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마당
상주학 제7권 댓글쓰기
君子鄕의 고장인 尙州의 根本精神을 찾아서(1)
- 存愛院의 愛民愛鄕精神 -
권세환(문경대학교 초빙교수)
Ⅰ. 상주 정신의 근간을 이룬 儒學思想
1. 儒學과 경전에 나타난 근본사상
儒學은 공자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인 경전과 이 경전에 근거한 후세 학자들에 의해서 집대성된 敎學 사상이다.
儒學은 儒敎와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儒敎는 윤리 도덕적인 의미가 강한 孔孟 시대의 것을 의미하고, 儒學은 儒敎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經學을 의미하는 것으로 韓代 이후의 것을 가리킨다.
근대 서구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儒學은 특히 학문적·이론적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는 데 비하여, 儒敎는 교화적·실천적 영역으로 이해됨으로써 둘 사이를 구별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의미에서 보면 儒學과 儒敎 양자는 서로 배제하는 측면이라기보다는 서로 영역이 겹치는 類義語로서 혼용되었다.
그리고 선비는 한자어로 ‘士’이다. 한석봉의 천자문에 사는 先輩사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士’는 뜻은 같지 않다. 先秦시대에는 ‘戰士’라고 했고, 전국시대에는 ‘任俠사’, 당송시대에는 ‘朝士사’, ‘文士사’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는 ‘軍士사’, 고려에서는 15세기까지는 ‘朝士사’, ‘文士사’, 16세기 이후 사림의 시대에는 ‘先輩사’로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천자・제후・경・대부・사의 봉건적 질서 아래에서 대부와 사는 제후의 가신이나 전사를 의미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文學遊說之士’ ‘任俠之士’가 새로운 사인층으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唐대에 이르면 문관귀족을 가리키는 ‘문사’라는 명칭이 널리 쓰인다. 宋대에는 양자강 남쪽이 개발되면서 신흥 중소지주들이 등장해 ‘사대부’층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문・무관뿐만 아니라 유교 교양을 갖춘 독서인층까지 포함되었다. 이 독서인층이 바로 조선의 선비와 같은 부류이다. 선비란 모름지기 儒敎의 교양을 갖춘 ‘先輩’라는 용어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선비를 李德懋는 '靑莊館全書'에서 선비란 행동이 바르고 학식이 높으며 의리와 원칙을 중시하며 고결한 인품을 지닌, 끝없이 자신을 도야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하였다.
士子 明心如鑑 律身如繩 鑑不磨 則塵易汚 繩不直 則木易曲 心不明 則慾自蔽 身不律 則惰自生 治心身 亦當磨之直之
선비는 마음을 거울처럼 맑게 해야 하고 몸단속을 먹줄처럼 곧게 해야 한다. 거울은 닦지 아니하면 먼지가 끼어 쉬이 더러워지고 먹줄은 곧지 아니하면 나무를 곧게 할 수 없다. 마음은 맑지 아니하면 욕망에 가려지고 몸은 단속되지 아니하면 게으름이 생겨난다.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일도 마땅히 닦아야 하고 곧게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周易에서는 선비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으로 집약하였다. 즉 안으로 敬을 통해 마음을 수양하고, 밖으로 義로운 행위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天理가 사람에게 품부된 것을 性이라 하였다. 性은 본래 착한 것인데 인간의 욕심에 가려 약해질 수 있으니 敬을 통해 사욕을 제거함으로써 본래의 착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의 ‘存天理遏人欲’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라면 우선 敬을 해야 한다. 敬이란 스스로 닦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禪이나 靜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스스로 수양해서 나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道를 실현해야 한다. 그러니 선비는 道學을 연구하는 지식으로 인격이 고결해야 하고, 청렴결백・근엄 강직하며, 禮義廉恥를 지켜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義로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선비가 가야 할 길이다.
또한 경전이란 만고불변의 진리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고대에는 儒敎이외의 道家나 墨家 등의 서적도 경전이라고 하였으나 儒敎가 중시되면서 儒敎이외의 서적은 子書로 불렀다. 儒敎經典에 대하여 三經, 五經, 六經, 九經, 十三經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四書 즉, 論語, 孟子, 中庸, 大學을 주요 경전에 포함하고 있다. 이 경전들에 儒學의 심오한 정신들이 담겨있다.
三經 : 詩經, 書經, 周易
五經 : 詩經, 書經, 周易, 禮記, 春秋
九經 : 詩經, 書經, 周易, 禮記, 周禮, 儀禮, 春秋(春秋左氏傳, 春秋公羊傳, 春秋穀梁傳)
十三經 : 詩經, 書經, 周易, 禮記, 周禮, 儀禮, 春秋(春秋左氏傳, 春秋公羊傳, 春秋穀梁傳), 論語, 孟子, 中庸, 爾雅
2. 儒學의 대표적인 정신사상인 四端
儒學의 대표적인 정신 사상은 四端이라고 할 수 있다. 四端은 孟子 公孫丑 上篇에 나오는 말로서 仁義禮智를 말한다. 즉 仁은 惻隱之心이라하여 仁을 꽃피우는 실마리는 남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을 나타내며, 義는 羞惡之心이라하여 義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거짓을 미워하는 의로운 마음을 말하며, 禮는 辭讓之心이라하여 禮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자기의 이익을 버리고 남을 밀어주는 마음을 말하고, 智는 是非之心이라하여 智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仁을 논어 顔淵篇에서 ‘樊遲問仁 子曰愛人’이라 하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樊遲는 儒學의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여 후세의 우리에게도 큰 도움을 준다. 樊遲의 질문에 대하여 孔子는 참으로 명쾌하게 답한다. 즉, 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여,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것을 仁이라 한다. 어진 사람의 사랑은 차별이 없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안다는 것이다. 사물과 역사에 관한 지식보다는 인간에 관한 지식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정치에 있어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孟子는 義를 孟子 告子上에서 ‘仁, 人心也, 義, 人路也’라 하여 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義는 사람이 가야할 길이라고 하였다. 儒學은 他者에게 요구하기보다 스스로를 가다듬을 것을 권한다. 孔子는 君子는 자신에게 구할 뿐 타인에게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禮를 중시한 孔子는 논어 八佾篇에서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이라고 하였다. 이는 林放이 孔子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당시 이미 세속인들의 禮에 대한 생각이 그 근본을 버리고 말엽만을 숭상하는 폐단에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 禮의 근본을 물었던 林放이 위대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禮에 대한 孔子의 설명인 奢와 儉은 사치와 검약이라는 오늘날 우리의 말로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예식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禮는 간단하고 검소하고 간략할수록 더 좋은 것이다. 禮의 儉이 곧 本이다. 易는 형식적으로 잘 치러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질서 정연한 어떤 상례의 규칙에 의하여 깔끔하게 진행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喪의 근본은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상실되었다는 슬픔에 있는 것이다. 질서 정연한 喪禮를 과시하기 위한 무대가 아닌 것이다. 喪이란 질서 정연하게 형식적으로 잘 치루기보다는 오히려 그 슬픔이 생생하게 표출되는 것이 그 本質이다. 禮의 本質은 사치와 질서 정연한데 있지 아니하고, 검소하고 슬퍼하는데 있다. 禮의 本質은 형식이 아닌 상황이라고 하였다.
