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가 일어난지 어언 61년이 됩니다.
1950년 6월 25일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맑은 날씨여서 당시 10살로 서울봉래국민학교 3학년이던 나는 동네 또래들이 집으로 와서 효창공원으로 올챙이를 잡으러 가자고 하는 바람에 집을 나서게 되었고 그때 내 여동생 英子(당시6살)가 저도 같이 가자며 따라 붙어 모두 함께 효창공원으로 갔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서대문구 만리동 2가 290번지 7호 언덕배기에 있는 적산가옥(일본사람이 두고 간 것을 아버지가 싼값에 매입)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효창공원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효창공원으로 가는 도중 큰길(서울역 대로)에서 확성기소리가 들리고 자동차들이 내 달리는 모습이 보이고 하여 우리는 올챙이잡기도 잊어버리고 모두 남영동 쌍굴다리를 지나 대로로 나갔습니다. 확성기에서는 휴가간 국군장병은 빨리 귀대하라는 소리가 반복 들리고 군인들을 실은 차들이 서울역 쪽으로 달리는 것이 보였고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이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통에 동생 영자를 잃어 버렸다가 한참만에 다시 찾아 서둘러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 와보니 당시 서울역 철도국에 다니시던 아버지(宋順烈)와 친척이 되는 옆집 하석이 아버지랑 어른들이 모여 라디오방송을 듣고 계셨고 38선에서 전쟁이 났다는 등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멀리서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고 포성은 점점 가까워 지더니 마침내 6월 28일 새벽에는 북괴군의 탱크가 만리동 고개로 밀어닥쳤고 딱궁총을 멘 인민군(북괴군)병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즉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고만 것입니다. 이때 까지도 국군이 잘 싸우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정부의 발표만 믿고 있던 아버지와 옆집 하석이 아버지는 남으로 피난갈 기회도 놓지고 말았습니다. 삽시간에 붉은 천지가 된 서울은 인민군과 내무서원과 남로당원들이 설쳐대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하고 불안하고 흉흉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일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황해도 연안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우리 가족은 할머니(金得賢)와 아버지, 어머니(睦貞根), 누이동생 둘(宋英子, 宋貞男) 그리고 나까지 모두 여섯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황해도 연안까지는 300리길로 요지음 같으면 차로 한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그때는 걸어서 사흘이나 걸리는 먼 거리 였습니다. 서울집을 비워 놓고 마차 두 대를 사서 당장 쓸 가재도구를 싣고 마차에 걸터 앉거나 걷거나 하면서 사흘만에 연안 (연백군 봉서면 소아리 490번지)큰 아버지(宋鳳烈)댁에 도착하여 피난살이를 시작했습니다. 6.25전에는 연안은 38이남으로 남한땅이었고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마을로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공산주의는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그야말로 순박한 농민들이 사는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6.25이후에는 여기도 공산주의 바람이 몰아쳐 지주들은 땅과 재산을 뺏기고 경찰관이나 군인들은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까지도 내무서에 끌려가 매맞고 죽고 하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편 낙동강까지 밀려갔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대반격이 시작되었고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은 적에게 뺏긴지 석달만에 도로 탈환하는 9.28수복이 된 것입니다. 서울수복에 이어 국군과 유엔군은 맹렬한 기세로 적을 몰아쳤고 원산과 진남포상륙으로 적의 퇴로를 위협하고 드디어 국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의물을 떠다 이승만대통령에게 바치는 등 한반도는 통일의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9.28수복으로 서울을 탈환하자 고향에 있던 아버지는 빨리 직장(철도국)에 복귀해야 했고 나는 학교에 복학해야 했고 해서 할머니까지 세 식구는 배를 타고 교동으로 해서 인천으로 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고향에 있던 어머니는 마침 네 번째 아이(아들--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하여 平遠이라 이름 지음)를 낳은 직후였고 연안에서 서울까지 오는 기찻길(황해남부선)이 폭격으로 다 끊겼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되면 기차타고 서울로 온다고 하고 누이동생 둘과 사내동생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때 어머니와 동생들과 헤어진 것이 오늘날까지 영영 생이별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개입하고 인해전술로 밀어 부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1.4후퇴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머니와 나는 먼저 여주의 친척집으로 걸어서 피난가고 아버지는 직장의 명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었습니다. 그 뒤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남으로 피난갔던 사람들은 도로 서울로 왔지만 황해도 고향에 있던 어머니와 동생들은 휴전선에 가로막혀 영영 서울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았던 1952년에서 1953년 사이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나오려고 사람을 사서 바닷가에 몰래 배를 대 놓고 들여 보냈는데 일이 안되려고 그만 해안 초소에서 발각되어 보초가 총을 쏘니까 그 사람은 업고 있던 큰 여동생 영자를 내팽개치고 자기만 도망가고 어머니는 둘째 정남을 업고 뛰어 도망가고 영자는 혼자 버려져 밤새도록 울다가 다음날 날이 밝아 어머니가 다시 가서 찾아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남동생 평원은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머니는 감시와 핍박이 심해져서 큰아버지댁에 못 있고 친정동네로 들어 갔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모두 풍문으로 들은 것이고 그 이후 소식은 오늘까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돌아가셨는데 할머니 병세가 위독하여 얼마 못 사실 것 같으니까 아버지의 누님(즉 나에게는 고모님)은 부랴부랴 아버지에게 재취할 것을 권했고 할 수 없이 아버지는 현재의 어머니를 부인으로 마지 하셨습니다. 현재의 어머니는 일남 3녀를 낳으셨고 아버지는 2005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시고 죽전에서 남동생과 같이 사십니다. 나는 지금 집사람과 아들, 딸 하나씩 두고 있습니다.
