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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루카 10,13-16
지옥에 가는 이유: ‘행복’을 원하지 않아서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은 한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실 때,
‘하늘’과 상반되는 ‘저승’은 곧 지옥을 나타냅니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의 운명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기쁩니까?
이 소식은 나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의로우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내가 죽고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면 기쁩니까? 오늘 저주받은 고을들도 그렇게 주저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행복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것이 더 많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무엇이 행복인지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복음이 맛이 없는 것입니다.
술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술을 끊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서전에서 평생 122명의 여인과 잠자리를 하였다고 써서 전 세계에 유명하게 회자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카사노바’입니다.
그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남자다.”라는 등의 말을 남겼습니다.
카사노바는 배우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키도 크고 외모도 출중했지만 동시에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었음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 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입니다. 카사노바는 70년 평생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합니다.
서품 준비에 한창이던 때 일흔 살인 사제 말리피에로가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것을 봅니다.
혼란스러운 그는 백작의 딸인 루시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납니다.
하지만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도 여러 여자와 특별히 높은 신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로 그는 성직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여기저기를 평생 도망 다니며 많은 여자를 꾀고 돈을 위해 사기를 치고 다녔지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한 공작부인의 돈을 빼앗기 위해 임신한 여인을 데려와 방금 죽은 아내의 영혼에 그녀가 죽으면 영혼을 환생시켜주겠다고 말하고는 만약 유산을 이 배 속의 아이에게 상속하면 죽은 아내는 다시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 것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말을 잘했나 봅니다.
평생 도망치며 감옥을 들락거리고 세상을 떠돌다 다시 베네치아로 와서 한 여자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 3개월입니다.
사실 그는 문란한 생활 때문에 성병에 자주 걸려 40대 중반부터는 성기능 장애가 오기도 했습니다.
천재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위대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자신이 믿는 행복을 찾아 떠났고, 그렇게 자신이 원한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만 하다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천재였지만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하나도 없고, 돈으로 여자의 성을 착취한 호색한이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기를 치던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는 평가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
카사노바는 분명 그리스도를 택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정도는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여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이라고 믿는 철학을 추구한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살면서 결국 돈도, 명예도, 성도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행복은 돈이다.”, 혹은 “행복은 명예다.”라는 식으로 결정해 버리면 참 행복이 왔을 때는
그것을 밀쳐내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던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 손을 놓아라.”
“당신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시는가요?”
위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행복을 원하는지,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고 당신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지 않고 이미 그 행복을 인간의 수준으로 규정하여 복음을 밀쳐내면 오늘 저주받은 마을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데레사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大路)로 안내하셨습니다!
산 너머 갯바위로 소풍을 갔다가 예쁜 구절초 무리들을 만났습니다.
구절초는 모두 다 똑같은 줄 알았더니 색상도 조금씩 다르더군요. 흰색, 연보라색, 진보라색...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아슬아슬한 절벽 작은 틈 그 사이에도 보란 듯이 자리 잡고 피어난 녀석들의 모습이
눈물겨울 정도로 예뻤습니다.
그 자태가 너무 어여뻐서 연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예쁘고 여여쁜 이유 중에 하나가 작음이었습니다.
작은 꽃잎이지만 그 안에 갖출 것 다 갖추었더군요.
피정 센터 산책길에도 번식을 좀 시켜보려고 몇 뿌리 캐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이 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작으니 사랑받는구나!’
아마도 이런 공식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분 품에 푹 잠기고 싶다면,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작은 야생화처럼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요? 탄탄대로가 아니라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좁은 길의 성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입니다.
그녀의 삶이 마치 깊은 산속 외딴 곳에 홀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작은 꽃 같다고 해서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불립니다.
언뜻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성인(聖人)이 되기에 많이 부족해보였습니다.
1873년에 태어나셨다가 1897년에 돌아가셨으니 불과 24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성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과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그 나이의 다른 젊은이들 바라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짧디짧은 수도생활의 연륜, 그것도 봉쇄수녀원 안에서, 그마저도 지병으로 골골하면서...
도무지 대단한 뭔가를 해낼 조건이 아닌 그녀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웬걸, 데레사는 자신의 탁월한 봉헌생활을 통해 나이와 연륜이 성덕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그 어떤 성인보다 크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빛나는 성덕은 온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봉쇄 수녀회 수도자였던 그녀를 전 세계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겸손, 복음적 단순함,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앙, 이 세 가지 요소는 결국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戀人) 대하듯 대했습니다.
그녀가 하느님과 주고받은 대화 곧 기도는 마치도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하는 연인들끼리 주고받은 연서(戀書)같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한 송이 작은 숨은 꽃이길 원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작은 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그녀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로 안내하셨습니다.
그리고 작디작은 그녀를 당신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꼭 안아주셨습니다.
숨은 것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녀 특유의 빛나는 작은 길을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루카 10,13)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고을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현존과 가르침, 기적을 충만히 누렸음에도 죄악에는 기민했고 믿음에는 게을렀던 탓입니다.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13)
꾸짖음의 내용을 잘 들어 보면 그 안에는 사실 꾸짖는 이의 기대와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은총을 받았음에도 하느님께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 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통해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시는 겁니다.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는 행위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모든 죄와 잘못에 대해 자비를 청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지요. 자루옷은 어떤 장식도 없는 투박하고 거친 천으로 자신의 비천함과 고행을 드러내며, 재는 세상 것에 한눈 팔고 달리다가 끝내 맞이하게 될 허무한 종말을 상징합니다. 자신의 근원과 목적을 외면하는 이는 결국 다 타고 남은 재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실패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고을들을 각별히 사랑하시고 더 많은 정성과 애정을 쏟아부으셨음에도 그들을 회개시키지 못하셨다는 걸 예수님도 인정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이 제대로 보답받지 못해서라기보다, 구원을 가로막는 완고하고 굳은 마음을 그들 스스로 고수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꾸짖으시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절절한 회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바룩 1,17)
이것이 패망과 유배라는 민족적 고통과 치욕 앞에서 이스라엘이 스스로 고백하는 자성의 골자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의 죄는 그분과의 관계성을 파괴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말씀보다 당장 자신들을 더 영화롭고 풍요롭게 해 줄 다른 목소리를 듣고 따르면서 그분과 점점 멀어졌고, 그렇게 멀어질수록 하느님 백성의 거룩함을 잃고 맙니다.
이민족에게 패방하여 이국 땅에서 타향살이를 해야 하는 유배의 기간은, 이방신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인 야훼 신앙을 되찾아 수호하며 다시 그분과의 관계를 간절히 갈망하게 될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내쳐버린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뼛속까지 통회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이는 반드시 해방의 선물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과 사회, 신앙 안에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여정을 충실히 살아갑니다만, 때때로 잠시 멈추어 자신의 구심점과 방향성을 점검하는 순간이 꼭 필요합니다. 회개는 주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존재적 소명과 정체성을 가다듬는 노력이지요.
부족하고 나약해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언제라도 그 품 안으로 달아드는 어린아이처럼 정화와 성화의 노력에 결코 지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실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