또한 論語 顔淵篇의 克己復禮章에 보면 ‘顔淵問仁 子曰克己復禮爲仁’이라 하였다. 즉 孔子는 나를 이기고 禮로 돌아감이 仁이 된다고 하였으며,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즉, 하루라도 나를 이기고 禮로 돌아가면 天下가 仁으로 돌아간다. 또한 ‘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 하여 仁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라고 하였다. 顔淵이 그 條目을 여쭈자 孔子는,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이라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四勿의 가르침이다. 非禮勿視는 눈앞의 일이 禮法이나 禮義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너는 그것을 보지 말라는 뜻이다. 즉 禮에 부합되지 않는 이를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말고, 말하려고도, 행하려고도 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에서 克己復禮가 유래되었다.
마지막으로 孔子와 孟子는 智에 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論語 里人篇에 보면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하여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다. 이는 孔子는 세상에 道가 서 있다면 내가 굳이 개혁하려고(易) 하겠는가? 라고 한 말에 나타나듯이 세상이 無道하기 때문에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즉 혼란한 세상을 개혁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도를 세우는(有道) 일이다. 이는 법이 공평하게 제정되고, 제정된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어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고 편법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道가 서 있는 사회이다. 天下有道라 함은 세상에 道가 있다. 즉, 사회에 질서가 있고 정의가 실현되어 있으며 법이 제 기능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는 道는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서나 알 수 있는 심오한 어떤 것이 아니다. 道 있는 사회가 곧 질서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즉 정치와 사회질서가 양호한 경우를 일컬어 天下에 道가 있다하고, 정치와 사회질서가 파괴된 경우를 일컬어 天下에 道가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孟子는 ‘仁之實事親是也 義之實從兄是也 智之實知斯二者弗去是也 禮之實節文斯二者是也’라고 하였다. 즉 仁의 실상은 어버이를 잘 모시는 것이며, 義의 실상은 형을 잘 따르는 것인데, 智의 실상은 이 두 가지를 잘 알아서 버리지 않은 것이고, 禮의 실상은 이 두 가지를 잘 조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학의 대표적인 정신 사상은 四端은 상주의 유학자들에게 깊이 심어져 存愛院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Ⅱ. 상주정신의 정수 存愛院
1. 存愛院 설립에 참여한 儒學者들
存愛院 설립에 참여한 儒學者는 己亥年(1999) 合稧 당시 24명이었으나 추가로 2명이 영입되고, 수행 4명이 있어 총 30명이었다. 참여한 유학자들은 ‘洛史彙簒’소재의 ‘存愛院 修正案 座目’을 토대로 하고 稧員錄은 연령순으로 기재되었다.
(1) 金鍊(1534-1603)
본관 昌原. 幼學. 官 贈 승의랑 공조좌랑
(2) 宋亮(1534-1618)
본관 礪山. 호 愚谷. 官 典獄署主簿, 前參軍. 품계 통훈대부
成大谷(運)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학행으로 鄭逑의 천거로 獻陵參奉에 임명되었고, 그 뒤 幽谷道察訪・漢城參軍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명종 21) 盧麒・鄭國成과 함께 洛社稧를 창설하여 鄕飮禮를 행하고 조약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다. 1580년(선조 13) 柳成龍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鄕講을 설치하고 그와 심경・近思錄 등을 강론하였다. 1602년 司圃署別提・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五賢院 창건하고 學規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임진왜란 때 장자를 왜적에게 잃었다.
효곡서원에 봉향되었으며, 1998년 4월 31일 대구 망우공원 충의단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愚谷文集 4권 2책이 있다.
(3) 金覺(1536-1610)
본관 永山. 호 石川. 官 司醞署主簿. 龍宮縣監, 贈 左承旨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낙동강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여름에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다수 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감사 金睟가 그의 전공을 行在에 보고하여 司醞署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그해 가을에는 咸昌縣事를 제수하였으나 또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1596년 왜적이 龍宮縣을 유린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용궁현감을 제수하여 적에 맞서게 하였다. 그 뒤 1604년 穩城判官을 역임하였다. 뒤에 左承旨에 追贈되었다.
淵嶽書院・昌德祠에 봉향되었으며, 1998년 4월 31일 대구 망우공원 忠義壇에 봉안되었다.
(4) 鄭而弘(1538-1621)
본관 晉州. 호 主一齋. 官 幽谷・金泉兩道 察訪. 蔭仕 縣監
동산사에 봉향. 尙義軍 佐幕, 有學行. 嶺南忠義壇 봉안
(5) 鄭而慶(1539-1576) (* 족보에는 1534 甲午年임)
본관 晉州. 幼學. 主一齋의 從弟
(6) 尹瑱(1541-1612)
본관 茂松. 호 希菴・菊圃. 官 통훈대부 丹城縣監
1541년 한성에서 태어났으며, 선조 13년(1580) 禧陵參奉에 이어 선조 17년(1584) 獻陵參奉과 齊陵參奉에 薦擧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가인 상주에서 군량미와 병사를 모으는 데 힘썼고, 그 공으로 이듬해 內贍寺主簿에 除授된 데 이어 司導寺主簿와 掌樂院主簿, 司憲府監察, 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이후 상주의 임진왜란의 참상을 보고서 선조 28년(1595) 스스로 屯田官이 되어 救恤策 12조를 상소해, 조정으로부터 곡식을 지원받아 기근으로 고생하는 백성을 돕는데 힘썼다. 같은 해 6월에는 丹城縣監으로 천거되었으며, 임기를 마치 후 고향으로 돌아오자 주민들이 頌德碑를 세워주었다. 김장생과 三盡圖를 저술하였고, 상주 道南書院 창건을 위해 힘썼다. 묘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로리에 있다.
(7) 金應德(1544-?)
본관 尙州. 幼學
(8) 李彦博(1546-?)
본관 全州. 幼學. 官 贈 正義大夫海天君
(9) 姜應善(1548-1622)
본관 載寧. 官 副護軍.
(10) 金之衍(1554-1603)
본관 商山. 호 西天. 幼學. 官 贈 監察. 西臺 冲의 둘째 아들
(11) 黃顯元(1555-1620)
본관 長水. 幼學. 尨村의 6대손
(12) 金有聞(1557-1619)
본관 商山. 官 將仕郞. 壬辰倭亂倡義
(13) 李㙉(1558-1648)
본관 興陽. 號 月澗. 官 지례현감
石川 金覺・復齋 鄭國成・西山 閔闇・槐亭 金晟의 문하생. 西厓의 문인이다. 癸卯年(1603년)에 생원이 되고 학행으로 世子翊衛司 洗馬에 제수되어 외대로 平陵道丞을 거처 지례현감에 이르렀다.
