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911. 묵상글 (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행복에 깨어 있는. 등 )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11 04:34
- 행복에 깨어 있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깨어 있음에 대해 묵상코자 하는데
오늘은 자기의 행복과 불행에 깨어 있어야 함에 대해 묵상코자 합니다.
이 묵상을 하기로 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의외로 자기가 지금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해서 깨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많은 분이 자기 행불행을 점검하지 않고 그냥저냥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평지풍파를 일으켜 불행해질까 봐 그러지 않을까요?
괜히 건드려 잠자고 있는 불행감을 깨울까 봐 그러지 않을까요?
행복한지 불행한지 따지다 보면 내가 행복한지 자신이 없기에
자기의 불행이 들킬까 봐 행복에 관한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실로 제가 ‘정말 행복하세요?’하고 질문하면 많은 분이 곤혹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지금 내가 행복한지 생각지 않다가,
이렇게 계속 살면 나의 미래는 행복할지 생각지 않다가
예상치 못한 불행과 준비가 안 된 불행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되겠습니까?
뒤늦게 인생이 망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축구 경기 90분 중 1분 전에 골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10살 때 불행한 것이 낫지 90살 때 불행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90살 때 불행한 것이 낫지 영원히 불행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알면 지금부터 행복합니다.
지금 모르더라도 나중에는 알아야 합니다.
어쨌거나 오늘 그것이 명확히 제시됩니다.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 소유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불행하여라,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주 올레길을 완주했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힘들지 않았냐고 여쭤보니, 처음에는 친구 따라 몇 코스를 다니다 보니 어느새 완주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 성지순례 완주하신 분들의 시작도 처음에 몇 군데의 성지 방문 후에 꾸준히 다니다 보니 완주하셨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완주하셨을 때의 기분에 관해 물으니, 거의 비슷한 답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뻤습니다.”
처음의 작은 시작이 있고, 여기에 꾸준함이 더해져서 결과물을 내게 됩니다. 책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장편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 두꺼운 것을 어떻게 읽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꾸준함을 가지고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큰 만족감과 기쁨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이렇습니다. 분명 작은 시작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조금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꾸준함이 동반되면 주님을 알아가며 큰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 작은 시작 부분부터 포기합니다. 그리고 항상 이유를 만듭니다.
‘세상일이 바빠서, 미사가 재미없어서, 기도가 힘들어서, 기도해도 변하는 것이 없어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할 세상의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시작에서 멈추고 꾸준함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내서 꾸준히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신앙인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기쁨은 얼마나 클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가난과 굶주림, 슬픔과 박해를 겪는 사람은 행복하고, 부유함과 풍족함, 웃음과 칭찬을 누리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세속적인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은 여기서 멈추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가질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도 않고 결국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지 못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세상 것의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께 나아가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되고 결구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나고, 그리고 꾸준히 주님을 만나고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신중하되 천천히 하라. 빨리 뛰는 것이야말로 넘어지는 것이다(셰익스피어).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이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런 사람일까요?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일까요?
특히 마지막 네 번째 불행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또한 눈치보고 비위맞추며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나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인간관계나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며, 그저 오손도손 미워하지 않고 재미나고 즐겁게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주님 안에 고독하기를 배우게 하고
진리를 만나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게 하고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소서. 아멘.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의 아들때문에 행복하길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를 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 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하여라.’그래서 젊은이는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머리 돈 여자!’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 ‘머리 돈 여자!’정신 없는 사람과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골로3,2).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골로3,9-10). 참된 행복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을 차지하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께 맡기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뿐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 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에서 찬양 때 부르는 성가를 ‘복음성가’라고 합니다. 복음성가 중에 종교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던 노래가 있습니다. 복음성가이면서도 방송에서 많이 소개되었던 노래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가사나 멜로디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혹시 제목이 기억나시는 분 있으신가요? 1997년에 발표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찬양 성가로 불렀는데, 많은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일반 대중에게도 사랑받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가 사랑받았던 이유는 당시 우리 사회가 ‘IMF' 국가 부도 위기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회사가 쓰러졌고, 많은 직장인이 실직했습니다. 경제위기는 가정의 위기, 개인의 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역과 을지로에는 노숙자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저는 교구청에 있었습니다. 강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을지로 지하상가에 있는 노숙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물가에서 힘차게 끌어올린 공이 US 여자오픈에서 우승의 견인차가 되었듯이, 박세리 선수의 우승은 국가 부도의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 국민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도 'IMF'의 거센 파도에 침몰할 것 같았던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랑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 맺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그것만으로도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천년에 한번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이 바위를 스치고, 그 스치는 옷자락으로 바위가 사라지는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시간은 억만년도 더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나서 가족을 이루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인연은 모두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행복은 소유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병중에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을지라도,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많은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하느님을 떠나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라고 권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노래도 잘 하였고, 말도 잘 하였고,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제게 없는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이 적으면 무시당한다고 원망 했습니다 상사에게는 대화가 안 된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젊은 직원에게는 예의가 없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늘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 곁에는 행복이 머물 수 없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감사의 문을 활짝 열면 됩니다. 계속 행복하고 싶다면 불평의 문은 꼭 잠가 놓으면 됩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나중에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배부르게 될 것이며 웃게 될 것입니다. 이것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고난과 고통을 주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나중의 행복을 위해서 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행복에 관한 이런 연구를 보았습니다.
