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무슨 김무침을 그렇게 많이 가져왔어?'
건물 식당에서 식판에 점심을 퍼 가서 자리에 앉는데 사장님이 내 식판을 보고 한마디하신다.
난 요즘 음식을 가능하면 소식하려고 한다.
그건 나이 먹으며 기초대사량이 줄어드니 여차하면 칼로리 과잉이 되기 쉽기도 하거니와,
(몸무게 1kg이 풀코스에서 3분을 느리게 한다는 말이 전부는 아니고) 몸무게를 가볍게 해서
달리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하여 그렇기도 하다.
목표가 68kg 이내인데 지금은 70언저리다.
자유배식을 하는 식당에서 될 수 있으면 음식을 꼭 먹을 만치만 담으려 한다.
다른 사람이 공들여 지은 음식물을 편히 앉아 먹으며 버리기까지 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도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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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을 많이 먹으려 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무슨 철분, 비타민 등등이 많아 장수무병해서가 아니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전 다니던 그룹 계열사에 병유리 만드는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 직원들은 어디 가다가 나뒹구는 병을 보면 다 깨뜨려버린다고 했다.
그 병이 회수되어 재활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래야 하나라도 더 만들어 팔 수가 있으니.
내가 김을 먹어봐야 몇 장을 더 먹으랴마는 난 김을 보면 한 장이라도 더 소비하고자 한다.
누구를 위해서?
내 어릴적 김하던 고생을 생각하며,
또 지금도 고향에서 김을 하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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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다른 말로 해태(海苔)라고 한다.
해태라면 바다 이끼지만, 해초 즉 바다 풀의 일종이다.
영어로는 Sea-weed 그 또한 해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남해안에서 주로 양식이 되는데 그 이유가 있다.
김이 자라려면 반드시 간만의 차가 커야 한다.
그래야 하루중 일정 시간은 물에서 빠져나와 햇빛을 보고 또 바람을 맞을 수 있으니.
우리 고향도 천혜의(?) 지리적 적합성을 가지고 있어 오래전부터 김 양식이 주 수입원이었다.
달리 말하면 우린 두 발을 떼면서부터 그 김 만드는 현장에 발을 들여놔야 한다는 숙명을 짊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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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김은 ,
겨울에 한다.
바다에서 한다.
물을 많이 쓴다.
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 특성은,
'고생', '쌩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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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당연히 편하게 대량생산을 한다.
소위 자동화, 기계화.
하지만 옛날, 근 20년 전까지는 적어도,
사람 손으로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겨울 한철 고생해서 몫돈 만진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일년 열 달을 그 관련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노동은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고역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허리 한 번 펼 시간, 밥 한끼 앉아 먹을 여유가 없다.
겨울에 바다 뻘에 들어가 원초를 채취해 와,
잘게 도마에다 놓고 칼로 토막내고,
물로 씻어 풀어서,
발(장)에다 떠서,
건(조)장에다 일일이 말리고, -도중에 눈.비라도 오면 불난 호떡집 됨.
걷어서 떼고,
열장, 백장씩 묶고,
네모 반듯이 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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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대여섯 살이 되면 어김없이
어른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그 힘든 노역을 하며. 바다 멀리 있는
도시와 대처(大處)를 동경했다.
그리고 그 못난 부모의 숙명에서 벗어나리라는
꿈과 희망을 키웠다. - 지금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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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 우리집이 김을 마지막으로 한 건
내가 군대서 제대하고 복학을 할 즈음이었다.
그러니 80년대 초에 끝을 냈겠지.
부모는 늙어가고 그 산업도 규모화, 기계화가 되어가니 그만 둘 수밖에.
이후로 난 겨울 방학때 고향에 가서 김을 도울 이유는 없어졌다.
그리고 그 숙명의 고리에서 해방되었다.