兄弟急難圖는 임진왜란 때 埈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치하여 백화산 고모담에 있었는데, 그 때 병(痢病)을 앓는 동생을 업고 적진을 탈출할 때 적군을 만났는데, 적이 칼을 빼어 죽이려다 형제의 우애에 감동하여 살려 주어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동생 埈이 명나라에 가서 이 이야기를 하니 그들이 감동하여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尙義軍 召募官. 嶺南忠義壇 봉안. 옥성서원 배향. 문집 4권. 兄弟急難圖 1권. 朱節彙類 4권
(14) 金知節(1558-1618)
본관 永山. 官 僉正. 石川의 둘째 아들
(15) 李峻(1560-1635)
본관 興陽. 號 蒼石. 官 1591년 문과 급제. 통정대부 홍문관 부재학. 贈 자헌대부 이조판서 兩館大提學. 시호 文簡公. 壬午年(1582년)에 생원이 되고 辛卯年에 문과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경세 등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 몇 천 명과 고모담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폐하였다. 1597년 소모관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調度使에 임명되었다. 그 뒤 通政大夫 弘文館 副提學에 올랐다. 정치적으로는 남인 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옥성서원・영주 우곡서원 배향. 도남서원 추배. 嶺南忠義壇 봉안. 蒼石集. 兄弟急難圖 편찬
(16) 姜應哲(1562-1635)
본관 載寧. 호 南溪. 官 外臺 沙斤道丞. 察訪
임진왜란 시 향병을 모집하여 정기룡과 같이 활동하여 왜적을 무찔렀다. 의병장. 연악서원・세덕사 배향. 嶺南忠義壇 봉안. 남계문집
(17) 金光斗(1562-1608)
본관 商山. 호 一黙齋, 黔巖. 1606년 進士
壬辰倭亂때 정경세, 이전, 전식, 조정 등과 같이 함창, 황령에서 창의하여 왜병과 싸웠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효곡서원・송호사 배향. 嶺南忠義壇 봉안
(18) 鄭經世(1563-1633)
본관 晉州. 호 愚伏. 官 정헌대부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의정부 좌찬성. 시호 文莊公.
1578년(선조 11) 생원과 진사 초시 합격. 1586년 알성문과에 乙科로 급제. 1596년 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했으며, 잠시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禦倭鎭營의 각처를 순시. 이조정랑에 있을 때에는 인사 행정이 공정하여 賢邪를 엄선해서 임용·퇴출했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 승정원우승지, 3월에 승정원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이때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民力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 풍습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 영해부사가 되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풍습을 교화하였다. 그 해 겨울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당시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가 시끄러웠기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마을에 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또한 상주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道南書院을 창건하였으며, 이곳에 五賢을 從祀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 1609년(광해군 1) 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火藥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兵部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썼기에 特旨로 嘉善大夫의 칭호를 받았다.
1610년 4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는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는 다시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 鄭仁弘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士論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禮論에 밝아서 金長生 등과 함께 禮學派로 불렸다. 사위는 同春堂 宋浚吉(興岩書院 배향)이다.
道南書院・우산서원・계령의 덕림서원・대구 연경서원・경산 고산서원・강릉 퇴곡서원에 배향. 尙義軍 召募官. 嶺南忠義壇 봉안.
저서로는 愚伏集・養正篇・朱文酌海・喪禮參考가 있다.
(19) 金知德(1563-1630)
본관 永山. 幼學. 石川의 셋째아들
(20) 鄭鳴世(1564-1589)
본관 晉州. 官 忠順衛. 선조 36년(1603) 庭試 丙科 19위
尙義軍 左幕
(21) 宋以脩(1564-1613)
본관 廬山. 官 秉節校衛. 愚谷의 아들
(22) 金知復
본관 永山. 號 愚淵. 官 성균관사예. 石川의 넷째아들. 西厓의 문인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무렵 광해군의 난정으로 권세를 잡은 간신 李爾瞻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으나 관철되지 않자, 은둔할 생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이준·정경세를 비롯하여 趙纘韓・康應哲 등 당시에 뜻있는 선비들과 서로 酬唱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안찰방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學諭가 되고, 1625년(인조 3) 典籍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시강원문학·장령(掌令)·부호군(副護軍)·영천군수, 1635년 성균관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愚淵文集 2권 1책이 있다.
(23) 康伏龍(1570-?)
본관 信川 . 성균관 生員. 西厓 문인
(24) 鄭而龍(1572-1605)
본관 晉州. 官 典牲署參奉, 贈 通訓大夫掌樂院正
東山祠 배향
(25) 韓瑺(1562-1634)
본관 淸州. 號 杜谷 . 幼學. 西厓 문인
(26) 權鼈(1589-1671)
본관 醴泉. 號 竹所. 官 副護軍.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하는 大東韻府群玉을 편찬한 草簡 權文海(1534-1591)의 외아들이다.
海東雜錄 14권을 저술하였다. 제1권에는 단군, 기자, 위만조선과 한사군, 삼한, 신라, 고구려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는데, 삼한 이전은 기사본말체, 신라 이후는 편년체로 서술하였고, 제2권은 백제와 고려 전반기의 역사를 편년체로 썼고, 제3권은 고려 후반기의 역사와 가야, 후삼국, 말갈, 거란, 몽고, 일본 등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다.
(27) 成灠(1556-1620)
본관 昌寧. 號 聽竹. 官 茂朱縣監, 贈 工曹參判. 栗谷의 문인이다. 어려서는 堂兄 省庵 浩에게 義理學을 배웠으며 東岡 南彦經에게 배웠다. 栗谷 李珥를 사사하였으며, 牛溪 成渾을 예방하였다. 경학에 밝았으며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임진왜란 때 賑恤策을 상소하니, 광해군분조에서 크게 칭찬하여 특명으로 賑恤官에 임명되어 쌀 2천석으로 충청・호남・영남의 수천 주린 백성의 목숨을 구했다. 1604년(선조37) 선조가 咽喉症과 失音症을 오랫동안 앓자 약방에서 성협의 의술이 통달하였다고 추천하였다. 선조 만년에 儒醫로서 활동하면서 약방의 어의들과 함께 임금이 進御할 약을 제조하였다. 1608년(선조41) 유의로 의관 허준 등과 상의하여 탕제를 지었으나 아무 효험 없이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 초기에 약을 잘못 제조하였다고 하여 허준 등이 귀양 갈 때 그도 상주로 쫓겨났다.