서원식을 앞둔 수녀님들은 저마다 내일의 서원식을 기다리며 작은 종이에 자신의 감정을 적었습니다. 어떤 수녀님의 쪽지에는 ‘행복합니다.’,‘감사합니다.’‘너무 기대됩니다.’ 같은 단어들이 즐비했고 어떤 분의 쪽지에는 ‘내일 비나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동안 수련하느라 고생했다.’ 등이 쓰여 있었습니다.
전자를 행복지수 4-5로, 후자를 행복지수 1-2로 분류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납니다. 수녀님들은 모두 90세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때 다시 행복지수에 따른 수명을 조사했습니다.
행복지수가 높았던 수녀님들의 절반이 아직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지수가 낮은 쪽 수녀님들은 열 분 중 아홉 분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이 결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건강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건강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구를 보고 다시 오늘 복음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가난 때문에 굶주림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은 그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나중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배부르게 될 것이며 웃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하늘나라로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
한마디 말의 힘
얼마 전 부모님께서 이곳에 방문하셨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부모님을 모시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날은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전날 비가 많이 왔던 날이었습니다. 아직도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습니다.
식당 앞에 주차하고 식당에 들어섰습니다.
식당 주인은 저희를 창가 쪽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손님이 오시니, 해나 나네요. 가게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순간 창을 통해 밖을 봤습니다. 진짜 먹구름이 갈라지며 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우연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습니다.
이것이 말 한마디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구름을 없애고 해를 나게 할 수는 없지만 먹구름 같은 마음에 해가 들도록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말 한마디입니다.
오늘이 이런 친절과 빛의 말 한마디를 나누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품위있고 자유로운 복음적 삶”
교황님의 동티모르에서의 두 번째 날인 9월10일 어제는 동티므로 신자들에게 참 풍요로운 날이었습니다.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은 인구 134만에 98%가 가톨릭신자들이며 어제는 인구 절반에 해당되는 60만명이 야외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2002년 독립했으며 인구의 평균 연령은 20세라니 정말 젊은 국가입니다. 파푸아뉴기니에 이은 동티모르, 작고 가난한 나라지만 신자들은 순수한 복음적 삶을 살고 있음을 봅니다. 특히 교황님의 방문으로 가톨릭 젊은이들의 넘치는 기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제 교황님이 곳곳에서 주신 말씀 제목도 은혜로워 소개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복음의 중심은 지구의 변두리 여기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작음’의 소중함을 보여 줍니다.”
“복음의 중심에 있는 나라, 동티모르입니다.”
“우리에게 배려하고 배려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준 어린이들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문화와 역사를 바꾸려는 악어를 조심하십시오.”
“전통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문화가 되도록 하십시오.”
파푸아뉴기니 신자들과 동티모르 신자들보다 교황님이 이들에게 받은 복음적 삶과 가치에 대한 충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싶습니다. 아마도 이런 생생한 복음적 삶에 대한 체험은 교황님의 삶에 신선한 활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자유로운 복음적 삶은 가톨릭 신자들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어떻게 품위있고 자유로운 복음적 삶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이 답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도 그렇게 대하였다.”
