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이 익, 더얼 컹 덜컹
다음 정차 역은 동 대구, 동 대구 역입니다.
내리실 승객은 좌측 문을 이용하여 잊으신
물건 없이…….
기석이 와 날 태운 부산행 비둘기 호 완행
열차는 칠 흙 같은 어둠을 가르며 대구로
달리고 있었다.
기석이 놈은 두려움과 흥분때문인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마른
오징어 다리를 씹어대고 있다.
“야 왜 그래, 무섭냐?”
소주잔을 건네 받으며 넌지시 물었다
“담배 좀 줘봐, 부산까지 아직 2 시간은 더 가야
된다더라, 안주 바꿔서 한잔 더 할래, 어때?”
“오늘 소주 확 받네”
멋 적게 씨익 웃으며 기석이 답한다.
“히히 미친놈 소주는 원래 받으라 구 마시는 거야.
키키… “근데 접때 학교 앞 닭발 집 생각난다.
죽여주게 맛나지 않았니.?”
“누가 아니래냐,” “그 아줌마 보조개도
쿠쿠 죽여주더라”
기말고사 시작하기 얼마 전부터 상위 3% 만
모아 소위 명문대를 목표로 새벽 1시 까지
하는 야간자습을 끝내고 학교에서 자전거로
20 여분 쯤 떨어진 포장마차 골목에서 연탄불에
지글지글 구워낸 첨 먹어본 매콤한 닭 발을
떠올려봤다.
귀염 귀염 웃을 때 보조개가 예술이었던 30대
초반의 아줌마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인기가
그만이 었었다.
쪼르르….프라스틱 소주잔을 채우며 기석이에게
한잔 건네고 내 잔도 꾹꾹 밟아 채웠다
반에서 짱을 먹던 기석이는 나보다 싸움을 잘한다.
나하고 한번도 붙어보진 않았지만 초등학교
5 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중학교 2 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다. 그리고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또 같은 반이 되었다.
질기다면 질긴 인연이다. 학교 안팍으로 나보다
싸움의 횟수가 두 배쯤 많았던 녀석이 싸우는 걸
난 여러 번 본 적 있다. 정말 때려 죽이기라도
할 듯이 무섭게 치고받던 기석이가 싸울 때는
전혀 딴 사람 같았다.
어쨌든 기석이와 나는 서로 오른팔 왼팔이
되 주었기에 우린 한번도 서로 치구박구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고 1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무더운 여름, 보충수업 시작을 삼일
남겨 논 목요일 아침이었다. 쏟아 붓는
빗줄기는 세상을 씻어 내려는 듯
연일 그칠 줄 몰랐고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주 소소한 일거리로….., 늘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아버지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 언성을 높이고
서로에게 상처와 흉터가 남는 말들로 할키곤
집을 나섰다.
‘다시 집구석에 들어가면 사람이 아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부터 깁슨 기타를 사려고 모아
두었던 20 여 만원의 돈을 은행에서 찾은 후 기석이
에게 전화를 넣었다.
기석인 내게 지난 몇 달 사이 가출에 대해 여러 번
언질을 했었고 오늘을 D-데이로 잡았다. 기석인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와 독재에
진저리 를 치고 있던 터라 우린 긴 말 필요 없이
쉽게 의기투합 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우린
청량리 역에서 ‘바다를 보며, … 살면 좋겠다’
라는 단순한 이유와 서울로부터 가장 멀어
아버지에게 쉽게 잡히지 않겠다는 나름대로
환상적인 계산아래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 도착해서 하는 일 없이 만화방,
오락실, 싸구려 쪽 방을 전전하자.
채 열흘도 못 되어 수중에 가진 돈이
바닥 났고 우린 돈벌이가 필요했다.
기석이는 서비스업종이 그 나마 적성에 맞을 것
같다며 부산 서면 시내 옹기종기 붙어있던
한 술집의 웨이터가 됐고 난 사업가의 기본은
영업이라고 일찍이 정주영, 락펠러 자서전을
보고 나름대로 감명 깊게 읽은 유치 찬란한
기억이 떠올라 사업가의 길로 뛰어들기로 했다.
