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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판에는 ‘1940년8월11일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용하였던 윤전기(조선일보 기증)’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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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문학가’ 코너에는 장장 10여년 동안 세차례에 걸쳐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했던 소설가 벽초 홍명희(洪命熹)와, 죽을 때까지 조선일보를 스크랩해서 간직했던 시인 윤동주(尹東柱), 그리고 1940년 조선일보가 강제폐간될 당시 소설 ‘삼국지’를 연재하고 있었던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액자 사진과 이름이 올라 있다. 한용운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일제 말 암흑기에도 끝까지 훼절을 하지 않았고, 1940년8월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는 것을 보고 ‘신문이 폐간되다’는 제목의 한시(漢詩)를 통해서 “붓이 꺾여 모든 것이 끝나니…”라는 피를 토하듯 절규했던 분이다. 당시 계초 방응모(方應謨) 조선일보 사장과 만해는 각별한 사이로서 방 사장은 서울 성북동에 만해를 위한 거처로 ‘심우장’을 지어주었다.
만약 ‘저 사람들’의 주장대로 ‘친일’ 윤전기를 뜯어낸다면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홍명희 윤동주 한용운 같은 분들의 조선일보와의 인연은 어떻게 끊어내야할 것인가? 독립기념관 학예실의 정재윤 팀장은 “독립기념관은 부착물이 아닌 순수 전시 유품으로 한용운 4점, 조만식 6점, 이상재 41점, 안재홍 2점 등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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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왼쪽에는 비밀(秘密)이란 뜻의 ‘秘’자가 박힌 ‘언문신문 차압기사 집록(조선일보)·1932’이 놓여 있었다. 밑에는 이런 설명이다.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보도되지 못한 조선일보 기사들 중 일문(日文)으로 번역해 모은 자료집―’. 발행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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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1929.10.30)’ 코너의 유리 상자에는 조선일보·동아일보 호외(號外)가 들어 있었다. 조선일보 호외(1930.1.15일자)는 ‘시내 12 남녀학교/ 일제(一齊) 시위 만세’라는 제목으로 ‘금 십오일 오전 중에 부내 각 남녀 학교에서 돌연 만세 시위가 닐어 낫는데 이날 아츰에…’라고 시작되는 기사가 있다. 거칠게 뽑힌 활자는 그날의 다급했던 긴장을 그대로 전해주듯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저 말없는 윤전기가 욕된 과오만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제6관의 ‘국학수호운동’ 코너에는 일제 탄압이 절정을 치닫던 1940년 1월30일자의 조선일보 기사가 확대 제작돼 있다. ‘조선어 사전 완성 단계에! / 일부, 출판허가 신청 / 만난을 극복하고 혈성(血誠)으로 일관(一貫)한 / 누신각골(鏤身刻骨)의 12 재(載) / 한글 창제 초유의 금자탑’이라는 제목이 흥분된 어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창씨 개명의 바람이 휘몰아치던 당시로서 ‘우리말 큰사전’ 발간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윤동주의 기사 스크랩북 발견을 계기로 일제 암흑기 대표적 저항 민족시인이었던 윤동주와 한용운, 그리고 조선일보의 깊은 인연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두사람은 필자이자 독자로서 조선일보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일제말 민족의식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죽을 때까지 지조와 기개를 잃지 않았던 한용운은 ‘님의 침묵’ 등의 시인으로 유명하지만 생전에 장편소설도 썼는데, 그중 두 편이 조선일보에 연재됐다.
‘흑풍’은 1935년 4월9일부터 1936년 2월1일까지 실렸고, 이어 1938년 5월18일부터 1939년 3월12일까지 ‘박명’이 연재됐다. 특히 그는 1939년 11월 1일 ‘삼국지’ 번역 연재를 시작,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계속함으로써 조선일보와 운명을 함께 했다. 민족의 언론기관이 문을 닫게 됐다는 소식을 접한 만해는 비분강개해 ‘신문이 폐간되다’란 제목으로 피끓는 시를 남겼다.
조선일보 기사 스크랩을 하던 1938~39년 무렵, 윤동주는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던 잡지 ‘소년’을 매달 사서 고향인 중국 용정에 있는 동생 일주에게 보내주는 자상한 형이었다.
그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39년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월21일), 시 ‘유언’(2월6일) ‘아우의 인상화’(10월 17일) 등을 ‘윤동주’ ‘윤주’란 이름으로 발표한 필자이기도 했다. 이런 윤동주였기에 대학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조선일보를 읽고 이를 스크랩하고 나중을 위해 고향집에 보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첫댓글 학교 대자보를 보고 그런 사이비 지식을 습득하셨나.명계남이 가르쳐줬나........아시죠?오류는 무지에서 나온다는 것!!!저보다 한 살 많으신 모양인데,에구에구....ㅜㅜ 또,조선일보처럼 이쁜~신문을 일본에선 왜 강제폐간하려 했나요?이상하네?
조선일보 윤전기는 1차 일본 2차 인민군이 탄압한 것 아시죠??? 3차는 친북파가 돼 버렸군요.얼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