참으로 하늘 나라에,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있기에 가난중에도, 굶주림중에도, 울음중에도 품위를 지키며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을 내다보며 기뻐하고 뛰놀수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 욕구와 탐욕을 초월한 참으로 자유롭고 품위있는 고결한 복음적 삶,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행복선언에 이은 불행선언은 저주도 아니고 형벌의 선고도 아니고, 하나의 탄식이자 경고입니다. 회개하라는 엄한 부르심입니다. 지금 부유한 이들은 자족하기에 앞서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굶주린 사람들과 나누고, 지금 웃는 사람들은 우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하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이 구원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저주는 축복이 될 수 있고, 품위있고 자유로운 고결한 복음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참으로 자유롭고 품위있는 복음적 삶에 바오로 사도가 결정적 답을 줍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태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고도로 자기를 절제하는 품위있고 자유로운 삶의 절정입니다. 세속적인 현실에 무관심하라는게 아니라 깨어 살라는 것이며, 세상에 빠져 살지 말고 자본주의에 역행하여 초연한 이탈의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쾌락이 아니라 자발적 가난을, 존재의 기쁨을 살라는 것입니다. 늘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기후위기도 해결되어 지구도 자연도 사람도 살 수 있고 희망의 미래도 가능할 것입니다. 녹색평론 2024년 가을호 머리말 끝부분을 나눕니다.
“다른 길이 없다. 에너지 소비를 절대적으로 줄이고, 경제성장을 그만두고, 인구의 과반수가 농촌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무기를 버리지 않고는 인류는 미래를 맞을 수 없다. 이 혁명은 민주주의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꿈꾸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태도이다. 체념해서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하느님이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이지만, 인간의 자발적 협조가 절대적입니다. 바로 자발적 가난과 절제, 품위있고 자유로운 복음적 삶의 회복으로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함이 바로 진정한 영적혁명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언젠가 이런 자유롭고 품위있는 삶을 꿈꾸며 써놓은 시가 있어 나눕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 하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되어 님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 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아멘.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아무 것
없기에
나
있으니
행복한 사람
모든 것
있기에
나
없으니
불행한 사람
나
없어져
너
있기에
행복한 사람
나
있으려
너
없애니
불행한 사람
너
없어도
임
계시니
행복한 사람
너
있기에
임
없으니
불행한 사람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루카 6,20.26)
네 가지 참행복: 네 가지 기본 덕목
루카가 여덟 가지 복을 어떻게 네 가지로 함축하고 있는지 봅시다. 우리는 네 가지 기본 덕목을 알고 있습니다. 절제, 정의, 신중, 인내가 그것이지요. 미음이 가난한 사람은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우는 사람은 거만하지 않고 온순하며 조용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겸손하지요. 의로운 사람은 우리 모두에게 공동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 것을 내줍니다. 자기 것을 내주는 사람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이웃을 해치려 함정을 파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덕목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진 사람에게서 여러 가지 덕이 나타나고, 어느 한 덕목에만 충실해도 성인다워집니다. 덕이 충만한 곳에 그에 따른 보상도 충만합니다. … 그러므로 절제에는 순결한 마음과 정신이, 정의에는 자비가, 신중에는 평화가, 인내에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을 친구로 인정하지만,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가 있다면,우리는 그를 부끄럽게 여긴다. 행복선언의 첫 말씀은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을 발견하고,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소유한다. 엑카르트는 굶주림이 있는 곳에서는 서로 빵을 나누며 위로하고,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는 옷을 주어 위로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으 볼 때 엑카르트는 마태오 복음 25장 31-46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또한 엑카르트는 빵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한 예수의 이야기와도 연결시켜 말하는 것 같다(마태 7,7-11 참조).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위로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다: 피조물 자체에서 오는 위로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위로. 피조물은 위로를 주는 능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종종 어떤 사람이 목마를 때 빵을 주고, 어떤 사람이 덥다고 할 때 옷을 주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위로는 완전하지 않다. 그것에는 무언가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위로는 순수하고 참스러운 것이 섞여 있지 않다. 그것은 완전하고 완벽하다.(237)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7절: 대 탁발수도회
프란치스코와 그의 수도회:
