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영험담을 읽어보시고 서울 사당동 국청사의 묘각스님(02-585-4832)이나 www.daewonsa.or.kr 전남 보성 대원사의 현장스님,www.seonwonsa.or.kr의 강화도 선원사의 성원스님, www.ekayana.or.kr 광륵사의 능인스님중에 한두분 스님과 상담하신 후 지도에 따라 기도를 하십시오.
참고로 '아가야, 용서해다오'란 석묘각스님저 간경도감발행의 책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김 명자(가명)씨는 타고난 미모에 지성미마저 넘쳐 흘렀는데, 성격이 좀 까다로워 결벽증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결혼하기 2년 전쯤 한 청년의 구혼을 거절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입맞춤하고 포옹하는 등의 사랑의 행위가 매우 추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에게 거의 겁탈당할 뻔하다가 가까스로 그 자리를 벗어났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씨의 부모가 서둘러 지금의 남편과 중매결혼을 시켰다. 그런데, 그 청년은 어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 협박을 해왔다.
"당신 남편에게 과거가 있는 여자라고 말하겠다. 어디 잘 사나 두고보자."
이런 상황에서 어찌 마음이 편했겠는가? 김씨는 그 때문에 남편과의 잠자리마저 여의치 못해 거의 의무로 여기게 되었고, 결혼후 1년쯤 지났을 때는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체중이 겨우 40킬로 램미만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 병원에 다니던 김씨는 그 사이에 임신중절을 한 번 했다. 남편과 시부모가 극진히 간호하여 건강이 다소 회복되기는 했지만 왠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不貞의 상징처럼 여겨져 그 후에도 임신하면 곧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중절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러기를려 두 차례나 했다. 결혼 생활이 4년째 접어들면서 차차 부부생활에도 익숙해진 김씨는 아기를 하나 낳았다. 그녀는 이제야말로 마음의 병도 없어지고 몸도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6년째가 되자, 밤에 악몽을 꾸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자 몸에 아프지 않는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러다가 '아가야, 용서해다오' 읽고는 묘각 스님에게 연락을 드린 후 찾아와 의논한 끝에 시댁과 남편 모르게 수자령을 천도하기로 했다. 3개월에 걸쳐 방생을 세 번했고, 처음 방생한 날로부터 100일동안 지장보살염불을 했다. 세 아이를 지워버린 사실을 지극히 참회하면서 하루에 1만번씩 지장보살을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째 접어들자 악몽이 차츰 사라지고 입맛도 생겨 마침내 건강도 회복되었다. 그러자 기피하던 잠자리도 즐겁게 변해 남편과의 금실도 좋아졌다. 그 당시 김씨는 임신 8개월이었다고 한다.
"스님, 안녕하십니까? '아가야, 용서해다오.'를 읽고 편지를 올립니다. 저는 나이 69세, 안 사람의 나이는 60세로 농촌에서 어렵게 지내는 농군입니다. 자식이 열이나 되는데, 85년 4월초에 큰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람을 치어 발을 부러뜨려, 없는 살림에 논밭을 팔아 합의를 보고 수습을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집안에 우환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 해 가을, 안사람의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은 정신이상이 고질이 되어 혼자 지껄이고 웃기도하며 청승맞게 울기도 했다고 한다. 이웃사람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는 것은 예사고 심지어는 남편이 이웃집 아낙네와 통정을 했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다니기도 했다. 처음엔 미친 소리로 치부하던 동네사람들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촌로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단다. 그래서 잡신이 씌인게 아닌가해서 푸닥거리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아무 효험도 없었다고한다. 그 편지는 이렇게 끝났다.
"돌이켜보니, 20여년 전에 자식은 많고 살림은 어렵고해서 6개월짜리 태아를 낙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2개월 된 아이를 남모르게 지워버린 일도 있습니다. 스님께서 쓰신 책을 읽고 혹시나 그 아이들의 영장인가해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올바른 하교를 부탁드립니다."
스님은 편지를 받고 전화를 걸어 그 촌로를 상경하게하여 하룻밤을 같이 보내며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촌로는 집안이 너무 어려워 서울오는 차비까지 이웃에서 간신히 빌려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튿날 스님이 두 아이의 불명을 짓고 천도할 준비를 하자, 촌로는 아무 준비없이 왔으니 일단 그냥 내려가겠다고 자리를 뜨려했다.
촌로의 사정을 이미 알고 계셨던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제자인 제가 돈이 없다고 천도를 안 해드리겠습니까? 딱한 일을 보고 외면한다면 어찌 불제자라 하겠습니까? 아무 걱정마시고 천도나 정성껏 하십시오.'
