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비(哭婢)와 곡림청(哭臨廳)
곡비란 품삯을 받고 대신 울어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비(婢)라는 글자에서 보듯 천민들이 곡비를 했습니다. 2014년 3월 9일에 KBS 드라마스페셜 ‘곡비’(주연 - 김유정)가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영의정 댁의 장자가 죽자, 곡비가 된 아이가 강요와 협박에 의해 마지못해 울겠다고 하면서 ‘진정 죽은 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체통을 위해 울어달라는 당신들이 불쌍해서 운다.’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왜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은 제대로 울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억지로 울게 하고, 그것도 강요를 해서 울게 하는 것일까요.
3년에 걸친 유교식 상례(喪禮) 절차는 울음(哭)을 시작으로 울음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선비들의 일상을 좌지우지한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는 곡을 하는 시기를 정해 놓았습니다.
1) 시신을 싸서 묶는 절차인 소렴(小殮)을 할 때부터 시신을 입관하는 대렴(大殮)을 마치고 시신을 임시로 가매장하는 빈(殯)을 마칠 때까지, 2) 상주가 상복을 갈아입는 성복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영전에 제사를 지낼 때, 3) 상여가 장지로 떠나는 발인 하루 전에 울음을 시작해 상여가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주자가 이렇게 상례에서 우는 시기까지 정해놓으니까, 상례에 온 사람들이 이때는 울음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상주가 우네, 안 우네 하고 보게 됩니다. 하지만 상주도 사람인지라 때맞춰서 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남들이 보니까 누군가 예법에 맞게 때 맞춰 울어주는 사람들이 필요해졌고, 그래서 대신 곡(代哭)을 해주는 곡비가 등장했고, 전문 직업인도 생긴 것입니다.
1421년 2월 12일 예조에서 세종에게 “국장이나 대신들의 장례에 곡비는 이전에는 시전(市廛)의 여자를 시켰으나, 정종과 원경왕후 국장 때는 옛 제도에 따라 궁인이 곡을 하며 따르게 했으니, 이후로는 대신의 장례에는 본가의 노비를 곡비로 쓰게 하소소.”라고 건의한 기록이 있습니다.
국장이나 대신들의 장례에 대신 울어주는 일을 시전의 여자, 즉 한성부 시전 상인집의 여성들에 시킨다는 것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성부 사람들은 촌락민에게 부과되는 조용조 세금 대신에, 집터에 대한 세금인 가대세(家垈稅)과 방역(坊役)이란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방역에는 야간 순찰을 도는 좌경, 한강에서 빙고까지 얼음 옮기는 장빙역, 왕릉 조성에 동원해 일하는 산릉역, 그리고 대신 울어주는 곡비도 방역의 하나였습니다.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는 ‘금제절목’이라고 해서, 조선시대에 여러 금지해야 할 것을 적어놓은 항목이 있는데, 이 가운데 서인의 초상(初喪)에 길을 인도하는 곡비를 쓰는 자를 금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곡비는 사대부들이 체통을 차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 인만큼 서인들은 감히 곡비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슬픔을 달래고 도리를 일깨우는 대신 울어주는 대곡(代哭) 문화는 명분과 실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생긴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양반들의 예법 문화의 하나입니다. 명분상 상례는 슬퍼야 하므로, 울음이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양반 체면에 막 울 수도 없고, 별로 슬프지 않아서 울음이 나오지도 않는다는 현실 때문에, 대신 울어주는 곡비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관리들이 관비(官婢)를 함부로 곡비로 동원해 탄핵받은 사건도 있는 것을 보면, 곡비를 쓰는 것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양반가의 상례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곡비의 존재를 상주가 몸이 상하지 않게 보호하고, 고인에 대한 여운을 풀어주며, 자식된 도리를 일깨우는 배려의 풍습으로 보자는 견해도 있습니다.
왕실의 장례에서도 울어주기가 필요했습니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 상이 생기면, 대비를 비롯한 왕실 여성의 상장례 참여는 빈전에서 울어주기(哭臨)을 담당하는 역할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대비, 왕비, 세자빈 및 내명부는 왕 혹은 왕후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을 시작으로 죽음을 확인하고, 머리를 풀고 상복을 입고 빈소에서 곡을 하며, 산릉에 장사를 지내기 직전까지만 공식적인 의례에 참여하는 것이 『국조오례의』의 규정이었습니다.