그는 1224년부터 심한 위병과 눈병을 앓았다. 그는 1224년 9월 라베르나(La Verna) 산에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주님의 상흔(傷痕)을 자신의 몸에 받았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인 그는, 수난에 있어서도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과 결합되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그는 훌륭한 「태양의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은 전 피조물이 찬미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에서 넘쳐흐르는 것이었다. 그는 땅바닥에 누워 가난하고 헐벗은 채, 그러나 그의 형제들이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찬미가(Te Deum)를 입술로 노래 하며 1226년 10월 3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민중과의 결합성은 그의 수도회 회원들에게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중세의 민중 선교사로 존속하였다. 성 그클라라 수녀회는 그들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이 회는 1212년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적 지도 아래 있었고, 그에 의하여 아씨시 근교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 정주하였다. 1221년에는 이른바 제 3회가 여기에 첨가되었다. 이 3회를 통해 세속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도 프란치스코회의 이상과 효력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교회에 청빈에 대한 사랑을 다시 명심시키고, 그 부유함 때문에 스캔들을 받은 사람들의 눈에 교회를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청빈생활 안에서, 세상을 멀리하거나 세상을 멸시함이 없이 청빈의 이상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올바로 유지해 오고 있다.(233)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6,20.24)
나는 가난하며, 가난하게 살고 싶은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너나 나나 다들 힘들고 가난했기에 가난을 받아들였으며,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그닥 어렵고 힘들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은 지금에 있어서 가난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참으로 막막하고 힘든 일입니다. 40대 여성 탈북자 <한씨와 6살 아들>이 서울 봉천동 한 임대아파트에서 숨진 지 두 달여 만에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냉장고가 비어있었고 임대아파트 월세와 공과금이 1년 가까이 밀린 걸 보면 굶주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소식이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생사를 넘어 자유를 찾아 탈북해 왔는데, 자유를 찾은 이 땅에서 굶주려 죽었다니 얼마나 참담한 소식입니까? 어쩌면 가난이란 이 母子처럼 누구에게 그리고 그 무엇에도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가 바로 가난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비참하고 속상한 것이 가난입니다. 물론 제 주변에도 아직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가난이 아니라 궁핍한 상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우리 중 누가 그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먼저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있고, 사람들로부터 미움받고, 거부당하고 모욕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포하셨고, 그 반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가난함, 굶주림, 울음, 미움, 추방, 모욕과 중상을 두고 행복하다고 선언한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생존하는 데 없어져야 할 부정적인 것, 즉 악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께서 부유함, 배부름, 웃음, 칭찬 그 자체를 불행한 것으로 선포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런 상태는 오히려 증가되고 전염되어야 하는 긍정적인 것, 즉 선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왜 부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자로, 긍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불행한 자로 선언하신 걸까요? 그것은 각각의 상태가 가지는 수용 능력 때문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의도는 ‘가난과 부요’가 ‘행복과 불행’을 구별 짓는 기준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입니다. 결국 가난함과 부유함 중에서 어느 상태가 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잘 수용할 수 있으며 그 가치를 담을 그릇이 넓으냐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처럼 가난함의 그릇에 하느님 나라를 담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만족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차지했다고 믿기에 누구보다 더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어떤 사람들은 부유함의 그릇에 하느님이 아닌 세상적인 것들로 채우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재물에 대한 탐욕만을 담으려고 하기에 불행합니다. 탐욕은 불행의 올무이자 족쇄이며 늪입니다. 부유함의 그릇에 탐욕만이 가득하다 보면, 탐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잖아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들처럼 탐욕의 늪에 빠지면 하느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고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1콜3,1)라고 권고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삶과 새 인간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들답게 산다는 것은 “현세적인 것들 특히 탐욕을 죽이고, 수치스런 말 따위는 버리는”(3,5.8.9)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점은, 성서학자들은 성서를 연구하면서 깨닫게 된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늘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해 우선적인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왔습니다.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수도자나 성직자가 때론 좌파(?)처럼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의식이나 삶 안에서 부유함에 젖어 사는 것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지향 자체가 바로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수억 원이 넘는 큰 저택에 생활하며 사셨던 독일의 고위 성직자를 파면하신 교황님의 의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솔직히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요?, 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부유하기에 마냥 행복하고 가난하기에 마냥 불행한 것이 아님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음 인용문을 잘 읽어보길 바랍니다. 칸트는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에크하르트는 『하느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그 무엇을 털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많이 가졌다고 오만하지 않고 적게 가졌다고 불평 불만하지 않고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다만 많이 가졌다고 느낀다면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비록 물질적인 것은 적게 가졌지만, 많이 받은 어떤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십시오. 아멘.”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욕망을 절제하는 이 만이 참 행복을 /
