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강론>(2023. 9. 29. 금)(루카 12,15-21)
복음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먹고사는 문제’에 관해서,
구약성경 잠언 저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여기서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라는 기도는,
‘모든 일’이 다 주님의 손에 달려 있고,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내가 잘나서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내가 못나서 가난하게
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라는 말은, 인간의 나약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의 선한 의지보다 재물 속에 숨어 있는 마성(魔性)의 힘이
더 강해서,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본래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악한 쪽으로 가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라는 말은, ‘가난’은 극복해야 할
‘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재물이 없을 때에도 재물 속에 숨어 있는 ‘마성’은
인간을 악한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밖에 있는’ 재물의 악한 힘이 ‘내 안에 있는’ 욕망과 욕구를
자극해서 나를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청빈’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서 가난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어쩔 수가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그 경우에도 ‘재물 없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욕망과 욕구를 억제하는 일과
재물의 악한 힘을 물리치려고 노력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 노력 없이는 청빈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여기서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라는 말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 즉 ‘하느님의 것’입니다.
재물이든지 시간이든지 목숨이든지 간에......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사랑, 겸손 같은 ‘성덕’뿐이고, 세속의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은 모두 버려야(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인데도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악착같이 움켜쥐고 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라는 말은, 탐욕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지 노동을 비롯해서
인간 사회의 건전한 경제 활동을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6-20)”
자기 것이 아닌 것들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재물도, 목숨도, 시간도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들을 언제 어떻게 되찾아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이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은 것이 세 번째 어리석음이고,
이웃에게도 하느님께도 감사드리지 않는 것이 네 번째
어리석음이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다섯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여기서 ‘어리석다.’ 라는 말은, ‘멍청하다.’ 라는 뜻이 아니라
‘악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악한 자’, 즉 ‘죄인’입니다.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하느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차지하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악한 부자를 곧바로 처벌하지는
않으시고,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밤에’ 라는 말은, 그가 회개하도록
‘몇 시간’의 여유를 그에게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얻은 ‘몇 시간’은,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이고
유일한 기회입니다.
[출처] 한가위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