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
망우리
그곳은 - “근심을 더는 마을” “시름을 잊는 마을”
참으로 시적(詩的)인 향내가 나는 마을이름이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여기저기 뚫린 산책로.
발가벗은 묘지들만 줄줄이 누워있던 망우리 공동
묘지는 이제는 가고 울울창창한 숲이 우거져 풍치가 그만이다.
산길 좌우 숲속에 숨어 있는 묘택(墓宅)들
숲속의 길이 끝나는데 저 아래에 한강이 흐른다.
평일이고 휴일이고 찾는 등산객들과 산책하는 이들.
이제는 더는 공동묘지가 아니다. “망우리 공원”이라고 부른다.
캠핑장을 만들어 운영하는 공동묘지다.
유네스코에서 정해주는 “문화유산“ 훈장을 타려고 서울시가
열심히 뛰고 있단다.
그러나 1973년 까지 40년 동안은 유령의 마을이었다.
최근까지 망우리에 밤이 오면 망자(亡子)를 부르는 음울한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다: 가늘고 길게.
특히 625때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주검이 여기서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던고?
6.25 그 난리 통에 남의 묘에 제사지내고 제주가 둘이나 되어
서로 자기 묘라고 싸우다가 묘를 파는 비극도 연출되었다.
1933년 이태원 공동묘지를 일본군 기지로 쓰려고 묘지를
이곳으로 옮겼다. 1973년 만원이 되어 묘지를 폐쇄했다.
유관순 누나가 이태원에서 이곳으로 오는 도중 행방불명 되었다.
일제의 독수(毒手)가 버렸는지 못난 후손들이 낮 잠 자다
잃어 버렸는지?
이곳에는 많은 유명 인사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한용운 선생이 여기 계시다. 사모님도 계시다. 스님은 14살에 결혼하고
16살에 출가 하였다. 37년 만에 만난 부인이었다. 청담스님, 성철스님 고승 들은 참으로 부인한테 잔인하다. 모조리 부인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신랑 한 사람 믿고 시집왔다가 모두 어린 나이에 신랑이 달아나버린 여인들. 그 어린나이의 생과부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까?
한용운 스님은 37년 만에라도 재회 했으니 다행인데 나머지 스님들은 입적 할 때까지 만나주지 않았으니 참으로 야속하다. 평생을 생과부로 보낸 부인 들 윤회하여 다시 세상에 나오면 농부나 어부하고 평생해로 하기를 바란다.
한용운 스님은 일본 통감에게 조선 중들도 결혼하게 허락해 달라고 진정 서를 썼다. 중들이 홀로 사는 것이 수 천 년 전통이 아니었던가? 다만 일본 중들만 결혼하여 처자식 낳아 기르는 것이 예외였다.
정자 좋고 우물 좋은 법은 없다고 한다. 한용운 선생도 일본 통감에 애원하 는 편지를 쓰기도 하면서 일본사람에게 굽신거렸구나. 동전만 양면이 있 는게 아니구나. 한용운 스님도 양면이 있었구나.
3.1운동이 터져서 다른 32인과 함께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가장 당당하 고 의연하였다. 벌벌 떠는 동료들을 질책도 하고 격려도 하였다.
이 마을엔 시인 박인환도 잠들어 있는데 나이 30에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경기 중학교 다니다 퇴학 맞았는데 이는 요즘과 달리 학교의 기강이 섰다는 뜻이다. 그의 아내는 29살 그리고 3남매를 남기고 떠났다.
명동을 주름잡던 시인 그러나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 처가살이하 며 하루하루를 죽였다. 시인 이상(李箱)의 기일이 되어 사흘을 계속 마시다
갔다. 총독부 발행 잡지에 소설의 제목을 12.12라고 썼고 69이란 다방 간판 을 걸 다가 들켜 간판을 빼앗긴 그 이상을 위하여.
그의 아내 이정숙은 부잣집 딸로 1m 70이 넘는 늘씬한 미인이었다.. 진명학교 배구선수였다
저 유택에 누워 있었어도 처자식 걱정에 잠들기가 어려웠으리라.
아내도 힘들게 늙어갔고 자녀들도 힘들게 컸다.
주지하다시피 ‘세월이 가면’ ‘신사와 목마’ 같은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근심을 잊는 마을’로 이사 왔다. "인환은 갔어도 그의 시는 우리 가슴에 남 아 있다.“
묘지 번호 103535, 소와 은박지의 화가 이 중섭의 묘택 주소다. 시멘트로 발라 올린 비석이 흉측 하다. 원래 평안도 태생인데 서울로 내려 왔다가 6.25가 터지면서 부산으로 가서 범일동 창고에 거처를 잡고 부두 노동자로 일했다. 일본인 아내와 어린 아들 둘. 1951년 제주도로 가다. 배급으로 주 는 고구마로 주식으로 하고 게를 잡아 반찬으로 삼았다. 갖은 고생 끝에 일 본인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보냈다.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처음이 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었다. 은박지 그림이 춘화라 하여 전시되지 못했는 데 오히려 미국 미술관에서 3점을 사 주었다. 돈이 없어 화구를 살돈이 없 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거지와 다름없는 이 천재화가는 술로서 괴로움 달래다가 간이 망가졌다. 1956년 간염, 영양실조, 그리고 정신분열 증으로 영면했다. 일본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 어찌 눈을 감았 을까? 이 중섭 탄신 100주년 기념 전만 요란히 하는 사람들은 끝나면 이중 섭 묘소에 한 번 가보길 바란다.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는 역사상 가장 많은 관람객을 동원했다. 반 고흐도 에드가 알란 포도 사후 에 명성을 얻었다.