遺稿 1권. 죽림서원・화암서원・운계서원에 배향
(28) 孫禟(1567-1629)
본관 慶州. 號 鼎翁. 官 進士, 贈 左承旨. 月天 趙穆에 從學했다. 西厓의 문인
(29) 韓瑞(1568-1607)
본관 淸州. 號 佳村. 官 啓攻郞直長. 西厓의 문인
(30) 禹成績
본관 丹陽. 號 竹塢. 官 무과급제, 中軍, 贈 司僕事正. 命 旌閭.
1637년(인조 15) 정축의 난이 일어나자 右兵營中軍으로서 雙嶺에 이르러 청나라 군과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때 그는 죽음에 앞서 그의 奴僕인 貴同에게 당부하기를 “나는 곧 죽는다. 너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를 위하여 뼈라도 거두어다오.” 하니 貴同이 울면서 말하기를, “이미 주인이 나라를 위하여 죽을진대 소인(奴)인들 어찌 주인을 위하여 죽지 않을 수 있으랴.” 하면서, 곧 시체 옆에서 따라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조정에서는 司僕寺正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정려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설립자들의 인명은 存愛院誌를 참고하였다.
2. 存愛院의 설립 배경
상주 存愛院의 설립 배경에는 생명의 존귀성을 자각한 향토 선비들의 동포애가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특기할 수 있다. 1594년 4월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상주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당시 상주는 전쟁의 요충지였던 까닭에 수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더 더욱 임진년 4월 25일 관민병 800여명이 왜군의 주력부대 7,000여명을 상대로 최후의 1인까지 산화한 북천의 전투는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참화로 전쟁이 끝난 후의 상주는 기아와 질병에 그대로 노출 된 참혹한 현실이었으며, 기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현실에서 나라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조정에서 상주 전역을 復戶를 내린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위급한 상황을 본 상주의 선비들이 1599년 가을에 洛社稧의 계원들이 이 참혹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각자 米布를 출연하여 향토민을 구하기 위하여 사설의료기관인 存愛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醫局 운영의 기금으로 출연한 米布로 주치의를 두고 지역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진료를 담당한 의국으로서의 存愛院은 특별한 가치와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표방한 정신은 存心愛物 속에 다 포함하고 있었다.
앞장에서 논의한 四端의 정신을 상주의 선비들이 몸소 실천한 사례인 것이다. 즉 存愛堂(存愛院)을 설립한 기본 마음은 惻隱之心의 발로이며 修己治人의 實效로써, 儒道의 최고 경지인 仁(어짐・자비)에 접근하려는 선비의 同胞愛요 人間愛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은 存愛院이 의료사업과 미풍양속을 보호 계승하는 禮節敎化와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講學所로서도 활용되었다.
3. 存愛院의 설립 목적
存愛院의 설립 목적은 蒼石 李埈이 쓴 記文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향당에 達官한 분이 있으니 자비함은 보살과 같고 포부는 經國濟世의 큰 뜻이 있었다. 萬曆己亥年(1599년. 선조 32년) 가을에 官에서 사임하고 향리에 있었다. 하루는 그 친구 成士悅(成灠의 자)과 상의하기를, 우리는 혈육을 지닌 몸으로 寒暑의 침해를 받아 4백가지나 되는 병이 침공해 오는 데도 약은 한두 가지도 갖추지 못해 왕왕 비명에 죽으니, 그것이 巖墻 속에서 수족이 桎梏에 묶여 어찌할 수 없이 죽어가는 것과 같지 않은가? 지금 公은 詩書와 학문에다 岐黃術(의술)에도 통달하였다. 公의 마음인즉, 옛 사람이 靈祠에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던 마음과 같으니, 한 몸의 通痒을 보고만 있어 막연히 저 마음을 쓰지 않으랴. 이제 동지들과 대략 약재를 모아 급할 때 쓰고자 하니 진려하고 투약하는 일은 公의 일이라고 하니, 士悅이 마땅한 일이라고 여기었고, 여러 士友 또한 혼연히 참여를 원하여 협력하려 하였다.
이에 鄕藥材는 游手를 모아 채취하고 唐材는 쌀과 베를 내어 무역하여 재료가 이미 구비되니 이를 출납하는 장소가 없을 수 없어 이에 창고를 지어 저장하고 손님이 날로 모여 숙박할 곳이 없을 수 없어 이에 堂宇를 지어 접대하였다. 약을 팔아서 본전을 삼고 나머지는 모으고 늘려 모든 비용과 재료 구입에 충당하면서 누구든지 약을 구하는 자에게 짐짓 얻게 해 주니 효과가 순식간에 파급되었다.
이에 程先生 存心愛物이란 말을 따서 存愛堂이라 이름 지었다. 대저, 남과 내가 親疎는 비록 다르나, 한 가지로 천지간에 태어나 한 기운을 고르게 받은 즉 滿腔의 차마 못하는 마음(어진마음)을 미루어 동포애를 救活함이 어찌 사람의 본분을 다함이 아니랴. 한 사람의 선비가 그 位는 비록 미미하고 비록 그 베풂이 넓지는 않다 하드라도 실로 愛物하는 마음을 지녔은즉 반드시 濟物하는 功이 있을지니 이것이 군자가 마음 지닐 바요, 扁額에다 이를 취한 까닭이다. 愛란 仁의 베풂으로 어버이를 친히 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仁愛하고, 백성을 仁愛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다 이 사랑의 옮김이 아님이 없으니 사랑의 쓰임이 어찌 크지 않은가? 옛날의 군자는 집을 나오지 않고도 나라에 교화를 이루었다는 말이 있으니 그 道는 이 때문이다. 維摩詰은 位가 있는 자가 아님에도 능히 백성의 병을 보기를 자기의 병을 보듯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儒者이며 또 나와 남이 한가지라 여기는 자임에랴. 지금 우리는 몇 사람은 모두 愛人하는 마음을 지닌 자로서, 그 국면과 규모에 근거하여 뒷날 시설을 갖추어 하루아침 일이 있을 때 진실로 모든 일에 조치할 것이니, 存心愛物의 효과가 있어 어찌 이 한 원에서만 그치랴. 다만 염려되는 것은 일의 흥패는 때로 마음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무상한 것이라 알지 못하겠구나. 뒷날 이일을 잇는 자가 역시 능히 지키어 실추함이 없어서 醫局을 설치한 뜻을 얼마나 이룰 것인지.
孟子가 말하길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지녔다.’하였으니 惻隱之心이 없어진 연후에 이 의국을 폐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즉 뒷날의 군자가 어찌 오늘의 諸公의 存心愛物之心을 마음으로 삼아 뒷날을 더욱 도모하지 않을 손가. 내가 이때 마침 郡印을 차고 있어 비록 일에는 함께 하지 못하였으나, 諸公의 마음 씀의 근실함과 종합 처리하는 치밀함을 보고, 진작부터 그 일이 의로움을 알고 또 일의 成效를 즐거워하였다. 이제 諸公의 부탁에 의해 이 일을 일으킨 연유를 기술하고 또 뒷날에 이 일을 맡을 사람을 격려하였으며 이를 施置한 細目은 원규에 있으므로 여기에 쓰지 않는다. 達官은 愚伏 鄭經世公이며. 記는 拙修翁 李埈이 쓰다.
