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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28일 월요일 [(자)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수도회] 사랑으로 다시 세우는 새 예루살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2-6
† 복음 마태 8,5-11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구원이 온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립니다. 주님의 집이 있는 산이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대림 시기에 이사야 예언자가 들려주는 첫 번째 기쁜
소식입니다.
기다림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기다림은 가장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이 기다림을 통해
평화의 씨를 심고, 세상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되려면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겸손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그는 지도자급 인물이었지만, 예수님을 찾아와 중풍을 앓고
있는 자신의 종을 치유해 주시라고 허리를 굽힙니다. 자기 밑에 군사와
종을 부리는 사람임에도,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종이 비록 자기가 부리는
사람이지만, 그도 구원받고 치유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똑똑하거나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 대한 감사와 무한 한 신뢰
2016년 가해 11월28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생존자들에게 자랑이 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6
복음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1
매일 성지를 지키고 있지만 부득이하게 성지를 비워야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주가 바로 그런 날이었지요. 오래전에 부탁을 받았던
특강이 잡혀 있어서 하루 종일 성지를 비워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없다고 해서 성지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를 할 수
없다는 상황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에 연락을 해서 미사를 해 줄 수 있냐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신부들이 쉬는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성지의 11시 미사를 해 줄 신부를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게는 많은 동창신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창신부들끼리 연락하는 SNS 사이트에 미사를
부탁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저의 믿음대로 곧바로 몇몇 신부가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목하는 본당에서 성지까지의 거리가
상당해서 부담이 될 텐데도, 또한 아침 9시 미사가 있는데도 미사 후에
곧바로 와서 미사를 해주겠다는 신부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유일하게 쉬는 날이고, 다른 약속도 있었을
텐데도 동창이라는 이유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말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역시 동창이야.”
굳게 믿고 있었지만, 여기에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행동을 더
해주면 감사한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마치 동창들에게 느꼈던 저의 감정처럼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조금 이상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달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종의 상황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라면서 자신이 어떻게 해 줄 것인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말씀에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지요.
직접 보고 손이라도 만져줘야 치유될 것만 같은데,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이 백인 대장의 믿음을 보면서 왜 처음에 고쳐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가 이해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상황만 이야기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자신의 종이 치유되는 것이 옳다면 고쳐주실 것이고,
치유되는 것이 옳지 않아서 다른 행동을 하시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후에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믿음에 믿음을 더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것이며, 주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홉 가지 잘못한 일을 꾸짖기보다 한 가지 칭찬을 해주는 것이 그
사람을 개선하는 데 효과적이다(앤드루 카네기).
어제 강의를 했던 서울대교구의 여의도 성당입니다.
도전하라.
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 박사이며 동시에 작가인 수잔 제퍼스
(Susan Jeffer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은 오지 않아. 너에게 고난이 생겼다면,
너에게 어려움이 생겼다면 그건 네가 극복할 수 있는 고난이고
어려움이라는 의미야. 고난과 어려움을 성장의 발판으로 사용하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너는 분명히 전 보다 더 성장하고
발전하게 될 거야. 그리고 도전하라.”
어렵고 힘든 일이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이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잊고 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고난에 대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고난에 지난 뒤에는 성장한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요.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도전하라.”
여의도성당의 성탄 구유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으로 다시 세우는 새 예루살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1월28일 가해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마태 8,5-11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 8,8)
사랑으로 다시 세우는 새 예루살렘
이사야 예언자는 다가올 메시아를 통하여 예루살렘이 부흥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4,2).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피를 닦아내시고,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주고, 폭풍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4,4-5)고 전합니다.
한마디로 구세주가 오심으로써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고 구원의
손길이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이지요. 대림시기는
이런 영원한 생명, 세상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구원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취하고 찾아가며 손에 쥐게 되는 것들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겠지요.
오늘 이 땅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심각한 부패와 부조리한
사회 구조의 민낯을 보며 자괴감에 빠지고, 집단적 박탈감과 절망을
느끼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당사자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인식하지도 못하는 무딘 양심과 무책임 속에,
어리석게도 한가닥 지푸라기를 붙들고 바둥대고 있습니다.
권력과 돈의 단맛에 젖어들어 눈이 멀고 귀가 막혀 제멋대로 살아가는
결말은 늘 그렇게 예외 없이 비참할 뿐임을 망각해서는 안되겠지요.
이 대림절에 우리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 현세의 것들에
사로잡히거나 휘둘리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마음을
모아야겠습니다.
그저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에 만족하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실현해나가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해야겠지요.
가장 중요한 준비는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사랑함으로써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증오와 경멸을 가다듬어 사랑과
관심으로 변형시키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자비심과 겸손과 관대함이야말로,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세우는 핵심적인 몸짓임이
분명합니다.