6.25때 헤어진 어머니는 지금 살아계시면 91세이시고 누이동생은 각각 67, 65세가 됩니다.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 사진은 6.25나던 해 봄에 덕수궁 분수대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한 장 뿐입니다. 내 방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고 있지요. (사진설명; 어머니 아버지;좌로부터 정남 나, 영자)

6.25 61주년을 맞이하여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이산가족이 재회의 기쁨을 누리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고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댓글 막걸리 얘기에서 누군지 짐작은했었지 .이글을 읽으면서자네의 등장을 확인하며 무척 반가웠지만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보니 뭐라 위로해야 할지... 이산가족이었다는걸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미안 하네. 동생들이라도 만날날이 오기를 기원하네.
6.25 당시 불과 10살이였던 썬샤인님이 그렇게도 자상하게
전쟁 발발 전후를 잘 알고 있다는 기억력에 새삼 놀라우이.
나도 서울 신당동 장충국민학교때였고 1.4 후퇴때 부산으로
피난갔다 휴전 되던해에 상경해서 경기에 입학했지.
오늘에야 이산가족이란 것을 알고 내 처지와 같다는걸.......
지금 현 정세로 봐선 만남이 어느때가 될런지 요원하네.
그러게 말일세. 나이는 자꾸 먹어가는데 언제 만나게 될른지....
6.25가 다가오니 새록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본것이네만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것 아닌가?
천진난만했던 시절의 눈으로 그 시절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뜻해지네.
하늘이 무심치 않으면 언젠가는 만나지겠지.
나도 몇 년 전 북한을 탈출한 사촌 동생을 연길에서 만났었는데 한국으로 데려올 준비하는 동안에 그만 공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간 후로는 소식 두절이라네.
육이오는 김씨네 일가가 죄값을 치뤄야 마무리가 시작될 것 같네.
난 당시 만리동 고개 서쪽 산비알에 있는 소의 국민학교를 다녔지. 우리도 6.25 땐 피난을 못가서 서울서 피해다니다 1.4 후퇴때 피난을 갔었구.
참 슬픈 사연이구먼. "아 ~ 아 ~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밴아찌 어느새 캐나다로 가셨나? 잘가라는 말이라도 하려고 전화했는데 통화가 안되었어.....
소의국민학교라면 샌디에고에 있는 규서(정규서)랑 같이 다녔겠네.
한달간 빌린 쎌폰이라 떠나기 전날 택배로 보내서 불통이였소이다.
언제 만나면 많은 시간 갖구 이야기 하며 바둑이나 싫컷 둡시다.
어머님이 미인 이시네요. 북한산 봉우리에 올라 북쪽을 향해 크게 아주 크게 외쳐 불러 보세요 어~머~니~~~ 흑
맞아요. 우리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지요. subo님 말대로 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어~머~니~~~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릅이여 어~머~니~~~~~
어흐흐
힘내세요. 하늘은 무심치 않으리다.
그러지요. 오랫만이라 반갑고 고맙고....
뒤늦게 읽었습니다.어머니와 어린 누이와 생이별 61년! 그런 기막힌 사연들을 언론 보도를 통해 가끔 접하기는 했지만 동문 친구의 기록으로 직접 읽으니 그 상처의 깊이를 더욱 실감 할 수 있군요,누가 말했던가. 전쟁의 가장 결정적 비극은 수많은 이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송흥원님의 가슴속 恨! 언제 어떻게해서 완전히 풀리려나. 김정일의 訃音으로?
뒷메님 그리고 여러 동문들이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하고 하니 정말 고맙고... 한편 부끄럽기도 하네요. 나보다 더한 사연도 많을텐데... 여하튼 앞으로도 힘내어 살겠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는 그날까지....
6.25사변 61주년를 맞이하여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가슴을 울리는 글을 올려주어 고맙네. 송흥원 학형의 이 글을 계기로 해서, 우리 동창회에서도 언젠가 우리들의 6.25체험에 관한 글들을 모아 출판하는 기회를 마련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기네.
그런 기회가 오길 기대합니다.
왜 아버님 고향이 황해도 였나???!!! 왜 판문점에서 휴전회담 (당시는 정전회담)을 해서 황해도가 북한쪽으로 가게 했나 !!
정말 답답하군요.그런 이산의 아품이 있었는지 몰랐네. 동생분들은 아직 생존해 계실텐데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해서 만날 날을 기약해봅시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모두 황해도 연안사람이지요. 열여덟 동갑나이에 결혼하여 스물에 날 낳으셨지요. 연안은 6.25전에는 38 이남이었는데 전쟁통에 이북으로 뺐겨 버렸습니다.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르지만 미국과 중국이 정전협상을 하면서 대략 38선 기준으로 가르기로 큰틀은 정해놓고 최종적인 선은 정전하는 순간의 전선으로 하기로 했는데 미군은 동부산악지대에 전략적인 가치를 두었고 황해도는 큰산이 없고(구월산이 제일 높음) 평지라서 전략적 가치가 적다고 보고 힘을 쏟지 않았지요. 이산가족 상봉신청은 벌써 했지만 1년에 300명정도씩 만나게 하면 천년이 가도 어렵지요. 그것도 지금은 중단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