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여행기 6
" 이스파한 1: 이스파한 가는 길, 그리고 이스파한"
<이스파한 중심가>
2013년 9월 29일, 11시반에 출발하는 이스파한 행 버스를 타려고 쉬라즈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것은 10시 40분경. 웬 노란 옷을 입은 젊은 사람이 반은 실성을 했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날뛰고 다니면서, 여자들에게 키스를 해보려는 자세를 취하다 도망 가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다가 또 도망 가고, 비오는 날 물고기 뛰듯 날뛰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이란의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우리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 한 동안 정신이 혼미했다. 그리고 정신을 정말로 바짝 차려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잠시 후, 얼굴 반쪽이 시커먼 수염으로 덮인 사람이 자꾸 자신을 사진 찍어 달라고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했다. 서툰 영어로 전전날 있었던 "FC 서울"과 이란의 "에스테그랄" 팀과의 축구 시합을 언급하며 축하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더니, 이제 미국과 이란이 화해해서 협력해나가기로 했다고 말하면서 손가락을 깍지 끼어 연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란에 대한 미국의 봉쇄조치로 이란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입은 듯이 보였다. 느린 경제 발전으로 이란 어디를 가나 빈궁한 모습이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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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사람>
<도로의 한 지점>
<백 미러에 비친 버스 운전수>
중간에 한 번 쉬었는데, 사람들은 간단한 음료를 사먹었으나, 식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떼의 군인들이 다가오더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페르시아만에서 근무하는 이란군인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자신이 먹을 음식을 나에게 먹으라고 권했으나, 나는 그 음식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페르시아 만을 한국에서는 페르시아 바다라고 하느냐, 아니면 아라비아 바다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페르시아 바다라고 했더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잠시 뒤 저 멀리에 이란 여자 두 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H님과 함게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물어보니 "혹시나"가 "역시나"로 판명나고 말았다. 굳센 어조로 No라고 대답했다. 역시 무슬림 국가에서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서 가장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말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얼마에요"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정말로 맨 처음 배워야 될 말이, "사진 찍어도 돼요"라는 말이다. Good morning, thank you, How much?는 어디를 가도 다 통하는 말이다. 사진 찍어도 좋은 지를 묻는 이란 말이 "미투남 액스 베기람?"이라고 하는데, 이 간단한 말을 암기해서 써먹으려고 하면 생각이 안 나고, 암기하면 다음 날 또 잊어먹고, 하여튼 피나는 노력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그 말을 현장에서 써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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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앱 중에 Maps with me pro가 있다. 인터넷이 없어도 국내 및 해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약 5천원정도 하는데, 이번에 상당히 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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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고 있었다. 밖은 한결같이 황무지의 연속에다가 가끔 농작물이 보이는 경치다. 7시경에 길 옆에 우리를 내려주고 버스는 계속 달렸다. 3 명씩 조를 짜서 택시를 탔다. 택시 한 대당 10만 리알에 미리 흥정해서 가는 가격이다. 10만 리알은 한국 돈으로 약 3300원 정도 된다. 운전수 옆좌석에 앉아서 운전수를 보니, 열흘 굶은 시어머니처럼 꿍한 인상에 말 한마디 없이 간다. 자동차를 보니, 택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자가용 영업이다. 오른쪽 백미러는 가운데 금이 가있고, 왼쪽 백미러는 깨져서 아예 없었다. 백미러 없이도 운전 잘 해먹고 사는 나라가 이란이다. 하기야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생산해 내니까 웬만한 사람이면 자동차를 갖고 있는 것이지, 자동차 생산국이 아니라면, 자동차 굴리는 사람 그리 많지 않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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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도착하여 현지인과 사진 촬영이 있었다.>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자얀데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 33개의 아치가 있다는 시오세 다리다. 꿈에 그리던 이스파한에 왔는가보다. 이스파한을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해질녁 자얀데 강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이슬람 이야기 속 어느 공간에 와 있는 듯 하다"고 하지 않던가? 과연 눈 앞에 펼쳐진 다리는 노란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시골 장날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래, 이란에 온 목적이 바로 이 다리를 보러 온거야? 프랑스에 미라보 다리가 있다면, 이스파한에는 시오세 다리가 있지 않는가?