하늘은 부와 명성 두 개는 한 번에 안 주는 것 같다. 대체로 가난과 병마로
세상을 떠난 다음에 명성을 준다.
그리고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이 이 마을에 잠들고 있다. 한 때 공산주의 운 동을 한 죽산 조봉암, 박헌영과 이념적으로 갈라서면서 ‘탈 공산당 선언’을 했다.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무난히 해 내었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30%를 득표했다. 이 승만 과 민주당 계열에서는
경악했다. 30% 라는 비율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사형 통지서였다.
그는 간첩으로 날조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강원룡 목사(경동교회)는 말했
다. 미국은 조봉암을 암암리에 지원했다. 영어교사도 매일 보내 주었다. 국가지도자가 되려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된다는 미국 측 주장이었다.
그땐 독재정권이 간첩은 물론 무엇이고 날조하던 부도덕한 “날조 공화 국” 이었다.
2011년에 복권되었다. 억울한 사람 한참 일할 나이에 죽여 놓고 복권이나
하면 무슨 소용인가? 이 무도한 사법 살인 너무나 억울하지 않은가?
웃기는 것은 대법원 판사 전원이 무죄에 손을 들었단다.
사형언도도 전원 찬성. 거수기가 되어야 대법원 판사가 되나?
형장에서 “소주한잔과 담배한대만 달라”고 부탁했는데 규정상 허락이
안 되었다. 몇 분후면 이 세상을 떠날 사람에게 소주 한 잔 안 주는 야박 한 사람들, .규정보다 후환이 두려워서 못 준 것 같다.
이 "시름을 잊는 마을“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들어와 어울린다.
이번에는 가수 차 중락이다. 1942년생으로 27세에 뇌수막념으로 타계했 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Anything that's part of you(당신의 것이면 무엇이고)을 우리말로 번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차중락으로 울고 차중락으로 웃던 팬들. 그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 그리고 한 편의 시 같은 번안한 가사 이 모든 것이 그를 당 시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우상의 갑작스런 죽음, 전국이 고요했다. 이렇게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갔기에 팬들의 슬픔은 너무컷 다.
한국에서 보다 외국에 더 알려진 테라코타(Terracotta) 조각가 권진규
교수가 이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
1922년 태어나 일본 무사시노 예술학교 조각 부를 졸업하고 1953년 일 본에서 후배 도모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6년을 살았는데 도모가 일본에 귀화 하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이혼했다. 조각가 로뎅이 제자 까미유와 함 께 한 것과 비슷했다. 이혼 후 독신으로 지내다 51세를 살고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예술가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하여 늘 불안하게 보내 다가 “인생은 공(空). 파멸” 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고 말았다. 테라 코타의 권위자임에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에 분개하였다. 1960년대 자 신의 작품을 미술 전문 상에 가지고 가면 자기가 부른 가격보다 적게 사 겠다고 하면 자존심 상하여 작품을 갖고 나왔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화가 난 권 교수는 그 작품을 조수에게 주어버린다. “이거 자네나 가져.” 작업 장에서도 권 교수가 불량이라고 하면서 구워 낸 작품을 여러 개 조수에 게 주어 버렸는데 이 조수가 훗날 하는 말이, “권 교수가 준 작품들 이 자기 집 짓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고 했다. 외국에서 대가로 알려진 그의 작품이 고가에 거래된다는데 자살을 하여 버렸으니...이제는 국내에 서도 그의 테라코타의 진가를 알아준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33인의 한 사람인 박희도도 이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
황해도 출신으로 감리교 전도사를 시작으로 기독교인을 많이 만세운동에 끌 어 들였다. 만세 운동 후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본격적인 친 일 행위를 하여 많은 이의 원성을 샀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이 석방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마을로 들어왔다.
일제로 변절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박영효는 고종 폐위를 반대하여 이완용하고도 격렬하게 대립하다가 귀양까지 갔었는데 막 상 한일 합방이 되니 체념했는지 일본에서 주는 작위와 은급을 받았다.
그리고 친일파가 되었다.
