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51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제주의 신화가 시작되다
원래 탐라국(耽羅國) 또는 탁라(乇羅)라고 불렸던 제주도에 전해 오는 신화에 따르면, 제주의 역사는 고을나ㆍ양을나ㆍ부을나 이렇게 세 을나(乙那)에 의하여 시작된다. 제주의 시조가 되는 세 을나는 독특하게도 제주 1동에 있는 삼성혈(三姓穴)의 모흥혈(毛興穴)이라는 세 구멍에서 솟아났다 한다. 가야나 신라ㆍ고조선ㆍ부여 등의 다른 나라 시조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태어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시조가 한 사람도 아니고 셋인 점도 다르다.
삼성혈제주도 즉 탐라국의 탄생설화를 품고 있는 삼성혈은 신비스런 풍경을 연출한다.
당초 세 사람은 바로 신인이었는데서로 짝지어 해 뜨는 동쪽에 와서 살았네오래도록 세 성씨만 서로 혼인을 한다더니듣건대 그 남아 전하는 풍습 주진(朱陳)과 비슷하구나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점필재 김종직의 시다.이런 연유로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가 의병을 모집하면서 세 성씨가 모두 같은 후손임을 언급한 글이 유성룡이 지은 『난중잡록』에 실려 있다.
제주ㆍ정의ㆍ대정. 세 고을. 고성ㆍ양성ㆍ부성. 43가 문호의 모든 어른들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 때 인물이 생기던 시초에 하늘이 3신을 한라산 밑에 내려보내시니 고씨ㆍ양씨ㆍ부씨라. 또 아름다운 여인과 망아지, 송아지의 종자를 함께 주어 한 지방에 터를 여는 조상이 되어 이제에 이르러 인구의 번성함과 말(馬)을 길러냄이 대개 3신인의 덕택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 후세에 자손이 혹은 바다에 떠서 이리저리 여러 곳에 흩어져 사니 세상에서 이른바 제주 고씨ㆍ제주 양씨는 모두 그 후손입니다.
삼성혈에서 솟아난 세 을나는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나물을 캐서 먹으며 이동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를 타고 온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각자 배필로 맞이했으며, 그들이 가져온 오곡종자와 송아지ㆍ망아지 등 육축으로 농경생활을 했다.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婚姻池)는 세 을나가 벽랑국의 공주들과 혼례를 올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혼인지제주의 탄생설화와 전설을 품고 있는 혼인지. 여느 관광지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제주에 가면 꼭 한번 찾아봐야 할 볼거리다.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한 뒤 점차 제 몫의 땅이 필요해진 세 을나는 각자 자기가 살아갈 터전을 결정하는 데 화살을 이용했다.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세 을나가 쏜 화살은 각각 일도ㆍ이도ㆍ삼도에 떨어졌고, 일도ㆍ이도ㆍ삼도동이 여기서 유래했다. 세 을나가 활을 쏘았던 장소가 바로 제주시 봉개동과 아라동에 걸쳐 있는데, 제주도 말로 쌀손장오리(射矢長兀岳, 사시장올악)라고 한다. 세 을나가 쏜 화살이 박힌 돌을 모아둔 곳이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삼사석(三射石)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제주 시조 탄생 이후 바다를 통해 발달한 외래문화가 유입되었고, 비로소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때까지가 제주도의 신화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제주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삼국시대부터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백제 문주왕 2년(476)에 탐라국이 백제에 토산물을 바치자 벼슬을 주었다.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정벌하려고 지금의 광주에까지 이르자 탐라국의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사죄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 문무왕 2년에 탐라국의 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그로부터 독립국이었던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