천도재가 끝나자 스님은 촌로에게 매일 지장경을 독송하고 츰부다라니를 외게 했다. 반 년쯤 후 촌로가 찾아와 집사람의 이상한 증세가 사라지고 집안 분위기도 좋아졌다고 하고는 그 동안 빚을 진 것 같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하면서
주섬주섬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놓는데, 어느덧 그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있었다. 스님 역시 눈물을 훔치며 공양주보살에게 촌로가 가져온 곡식을 깨끗이 씻어 오게해서 불단에 올리고는 함께 예불을 올리셨다고 한다.
1991년 당시 23세의 정이(가명)라는 여인이 편지를 보내 스님에게 상담을 청했다. 그 결과 그녀는 무려 30명의 수자령을 천도했다. 아니 30명이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이 많을 것이다.
정이는 가난한 어촌에 태어나 중학교만 마치고 공장에 다니며 검정고시를 보려고 야학에도 열심히 다니는 소녀였다. 그다지 미인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천성이 밝고 붙임성이 좋아 공장의 남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어느해 여름 야유회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평소 잘알고 지내던 주임과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정이는 그날 술을 처음 먹어보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정신이 깼을 때 정이는 이미 그 남자와 넘지않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취방으로 돌아와 그 다음날로 공장을 옮겼다. 그러나 그 남자와의 인연은 질겨 결국 동거까지 하게되었고, 그 과정에 두차례 중절수술을 했다.
남자는 시간이 흐르자 정이에게 싫증을 느꼈는지 술과 노름으로 조금있던 저축을 다 까먹고는 사라져 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에 건강마저 나빠진 정이는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생활비도 못대고 밥만 축낸다는 핀잔만 들었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그 곳에서 몸을 추스린 정이는 다시 도시로나와 공장을 전전했지만 결국
호스티스 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돈은 잘 벌게 되었다. 집에 송금도 많이해서 효녀라는 말을 듣고 대접도 극진히 받았다. 그러나 그게 과연 행복이었을까? 정이는 얼마가지않아 이유없이 이 아프고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 너무나도 끔찍한 악몽때문에 밤새도럭 불을 켜놓고 있기 일쑤였다.
악몽은 늘 이랬다. 갓난아이를 안아주거나 업어주고 있는데, 그 아이들이 꼭 악귀처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거나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이 깼다가 다시 들라치면 이젠 그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날이면 꿈 속에서 아이들이 때렸던 곳이 너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정이는 여러 병원과 한의원을 찾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그래서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묘각 스님과 인연이 되어 천도재를 올린 정이는 집으로 돌아가 츰부다라니와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를 매일 한 편씩 100일동안 사경을 했다. 사경을 끝내던 날 밤, 정이는 꿈에 구름 속에 계신 부처님을 보고 환희심을 느꼈다. 그 날부터 기분이 몹시 좋아진 정이는 거짓말처럼 몸이 좋아졌고, 이에 불보살이 시방세계에 상주하심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지금 정이는 착실한 남편을 맘나 아들 하나를 낳고 어느 섬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스님, 일전에 친구집에서 스님이 쓰신 '아가야, 용서해다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요즘 身病으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데, 아무래도 중절한 아이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불교를 믿지않아도 아이의 영혼을 천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대자대비하신 불보살님께서 종교를 가려가며 중생을 구제하신다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어찌되었든 같은 종교인의 입장이니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한 번 절에 들르십시오."
며칠 후 찾아온 오부인은 친정이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시집을 간 후 시댁 식구들에게 모두 기독교를 전도한 그야말로 모범적인 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님은 그런 오부인이 왜 중절 수술을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더란다.
그러자 오부인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 땐 너무 살기가 어려워 그만 큰 죄를 짓고 말았다며 가슴아파했다. 오부인은 한 번의 유산과 두 번의 중절 수술을 했는데, 특히 허리와 어깨가 몹시 아팠다고 한다. 처음엔 오부인도 중년이 넘으면 생기는 그저 그런 병이라고 치부했는데, 좀처럼 통증이 가시지않아 좋다는 병원을 여러곳 전전했지만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나날이 많자 가정살림도 점점 엉망이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잘되던 남편의 사업마저 기울어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겪게 되었다.
오부인은 묘각스님과 상담한 후 절에서 천도재를 지낸 뒤 100일을 작정하고 집에서 법화경 여래수량품의 자아게를 하루 한 편씩 사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경은 나중에 부처님 앞에 모셔졌다. 100일이 거의 가까워질 무렵 오부인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질이던 허리와 어깨의 통증이 봄날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남편의 사업이 다시 잘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해져서 살만해진 오부인은 불교쪽으로 기운 생각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다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속된 말로 불교가 최고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종교가 다르다해도 불보살님들은 고통받는 중생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