'역시 난 순수한 놈인가부다 히히'
수중에 남은 돈은 만 2 천원 …..그걸 가지고,
흐릿한 기억이긴 하지만 부산역 앞에서
128 번 따라지 버스를 타고 여덜 정거장을
가면 대명동이 나오고 그곳엔 수세미며
나프탈렌이며 불법 복사한 노래 테이프등을
취급하는 소매시장이 있다고 며칠전에
쪽 방에서 만났던 광주쪽 양아치 애들한테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로 앵벌이들이 이용하는 품목들을 취급하는
그곳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그들처럼
반구걸 스런 사업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불안함과 치욕스러움을 감안 해야 했지만,
당장 내일 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나로선
그런 사치스런 감정과 연민에 빠질 처지는
아니었다. 수세미며 나플탈렌이며 불법성인가요노래
테이프등의 생필품을 잔뜩 가방에 울러 매고
난 거리로 나섰다. 그리곤 무작정 가가호호
방문판매를 하러 다녔다.
3 천원 짜리 싸구려 쪽방에 기거했던 기석이와
난 저녁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자식은 처음 며칠간을 빼놓곤 이 생활이
너무 힘들었으며 먼저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내게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가출한지 딱 열 하루 만 이었다.
……개새끼……
위로 누나만 셋 있는 집안의 3 대 독자, 일년 내내
따뜻한 온실 속에서 자랏을 법한 놈의 근성이
나의 그것과 같기를 바랄순 없었다.
........등신.
떠나버린 배신자의 등에다 욕지거리를 해주는 걸로
기석이를 접었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의리라는 건
그 유치함의 대담성을 논하기 전에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선이 있는 것이다.
부산의 지리를 알 수 없었던 난 아침에
쪽 방에서 나서면 자리가 텅 빈 버스를 골라 타고
아무데나 가서 내렸고 그 내린 동네가 그 날의
내 영업장이 되 주었다. 그렇게 생활하기를 닷새쯤
지난 어느날, 전날의 피곤함 때문인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고 한 참을 지나서야 내린
정차 역 주변은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숲속이었다. 적어도 3층에서 높게는 5층 건물의
높이정도의 빽빽히 들어선 소나무와 잣나무들은
푸른 하늘빛을 원천봉쇄하기라도 하듯 하늘을
차단하고 있었다.
거기엔 음습하고 어둡고 알 순 없지만 비릿한
스산함이 느껴지고 있었고, 마치 생선이 썩어
들어가는 듯한, 아니 죽은 개나 고양이의 시체가
썩은 냄새 같기도 한, 그 불쾌한 비릿함은 코를
찌르고 그 일대를 진동하고 있었지만 난 애써
무시하려고 애써보았다.
띠엄 띠엄 자리한 고만고만한 크기의 한옥집들이
얼기설기 모여 자그마한 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이 얼마쯤 걷자 눈앞에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 저는 야간 고등학교 다니는 가난한
고학생이며 소년 가장 입니다.”
“ 방학을 이용해서 등록금을 좀 벌어볼까 하고요”
“사실은 그보다, 할머니 다리도 곧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독하고…..’’
하며 무척 지치고 불쌍한 표정을 표표히 머금고 있으면
“그래, 학생 모 팔아요?”
하며 아줌마들은 되묻곤 천원에 두개들이 수세미와
한창 잘 나가던 2 천원 짜리 조용필 힛트곡
메들리 테잎 정도는 사주었다.
내가 커다란 초록색 대문을 밀고 들어선 2 층집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부엌 쪽에 사람이 있을까 해서
“ 누구 없어요?”
하며 다가서는데 한 아주머니가 부엌쪽에 달린
빼닫이 문을 삐걱 열며 나섰다. 난 그 아주머니를
본 순간 온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쪽 눈은
멍 뚫린 채 쪼그라 붙어 있었고 귀는 삼분에 이쯤
녹아 흘러 간신히 형체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고무장갑을 낀 양 손은 손가락이 다 뭉개어져 있었다.
' 읖'
눈살 찌부린 내 얼굴을 그 아줌마가 보았으면
어떡하나하고 순간 걱정이 들었다.
불과 한 달쯤 전에 보았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이라는 소설을 읽어 내려가며
상상했던 그 나병환자가 내 앞에 있었다.
난 살아오면서 그날처럼 사람의 모습을 보고
놀라거나 무서워 했던 기억이 없다.
아무런 할말을 찾지도, 돌아서 뛰어 나갈 수도 없이
이미 내 다리는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
초등학교 때 나병 환자들은 치료를 위해
산 사람의 심장을 파 먹는다 얘기가 머리를 더 아찔하게 한다..
겉으런 긴장하지 않을려 고 애썼지만 매우 당황스러운
긴 침묵이 그 아주머니와 나 사이에 한동안 흘렀다.
침착 할려고 노력했으며 늘 하던 말을 웅얼거렸다.
“저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는 가난한 고 학생인데여”….
떠듬거리며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흉칙한 외모
그러나 난 얘써 그녀의 눈길을 피하려 하진 않았다.