나는 내일을 위해,조금만 걷다가 호텔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묵을 Suite Hotel의 간판이 어둠을 뚫고 흰빛을 내며 자신을 알리고 있었다. 호텔의 시설도 마음에 들고, 위치도 마음에 들고, 음식도 마음에 들고, 그 앞에 시오세 다리까지! 세상에 이렇게 팔자 좋은 놈이 또 있을까? 하늘을 나는 듯한 흥분을 억지로 참아가며, 내 어릴 적 추석 전날, 잠을 설치고 새벽을 기다리듯 그렇게 다음 날을 눈빠지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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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앞에 있는 시오세 다리>
<우리가 묵은 Suite Hotel>
어디 마음이 조급한 것이 동명일기의 저자인 의유당 김씨만의 일이던가? 몇 번이나 잠이 깨어 커튼을 열고 보고, 또 자다 일어나 보고, 몇 번이나 그래도 새벽은 오지 않았다. 내가 눈이 있다면 "새벽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감동적인 순간을 보고 싶다"고 했던 헬런켈러의 말을 되뇌이며 창가를 서성이거렸다. 마침내 닭우는 소리는 없으되 날이 밝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대충 옷을 걸쳐입고 카메라를 메고 계단을 내려가니 계단에 닿는 신발 소리가 정부군을 습격하는 혁명군의 군화 발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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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나 어쩌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새벽 5시 30분,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쩍쩍 갈라진 강바닥이 아닌가? 쉬라즈에서 물없는 강에 실망한 나는, 내 앞에 놓여있는 바둑판 같은 강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고, 눈이 희미해졌다. 내가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랄 때, 마른 논 갈라진 것은 보았으되 이렇게 거북등처럼 갈라진 것은 난생 처음이다. "마른 논 갈라지듯"이라는 한국 표현은 오늘부로 "이스파한 강바닥 갈라지듯"이라고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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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눈을 들어보니 한 때는 강에서 유유히 떠서 뭇 사람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었을 빈배가 강가에 꽁무늬를 뒤로하고 나란히 놓여있었다. 저 배들이 언제 다시 물속으로 돌아갈 날이 올까? 이곳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버림받은 땅이란 말인가? 나오는 한숨을 참아가며 나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에서 지금도 팔리고 있는 여행 안내서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파한 물가에서 물장난을 치거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 강가의 잔디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느낄 수 있다. 날이 어두워지면 강위의 다리에 조명이 켜진다. 이 모습은 오랜 시간 가슴에 남을만큼 아름답다. 다리 밑에 앉아 있다보면, 16세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혔던 이스파한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난다." 여행 안내서를 쓰는 사람들은, 다른 책을 베끼기만 하지 말고, 현장에 가보고 현재 상황을 업데이트 해야 한다. 옛날 대학 교수들, 한번 만들어 놓은 공책 수십년이 흘러 노랗게 변한 것을 죽을 때까지 울궈먹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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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흘러야할 강 바닥으로, 출근을 하려는 사람들과 산색하는 사람들이 우스꽝스런 제스처를 나에게 보내면서 알 수 없는 말을 해대고 있었다. 강 한 쪽에 조금 물이 고인 곳에서는 새들이 날아와 물을 마시기도 하고, 목욕을 하기도 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내 눈이 어디를 응시해야할 지 모를 때, 내 앞에 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상체보다도 더 긴 내 다리의 그림자였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고 했던가? 어울리지 않게 길게 드리워진 내 다리 그림자가 시오세 다리까지 뻗어 있었다. 나는 내 그림자가 "슬픈 그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그림자"! 최유나의 노래 가사에 있는 말이다.