박윤식 [big-llight] 2024-09-10 ㅣNo.175851
행복은 하느님과의 만남으로만 누릴 수 있단다. 그분 모시는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마음이 가난한 이란 삶의 빈자리를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꼭 채워 주시리라고 믿는 이다. 그는 그분께서 반드시 주시는 걸 믿기에 어떤 이기심이나 탐욕에도 빠지지 않는다. 사실 행복은 본시 인간 것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것일 게다. 그분께서 주셔야만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주님의 힘과 함께해야만 불안이 사라진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게 많다고 쉽게 나누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무튼 많이 가질수록 더 갖고 싶다나. 소유가 많고 적음은 단지 인간 사회의 구분이다. 주님 앞에서는 그 구분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분께는 있는 이나 없는 이가 다 같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죽을 땐 두고 가야하니까. 평범한 이것을 외면하면, 정말 불행한 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이르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박해받는 이들은 행복하고, 부유하고 배부르고 지금 웃고 칭찬받는 이들은 불행하단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면, 이 세상의 행복을 희생으로 지불해야만 할게다. 이렇게 예수님이 행복한 이들이라고 여기시는 이는 하늘 나라를 향해 희망을 안고 사는 이들일 게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보다 그분께 더더욱 마음을 두는 이들이리라. 주님 계명을 따라 새롭게 살려면 세상 것에 고착되지 않는 마음이어야 하리라.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서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평범한 일상에서 참 행복을 체험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창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각과 관점의 작은 방향 전환을 통해 일상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바뀔게다. 하지만 말씀을 깊게 묵상하면, 지금 웃는 이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이 세상이 복음을 거스르고 있기에.
다시 말해 세상이 바른말 하는 이를 자기와 다르다고 박해하고, 더욱이 복음을 선포하는 이를 증오하여 모욕하면, 이는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은 채 눈앞의 편안함만을 찾는 것이기에 정녕 위험한 일이리라. 이들은 저 위에 있는 것을 떠나서, 현세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머물려는 안이한 이들이다. 오직 저 위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더 높은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는 이는, 세상이 손가락질하면서 거부하거나 박해를 하더라도, 그래서 때로는 울고 불행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진정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기필코 아는 이리라.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은 놀랍게도 부족함을 느끼는 데 있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재물을 미워해야 한단다. 돈도 좋고 예수님도 좋다는 식의 생각이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만드니까. 넉넉하고 넘치는 게 결코 행복해 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재물을 많이 소유한 이는 그게 다 행복해지는 게 아니니까 비워야만 할게다. 이렇게 욕망 앞에서 절제하는 이 만이, 진정한 참 행복을 느낄 수가 있으리라.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31).
지난해에 아버지의 임종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세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은 아버지였지만, 그렇다고 현세에 집착하거나 죽음을 아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의사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인사도 없이 그냥 가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신앙이 없는 삶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에 대하여 아무 미련 없이 떠나가는데,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현세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자기 몸을 끔찍이 아끼며, 아주 사소한 예를 들면 선풍기는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려 하는 우리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음을 과연 믿는 것일까요?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현세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영원한 삶을 바라며 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불행 선언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그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삶 속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마치 현세가 전부인 양,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삶만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45)
==========================================================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들에게 좋을 말을 듣고 싶지
그렇지 않은 말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게 대해주기를 원하지
함부로 대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미움과 칭찬에 대해
조금은 다른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이 행복하고
사람들이 나를 좋게 말하는 것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행복과 불행의 조건은
이 두 부분에서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즉 내가 생각할 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즉 그들의 입맛에 따라
그들이 미워하거나 좋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했는지 보다
내가 한 것에 그들이 만족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것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찾게 됩니다.
이것은 배려로 보이지만
사실 배려가 아닙니다.
