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 21일 금식 암송기도 팔일째>
1.
<성경암송기도요?>
21일 조국을 위한 금식과 암송기도에 대하여 부족하지만 그 때 그 때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face book 에서 나누고 있는데, 의외로 성경암송기도에 대해 개인적으로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네요.
여러분들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질문하신 분의 질문과 답을 좀 달았습니다. 우선 간단한 글 부터 올립니다.
2.
금식 8일째, 앉아 있거나 일어서 있을 때 기운이 없다. 누우면 참 편하다. 누워 있는 시간 내내 참 편하다. 계속 누워 있고 싶다.
못 먹어 가죽만 남은 북한의 어린이들이 왜 누워 있는 모습들이 많은지... 간단한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체험 되어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아이들의 마음이 내게 잘 전달이 된다. 그래서... 기도가 나온다.
“주여 ~ 그 아이들을 먹이소서. 그들을 먹이는데 우리가 쓰임받게 하소서.”
“북한 정권 김정은부터 핵심 인물들에게 성령님께서 습격하시사 잘못 살아 왔음을 갑자기 깨닫게 하시고 북한 주민들을 먹이게 하소서.”
”요즈음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선교사를 한 번도 만나 보지도 못하고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모슬렘들의 꿈에도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수많은 모슬렘들을 돌이키시지 않습니까? 그 일들이 북한에 고위간부들에게로부터 왕창 일어나게 하소서.”
“그러나 그런 방식이 하나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어찌하든지 북한을 새롭게 하셔서 북한을 먹이시옵소서. 아버지 ~~~~~~ ”
“그리고 대한민국에도 구제와 긍휼의 역사가 더 왕성하게 일어나게 하소서”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남북한에 전파되어 죽어하는 영혼들이 부활 생명 얻게 하소서! 그리하여 재림 예수님께 연합되는 신부되게 하소서.”
3.
금욕주의, 율법주의적 금식은 오히려 독이 된다.
금식, 밥 안 먹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죽겠다는 것이다. 확실히 밥 안먹고 육체를 서서히 죽여가는 만큼 영이 충만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금식해서 육이 죽어 영이 충만해 지는 것이 아니다.
금식할 때 유의 사항,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갈 2:20)
이미 죽은 자아를 믿는… 믿고 행(금식)하는 금식이 되어야 복음적 금식이다.
생각을 비우며 자아를 내려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경암송으로 생각을 비우며 내 안의 성령 바라보는 기도도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 이미 죽었으니, 죽은 자아를 믿고 생각을 십자가로 넘겨 버리며, 내 안의 생명의 성령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님을 바라보는 것이니 이 기도도 복음적 기도다.
금식이나 기도나 성경암송이나 성경읽기가 율법적 행위가 되면 율법과 육신과 자아에 더 묶이게 되어 사단이 박수를 치게 된다. 조심하자.
갈라디아서 (2:20, 3:1~5)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과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함께 못박힌 것) 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4.
<방언, 성경읽기와 암송기도의 관계>
Q
목사님,귀한말씀 감사합니다!
새벽에는 방언기도만 하고 있고 낮에 시편을 읽으며 그 말씀으로 기도하며 은혜가 많습니다. 조언을 구합니다.
암송기도가 제가 시편읽으며 하는 기도와 어떤 차이가 있나요?한절 한절 암송될때까지 읽으며 넘어가다보면, 앞에 암송했던 부분은 잊혀지게되서요ㅎ
A
샬롬 ^^ 부족한 종에게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언기도는 참으로 유익합니다. 하지만 말씀에 base 를 두지 않으면 온전치 못합니다.