우린 서로가 미워진 것도 싫어진 것도 아닌데 우린 서로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도 정녕 없는데 타버린 빈 가슴속에 스쳐 가는 슬픈 그림자 아 이젠 모두 끝나버린 아픈 추억 옛 이야기
그렇다면 정녕 시오세 다리 위의 낭만도 이제는 끝나 버린 슬픈 그림자로만 남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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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한 여인이 보였다. 순간 나는 그녀가 하늘에서 날아온 천사가 아닌가 했다. 가슴이 철렁하고 앞이 캄캄했다. 우리를 보면 피해가는 다른 이란 여성과는 달리, 놀랍게도 그녀는 먼저 나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두손을 가볍게 모으고, 우아하고 품위있게 앉아 있는 그녀, 사진을 찍어도 좋은지 물으니, 주저함없이 찍어도 좋다고 했다. 그녀와 간단한 영어로 대화를 했다. 강 근처에 직장이 있다고 했다. 직장에 가기 전에 매일 이곳 강가 벤치에 앉아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직장으로 간다고 했다. LG photo printer로 사진을 한 장 뽑아주었다. Thank you very much, Good bye 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멀리 사라질 때까지 한 동안 넋이 나간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강물이 없어서 섭섭했던 감정도 봄바람에 눈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아, 정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구나! 아, 나는 오늘 이스파한의 강물보다 더욱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노라. 강물이 없어도 좋다. 시오세 다리가 없어도 좋다. 그녀를 본 것만으로 이미 이스파한에 대한 평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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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후, 우리는 이맘광장까지 걸어갔다. 이곳 전체가 볼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알리카푸 궁전이니, 이맘모스크니, 세이크로폴라 모스크니, 따질 것도 없다. 그저 사방이 유적과 유물로 가득 차 있다. 그 사이에 각종 가게가 즐비하게 놓여 손님을 유혹하고 있다. 직사각형으로 된 광장 가운데에 분수가 있고, 주위에는 꽃이 피어 있으며, 운동장 주위로 말이 관광객을 태우고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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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 모스크에서 한 이란인이 자기 있는 곳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무슨 일인가, 모두들 궁금하여 가보았더니 거기에서 소리를 내면 바로 메아리가 들리는 지점이었다. 한 사람씩 소리를 질러보다가, 이번에는 단체로 "꼬레(한국)"를 외쳐보았다. 과연 메아리가 되돌아 왔다. 다른 지점에서 같은 소리를 내 보았으나, 메아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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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녹음: 메아리. 위 작은 그림을 더블클릭할 것>
<모스크 밖에서 아이들이 달려든다. 알고보니 구두닦이 소년들이다.>
상가에 양철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릇을 만드는데, 손으로 두들겨 모양을 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도는 수제 냄비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한 노인이 양철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두 눈이 보이지 않는 듯 했다. 때묻은 굵은 손으로 망치질 하는 노인의 모습이 마치 톨스토이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그런 인상을 풍겼다. 굿판에서 울려나오는 무당의 꽹과리 소리처럼, 노인의 망치 소리는 내 귓가를 지나 하늘로 올라가 멀리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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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잠시 쉬면서 먹은 아이스크림>
어느덧 우리의 발길은 바자르에 닿아 있었다. Lonely Planet에 걸어보도록 되어 있는 코스는 절대 찾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척 보아 알았다. 우리는 큰 방향을 잡고 여기저기 걷기 시작했다. 바자르에는 갖가지 차와 향료 그리고 건과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또 어떤 곳에서는 때가 묻은 마네킹이 멋들어진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고, 건장한 남자 마네킹은 멋들어진 신사복을 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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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으니 점심을 먹어야 했다. 식당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에 문을 열었더니, 한 남자가 나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눈을 들어 보니 매캐한 연기 속에서 약 30명이 물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근처 가게에 들어가 전통식 음식점을 물으니, 자기 집에 있는 종업원에게 우리를 안내하라고 시켰다. 종업원을 따라갔다. 종업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먼길을 종업원은 우리가 따라오는지 힐끗힐끗 뒤를 보며 걸어갔다. 팁을 주어야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시점 또는 지점에서 그는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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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한 이란인>
과연 안락하고 편안한 전통식 이란 음식점이었다.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음식을 시켰다. 마치 음식 백화점인 듯 했다. 이란인들은 우리를 힐끗힐끗 바라보았고, 우리도 이란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곁눈질했다. 웬만한 이란 사람이면 적당히 통할 수 있는 영어를 한두 마디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곳이 관광구역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떻든 큰 어려움 없이 의사전달은 되고 있었다. 오년전 복만씨가 이곳에 왔을 때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5년 사이에 영어붐이 일어난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는 말이 순간 생각났다. 한참을 먹고 쉬고 이야기하다가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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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Lonely Planet 안내에 따라 체헬소툰 궁전, 현대 미술 관을 거쳐, 체헬 소툰 팰리스 공원에 도착했다. 넓은 공원에 붙어 있는 "경주시와 이스파한시 사이의 우정과 실크로우드에 관한 교환 기념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분수대에서는 태양을 배경으로 물이 품어져 나오며 무지개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 주위에 사람들이 앉아 한가롭게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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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이 대추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자꾸 마시고 가라고 했다. 대추차를 먹다보니 그냥 올 수 없어, 또 사진을 한 장 빼주게 되었다. 만면의 웃음을 짓는 할아버지와 가볍게 미소를 보내는 할머니의 모습이 참으로 정겹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이들은 결혼 이후로 한번도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좋아하시든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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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사진: 내가 여태까지 만났던 이란인 중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대학생>
두 명의 젊은이가 찾아와 말을 걸었다. 나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영어를 잘 하는지 못하는 지는 금방 안다. 두 명 중 한 명은 정말로 영어를 잘 했다. 타브리즈라는 도시에서 이곳으로 유학을 온 그 학생은,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전공학을 전공한다는 그는 한국의 팝 문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약 십분을 이야기하던 그는 나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왜 그러냐고 내가 물었다. 영어를 실컷 말할 수 있어서 그런 기회를 준 나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나는 이런류의 감사를 처음 받아본다. 그는 그날 오후를 나를 가이드해주고 싶다고 했다. 고맙기도 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면 이란의 실상을 좀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그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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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오세 강가로 왔다.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 젊은이들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물길을 뛰어넘는 연기였다. 어떤 젊은이는 고꾸라지고 어떤 젊은이는 멋들어지게 장애물을 넘었다. 자기 뜻대로 안되었을 때, 자전거를 내팽겨쳐 자신을 보호하는 솜씨가 놀라웠다.