내 삶을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상대방의 생각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나중에 결과가 좋지 않을 때에는
내가 기대하는 칭찬을 못 듣게 되면
상대방에게 분노하고
공격적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미움을 받을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미움의 상황을 우리는
대부분 잘잘못과 연결해서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미움도 견디기 쉽지 않지만
스스로 잘못이라고 판단하는 상황은
더욱 맞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적당히
상황과, 상대방과 타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가
대부분 자신들의 만족 여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굳이 모든 상황을
나의 잘못과, 내 탓과
연결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미움이 내 탓의 결과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오히려 미움을 받을 수 있는 힘도
내 안에서 조금씩 커질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된 행복은 결핍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도 있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7천원 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
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감사하면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신다. 루카는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20절) 이것은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죄에서 가난한 사람, 악덕에서 가난한 사람, 세상 우두머리에게 빼앗길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요한 14,30 참조).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분처럼(2코린 8,9 참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우리가 몸과 마음, 모든 힘을 다하여, 가진 것을 다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생활 때,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바보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영원으로 그리스도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물론 현세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신다. 문제는 하느님과 세상의 가치관이 마음에 어떠한 순서로 정리되어있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면 모든 것은 잘 되어있는 것이다. 반대로 재물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하느님께나 인간에게나 제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박해도 당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 우는 것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의 잘못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진정으로 울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울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유하다는 것은, 마음이 세상의 일로 차 있으므로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가실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일에 즉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 때문에 결정적으로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복음에 나오는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하며, 애통하여 소리친다는 뜻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보듯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선행을 하는 데 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행복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복의 관건은 ‘누구를 위해 가난해질 것이냐?’이다
오늘 복음은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받아 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굶주리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다 행복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이 ‘봉헌’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봉헌될 때 내가 비워지고 그 자리에 주님의 ‘뜻’이 채워지며 그래서 나로부터 자유로워져 많은 이들을 자신 안으로 초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과 쾌락을 구분해야 합니다. 쾌락은 가지는 것, 먹는 것, 세지는 것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은 적응됩니다.
이를 쾌락 적응이라 합니다.
UC 리버사이드 심리학과 교수 소냐 브로머스키는 복권에 당첨되든, 직장에서 승진하든, 결혼을 하든 몇 개월만 지나면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온다고 많은 사례를 통해 주장합니다.
우리도 사실 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큰 쾌락, 혹은 중독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까지 빠져버리는 예가 많습니다.
어떤 물고기가 물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고기는 묻습니다.
“물이 뭐예요?”
물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행복 자체에 있으면 적응됩니다.
전혀 행복한 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물 밖으로 잠시 나가서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어야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음을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건강의 행복을 아는 사람은 운동의 고통을 즐길 수 있고 라면을 맛있게 먹으려는 사람은 배고픔을 참을 줄도 압니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고통도 즐길 줄 알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즐길 줄 모른다면 사실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치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난과 배고픔, 멸시받음이 무조건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일본의 카미카제 자살 특공대는 황제가 하사했다는 사케를 한 잔씩 하고 죽음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죽음입니다.
자기를 봉헌하지만, 결과는 자기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마치 성전이나 병원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처럼 사회 약자들,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위해 가난해지고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뜻은 인간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모든 타인을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직 부모와 같은 창조자를 위한 가난과 자기 봉헌만이 두려움 없이 나를 내어줄 수 있게 합니다.
‘노숙인들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요셉 병원 선우경식 원장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결혼도 안 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노숙인들의 무료 병원을 운영하였습니다.
73년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저명한 대학병원들로부터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한국에 돌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세웠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져도 꿰매 신고, 차가 다 낡아서 사람들이 선물해 준다고 해도 의료품으로 달라고 하였습니다.
선우 원당은 봉사를 희생이 아니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평소 “환자들은 내게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귀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감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장례식 때 요셉 의원 현관접수를 맡고 있던 안수근 씨가 조사(弔辭)를 읽었습니다.
고아원 출신으로 신림동 다리 밑에서 살면서 술과 싸움을 일삼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선우 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재활시키고 일거리도 주었습니다.
안 씨는 “제 소원은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는 것인데 살아 계실 때 원장님을 아버지라 불러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젠 저 속 안 썩이며 열심히 살게요. 아버지~”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하느님의 뜻에 자기를 봉헌한 이들이었고
정말 가난하고 배고프고 멸시받았지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로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참 행복은 사랑에서 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주기 위해 가난해져야 하고 더 먹이기 위해 배고파져야 하며 높이기 위해 낮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을 마치 자기 것을 빼앗길 오두막처럼 여기다가 이제는 하느님이 사시는 성전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 자존감이 행복의 수준입니다.