성령님께서 쓰신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canon (정경, 규범, 원칙, 표준, 기준, 근본 원리) 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암송기도를 기초에 두시면서 방언기도를 병행하시면 더 깊은 방언기도가 나올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고린도 전서 14장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우리 생각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왜 성령께서 주시는 좋은 선물 중 하나일까요? 방언은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생각이 알아챌 수 없다는게 당연하죠. 바로 그 알아듣지 못하는 영의 언어인 방언도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게 하는 좋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단순말씀 암송으로 생각을 비우며 성령님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런데 어떤 분들이 방언에 대하여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성도가 어떤 주의 종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성도 : 전도사님, 방언은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해요.
전도사 :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거리를 집중하면서 방언을 하세요. 그러면 응답될 것입니다.
이러한 조언의 영향을 받아 문제를 생각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거나 울면서 방언기도를 시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시작부터 울면서 방언하면서 그것이 성령의 탄식으로 착각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은 그냥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 뿐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탄식은 아주 깊게 방언으로 성령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 어느 순간에 영의 비밀이 풀려지면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신비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방언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인가 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그 방언으로 그 문제를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을 비우며 자아를 내려놓고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을 예배하며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을 통해 오히려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 문제를 성령께 맡기는 비결입니다. 방언은 영의 언어이므로 성령님만을 바라보는 좋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어떤 영의 언어일까 짐작을 할 수 있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5,46)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방언은 하나님을 높이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방언이 하나님을 높이는 언어인데…방언을 하며 하나님을 높이면서 동시에 문제거리를 생각하며 방언 시작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울면서 “그 문제를 하나님, 어떻게 해 주세요” 라는 태도,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상태가 아닌 것이지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문제를 호소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마치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넌센스라는 것을 말하는 것 뿐입니다.
실제로 과학적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문제거리를 생각하면서 방언을 하게 했을 때 뇌파검사를 했는데 그 때 걱정파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베타파 감마파가 상승했고 평강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알파파가 거의 제로였습니다. 반대로 오히려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방언을 하며 성령님을 찬양하듯이 성령님만을 집중했을 때 평강파장 알파파가 상승하고 걱정, 염려 파장인 베타파 감마파가 거의 제로가 되었습니다.
형제님께 권면합니다. 시편 읽기를 아침에 하십시오. 그냥 읽기보다는 암송이 더 좋습니다. 지금과 같은 유형의 시편읽기는 낮에 그대로 하십시오. 그렇다면 아침에 암송기도는 다른 성경부분을 채택하는 것도 좋습니다. 신약 성경 중 짧은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성경에 도전해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아침 암송기도는 어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도 내려놓는 차원의 암송이어야 하고 그 암송으로 성령님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매일 새 부대가 되어야 새 포도주를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히 하나님을 많이 안다고 하는 분들 일수록 어제의 근사한 옛 부대를 가지고 새 포도주를 마시려하는 경향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바로 암송으로 내 머리를 비운다는 것은 그 근사한 옛 부대를 버리고 성령님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며 새포도주(새 젖)를 사모하는 것이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성경 암송으로 생각을 어린아이 같이 비우며 새 부대로 나아가 새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성령님만을 바라보기”…. 이게 기도의 본질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지혜가 있습니다. 내 생각을 어린아이와 같이 백지상태와 맑은 심성으로 만드는 도구가 암송이다? 와우…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비우는 도구로써 암송하니 깨끗한 상태에서 성경이 영, 혼, 육에 각인되어져서 좋고 성령님을 더 바라보게 되어서 좋으니 정말 일석이조인 거죠.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방법으로 암송해야 합니다.
특별한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하고 쉬운 방법입니다.
이 부분에서 성경을 쉽게 까먹는 것에 대한 답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한 구절로 예를 들겠습니다.