存愛院의 설립 배경에는 임란이라는 미증유의 참화를 겪으며 상주는 거의 황폐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의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비명횡사하는 향민이 속출하자 동포애가 지극했던 洛社稧員들이 향토의 급선무가 의료사업임을 절감하여 ‘향토를 내 손으로’ 구제하자는 숭고한 선비정신이 바탕으로 되어 있음을 먼지 특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신이 洛社稧를 합사하던 당년의 1599년 가을부터 동참 선비들의 동포애 구현으로써 의료 활동이 주목적인 私設醫療局으로서의 存愛院을 개설하였던 것이다. 계원들의 출자로 당년에는 간이 약재창고와 숙박소를 설치하여 靑里 黔岩에 창건하였다.
4. 存愛院의 설립 의의
存愛院의 설립 의의를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총서에서 밝힌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存愛院의 설치 배경은 의료제도상에서 먼저 찾아본 결과 지방에는 각 도에 파견된 의학 敎諭, 審藥 등의 몇 사람이 모든 지역민에 대한 치료와 약제 공납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따라서 지방의 의료 환경은 극히 소홀하고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방 의료제도의 불비는 임란 후 지방에서의 사설의료원이 설립될 수 있는 먼 배경이 되었다.
향약집성방의 성과와 계속된 향약지식의 증보로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향약을 사용하는 처방과 그 활용이 鮮初에 비해 늘어 갔다. 그 대표적인 의서로서 1538년 (중종33년)에 간행된 金正國의 ‘촌가구급방’이다. 이 처럼 고가의 唐材를 향약으로 대체하는 향약의술의 진보가 지방의료 시설인 存愛院 설치의 한 배경이 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배경은 16세기의 이른바 이상기후 현상이다. 이상 기온의 불순한 기후로 농업생산력을 떨어뜨렸고 이로 인해 영향의 악화는 역병의 발생과 전염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임란이라는 전쟁 상황은 최악의 의료상태를 야기 시켰다. 이는 임란 후인 1599년에 存愛院 설치의 보다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趙靖의 ‘임란일기’를 통해 본 결과 당시 의료 상황은 자연치료에 의존하여 의료시설과 지식이 거의 공백에 처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상주에서의 이러한 의료현황은 임란 후 士族들이 存愛院을 설치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임란 후 높아진 지방 사족들의 위상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存愛院 설치 당시 낙사계의 참여자의 직역과 직품을 분석하여 보면 모두 상주지역의 사족층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存愛堂의 설치나 운영은 상주 사족층에 의해 이루어 졌음은 확실하였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存愛堂 건립의 출발은 1599년이며, 存愛堂의 건물이 완성된 것은 1602년이었다.
따라서 存愛院의 설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다.
첫째, 사설의료원으로서 현존하는 기록상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둘째, 임란 후 황폐해진 鄕村社會의 재건 노력 중의 하나로 의료시설을 사족 공동으로 운영하였다는 것은 상주 사족의 공동체 의식의 발로였으며, 存愛院의 堂號가 程先生의 ‘存心愛物’에서 따온 만큼 성리학의 이념적 실현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셋째, 사족의 낙사계를 통한 存愛院의 운영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1599년부터 1782년까지 180여 년간 지속적인 의료기구로서 당시 열악했던 지방의료 시설을 보완하였다는 점 등에서 설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5. 存愛院의 사업
存愛院의 사업에 관한 기록은 孫永老가 닦은 存愛院事蹟(1886년)과 李鐘麟이 닦은 洛史彙纂 중의 存愛院事蹟・存愛院會錄・存愛院重建日記와 향지 등의 자료를 살펴보면 醫療院・禮節敎化場・講學所로서의 세 가지 사업을 살필 수 있다.
(1) 醫療院
存愛院의 의료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의료사업의 시작은 蒼石 李埈이 쓴 ‘存愛院記’에서 설명하였으나, 그 후의 기록은 1782년(정조 6년) 誣告로 인하여 관청에 제출한 후 보존되지 않아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앞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1602년에 세워 1811년에 중수하고, 다시 1886년에 보수한 285년간에 存愛院으로서는 큰 액운이 무고를 1782년에 당하였다. 그러나 1797년에 완전 변무되었으나 이 후 약방도 철거되고 집회조차 어려울 정도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따라서 의료 활동은 1782년 무고로 중지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상주의 存愛院은 存心愛物하는 상주 선비의 높은 동포애로부터 의료사업이 1599년부터 전개되어 근 200년간이나 실시되어 다른 지방에서는 그 유례가 드문 私設公同醫療院으로서의 구실을 다한 점은 鄕史에서만이 아니라 韓國醫療史에서도 특기할 일이라고 본다.
(2) 禮節敎化場
存愛院은 의료원의 역할 뿐만 아니라 고장의 미풍양속을 되살리고 계승하는 구심체적인 공간으로 그 존재의 의의도 컸다.
愚伏은 ‘洛社稧合稧序’에서 상주는 고래로 미풍양속을 지켜온 君子鄕이었음을 강조하였고, 임란의 전화 속에서도 향토민 스스로 德業相勸하고 過失相規하여 禮樂을 되살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愚谷의 ‘洛社稧條約序’에서도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오늘을 사는 선비들의 큰 몫임을 설파하고 있다. 洛社稧合稧 당시 군자향의 미풍양속을 지키는데 앞장섰음을 月澗과 一黙齋의 연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月澗은
만력 27년 己亥年(1599년) 선생 43세 봄, 다시 洛社稧를 결성하였다. 이에 앞서 鄕父老들이 禮俗을 흥기시키기 위하여 더불어 洛社稧를 결성하였다. 만력 무인년(1590년)에 선생도 다시 修稧를 하였는데, 매년 봄과 가을 좋은 날을 받아서 鄕飮酒禮를 행하여 德業을 권장하고 과실을 서로 살피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사람들은 常性을 잃고 향토의 풍습도 크게 변하였다. 선생이 鄭愚伏과 상의하여 난리에 남은 목숨이 다행히 古井을 회복하여 다시 옛일을 닦아 講學을 중히 하고 회합을 좋게 하는 바는 말아서는 안 될 일이다 하고, 서로 상의하여 條約을 講定하였는데 다 평일에 행하는 바에 의거하여 忠厚함을 숭상하고 惇睦함을 흥기시키는 기풍으로써 하였다.