백인대장은 얼마든지 종을 부릴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을 다 지닌
세력가였습니다(마태 8,9). 그런 그가 중풍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종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고쳐주려고 나섭니다(8,6). 또한 예수님께는 감히
자기 집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다며 한 말씀만 해달라고 겸손하게
청합니다(8,8). 그의 자비심과 관대함, 겸손한 태도에 예수님도
감동하시어 고쳐주십니다. 겸손한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부른 것이지요.
사랑이신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렇게 내 안에 사랑을 채워 사랑의
사람으로 변형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이 땅에 사랑이신 주님께서
오실 수 있도록 정의를 실현하고, 말과 행동으로 선이신 주님을
증거하도록 투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질서는 정의가 실현될 때
바로 설 수 있지요. 정의에 뿌리내린 사랑이 평화를 가져옵니다.
오늘도 희망 가운데 주님을 기다리며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내 안에, 이 땅 위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도록
해야겠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정화, 진리와 정의를 통한 자비의
실행을 통해 참 기쁨이신 주님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굳이 오시겠다는 주님 - 김찬선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가해 11월28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굳이 오시겠다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과 백인대장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주님과의 관계가 이러하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 얘기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의 도움을 청하는 루카복음과 비교되는데
이로써 마태오복음은 백인대장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드러냅니다.
그렇지요. 보통의 경우는 루카복음에서처럼 정복국의 백인대장이라면
직접 오기보다는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는데 마태오복음에서는
자기 종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기까지 사랑을 합니다.
저도 사랑을 하긴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저를 낮추거나
그를 존경하는 사랑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겸손한 사랑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어야 완전한 사랑이고,
겸손해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게다가 백인대장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스승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자기의 주인이요 자기는
예수님의 종이라고 한 것이기도 하지만 구원자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기에 한 말씀으로도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 한 말씀으로 치유하실 수 있다는 이 이방인의 믿음은
말씀의 창조주께 대한 창세기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1장의 창조는 2장의 창조와 비교가 됩니다.
2장에서 하느님은 땅으로 내려오시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숨을 인간의 코에 불어넣어 생명을 창조하시는데 비해
1장에서 하느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그저 한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생기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생기는 것이 생명이요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복되도다.’라고 한 뒤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라.’고 고백할 때 이 백부장처럼 우리가 믿는다면 몸과
영혼의 치유가 참으로 이루어지리라 저도 믿고 여러분도
믿어야겠지요.
그런데 백부장의 이런 겸손하면서도 대단한 믿음의 고백에
예수님께서도 상응하는 칭찬과 사랑을 보이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고 하십니다.
백부장의 고백대로 가시지 않고 한 말씀으로 원격치료하실 수 있지만
굳이 가셔서 당신의 손을 백부장의 종에게 얹어 치유해주려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사랑이요,
따듯한 내재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지 않고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 말씀으로 무에서 창조하신
분이 한 말씀으로 구원하실 수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구원키를 원치 않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입니다.
전화 한 통화, 편지 한 통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자식의
손을 잡아주고 밥 한 끼 먹이고픈 것이 부모의 사랑이듯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이런 내재적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대림절은 이렇게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고,
이렇게 오셔서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시기입니다.
-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간 월요일
2016년 가해 11월28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 마태오 8,5-11
캐나다에서 지인이 오셨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음식도 주셨고, 차량도 빌려 주셨고, 은행 업무도
도와주었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음식도 사드리고, 차량도
빌려드리려고 합니다. 지인과는 여러 추억들이 있습니다. 처음 머물던
집은 교통이 불편했고, 너무 추웠습니다. 지인께서 교통이 편하고,
따뜻한 집을 찾아주었고, 정해진 날 아침에 함께 짐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사정이 있었는지 지인께서는 약속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었고, 성격이 급한 저는 택시를 불러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저는 1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꼭 올 거라는 믿음도 없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지인은 저를 찾아오셨고, 그때는 많이
서운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는 추억이 되었지만
조급한 저의 성격과 믿음이 부족한 저의 모습을 반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많은 분들이 저를 기다려 주셨고, 저의 부탁을 기쁜 마음으로
들어 주셨습니다. 1989년의 일입니다.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던 학생이
취업을 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고 연락을 하였습니다. 저녁식사 약속을
하였지만 저는 깜빡하였고, 천마산으로 친구들과 산행을 하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4시간이나 늦게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대학다방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을 보았습니다. 제가
올 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미안한 마음도 컸고, 고마운 마음도
컸습니다.
공자께서는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렵지만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한대로 판단하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하면 ‘그럴 수도 있지.’가 되고 남이 하면 ‘그럴 수가
있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웃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십시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 우리는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입니다. 분쟁과
갈등, 폭력과 전쟁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를
모아 일치와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평화와 공존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백인대장의
하인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서로를 신뢰한다면, 서로를 믿어준다면
인내하고 기다려 준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보여 주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참된 믿음의 소유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1월28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 마태오 8,5-11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라.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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