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런 못난이를 가졌을까?>
영화 “타이타닉(Titanic)”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타이타닉은 1912년 4월 15일에 발생했던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를 각색하여 1997년 개봉한 미국의 로맨스 영화로서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감독을 맡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와 케이트 윈슬릿(Kate Elizabeth Winslet)이 주연을 맡았다. 타이타닉호가 침몰될 당시 38세였던 타이타닉호의 이등 항해사 찰스 래히틀러(Charles Rehitler)는 구조된 승객들을 책임지기 위해 선원 중 유일하게 함께 구조된 승무원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찰스 래히틀러는 타이타닉호의 참사 내용을 담은 17페이지짜리 회고록을 썼다. 다음은 그 17페이지 분량의 회고록을 짧게 요약한 것이다.
***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선장이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 승객들이 가족과의 이별 대신 배에 남아있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여성과 아이들은 이리 오세요!”라고 외쳤지만 가족을 버리고 혼자 구명보트에 오르려는 여성과 아이는 극소수였습니다. 첫 구명보트가 바다로 내려가자 저는 갑판 위에 있는 한 여성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어서 구명보트에 오르세요” 그녀는 뜻밖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요, 저는 배에 남겠어요.” 이 말을 들은 여성의 남편이 “그러지 말고 어서 타요. 여보!”라고 말하자 여성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혼자 가지 않겠어요. 당신과 함께 이 배에 남을 거예요.” 그것이 제가 본 그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 부자였던 아스토리아 호텔(Astoria Hotel) 창업자 존 애스터(John Jacob Astor)는 임신 5개월 된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며 갑판 위에 앉아, 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가(cigar, 呂宋煙)를 들고 있으면서 멀리 가는 보트를 향해 외쳤습니다. “사랑해요. 여보!” 그때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 명이 애스터(Astor)에게 보트에 타시라고 권하자 애스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생존자를 수색하던 승무원이 배의 파편들에 의해 찢겨진 애스터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타이타닉호 같은 배를 10대도 만들 수 있는 재산을 가진 대(大)부호였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신사도를 지킨 사나이의 위대한 선택이었습니다.
성공한 은행가였던 구겐하임Guggenheim)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처럼 죽겠습니다.” 구겐하임이 아내에게 남긴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
미국 메이시(Macy’s)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Strauss)”는 세계 2번째 부자였습니다. 그는 어떤 말로도 아내 로잘리(Rosalie)를 설득해 구명보트에 태우지 못했습니다. 아내 로잘리는 “저는 당신이 가는 곳에 항상 함께 갔어요. 세상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라며 남편을 두고 구명보트에 오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8번 구명보트의 책임 선원이 67세의 세계 2대 부자 남편 슈트라우스에게 “누구도 어르신이 보트를 타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라며 구명정에 탑승할 것을 권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슈트라우스는 단호한 말투로 “다른 남성들보다 먼저 보트에 타라는 제의는 거절하겠습니다.”라며 생사의 순간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63세의 아내 로잘리의 팔을 잡고 천천히 갑판 위의 의자에 앉아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현재 뉴욕 브롱크스(Bronx) 광장에는 슈트라우스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는데 그 기념비에는 “바닷물로도 침몰시킬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남편과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리더파스는 남편을 꼭 껴안고 혼자 살아남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남편은 주먹으로 그녀를 기절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명보트 안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재가(再嫁)하지 않았으며 남편을 그리워했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었습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이었던 호소노텍스트는 여장(女裝)을 한 채 여성과 어린이들로 채워진 10번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그는 귀국 후 바로 퇴직당했습니다. 모든 일본의 방송 언론과 여론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그는 십여 년 뒤 후회와 수치로 가득 찬 삶을 마감했습니다. ***
위의 회고록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낄 것이다. 타이타닉호의 주요 승무원 50여 명 중 구조를 책임졌던 이등 항해사 래히틀러 외에는 모두 침몰하는 배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우리는 10년 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반바지 속옷 차림으로 배를 빠져나오는 선장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왜 이런 못난이를 가졌을까? 우리의 선비정신과 신사도는 어디 갔단 말인가? 오늘도 자기만 옳다고 떠들어대는 제 잘난 국회의원들과 고위관료들, 그리고 종교인들을 보고 있자니 그 못난이가 결코 돌연변이처럼 이유없이 생겨난 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