一黙齋도
己亥年 만력 27년(1599년) 선생 38세 봄, 다시 洛社稧를 결성하였다. 병인년(1566년)에 향리의 父老들이 藍田呂氏鄕約의 제도를 모방하여 서로 稧를 결성하여 향토의 미풍양속을 장려하더니 임진왜란 뒤에 폐하여 행해지지 않자 선생이 개연히 여겨 계중의 동지들과 다시 舊約을 닦았다.
라고 하였다. 이는 洛社稧의 결성 목적이 미풍양속을 장려함에 있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특기할 사실로 存愛院 白首會(敬老會)를 개최하였다. 백수회는 1607년 처음 개최되었으며, 이 백수회에는 주부 宋亮(74세), 金覺(72세), 鄭而弘(70세), 현감 尹瑱(67세) 등이 주빈이었다. 愚伏 鄭經世가 쓴 ‘稧中爲高年設宴請文’을 살펴보면 그 당시의 어른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생각건대 세상에서 나이를 귀히 여기게 된 지는 오래입니다. 선왕이 그들을 위한 政化로써 옷과 고기로 우대한 것은 정화가 가정에 시행된 것이요, 가벼운 짐은 자신이 아울러 지고 무거운 짐은 나누어 맡음은 정화가 도로에 까지 미친 것이며, 지팡이를 내리고 금품을 주어 돕고 80세 이상의 노인이 군명을 받을 때도 다리는 한 번 꿇고 머리는 두 번 조아리게 한 것은 정화가 조정에 달한 것이요, 천자가 물을 것이 있으면 몸소 찾아가고, 사방을 갈 때에도 편안한 수레를 타게 된 것은 정화가 천하에 통한 것이었습니다.
향당간인즉, 더욱 이를 중히 여긴 까닭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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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三代의 나이 많은 어른을 존중했던 풍습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生 등도 모시고 말석을 얻어 잔을 드리고 경하를 드림으로써 경로의 정성을 다하는 이 일이 구구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변방의 근심도 겨우 안정되고 조야가 무사하며 천기도 中和하고 경치도 한창 좋으니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와 야복차림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왕림하시는 일을 상상하면 또 어려운 일은 아닐 듯싶습니다. 삼가 鄕子弟를 보내어 몸소 찾아가 숙배하고 진퇴 유무를 듣고자 합니다. 바라오니 僉尊을 살피소서.
이러한 미풍은 存愛院이 어려울 때도 이어졌으며, 조선조 말기까지 이어져왔다. 백수회는 1607년에 存愛院에서 비롯되어 1908년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상주 선비들이 소중히 가꾸고, 잇고, 물려주려 한 것이 무엇이었던 가를 알게 한 商山의 염원이었다 하겠다. 오늘날도 향교에서 耆老宴을 베풀고 있으니, 미풍의 계승은 상주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3) 講學所
存愛院의 세 번째 역할은 講學所 운영이었다. 이는 南溪 康應哲과 月澗 李㙉의 年譜에 기록되어 있다.
南溪의 연보에는 ‘만력 30년 임인년(1602년) 봄에 存愛院을 창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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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제현과 存愛院에 모여 中庸을 강연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1599년 낙사계 합계와 더불어 의료국으로서의 存愛院 기능은 시작되었으나, 3년 뒤에 存愛院 건물을 창건하고 그 해 12월부터는 이 건물을 강학소로도 활용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월간의 연보에도 만력 45년 丁巳年(1617년) 선생 60세 4월 趙黔澗(靖), 孫聞灘(遴)과 더불어 存愛院에서 놀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놀았다는 것은 단순히 놀았다고 보기 어렵고 강학 등을 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南皐 宋奎弼의 鄕約序를 살펴보면
丁酉年(1837년) 봄에 마침 옥성서원에 모임이 있었는데, 우연히 三面의 향약을 합설하자는 발의가 일자 한 마디로 동성이라 뭇 마음이 하나같았다. 대개 이 三面은 州城의 남쪽에 있고 사대부의 텃밭으로 일컬어졌으며, 명현이 대를 갈며 태어나 유교가 크게 행해졌다. 강론과 학업은 향당에 書塾이 있고 存心愛物은 院에 그것으로 이름을 지어 출입하며 번갈아 수신하고 조석으로 서로 강마하여 조약을 세우기 기다리지 않더라도 鄒魯之鄕이라 불리어져 의연히 三代의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세대가 멀고 교화가 해이해져 옛 道는 잠기어 희미해지고 유명무실하게 예의는 폐해지고,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미루기만 일삼는 습속을 이루어 오늘 날 가장 개탄할 바인즉, 여럿이 함께 상의하여 향약을 설치하는 것이 어찌 헛된 일이리오.
이 서문을 살펴보면 청리 쪽 3개 면의 향약을 합설할 때의 글로서, 存心愛物이 곧 강론하고 학업을 닦는 궁극적인 목적이므로 存愛院이야말로 글방의 역할과 덕을 닦는 수도장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存愛院을 중심으로 한 南村 선비들은 선비골(鄒魯之鄕)에 산다는 자부심은 조선 후기까지에도 대단했음을 이 글에서 볼 수 있다. 이 같은 자부심은 17세기 명현들인 愚谷・石川・月澗・蒼石・愚伏・南溪・一黙齋 등이 모두 이 지방 출신들인데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 본 바를 요약하면 存愛院은 存心愛物의 정신으로 동포애를 발휘한 의료사업에만 정성을 쏟은 게 아니라, 禮節敎化와 興學育英으로 상주를 선비의 고장으로 만들고 나아가 국가동량재를 기르려는 교육애의 발현장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Ⅲ. 存愛院의 정신을 잇자
1. 存愛院의 社中條約(洛社稧條約)
洛社稧 조약의 내용은 愚谷 宋亮의 ‘愚谷先生文集’ 권1에 수록된 것으로 이것이 丙寅稧의 것인지 合社稧의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 내용이 洛社稧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周禮 敎典은 鄕三物로써 만민을 교화하고 賓興함을 六德・六行・六藝로 하고 鄕八刑으로써 만민을 규찰함을 不孝, 不睦 不婣, 不悌, 不任, 不恤, 造言, 亂民으로써 하고 六禮로서 만인의 거짓됨을 방지하여 中正함을 가르치며, 六樂으로서 만민의 정을 다스려 화락함을 가르쳤으니 대개 정치를 독려하고 백관을 가르침에 질서가 있다.
