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세운 나라-발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역사지식의 전부다. 우리 상고
사의 한 시대를 차지하고 있던 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언제까지 존속했으며 강역은 어디
에서 어디까지였는지 모르고 지내왔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1748~1807)도 우리 민족의 그러한
무관심이 못마땅했던지, 정조 8년(1784)에 편찬한 『발해考』 서문에서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은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조정에서 발해 역사에 관심을 가진 자는 아
무도 없었다. 그러나 유득공은 차마 당조(當朝)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없어서 고려만 나무랐다.
발해(698~926)는 고구려가 멸망(668)한 지 30년 만인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어 고려가 건국(92
8)되기 직전까지 무려 228년 동안이나 존속한 대제국이었다. 유득공은 『발해考』에서 통일신라(668
~935)와 발해를 한꺼번에 일러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빗댄
용어다. 그러나 10세기부터 유득공이 살던 18세기까지 아무도 발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남아있는 사료가 거의 없었다. 중국도 요즘에 와서야 소위 ‘동북공정’ 운운하며 발해를
중국의 고대국가라고 우기지만, 사료가 남아있지 않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유득공도 사료를 구할
수 없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에서 겨우 줄기를 찾아 책을 쓰기는 했지만, 차마 낯이 뜨거워
『발해사』라고는 못하고 간단하게 살펴본다는 뜻으로 책의 이름을 『발해考』라 했던 것이다.
유득공은 생원시와 진사시를 거쳐 정조 3년(1779)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개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규장각에 검서(檢書) 직을 신설하여 유능한 인재를 검서관에 제수했는데, 특히
박제가‧서이수‧유득공‧이덕무 등 젊은 관리 4명은 사검서라고 불리며 개혁정책에 크게 이바지했다.
정조는 유득공의 재주를 알아보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자(庶子) 출신인 그를 손수 발탁했다.
유득공 집안의 남자들은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다는 이유로 대대로 과거에도 응시하지 못하는 불
이익을 감수해왔다. 유득공은 가평군수를 비롯하여 외직에 나가 있을 때도 정조가 부르면 달려와 겸
직하고 있는 검서 소임을 수행하고 돌아가곤 했다.
발해의 전성기는 제2대 무왕과 제3대 문왕 때로서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 시작하면서 주변국과 교유
했다. 특히 왜국과 가장 활발하게 교역했다. 이때 당나라에서는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높여 부르며
선린정책을 펼쳤다. 발해의 행정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토는 동쪽으로는 현 러
시아의 연해주에서 서쪽으로는 현 중국의 요동반도를 지나 랴오허강까지 광활한 지역을 통치했다.
남쪽으로는 대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발해에 관한 자료는 우리나라 사서보다는 중국 쪽 사서에 더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유득공은 주로
『구당서』와 『신당서』의 「발해 편」을 참고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삼국사기』『고려
사』『동국통감』 등 고려 및 조선의 사서와 왜국의 『속일본기』『일본일사』 등 모두 22책에 있는
발해 관련 자료를 인용했노라고 밝혀놓았다.
『발해考』는 왕들을 다룬 <君考>, 신하들을 다룬 <臣考>, 지리를 다룬 <地理考>, 관직을 다룬 <職
官考>, 의식과 복장을 다룬 <儀章考>, 발해에서 나는 물산을 다룬 <物産考>, 발해에서 사용하던 언
어를 다룬 <國語考>, 발해가 왜국에 보낸 국서를 다룬 <國書考>, 발해의 뒤를 이은 여러 국가를 다
룬 <屬國考> 등 총 9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다보니 국역하여 현대 활판으로 제작하
면 46배판 100쪽에도 못 미치는 빈약한 분량이다.
<君考>에서는 대조영의 부친인 대걸걸중상부터 제14대 대인선까지 15왕과, 발해의 뒤를 이은 홍료
국 및 오사성국의 왕을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 제14대 왕은 대위해였고, 제14대 왕으로 기록되어 있
는 대인선은 제15대 왕이었다. 유득공이 『발해考』를 집필할 때는 제14대 왕에 관한 사료를 찾지 못
해서 빠졌다. 가장 많은 사료를 확보한 왕은 건국자 대조영과 발해의 전성기를 구가한 무왕 및 문왕
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차지한 분량 역시 3쪽을 넘지 못한다.
<臣考>에는 무왕의 동생 대문예를 비롯하여 총 77명의 신하를 소개한다. 이 가운데 23명이 대씨 성
을 가진 왕족이다. 고씨 성을 가진 고구려 왕족도 17명 등장한다. 고구려 왕족들도 건국 및 통치 과정
에 참여했기 때문에 우대했다. <職官考>에 의하면 발해의 행정조직은 당나라 제도를 본떠서 3성(선
조성‧중대성‧정당성) 6부(충부‧인부‧의부‧지부‧예부‧신부)로 구성되어 있다. 3성의 관직도 소개되어 있
는데, 훗날 고려는 발해의 제도를 본받아 관직명만 바꾼 3성 6부의 행정체계를 갖추었다. 발해와 고
려의 3성은 조선에 들어와 의정부로 통합되었다.
<儀章考>에는 품계에 따른 관복 규정이 명기되어 있다. 관직은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여 정과 종으로
된 9등급 체제로 구분했는데, ‘품’ 대신 ‘질’이라고 명명했다. <屬國考>에는 발해가 멸망(926)한 뒤인
938년 발해 유민에 의해 정안국이 건국된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정안국은 986년 거란에 의
해 멸망했다. 중국 측 사서에 의하면 정안국 외에도 ‘오사성 발해국’ 등 발해를 계승하여 몇 개 나라가
명멸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1029년에는 발해 왕족 출신 대연림이 요나라 라오양 지역에 흥료국을 세
웠다. 이후에도 발해 유민들은 줄기차게 발해 부흥을 꾀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다한증의 여름철 나기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걸어서 다니는것 조차 제대로 할수 없는 곤욕 입니다.다행스럽게 어제,오늘 아침은 선선하여 서둘러 동네길 산책에 나섭니다. 실내 자건거 페달 밟기등 몇가지 운동을 대신 하지만 그냥 자연에서 걷는것 보다 신명이 나지 않으니 맑은 공기가 주는 고마움이 이런것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