“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2.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3.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한문장을 의미단위별로 끊어서 아주 여러번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방법일 뿐이겠지요. 그러나 이 방법을 16년동안 사용하면서 성령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고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암송이 왜 중요하고 암송을 왜 기도에 적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저의 그 삶을 겸손히 나누는 차원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원역사(창세기 1~11장) 와 구약(율법-모세오경)을 맡았던 유대인들의 방법과 일치하는 방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 많이 놀랐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성경을 보존해 온 결과 우리에게 이 글씨 성경이 손에 들려져 있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첫번째 짧은 의미 단위가 끝났으면 그 다음 짧은 의미 단위로 넘어가는 식으로 합니다. 그리고 또 다음의 짧은 의미 단위로 진행합니다. 그리고 나서 한구절 전체를 이어보면 쉽게 이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한 구절이 끝나면 그 다음 구절도 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두번째 구절이 끝났을 때 첫 구절 두번째 구절(1,2절)을 이어서 반복합니다. 다시 세번째 구절을 처음과 같은 요령으로 합니다. 또 다시 첫구절 두번째 구절 세번째 구절 전체(1~3절)를 이어서 반복합니다. 여러번 반복하며 성령님을 바라보면 좋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구절이 끝나면 그 다음 세구절(4~6절)도 같은 요령으로 합니다. 이 때 지나간 첫 세구절(1~3절)을 까먹을 까봐 염려하며 그쪽으로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살짝 까먹게 되는게 정상입니다. 두번째의 세구절(4~6절)을 시도할 때 앞의 세구절(1~3절)에 미련을 두고 자꾸 그 구절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아예 그것은 내버려 두고 두번째의 세구절(4~6절)에 집중하십시오. 두번째의 세구절이 같은 방식으로 암송되어지고 나면 그 다음 세번째의 세구절(7~9절)을 같은 방식으로 시도하십시오. 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의 여섯구절들(1~6절)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세번째 세구절(7~9절)이 끝나면 전체(1~9절)를 다시 암송하면서 살짝 까먹은 것들을 회복시키면 됩니다. 이 때 앞의 구절들을 까먹을지라도 전에 암송했던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금방 회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홉구절이 끝났으면 다음 아홉구절도 같은 방식으로 하고 나서 전체(1~18절)를 이어가며 약간씩 까먹은 구절들을 충분히 회복시키면서 그 다음 새로운 구절로 넘어갈 때까지 전체를 틀리지 않고 익숙해 질 때까지 반복합니다.
이런식으로 하여…한 장이 끝나면…한 장 전체를 몇번이고 반복해도 좋습니다. 입에서 술술술 나올정도로 반복하면 참 좋습니다.
중간에 다시 점검합니다. 암송하며 생각을 비우며 성령님을 바라보고 계신가요? 그것이 암송의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잠깐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조언을 드립니다. 조사 같은 것들(은,는,이,가) 즉, 토씨를 안틀리게 암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토씨가 희미해지면 복습이 어려워지고 복습이 어려워지면 암송이 싫어져서 쉽게 포기하게 되어집니다. 주의 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한 장이 끝나면 그 다음 장도 같은 요령으로 하십시오. 이 때 또 이전 장이 까먹어질 것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자연히 희미해집니다. 그냥 내버려 두시고 새로운 장에 집중하시다가 적당한 시기에 앞의 장을 다시 반복하며 복습을 하면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미 외운 부분은 정기적으로 수시로 다시 반복 반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장이 완성되면 앞의 장과 뒤의 장을 이어서 해 보십시오.
이 이론에 의하면 까먹는 부분에 대한 의문은 해결이 되었을 줄 압니다.
한마디로 살짝 살짝 까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까먹는 것을 보완하는 방법은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반복이며 복습입니다. 위의 원리로 반복과 복습만 충분히 하면 까먹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암송읽기 사이사이에 방언을 해 보십시오. 그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방언도 생각을 비우고 자아를 내려놓으며 성령님만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무 좋습니다.
형제님께서는 또 질문을 하셨지요….
“암송기도와 제가 시편을 읽으며 하는 기도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낮에 시편을 읽으며 그 말씀으로 기도하며 은혜가 많습니다.”
라고 질문을 하셨지요?
