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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畿高等學校 제56회 同期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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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구) 6.25 와 나 宋興遠
썬샤인 추천 0 조회 237 11.06.22 16:57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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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6.22 19:55

    첫댓글 막걸리 얘기에서 누군지 짐작은했었지 .이글을 읽으면서자네의 등장을 확인하며 무척 반가웠지만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보니 뭐라 위로해야 할지... 이산가족이었다는걸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미안 하네. 동생들이라도 만날날이 오기를 기원하네.

  • 11.06.22 21:16

    6.25 당시 불과 10살이였던 썬샤인님이 그렇게도 자상하게
    전쟁 발발 전후를 잘 알고 있다는 기억력에 새삼 놀라우이.
    나도 서울 신당동 장충국민학교때였고 1.4 후퇴때 부산으로
    피난갔다 휴전 되던해에 상경해서 경기에 입학했지.
    오늘에야 이산가족이란 것을 알고 내 처지와 같다는걸.......
    지금 현 정세로 봐선 만남이 어느때가 될런지 요원하네.

  • 작성자 11.06.23 08:55

    그러게 말일세. 나이는 자꾸 먹어가는데 언제 만나게 될른지....
    6.25가 다가오니 새록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본것이네만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것 아닌가?

  • 11.06.23 10:13

    천진난만했던 시절의 눈으로 그 시절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뜻해지네.
    하늘이 무심치 않으면 언젠가는 만나지겠지.
    나도 몇 년 전 북한을 탈출한 사촌 동생을 연길에서 만났었는데 한국으로 데려올 준비하는 동안에 그만 공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간 후로는 소식 두절이라네.
    육이오는 김씨네 일가가 죄값을 치뤄야 마무리가 시작될 것 같네.

  • 11.06.23 12:21

    난 당시 만리동 고개 서쪽 산비알에 있는 소의 국민학교를 다녔지. 우리도 6.25 땐 피난을 못가서 서울서 피해다니다 1.4 후퇴때 피난을 갔었구.
    참 슬픈 사연이구먼. "아 ~ 아 ~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작성자 11.06.23 17:50

    밴아찌 어느새 캐나다로 가셨나? 잘가라는 말이라도 하려고 전화했는데 통화가 안되었어.....
    소의국민학교라면 샌디에고에 있는 규서(정규서)랑 같이 다녔겠네.

  • 11.06.23 21:27

    한달간 빌린 쎌폰이라 떠나기 전날 택배로 보내서 불통이였소이다.
    언제 만나면 많은 시간 갖구 이야기 하며 바둑이나 싫컷 둡시다.

  • 11.06.23 14:55

    어머님이 미인 이시네요. 북한산 봉우리에 올라 북쪽을 향해 크게 아주 크게 외쳐 불러 보세요 어~머~니~~~ 흑

  • 작성자 11.06.23 18:04

    맞아요. 우리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지요. subo님 말대로 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어~머~니~~~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릅이여 어~머~니~~~~~

  • 11.06.23 19:25

    어흐흐

  • 11.06.23 18:55

    힘내세요. 하늘은 무심치 않으리다.

  • 작성자 11.06.23 19:27

    그러지요. 오랫만이라 반갑고 고맙고....

  • 11.06.23 23:04

    뒤늦게 읽었습니다.어머니와 어린 누이와 생이별 61년! 그런 기막힌 사연들을 언론 보도를 통해 가끔 접하기는 했지만 동문 친구의 기록으로 직접 읽으니 그 상처의 깊이를 더욱 실감 할 수 있군요,누가 말했던가. 전쟁의 가장 결정적 비극은 수많은 이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송흥원님의 가슴속 恨! 언제 어떻게해서 완전히 풀리려나. 김정일의 訃音으로?

  • 작성자 11.06.23 23:26

    뒷메님 그리고 여러 동문들이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하고 하니 정말 고맙고... 한편 부끄럽기도 하네요. 나보다 더한 사연도 많을텐데... 여하튼 앞으로도 힘내어 살겠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는 그날까지....

  • 11.06.25 15:24

    6.25사변 61주년를 맞이하여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가슴을 울리는 글을 올려주어 고맙네. 송흥원 학형의 이 글을 계기로 해서, 우리 동창회에서도 언젠가 우리들의 6.25체험에 관한 글들을 모아 출판하는 기회를 마련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기네.

  • 작성자 11.06.25 23:44

    그런 기회가 오길 기대합니다.

  • 11.06.25 20:00

    왜 아버님 고향이 황해도 였나???!!! 왜 판문점에서 휴전회담 (당시는 정전회담)을 해서 황해도가 북한쪽으로 가게 했나 !!
    정말 답답하군요.그런 이산의 아품이 있었는지 몰랐네. 동생분들은 아직 생존해 계실텐데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해서 만날 날을 기약해봅시다.

  • 작성자 11.06.25 23:39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모두 황해도 연안사람이지요. 열여덟 동갑나이에 결혼하여 스물에 날 낳으셨지요. 연안은 6.25전에는 38 이남이었는데 전쟁통에 이북으로 뺐겨 버렸습니다.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르지만 미국과 중국이 정전협상을 하면서 대략 38선 기준으로 가르기로 큰틀은 정해놓고 최종적인 선은 정전하는 순간의 전선으로 하기로 했는데 미군은 동부산악지대에 전략적인 가치를 두었고 황해도는 큰산이 없고(구월산이 제일 높음) 평지라서 전략적 가치가 적다고 보고 힘을 쏟지 않았지요. 이산가족 상봉신청은 벌써 했지만 1년에 300명정도씩 만나게 하면 천년이 가도 어렵지요. 그것도 지금은 중단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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