그러나 민비 시해한 배후인물로 지목된 유길준은 합방을 끝까지 반대하고 작위도 은급도 물리쳤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박은 변절하고 민비시해에
가담하여 친일파 낙인찍힌 유길준은 합방을 끝까지 반대하다니 인간은 참으 로 알 수 없는 존재다.
끝으로 이기붕 일가 4인이 여기에 잠이 들었는데 돌보는 이 없어 묘소들이 망가져있고 풀 속에 숨어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
라는 말은 이기붕과 그의 마누라 보고 하는 말이다.
해방되고 이승만이 귀국하여 돈암장에 묵을 때
이승만의 첫째 부인 박승선이 이승만을 만나러 돈암장에 왔는데
들여보내질 앉아 땅바닥에 털썩 앉아 울부짖고 있는데 이승만의 비서
박마리아가 나가서 박승선을 잘 설득하여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박 마리아는 프란체스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훗날 중앙대 설립자인 임영신은 프란체스카에 의하여 청와대 출입이 금지 되었다. 미국 체류 시 이승만이 임영신에게 청혼을 두 번 해서 두 번 다 거절당하고 결혼은 안 했어도 관계가 깊었다는 풍문이 돌아 다녔다. 프여 사는 임영신이라면 이를 갈았다.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미국에서 약혼하고 귀국하여 결혼했는데 이기붕은 광산, 구멍가게 하는 것 마다 망했다. 해방 될 무렵에는 요정 국일관 지배인으로 있었다.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면서 돈암장의 집사로 있으며 안정을 찾았는데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등에 업고 남편이 국회의원, 국방장관, 서울시장, 국회의장이 되는데 결정 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박 마리아도 이화여대 부총장이 되어 막강한 권력 을 휘두른다. 요정의 지배인 출신이 국회의원하는 것도 까마득한데 부통령
이라니 이건 많이 지나쳤다.
큰 아들 이 강석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가 되어 간단없이 시민의 눈살 을 찌푸리는 일을 했다. 주로 폭력을 휘둘렀다.
나중에는 이기붕이가 몸이 망가져 걷지도 못하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는 데 박 마리아는 남편을 부통령 후보로 만든다. 물론 대통령은 이 승만.
1960. 3. 15. 선거가 끝났다. 이기붕은 79%를 득표하여 부통령에 당선되 었다. 그러나 이 득표는 경찰 깡패 그리고 투표함 바꿔치기, 피아노표, 공 개투표 등의 불법을 동원한 득표였다. 결국 4.19 혁명이 터졌다.
이 기붕 일가는 도망 다니다 청와대에 들어와서 자살한다. 큰아들 강석이 가 동생과 부모를 차례로 쏘고 마지막에 자기를 쏘고 이 일가는 몰살했다.
정말로 욕심이 사망을 낳고 말았다.
조선이 좋아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인 들이다.
한 분은 벌거벗은 한 반도에 아카시나무와 포플러를 심은 사람이고
또한 사람은 조선을 연구하고 조선말을 하고 조선을 사랑했던 분이다.
이들이 이 마을에 들어 온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민둥산을 푸른 옷으로
입혀주고 이 나라를 자기 나라 이상으로 사랑했다는 것은 당시엔
머리가 돈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 사람은 예외 없이 지구라는 행성으로 들어온다. 지구에 있는동안 자기가 맡은 역할을
다하고 모두 다른 문으로 나간다.
“욕심이 사망을 낳는다”는 말을 명심하고 조용히 나가야겠다.
첫댓글 망우리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을 모조리 섭렵했군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망우리가 뇌리에서 점점 살아져 가는구료.
맞소이다. 망우리에 호적을 캐면 더 읽을만한 물건들이 많소이다.
우리도 언제고 근ㅅ심울 잊는 머울로 갈 터인데 목욕 깨끗이
하고 가야겠습니다
. . . 강가에서님께서 올리시는 글에서는 항상 많이 배웁니다.
다음 서울데 가면 망우리 공동묘지에 가 봐야 할 것 가습니다.
유럽에 가면 여러 도시에 있는 공동묘지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인 철학자 등을 만나든데 . . .
그 민둥산 망우리가 유네스토 등재 문화재로 올랐습니다.
1980년대 부터 서울시에서 공원 묘지로 만든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우양, 내가 실수를 하였소. 지금 한창 서울시에서 유네스코 측과 교섭이 활발하다고 합디다. 묘지공원이 등재된 것이
마카오, 스웨덴둥 몇군데 된다고 합니다. 미안하고 고맙소.
결국 한웅쿰 腐土로 돌아 가는 것이 인생임을 새삼 일깨우네요.
지극히 순수한 영혼(이중섭)도, 가장 추악한 육체(이기붕)도 똑같이...
요즈음 이중섭 탄생 100주년 미술전을 열고 있는데 역대 최고의 관람객을 기록하고 있답니다. 세월이 뒤 바뀐
같소이다. 이기붕은 국일관 지배인은 잘 했던 모양인데 그만 언덕을 오르다 굴러 떨어져 죽은 격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