우선 말씀암송기도와 성경읽기는 다른 분야입니다. 물론 성경읽기도 나의 옛 부대 차원의 지식으로 무슨 은혜나 깨달음을 취하려는 것이 아닌, 단지 나의 생각을 비우며 자아를 내려놓으며 성령님을 바라보는 예배차원이라면 말씀암송기도와 성경읽기기도는 성령님을 바라보는 기도의 도구로써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낮에 시편을 읽으시며 기도하시는 데에 은혜가 있다는 부분이, 혹시 말씀을 읽으면서 읽혀지는 부분이 나, 가정, 이웃, 국가, 열방을 향한 어떤 적용점이 찾아져서 그 적용점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닌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말씀에 입각한 파워풀한 기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성경읽기와 기도도 너무나 파워풀하고 유익하므로 하시되 아침에는 하지 마시고 낮에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아침에 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말씀드리는 말씀암송기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진 뒤에 바로 이어서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기도의 유형과 제가 말하는 말씀암송기도의 유형은 다른 차원입니다. 한마디로 그 말씀을 가지고 적용점을 찾으며 기도하는 것은 뒷 단계에 할 기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제 강조점이 있습니다. 말씀에서 찾아진 적용점이 과연 새부대 차원에서 찾아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어제까지의 나의 지식과 경험 테두리인 옛 부대로서 찾아진 적용점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날 말씀 속에서 뭔가 깨달았다 하면서도 그것이 내 과거의 신학적 지식관점과 신앙적 경험관점에서 확인한 지식에 불과하지.. 그것이 새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과거의 나의 지식과 경험도 다 내려놓고 새 부대가 되기 위해 성령님만을 집중하는 기도를 9년동안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집중하던 중, 말씀 암송으로 모든… 모든… (모든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생각을 비우며 성령님만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에 놀라운 새로운 기름부으심을 체험하며 새부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선악과가 지식의 나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와가 열매를 먹었던 것은 자기 생각 즉 자기 지식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생각의 결과입니다. 하와는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해 보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선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며 예배의 대상입니다.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산다는 믿음이 있는 자라면 아침에 눈을 뜰 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믿고 충분한 시간 동안 바라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큐티 문화는 어떻습니까? 큐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침에 충분히 새 부대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을 인정하는 것은 간단하게 하고 곧바로 조용히 성경을 눈으로 읽으며 큐티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의 옛 가죽부대 차원에서 이해해서 적용점을 찾아서 믿어보려는 태도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편 1편 2절의 묵상이라는 단어가 “잠잠히 생각하다”는 뜻인데 이 번역은 틀린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하가”인데 그 뜻은 “소리를 내다” 이고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신 6:6) 그 성경을 암송으로 소리를 내며 기도하고 예배했던 것입니다.
형제님께서 시편(또는 다른 성경)을 아침에 읽으실 때 위와 같은 원리로 읽으십시오. 더 나아가서 암송을 권합니다. 암송이 또 다른 지식을 채우거나 암송하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생명의 말씀으로 성령님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목적으로 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새기름을 부으셔서 그 말씀 하나하나가 나의 옛 지식에 의한 해석이 아닌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영적 통찰력에 의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암송은 그 자체로써 성경지식이 단순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비우며 자아를 내려놓으며 성령님만을 바라보는 방법이 성경암송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제가 큰 소리로 “이 놀라운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했습니다.
질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형제님의 질문으로 제가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
출처: 지용훈 목사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yonghoon.jee.9
*지용훈 목사님의 위 글이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어서 이글을 공유하실때에는 출처를밝혀주시기를 부탁하셧습니다.
첫댓글 은혜의 나눔터에 올린 '성경을 암송하라'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BOKT/17757 지용훈 목사님 글을 읽고 특별히 지목사님이 암송하는 방법이 있으신가 해서 여쭈어보았더니 저 말고도 질문하신분들이 많아서 위의 글을 올려주셨습니다...아직 제가 먼저 읽지 못한채 올립니다만 중요한 글일거라 믿습니다...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