이 행복을 아는 이들이라면 자발적으로 자선하고 단식하고 기도를 할 것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그 뒤에 올 행복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봉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혁명’이 아니라 ‘회개’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0-26)”
1) “행복하여라!”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 기쁨, 평화, 안식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 ‘행복’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행복 선언 말씀’은, 여러 가지로 힘든 고난과 역경 속에 있으면서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인데,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그냥 참고
살아라.” 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 말씀’은 일시적인 위안이나 주는 ‘진통제’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가난과 굶주림과 미움과 박해는 ‘참 행복(구원)’의 원인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참 행복(구원)’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그 ‘참 행복’은 죽은 다음에나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바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 또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2) 바로 그 변화를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4-47ㄱ).”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4-35).”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없었고,
굶주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참 행복’을 지상에서 실현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모두가 참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이 땅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공동체부터 변화하면, 언젠가는 온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어느 세월에...” 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쉴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내가 변하면 세상도 바뀐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신념을 가지고 있고, 신념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3)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즉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불행 선언 말씀’은 ‘저주’가 아닙니다.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권고입니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라는 말씀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바로 연상됩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5-26).”
저승에 있는 ‘큰 구렁’은, 단순하게 말하면 아무도 건너갈 수 없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장벽’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장벽은, 부자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그는 자기와 라자로 사이에 아무도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을 쌓아놓고 살았습니다.
그 장벽이 그대로 저승에서 그 부자를 가두어 놓는 감옥의 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누굴 원망하거나 탓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될 뿐입니다.
4)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내세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불행 선언 말씀’을 들어도 무시하고 비웃기만 하거나,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아니면, “그건 그때 일이고, 나는 지금 내 마음껏
즐겁게 살면 그만이다.” 라고 큰소리치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야고 4,14; 5,1).”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본당신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보좌신부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본당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당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20년이 지나서 안식년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순간을 감사드리고, 그 시간에 충실한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몇 해 전 은경축을 맞으신 어느 선배 신부님의 고백인데 그 내용이 마음에 참 와닿습니다. 정말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조건에 얽매여서는 안되지요. 우리는 ‘~만 하면 행복할텐데’라고 생각하며 특정 조건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지만, 막상 그 조건을 채우고 나면 행복해지는게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높은 수준의 조건들을 채우려는 욕심과 집착이 생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다음 또 다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이 나의 욕심과 집착은 점점 커져 무엇을 해도 행복하지 않고 무감각한 상태가 되지요. 내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이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기에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마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가난, 굶주림, 슬픔을 겪고 있더라도, 그런 일들을 겪는다는 사실 자체에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이겨낼 힘을 주시리라 믿으며 그분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르기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행복하여라’라는 선언을 듣는 이들이 지닌 특징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기준에 얽매여 사는 이들, 세상이 주는 풍요와 즐거움에 만족하며 안주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손길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지금 자기가 누리는 그것들이 계속 되기를 바라며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할 뿐입니다. 지금 자기가 행복하다고 착각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세상이 주는 만족과 풍요는 금방 ‘내성’이 생깁니다. 예전보다 더 가져도, 예전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도 그것이 주는 만족감과 기쁨은 점점 더 낮아지고 날이 갈수록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듯한 공허함과 헛헛함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기에 그들은 곧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는 이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를 편 가르기 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위로 덕분에 그 자체로 이미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부유한 이는 소유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넘어 존재의 삶을 지향해야 참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길을 안내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이며, 그 사실을 깨닫고 내가 받은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때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을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더 완전하고 충만한 상태로 누리게 된다고 알려 주십니다.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행복하여라! ”
채근담(菜根譚) 후집7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흔히 사람을 피함으로써 고요함을 찾지만
사람 없음에 뜻이 있다면
이는 곧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며
마음이 고요함에 집착하는 것이
곧 움직임의 근본임을 모르고 있음이다.
이래서야 어찌
남과 나를 하나로 보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잊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랴.
그런데 같은 채근담(전편 88)에서 더욱 성숙된 차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요한 곳에서 고요한 마음을 지키는 것은
참다운 고요함이 아니니,
소란한 곳에서 고요함을 지킬 수 있어야
천성의 참다운 경지를 얻으리라.
