다.
내륙으로 접어드니 황무지가 나타나는데 석유채굴기 같은 기계가 보입니다. 상철이가 검색해보더니 “일본 아키타에 석유가 난다고 하던데 이곳이 유전인 모양이야”라고 말합니다. 일본이 산유국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바다가 아니고 내륙에 유전이 있는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숙소는 히로사키 그랜드 호텔인데 말과 달리 방은 그랜드하지 않고 어제보다 더 적습니다. 캐리어 가방을 펼쳐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습니다. 몸을 누이는 데는 걱정이 없겠으나 술자리를 벌일 수 있을지 심히 우려됩니다.
호텔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한 뒤 직원에게 우리가 점찍어둔 식당 예약을 부탁합니다. 마지막 밤인 만큼 일본식 정식 요리인 가이세키(會席)를 먹어보기로 합니다. 물론 청주도 한 병 주문합니다. 두 개의 사각 나무쟁반에 밥과 국, 회 몇 점과 요리, 채소 등이 담겨 나옵니다. 오늘은 점심이나 저녁 모두 남 부럽지 않게, 아니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먹어봅니다.
가이세키 요리와 함께 마지막 날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다.
그래도 술은 마음껏 먹기 힘듭니다. 공금이 바닥을 보이자 영수가 3천 엔을 쾌척하며 보태라고 합니다. 한 병 더 주문해 술잔을 기울입니다. 가장 늦게 원정대에 합류 의사를 밝힌 병래도 나섭니다. “어제 대장이 2차를 쐈으니 오늘은 내가 2차를 살게.” 박수가 쏟아집니다.
어제보다 한적한 거리여서 우리가 찾으려던 그런 집은 더욱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한 술집에 들어가 소통을 시도하다가 도로 나왔습니다. 분위기도 마음에 차지 않은 데다 종업원이 별로 장사할 의지가 보이지 않더군요.
다른 집을 찾아보려는데 정형이가 “굳이 술집 가서 2차 하지 말고 호텔에 들어가 마시자”라고 합니다. 나머지도 선선히 동의하고 돈을 절약하게 된 병래는 표정관리에 애쓰는 듯합니다. 저는 속으로 “어제는 그 얘기 안 해주고…”라며 앙앙불락합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고릅니다. 일본 소주에, 맥주에, 과자에, 마른안주에, 오뎅에… 많이 집는다고 집었는데도 어제 내가 치른 2차 술값의 3분의 1에도 못 미칩니다. 흥칫뽕.
마음 좋은 상철이가 오늘도 방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방이 비좁아 침대 위와 옆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술판을 벌입니다. 상철이가 단단히 다짐을 놓습니다. “침대 시트에 음식물을 쏟으면 쏟은 사람이 깨끗한 자기 침대의 시트를 가져와 바꾸는 거다. 알았지?” 술에 취해 자칫 실수라도 하면 냄새 나는 시트에서 자야 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마십니다.
각기 돌아가며 소감을 털어놓습니다. 태성이는 “난 처음 일본에 왔는데 도쿄, 오사카, 교토 이런 데는 안 가보고 아오모리, 아키타를 가본다고 하니 주변에서 의아하게 생각하더라. 사실 지난해에도 유럽이 처음이었는데 파리나 로마는 못 가보고 스위스만 돌았어.”라고 말하자 동규도 “나도 마찬가지야. 근데 내년에 모교 경상대 출신 동문들과 떠나는 유럽 여행 때도 아일랜드를 간대. 파리 로마는 언제 가보나.”라며 맞장구를 칩니다.
정형이는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할 만큼 눈이 휘둥그레지는 경치는 없었지만 가는 곳마다 볼 만했네. 시간 여유를 두고 다시 와 본격적인 트레킹을 하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갑표는 ”분위기가 깨끗하고 조용해 마음에 들었다“고 하고 상철이는 ”최근 들어 마음 놓고 웃은 게 언제인지 싶다. 모처럼 깔깔 웃을 수 있어 좋았다“고 술회합니다. 병래도 ”친구들과 함께 있어 좋았고 많이 배웠다“고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이번 원정의 일등공신인 영수는 빗발치는 친구들의 치사에 쑥스러워 하며 담담하게 입을 엽니다. “여행은 준비할 때 가장 마음이 설레고 좋은 거라고 하는데, 그 즐거움을 거의 내가 독점해서 미안해. 그리고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테고,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한 적도 있는데 다들 불만 없이 잘 따라줘서 고마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마나 신경 쓰이고 힘든 일인 줄 잘 알죠. 고마운 마음에 다시 한 번 갈채를 보냅니다.
마지막 양주 올드파에 일본 소주까지 곁들이니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체력이 막바지에 이른 탓인지 술병을 비우는 속도가 영 떨어집니다. 결국 술병을 킵(keep)해놓고 끝내자고 합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마지막 밤에 킵이라뇨?
저는 남은 술병을 들고 동규 방으로 향합니다. 어찌어찌 해서 다 비우긴 했는데 그 방에서의 대화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 술자리가 결국 사달을 내고 맙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