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lam 8-이슬람문명의 개화】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틀이 형성된 이슬람 공동체는 메카로부터의 이주 10년 만에 다시금 메카로의 입성을 이루게 되며, 이것을 계기로 이슬람은 아라비아
전 지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발판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이렇게 뭉쳐진 이슬람 국가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이집트를 되찾고 시리아, 페르시아, 팔레스타인으로 영역을 넓혀 갔으며(AD661년)
남쪽으로는 인도를, 그리고 중국의 접경 지역과 북 아프리카 지중해 전역과 스페인 일부까지 그 영향하에 들어가게 된다.( AD750년)
11세기 이슬람 제국
이러한 영토 확장의 결과로 AD750년부터 AD1085년경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쳐 이슬람 문화는 급속도로 퍼져 나가게 된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이름도 아라비아어에서 유래된 것이니 당시 그들 세력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펴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고 문화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그리 빨리, 그리고 어떻게 적은 마찰 속에 그 모든 것을 이루고 지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슬람의 영토 확장이 여느 역사서에서 소개되었듯이, 약탈과 파괴를 동반한 수탈적 성격의 전쟁과는 다른 성격을 띠었을 뿐만 아니라, 점령 후 그들이 피정복민들에게 취했던 정책이 피정복민의 문화, 종교, 기타 사회 전반에 걸친 말살 정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토 확장의 과정을 통해서 이슬람 교도들이 선택했던 것은 이방의 문명에 대한 파괴와 탄압이 아닌 수용과 존중이었다.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들은 피정복자들의 선택권을 최대한 존중하였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발전을 위해서는 파괴보다는 화합이 필요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식민 정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앞서야 하는 것은 그들의 포용 정책이 10세기 이슬람 문명이 찬란하게
꽃 필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라비아 반도에는 새로운 세기가 동트고 있다. 찬란한 그들의 문명기가 동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들에게는 더 이상 전쟁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는데 그건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
(실제로 10세기말에는 750년을 전후로 해서 형성된 그들의 영토가 거의 그 규모면에 있어서 달라 진 것이 없었다.)
9C 부터 그들이 시작한 것은 바로 번역 작업이었다.
아라비아인들에게는 이방의 철학서나 지리서, 의학서 등에 담긴 지혜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눈이 있었던 것이다.
번역된 책들에는 철학서, 지리서, 의학서 뿐만이 아니라 산술(Arithmetic)이나 기하학, 천문학에 관한 것도 있었으며 음악이나 문학 서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의학서의 경우는 번역 작업의 초기부터 이루어졌으며,번역 과정을 통해 이들은 그리스 철학(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사상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중세 유럽의 과학 문명이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문명이 중세 유럽의 문명 발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드물다.
우리가 이슬람 문명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은 전반적인 흐름으로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부분적이며 편파적이다.
만약 이슬람문화가 없었다면 기독교 세계,즉 유럽의 문명은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11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동안 십자군전쟁을 치루면서 기독교도들은 당시 훨씬 앞서 있던 이슬람문명을 배워 유럽에 전했고 이로써 유럽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머릿속으로만 우주를 다뤘지만 아랍인들은 모든 것을 실험과 실습을 통한 증거에 바탕을 두고 연구했고 그들의 과학적방법이 현대과학의 기틀이 되었다.
황금을 좋아했던 아랍인들은 연금술로 황금을 만들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어도 결국 실패했지만 덕분에 물리,화학 분야가 발전해서 갖가지 합금기술이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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