즐거운 곳에서 즐거운 마음을 지니는 것은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니,
괴로운 곳에서 즐거운 마음을 얻을 수 있어야
마음의 참다운 기미를 보리라.
동양의 사상은 우리에게 친근함과 반성을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이와 연결되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 7,30-31)
한편으로 치우지는 것은 판단에서도 정도를 벗어나기 쉬운 법이지요.
바람직한 판단을 위해서는 양쪽을 다 들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요함과 어지러움, 약함과 강함, 어떻게 보면 서로 반대인 것 같아도
삶의 한 사건이나 어떤 물건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겠지요.
사실은 두 면이 다 있어야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 우리가 어리석음으로 흐를 때에는
한 면에 치우치거나 아예 한면으로 기우러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 처럼이라는 반대쪽의 것을 생각하므로써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지혜의 삶의 원칙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사도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할 수가 있을까요?
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가치로 따진다면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는 지금 불행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는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이 우리에게 와 닿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배부르고 웃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지만 배고프고 울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는 사람, 그런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고 웃고 인정 받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 편의 행복과 내 편의 판단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손해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처지에서도 반대의 사람을 배려하고 또 그들의 권익을 위해서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기쁘고 감사드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곳에서도 고요함을,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보다 세상에서 이미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선 하느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욕심을 비우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내 자신 보다는 내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요.
사도 바오로이 가르침과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복된 하루 되세요!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40911.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사는 삶
<2024.9.11>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5:15~27절)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사는 삶❞
❚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거짓을 버리고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 명심해야 할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 구원이 향하는 종착점은 은혜입니다(15~19절).
나병이 나은 나아만은 엘리사에게로 돌아와서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고백하며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자 합니다(15절). 그러나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사양합니다(16절). 그는 이 기적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임을 알았기에 예물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나귀 두어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요구하며, 이제부터 주님 이외에 다른 신들에게는 번제나 희생제를 드리지 않겠다(17절)고 결단합니다. 다만 아람 왕이 섬기는 림몬 신당에 들어가 절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용서해 주시기를 구합니다(18절). 엘리사는 평안을 빌어 주며 나아만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거나 경험하였기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룩한 열망이 식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성품을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고, 그 고백에 걸맞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향하는 종착점은 그러므로 은혜의 자리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변절된 행동은 불신앙을 가져옵니다(20~23절).
나아만이 엘리사를 떠나 얼마쯤 길을 갔는데,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이 아람 사람 나아만이 가져와 손수 바친 것을 받지 않았기에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여 무엇이든 얻어 와야 하겠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20절). 악을 도모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게하시의 행동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아만을 만난 게하시는 엘리사가 자신을 보내어 제자들에게 줄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청하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22절). 나아만은 게하시를 반갑게 맞이할 뿐만 아니라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를 몰랐기에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꺼내어서 두 부하에게 주어 메고 가도록 하였습니다(23절).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일깨우며 선물을 거절하였으나, 부패한 게하시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타락한 북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탐욕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눅 12:15, 22~26).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겉은 성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속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지면 결국 교회 공동체에게는 심각한 타격을 입힐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교회가 무너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의 최우선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욕심과 탐욕을 채우고자 하나님을 수단홧하거나 그럴듯한 명분으로 우리 자신의 욕심과 탐욕을 정당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변절 된 우리 자신의 행동은 곧 불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바라며, 그분으로 인하여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욕심이 향하는 종착역은 심판입니다(24~27절).
언덕에 이르자 게하시는 두 사환에게 예물을 받아 자신의 집에 감추고 두 사환을 돌려보냅니다(24절).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하시의 사기극을 엘리사는 훤히 알고 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스스로 자신의 죄를 자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25절)라며 끝까지 자신의 죄를 숨깁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그가 한 일을 이미 알고 있음을 드러내며 게하시의 탐욕을 지적하고 책망합니다. 또한 엘리사는 나아만의 나병이 게하시와 그 자손에게 옮아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그 말 그대로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반대로 합당한 심판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러므로 세상의 욕심과 정욕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욕심과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물질을 탐하거나 그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자신이 세상이 주는 유익을 얻기 위해 욕심을 꺾지 못하고 거짓과 위선을 고집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해 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욕심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욕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만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해 내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헛된 욕심과 욕망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도록 주신 은혜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삼하 5:15~2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