부모는 그 숙명이 다인냥 받아들이며 먹고 살았지만,
난 그 궁벽한 곳을 떠나 대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겨울에 찬물에 손을 담그지 않고도 먹고 살 방도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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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있으면 설이다.
당시 김은 만생종(晩生種)이라 설 무렵에 초벌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봇짐에다 스무, 서른 톳(100장) 정도의 김을 해서 도시로 가지고 나가
초라한 설 장만을 하곤 했다.
난 일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먹만한 국광이나 홍옥 사과 한 알을 맛보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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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은 가도 추억은 남는가?
내가 한 장의 김을 이 자리에서 더 먹는다고,
김값이 올라가 고향 친구들이 부자 될 리가 없음을
난들 모를까.
하지만,
그럼으로써 간 날의 쓴맛의 추억을 되살려
오는 날의 단맛의 가치를 망각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BLUE
추신) 멍후의 계란 한 판 '한 판 시리즈' 편을 읽고 갑자기 같은 어릴적 가업(家業)이 생각났다.
첫댓글 향수에 젖어 조상님의 숨결을 회상케 하는구나!! 김을 만드는데 많은 공이 들어가는지 처음 알았다. 나도 많이 먹을께...
대개가 비슷하구먼. 부모의 잡에서 벗어난 시기나 방법들이... 우리집 장사가 망하고서야 비로서 명절을 명절답게 보냈지. 너가 맛보고 싶었던 홍옥, 국광 파는 일.ㅋ
일리가 있다. 떡집에서는 명절이 주금이지.
김발 하면 생각나는 향수가 무지 많타,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부지가 김을 뜨면 난 발장을 들어내고 지게로 지고가서 하시코와 건장에 말리고 모자라면 밭 엉덕에다도 말리고 꼬챙이에 찔리고 오후엔 김걷어내고 발장 추리고 김떠오고 ...ㅋ 통 뭔소린지???모르겠지
뭔소린지 대강 그림이 그려진다. 에휴~
파일럿도 완도니 나랑 똑 같겠구나. 경험의 공유->공감.
들기름에 재서, 굵은 소금 술술 뿌리고, 연탄불에 살짝 구워, 네모나게 짜른 후, 삼양라면 빈 봉지에 담아, 도시락 반찬으로 가져가면 부루조아 였는데..
그런 노고들이......어릴적 부터 워낙 김 을 좋아하는 나 때문에 우리집의 밥상엔 김이 떨어질 날이 없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오늘저녁에도 그 노고들 덕에 잘~먹었어.ㅎ~또 내 딸이 날 닮아선지... 식탁엔 살짝구운 김과 간장 종지가 항상~자리 하고 있지.^^*
나도 김없이는 밥 안먹어...열심히 먹어줘야지...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미역국보다 김국이 훨씬 맛있고 개운하다. 지금은 공업용 약품을 쓰기에 그렇지만...
김국 아네? 된장 풀어서. 김이 모락모락. 후루룩 마시면 속이 개운하지.
김국이라... 술먹고 아침에 입맛없을때 김을 살짝구워서 비벼넣고 소금으로 일단 간을 맞춘다음 간장 약간 붓고 참기름 한방울, 그리고 깨소금약간 뿌려서 먹으면 속이 시원한데 한번 해볼래
좋은 글.
어렸을때는 김 함부로 먹지도 못했구만 김톳채로 이불속에 꼼쳐놓고 먹었던 아스라히 옛기억이 명절다가오니 절로 숙여진다.
김 생산 때 일부 맹독(염산)을 쓰는 건 사실이다. 농사로 치면 농약. 내가 가르쳐 줄게. 무조건 12월 하순이나 1월 초까지 나오는 초벌 또는 두벌 생산 김을 사 놓고 먹어라. 약은 대부분 1월 하순부터 특히 2월에 친다. 알았제?
아녀! 지금은 염산쓰다가 걸리면 끝장이여. 같은동네 사람까지도 염산쓰면 바로 신고한데. 그러고 염산을 쓰면 안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