- 중략 -
우리 聖朝에 이르러서는 문명과 治敎가 거의 三代의 성한 자취를 회복한 듯 하고, 鄕黨과 州閭에 학교가 없는 곳이 없어 백성으로 하여금 돌아갈 바를 알게 하며, 서로 권하여 덕으로 나아가게 하여 기수(운수)는 날로 쇠퇴해 지고, 선비의 습속은 하나 같이 명리를 좇으니 어찌 한심치 않으리오. 오직 우리 동지들이 洛社稧를 설립하고 조약을 정함은 성조의 배양하는 교화에 감화되지 않음 없은즉 원하노니 마음을 고금이 다르고만 생각하여서 스스로 퇴폐하고 타락함을 감수치 말며 서로가 속화됨을 구제한다면 이제 거의 풍속의 만에 하나나마 도움이 있다 할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었는데 후세로 오면서 선비의 습속마저 명리나 좇는 세태가 되었으니, 우리 스스로가 나서서 禮樂을 부흥시키는데 앞장서야 한다. 이것이 우리 洛社稧를 조직한 근본 목적이다.
이를 위한 ‘社中條約(洛社稧條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進德謹行(덕으로 나아가고 행동을 삼가함)
각자가 독실히 孝悌忠信의 도에 삼가하여, 모이는 날은 鄕飮禮를 베풀고 朱子의 白鹿洞規를 강론할 것
- 過失相規(과실을 서로 직언으로 간하여 고침)
충고하여 잘 이끌되 언성을 높여 박절히 말며, 자상하게 타일러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할 것. 반드시 서로가 성현의 傳心한 학문에 힘쓰며, 혹 儒者가 유의할 일은 바로 행하는 일에 이해를 서로 다투어 체면이 손상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할 것. 社中의 모두는 다 말을 조심할 것.
- 誠實相接(성심과 사랑으로 서로 맞음)
社中 모든 사람은 혹 일이 있거나 길흉사는 물론하고 즉시 찾아가 위문할 것
- 患難相救(환난을 서로 구제함)
수해, 화재, 도적을 당했거나 질병이 있을 경우, 환난의 경중이 있으니 임시로 의논하여 처리할 것
- 有慶相賀(경사에는 서로 축하함)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을 받은 경우, 들으면 날을 넘기지 말고 가서 축하하되, 유고로 몸소 살 수 없을 때는 子侄로 대신하여 글로써 치하할 것
- 有喪相弔(상사에는 서로 조문함)
社中에 상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가서 조문하고, 初終禮를 商量하여 확실히 하되 예에 따라 슬픔을 다하는 도리에 조금이라도 유감 됨이 없게 할 것
- 賻儀(초상집에 부조함)
社中에 초상, 장례 대 부의할 물품을 정하였음
- 尊儀(영전에 물건을 드림)
각기 집안 형편에 따라 공급하되 葬事에서 二朞까지로 할 것
- 先塋改葬과 碑碣, 會日, 有司 등에 대하여도 규약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위의 11조는 향촌의 두레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洛社稧의 條約이다. 이는 아름다운 미풍으로 서로 돕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약속이며 실천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2. 存愛院 관련시에 나타난 선비정신
存愛院 관련시로는 存愛院 白首會詩를 들 수 있다. 白首會 관련 시는 愚谷, 石川, 愚伏의 문집에 잘 나타나 있다. 백수회의 主賓은 愚谷 宋亮(74세), 石川 金覺(72세), 主一齋 鄭而弘(70세), 希菴 尹瑱(67세) 등이었다. 愚伏과 蒼石의 축하시를 소개한다.
奉次白壽會贈詩韻(愚伏 鄭經世)
德星夜入壽星墟 덕성이 밤에 수성의 자리에 드니
滿座耆英燕集時 자리 가득 子英들 제비 모이듯 하네.
年在古稀還健勝 일흔의 노인들 오히려 건승하고
皓如商四各瓖奇 흰 머리 상산4호 같아 진귀하고 빼어났다.
壺觴簡淡渦從數 술자리 담박하나 주량을 넘기는데
子姪陪隨笑語怡 자질이 뫼시니 담소조차 즐겁네.
盛事自今成歲例 좋은 일 오늘부터 해마다 선례되리니
到看仙核長孫枝 仙挑씨 자라 손자 가지 뻗는 걸 보리라.
奉次白壽會贈詩韻(蒼石 李埈)
四老頭邊白雪紛 四老의 머리에 백설이 분분한데
商山春色倚蘭時 상산의 봄 빛 무르익은 때일세.
十年兵革人無恙 십년의 난리에도 사람은 탈 없었고
一代耆英會更奇 한 시대 耆英會 더더욱 기이하네.
照世淸標元落落 세상 비춘 고상함은 원래 낙낙한데
通家和氣自怡怡 대대로 사귄 정분 화기애애 즐겁네.
社庭手種新松子 존애원 뜰에 손수 심은 새 솔씨
養得梢雲鶴踏枝 祥雲까지 자라 학 앉을 가지 뻗으리.
愚伏과 蒼石은 이 당시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조야에 문명을 날리던 시인이기도 하였으며, 蒼石의 시(6句)에서도 밝혔다시피 이 자리 모인 분들은 同鄕人으로서 대대로 정분을 나눠온 분들이기도 하였다. 여기서도 ‘商山四皓’가 상주에 산다는 의식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은영 중 상주가 선비의 고을이라는 자부심이기도 하겠다.
또한 이 시는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고 난 뒤의 시임을 蒼石은 3句에다 밝혀 놓았으며, 이 시가 장수를 축원하는 시임을 함축시킨 結句(7・8句)는 둘 다가 묘를 얻었다 하겠다. 愚伏은 ‘좋은 일 이제부터 해마다 선례 따라 이루어지리니 仙挑씨 자라 손자 가지 뻗는 걸 보리라’하였고, 蒼石은 ‘존애원 뜰에 손수 심은 새 솔씨, 祥雲까지 자라 학 앉을 가지 뻗으리.’라고 축원하였다. 이 자리 모인 長老들은 물론 愚伏과 蒼石 등의 소장 선비들도 임란 7년에 신명을 바칠 각오로 倡義兵에 가담한 분들로서, 천신만고로 살아남아 향리의 어른을 모시고, 전래하던 미풍양속을 이을 때의 남다른 감회는 詩語 밖에 무한히 펼쳐 놓았음을 독자는 감지할 수 있다.
君子鄕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던 商山 선비의 높은 덕을 이들 시로써도 충분히 알 수 있다.
醫局墻嵔有山菊花感而賦之示座中二首(蒼石 李埈) 하나
山菊花假非眞 산국화는 가짜요 진짜 국화가 아니라지만
不用分明辨眞假 분명히 진짜 가짜 분별할 일 못되네.
花名雖假卽是眞 꽃 이름 비록 가짜이나 이것이 곧 진짜니
若戰霜風猶不挫 저 바람서리와도 싸워도 꺾어지질 않네.
平居抵掌談節義평소에 즐겨 절의를 담론하고
男子心期如許大 남자의 마음은 이 같이 커야 된다고 하고도
一朝臨亂草靡風 하루아침 어려움에 바람에 쓰러지는 풀같이
身上三綱輕一唾 내 몸의 삼강을 침 뱉듯 가벼이 여기네.