나의 머뭇머뭇 거리는 얘기를 다 듣던 아줌마는
“학생이 아주 기특 하구만…..” 하며 아주머니는
수세미 다섯 개와 나 훈아 테이프도 하나 사주었다.
그러면서
“ 희연아, ,,,희연아, 엄마 지갑 좀 가져오련 ”
하며 딸 아이를 부르는 거였다. 잠시 후에 나타난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녀가 지갑을 가지고 왔다.
갸름한 얼굴이 뽀얗던 눈망울이 아주 예쁜 소녀였는데
소녀가 그 아주머니의 딸 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렴풋이 짐작 할수 있었다.
아….나병, 나병이라는 문둥병은 유전이 아니구나…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 할 수 없는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과 격리된 천국이 거기에 있었다.
그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대부분
가내 양계를 해서 생활을 꾸려 간다는 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고 집집마다 작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천마리의 닭을 키우며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그 마을에 발길이 닿아
찾아 들었던 그 해 여름엔 닭에게만 발생하는
돌림병중에 하나인 DD-4 라는 ‘수탉 전이병’이
마을을 휩쓸고 지날 즈음이었다. 마을 내 모든
닭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그렇게 죽은 수천마리의
닭을 집집마다 태우는 냄새로 마을전체는 검은
그을음과 함께 쾌쾌한 냄새로 진동을 치고 있을 때였다.
날 배신하고 먼저 돌아간 기석이의 귀 뜸으로 아버지
에게 붙들려 서울로 돌아가기 전 까지 난 그 마을을
다섯번 쯤 더 찾았고 마을 어귀에 있던 싸구려
분식점에서 세상에서 처음 벌어본 돈으로 우연히
만난 그 날의 눈망울이 컷던 희연 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와 함께 팥 빙수와 떡복이를 사먹고
그 다음주 일요일 오후엔 둘이 버스를 타고
함께 다대포 바닷가에도 놀러 갔었드랬다.
그리고 …언젠가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그렇게 참다 참다 도저히 참기가 힘들어진
그 해 여름방학이 다 끝 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용기를 내어 그 소녀에게 보낸 편지는
‘수취인 불명’ 이 되어 내게 다시 돌아왔을 뿐이었다.
소녀와의 기억은 고스란히 내 추억의 앨범이 되어
가슴 한 켠에 아직 자리하고 있다. 고 1 여름방학은
장마가 그치듯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고 소녀는
저 멀리 내 기억의 저편으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내내 들어야 했던
교수특유의 그 지리멸멸한 아버지의 설교와 강의
넘어로 달리는 차창밖의 저 만치 보이던
소나무 사이로 드리워진 햇살이 눈부시다.
………..
서울에 올라와 제일 먼저 한일은 기석이를 불러내
맞짱을 뜬 일 이었다. 아파트 경비실에서 인터폰으로
기석이 놈을 불러 냈을때 수화기 건너편의 기석인
‘알았다’ 라고 잘라 말하며 ‘옥상에서 보자’
며 전화를 끊었다.
…..한참을 노려보다……우린 멱살을 쥐었다 났다
주먹을 날릴려는 시늉을 했을 뿐 때리지는 못했다
…친구 ……. 그래 친구였다……..
그리곤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그 가출 사건 이후
이상스레 기석이와 난 서먹한 사이가 되 버렸다.
너무나 엉성했고 서툴렀던 소녀에 대한 첫사랑과
그 미련만큼이나 한 없이 쌓여버린 그리움,
그리고 잃어버린 친구 사이에서 내 정신의 키는
부쩍 커 있었다.
....오랬동안을 잊고 지냈던 기석이 놈을 우연히
다시 만난 건 대구 50 사단에서 훈련을 마치고
경남 울진 근교 산하부대 142 연대 소속 통신병으로
배치 받아 이병 생활을 거의 마쳐갈 무렵이었다.
중대 선임하사 말대로 군 생활 20 년만에
너 처럼 빠진놈은 처음 본다는 표현대로 자유분방한
내 정신과 군대는 정말 궁합이 맞지않았고
하루가 지옥 같은, 정말이지 개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었다.
..............
..........
......
자네, 자네 많이 피곤 한 가보네….시차 때문에 그렇겠지.
쪼르르 ……..
크리스탈 잔에 다시 와인이 그득 담긴다..
연한 보라빛이 물게 든 와인잔 너머로 희연의 모습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훔쳐보며 내가 알던
부산에서의 그 소녀를 기억해 낸다. 희연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날 의식하지 않으려는듯
아주 이따끔씩 나를 바라다 볼 듯 말 듯
눈길을 주었다. 내가 알던 그 소녀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