강가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은 이란인은 대부분 잘 생겼다는 것이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 언뜻 보아 모두 영화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란인만을 보다가 훗날 터키에 가서 터키인을 본 S님의 말, "터키인들은 왜 이리 못 생겼어. 무슨 뾰족감 깎아 놓은 것 같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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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한쌍의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나보고 자꾸 사진을 찍어 빼달라고 했다. 내가 싫다고 했더니, 남자 아이가 능청맞게 내 어깨를 주무르다가, 내가 웃으면 내 볼을 꼬집어 나를 괴롭혔다. 이놈은 나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하더니 "너 낯설다"라는 표정으로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에 장난끼가 가득 차 있는 이 젊은이들은 내년에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몇살인지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22살이라고 했다. 아마 몇 년 뒤에는 이들을 닮은 아이를 낳고 깨가 쏟아지게 살 것이다. 아니면 인간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했으니, 힘든 인생의 고해를 건너갈 수도 있다.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사랑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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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태양이 마지막 빛을 강바닥에 뿌리고 있을 때, 저 멀리 젊은이 몇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 두 사람은 야즈드에서 만났었던 중국인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남자는 한족이었고 여자는 조선족이었는데, 여자는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그녀는 한국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고 했다. 그들은 마쉬하드를 방문할 것을 적극 추천했다. 이란에서 좋다는 곳은 다 돌아다녀 보았으나, Mashhad와 같은 곳은 없다고 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스마트 폰 사진 속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들은 나의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물었다. 나는 하마단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마쉬하드로 가라고 애걸하다시피 말했다. 어떻든 이란은 다시 한번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란 사람이 좋아서 이고, 두 번째 이유는 마쉬하드를 가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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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또 다시 이스파한에 밤이 왔다. 시오세 다리에는 다시 붉은 불이 점등되었다.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해서일까? 젊은이들은 강바닥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광기어린 불장난이 시작된 것이다. 불은 요원의 들불처럼 강바람을 타고 번졌다. 불가에 앉아 있던 젊은이들이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연기와 노래가 하늘로 퍼져 이스파한의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제 물이 있어야할 강 바닥은 순식간에 불의 강으로 변했다. 출렁이는 물보다 하늘로 치솟는 불이 더욱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치솟는 밤의 열기 속에서 아침에 보았던 여인의 얼굴이 오우버랩 되면서 내 가슴의 열기도 공중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그래 인생이란 이런거야. 모든 것을 훨훨 날려보내야해. 본래 삶이 다 그런거야. 훨훨타는 이스파한의 밤 하늘에, 젊음도, 사랑도, 인생도, 추억도, 그리고 나 자신도 모두 연기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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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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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와 함께 여행을 다녀 오신 우리 일행 10명 중, 혹시 이 글을 보게될 분에게 알립니다.
지금 여행기를 쓰느라 바빠서, 제가 찍은 사진을 분류할 수 없습니다.
여행기가 끝나면 분류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보낼 사진은 youngeul@dreamwiz.com 또는 youngeul@chol.com으로 보내주시고,
보낼 사진이 없는 분은 위에 적힌 저의 이메일 주소로,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스파한 ..강에 물이 없네요..가뭄인가 봅니다..
시오세폴..
멋있다는 것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디 거기뿐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유명한 곳이 그렇지요.
시세오 다리가 사진 처럼 저렇게 멋있을까요?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셔서 빠져듭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릅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는 것이니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릅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