위의 시는 蒼石의 述訓詩라고 할 수 있다. 醫局墻嵬有山菊花感而賦之示座中二首 중 하나이다. 의국의 담장에 모서리에 핀 산국화가 있어, 느낀 바를 좌중의 사람들에게 보인 두수 중 첫수이다. 이 시는 金針보다 센 言針이다. 한마디로 假人, 表裏不同人을 비판하였다. 이 시는 壬辰倭亂(선조 25년, 1592년)과 丁卯胡亂(인조 5년, 1627년)을 겪으며 두 번이나 의병에 가담했던 선비요, 형제의 우애가 극진하여 중국에 까지 형제애로 소문난 선비로, 名實이 다른 선비를 산국화에 대비시키어 述訓詩를 썼다. 山菊을 집안의 黃菊에 비해 보잘 것 없는 野菊이요 볼품없는 假菊이라 홀시하는 선비들, 입으로는 큰 소리로 節義를 논하고 남자 몸으로 節義에 살다 가야한다고 허세를 부리든 선비들, 정작 위난을 당하면 바람에 쓰러지는 풀같이 기가 꺾이고 지녀야 할 三綱 저버리기를 침 뱉듯 하는데도, 홀시하던 山菊은 서릿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다. 본질을 잃은 선비들의 表裏不同한 假人을 산국화에 대비시켜 신랄히 비판하고 경계하였다. 實없는 명분 세우기에 급급한 선비들을 고발, 비판한 이 시는 자연히 存愛院에 왕래하는 계원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자성의 거울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화려한 빛깔이나 진한 향기는 없더라도 어느 자리에서나 天性을 지키며 사는 山菊같은 삶이 선비의 체세요 처신이라 일깨우려 하였다.
醫局墻嵔有山菊花感而賦之示座中二首(蒼石 李埈) 둘
山菊花小墻隈 산국화 크기는 담장키만도 못하고
花小於錢白色淺 엽전보다 작은 꽃잎 흰 빛깔도 옅어.
雖無好貌誇玉雪 비록 옥설 같은 얼굴 자랑할 건 없지만
尙有貞資傲霜霧 오히려 정결한 자태 서리와 안개에도 오만하네.
由來物性自有常 미물도 천성을 떳떳이 지키거늘
奈何人心易受變 어찌하여 인심은 그리고 쉽게 변하는가?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頓顙胡庭乞哀輩 오랑캐 뜰에 머리 조아리고 목숨 빌던 무리를
名節終歸草介賤 명예와 절개 끝내 지푸라기 같이 천한 데로 돌아감을.
이 시는 첫수보다 다 강한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中華에 견줄만한 禮節國이라는 자존이 丁卯胡亂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땅에 떨어진데 대한 수치심과 울분이 그대로 노출 된 것이라 하겠다. 이는 오랑캐로 얕보던 청나라에 굴복하여 형제지국이 된 치욕과 그 보다 더한 분노는 위정자의 假人이 시인의 감정을 격렬하게 했던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명예와 절개를 지푸라기만도 못하게 여기는 최악의 현실, 선비도를 실천한다고 자부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는 위정자를 향한 고발과 비판이 신랄할 수 밖에 없었던 이면에는 임란 7년에 신명을 바칠 각오로 倡義兵에 앞장섰던 감회가 분노로 폭발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시는 存愛院을 드나드는 선비들에게 직접적인 훈도 이상의 교육적 효과를 내었을 것이다.
3. 存愛院의 정신
存愛院의 정신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洛社稧 중심의 선비들이 存心愛物의 높은 정신을 발휘하여 1599년 가을에 창설하였으며, 1602년 봄에 存愛院을 창건하였다. 1599년 낙사계 합계와 더불어 의료국으로서의 存愛院 기능이 시작되었으며, 3년 뒤에 存愛院 건물을 창건하고 그 해 12월부터는 이 건물을 강학소로도 활용하였다.
또한 存愛院은 고장의 미풍양속을 되살리고 계승하는 구심체적인 공간으로 그 존재의 의의도 컸다. 愚伏은 ‘洛社稧合稧序’에서 상주는 고래로 미풍양속을 지켜온 君子鄕이었음을 강조하였고, 임란의 전화 속에서도 향토민 스스로 德業相勸하고 過失相規하여 禮樂을 되살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愚谷의 ‘洛社稧條約序’에서도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오늘을 사는 선비들의 큰 몫임을 설파하고 있다. 洛社稧合稧 당시 군자향의 미풍양속을 지키는데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存愛院은 주 기능인 의료사업은 1599년부터 1782년 후까지 근 200년간 지속되었으며, 또한 민풍을 쇄신하고 미풍양속을 계승・발전시키는 禮節敎化場의 역할을 하였으며,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과 교육을 진작시키는 강학소로서의 기능은 300여 년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存愛院의 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의 시는 거의가 실천 유학으로서의 경로효친사상이 주제로 이루었으며, 후대로 가면서 敬사상으로 확대되었다. 敬사상은 우리 정신의 뿌리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조선선비의 가치관이기도 하다. 이를 우리는 蒼石의 醫局墻嵬有山菊花感而賦之示座中二首에서 조선 선비의 기개와 기상을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存愛院 관련 시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정신은 存心愛物로서 禮節敎化나 講學의 장소로 활용된 만큼 敬의 사상과 후진양성에 주목적이 있다. 이는 도덕적 질서의 유지・계승보다 나은 미래를 염원하는 興學育英에의 선비정신이 창작된 시의 주제의식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存愛院의 정신은 본성을 지키고 길러 남에게도 이로운 일을 하려는 存心愛物의 정신은 어느 자리에서나 주조를 이루었고, 동포애로서의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은 尊賢思想과 鄕風樹立의 전통의식 고취에 근간이 되었으며, 이러한 存心愛物의 정신은 300여 년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存愛院의 정신을 요약하면 1599년 조선에서는 최초로 창설된 私設醫療局으로서 그 주된 목적은 의료사업에 있었다. 이는 存心愛物 사상이 투철한 상주 남부 지역(청리, 공성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내 이웃은 내가 돕자’는 뜻으로 시작되어 약 200년간 지속되었다. 이는 단순한 의료사업의 차원을 넘어, 儒家의 이념인 修己治人의 목적을 仁의 端, 惻隱之心에서 구현하려는 상주 선비道의 실증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1602년 存愛院 건물 창건이후 겸행했던 講學所 구실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어 상주 興學運營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607년 白首會 개최를 기점으로 禮節敎化場으로서의 기능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까지 300여 년간 지속되었다.
한 마디로 存愛院은 선비道 실현을 추구해 온 商山 선비들의 동포애와 향토애가 存心愛物 사상으로 결집되어 王으로부터도 그 존재의 의의를 ‘大稧’로 칭송 받을 만큼의 醫療局・講學所・禮節敎化場의 구실을 다해 온 데에 그 存在意義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상주의 선비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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