3년 상례를 치루는 동안 빈전(殯殿)에서의 5개월 이후에는 특별한 의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3년 상례 동안 왕실 여성의 혼전(魂殿)에 대한 의례가 새롭게 요구되었습니다. 『주자가례』에 없는 혼정에 대한 의례가 생긴 것입니다. 즉 망곡례(望哭禮)라는 의례를 통해 왕실 여성이 혼전에서 의례에 참여하게 됩니다. 망곡례는 산릉에서 장례가 이루어지는 시간에 궁궐 안에서 그곳을 향해 배례하고 곡하는 절차입니다. 1567년 명종비(인순왕후) 국상에서 처음 선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산릉에 직접 가지 못하는 경우가 늘고, 망곡례가 상례화되면서 망곡례의 시행대상이 왕실 여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면서 1659년 효종 즉위 이후에는 여성들이 망곡례를 통해 혼전 의례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곡림청(哭臨廳)은 상장례 기간 모여서 우는 공간으로, 조선 초기에는 빈전에만 왕 혹은 왕실 여성들의 곡립청이 존재했습니다. 하루 종일 빈소에서 울음이 그치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혼전에서는 왕과 여성들의 곡립공간이 없었고, 혼전의례 동안에는 왕에게는 제례를 올리기 전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준비하기 위한 어제실이 마련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여성들이 망곡례 형식으로 혼전의례에 참여하게 되면서, 혼전영역에도 왕실 여성을 위한 곡림청을 조성하게 됩니다.
창경궁 문정전에 처음 혼전이 설치된 것은 1530년이었으나, 이때는 곡림청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659년부터 숭문당에 곡림청이 설치되었고, 숭문당에서 문정전으로 연결되는 통경문(通慶門)에 내(內)제물진설처가 조성됩니다. 내명부에서 마련하여 혼전에 올리는 제물을 진설하는 곳으로, 왕실의 내명부가 상장례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 건축에도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통경문에는 생베로 만든 휘장(생포갑장)을 달아 숭문당이 곡림청임을 상징하기 시작했습니다. 1674년 인선왕후 혼전이 생길 때에는 곡림청이 더 커져, 숭문당 앞에 별도의 곡림청을 더 만들고, 함인정을 포함해 환경전 앞 이명문부터 시작해 숭문당 앞마당 일대 문(門)에 생포갑장을 달았습니다.
본래 숭문당은 왕의 서재로 사용했고, 함인정은 왕의 연회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곡림청을 통해 여성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여성들이 함인정 앞 권역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 초기 대비는 왕실의 어른이었으나, 후기에는 수렴첨정을 통해 왕과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지위까지 격상됩니다.
영조비 정순왕후는 1800년 정조가 승하자, 그의 혼전을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에 설치합니다. 창덕궁 수정전에 거주했던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며, 당시 제2편전인 창덕궁 희정당에서 주로 엄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활동공간을 고려해 선정전을 편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대비의 의중이 정치에 크게 반영되었습니다. 선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되자, 선정전 북쪽인 연화당에서 곡림청이 조성되었습니다. 또 1834년 순조가 승하해 선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되자, 수렴청정을 하게 된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선정전 서북쪽에 위치한 보경당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는 혼전의례가 이루어지는 동안 하루에 세 차례 곡림하고, 제물을 올리는데 참여하기에 편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시신을 무덤에 묻고 난 후, 혼전에서 죽은 이를 위해 억지로 울어주는 곡례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허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풍습이 지속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왕실 여성들은 울음을 통해 여성의 정치적 권한을 확대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우는 곡비의 존재 역시 유교의 예법이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고, 허례(虛禮)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도덕적 명성을 얻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허례라고 할 풍습이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것은 이처럼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첨언) 장례 기간 동안 슬퍼하고 울어야 한다는 것은 중국에서 수입된 유교의 사고방식입니다. 고구려의 풍습에는 사람이 죽으면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지만, 장례를 지낼 때는 북 치고 춤추고 풍악을 울리면서 죽은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죽음 당시에는 이별이 슬프지만, 죽은 이가 저승에서 새로운 삶은 산다고 생각하면 기쁘게 보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 서쪽에 살던 유목민인 오환족은 병사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서, 시신을 염(斂)한 후에 관에 넣고 곡을 하며 슬퍼하나, 장례를 할 때는 춤과 노래로써 죽은 자를 떠나보냈습니다. 바이킹들은 장례식 때 울지 않습니다. 죽어서 신들이 사는 발할라 궁전에 가게 된다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장례를 지낼 때 슬퍼하기보다 풍악을 울리는 고구려의 풍습은, 어느덧 유교식 문화에 푹 젖어든 오늘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낯설지만, 이러한 풍습은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엄청 오래 전해왔습니다.
1398년 12월 29일자 『태조실록』 에는 “외방의 백성들은 그 부모의 장례 일에 인접 마을의 향도를 모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조금도 애통해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이 풍습이 유교적 가치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금지시켰습니다. 이후 우리의 장례문화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곡비라는 직업도 유교의 예법이 만든 것일 뿐, 이전 시대에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논문 : 신지혜, <조선 후기 대비의 상장례 참여확대와 의례공간의 변화>, [장서각}26, 2011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