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입원심(淨入願心)]
【왕생론주】
淨入願心者:
【번역】
“정입원심( 淨入願心 )”이란, 다음과 같다.
【왕생론】
又,向說觀察莊嚴佛土功德成就、莊嚴佛功德成就、莊嚴菩薩功德成就,此三種成就,願心莊嚴,應知。
【번역】
또한, 앞서 불국토 공덕장엄의 성취, 부처님 공덕장엄의 성취, 보살 공덕장엄의 성취에 대한 관찰을 설했는데, 이 세 가지 성취는 모두 (아미타불의) 원심(願心)으로 장엄한 것임을 마땅히 알라. (모든 청정장엄이 전부 아미타불의 원심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왕생론주】
「應知」者,應知此三種莊嚴成就,由本四十八願等清淨願心之所莊嚴。因淨故果淨,非無因、他因有也。
【번역】
(천친보살이 말한) “마땅히 알라”란, 이 세 가지(국토, 불, 보살) 장엄의 성취가 모두 (아미타불) 인지의 48원 등 청정한 원심으로 장엄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지의 원심이 청정한 까닭에 과지의 정토 의정장엄 역시 청정한 것으로, 원인이 없거나 다른 원인으로 이 과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왕생론】
略說入一法句故。
【번역】
(이상 폭넓게 설한 국토, 불, 보살 등 세 가지 장엄성취를) 간략히 말하면 “일법구(一法句)”로 거두어들이는 까닭이다.
*일법구: 즉, 관찰문의 첫 번째 구절인 “청정공덕의 장엄성취를 관찰함”을 “청정”이라는 두 글자로 간략하게 극락의 장엄을 요약한다. 폭넓게 말하면, 양, 성, 형상 등등 장엄공덕성취의 관찰이 있다.
【왕생론주】
上國土莊嚴十七句、如來莊嚴八句、菩薩莊嚴四句,為廣;入一法句,為略。
何故示現廣略相入?諸佛菩薩有二種法身:一者法性法身,二者方便法身。由法性法身,生方便法身;由方便法身,出法性法身。此二法身,異而不可分,一而不可同。是故廣略相入,統以「法」名。菩薩若不知廣略相入,則不能自利利他。
【번역】
("약" 이 있으면 "광" 도 있다. 그렇다면 광과 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위에서 말한 국토의 장엄 17구절과 여래의 장엄 8구절과 보살의 장엄 4구절이 폭넓음(廣)이고, 한 법구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간략함(略)이다.
(“광”은 “약” 속으로 거두어들이고, “약”이 “광” 속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을 “광약상입”이라 부른다) 무슨 이유로 광약상입(廣略相入)을 나타내 보이는가? 제불보살에게 두 가지 법신이 있으니, 하나는 법성법신(法性法身)이고, 또 하나는 방편법신(方便法身)이다. 법성법신에서 방편법신을 낳을 수 있고, 방편법신에서 법성법신을 드러낼 수 있다. 이 두 가지 법신은, 다르지만 분리할 수 없고, 하나지만 혼동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광약상입(폭넓게 드러낸 29가지 장엄의 방편법신을 법성법신 속으로 거두어들이고, 법성법신을 펼쳐 보이면 바로 29가지 장엄의 방편법신이다)이므로, 총괄적으로 “법”이라고 부른다(이 모든 것을 전부 “법”이라 부른다). 보살이 광약상입을 모른다면 자리이타를 할 수 없다.
*광약상입: 광(廣)은 광설(廣說), 즉 폭넓게 전개하는 것이고, 약(略)은 약설(略說), 즉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이다. 광설과 약설은 병존하며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광은 전부 약 속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고, 약은 광 속에서 전부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많음이 곧 하나이고, 하나가 곧 많음이다.
*법성법신: 법성이체를 증득한 진여의 몸으로, 삼신 중의 법신이다.
*방편법신: 법성법신으로부터 방편으로 시현(示現)한 중생을 제도하는 보신과 응화신이다.
【왕생론】
一法句者,謂清淨句;清淨句者,謂真實智慧、無為法身故。
【번역】
일법구란 청정구(淸淨句)를 말한다. 청정구란 진실한 지혜, 무위법신인 까닭이다.
【왕생론주】
此三句,輾轉相入。依何義名之為「法」?以清淨故;依何義名為「清淨」?以真實智慧、無為法身故。
「真實智慧」者,實相智慧也。實相無相,故真智無知也。「無為法身」者,法性身也。法性寂滅,故法身無相也。無相故能無不相,是故相好莊嚴即法身也;無知故能無不知,是故一切種智即真實智慧也。
以真實而目智慧,明智慧非作、非非作也;以無為而標法身,明法身非色、非非色也。非於非者,豈非非之能是乎?蓋無非之曰是也,自是無待夫非是也。非是,非非,百非之所不喻,是故言「清淨句」。「清淨句」者,謂真實智慧、無為法身也。
【번역】
이 세 구절(“일법구”, “청정구”, “진실한 지혜, 무위법신”)은 차례로 서로 거두어들인다( 輾轉相入). 어떤 이치에 근거하여 “일법구(一法句)”라고 부르는가? 청정하기 때문이다(극락세계의 의정장엄은 체성이 청정하다). 어떤 이치에 근거하여 “청정구”라고 부르는가? 진실한 지혜, 무위법신이기 때문이다(모든 게 전부 진실한 지혜, 무위법신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전부 법신과 지혜를 본체로 삼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부른다).
“진실한 지혜”란, 실상의 지혜를 가리킨다. 실상에는 상이 없기(실상은 모든 상을 여의었다) 때문에 진실한 지혜는 아는 게 없다(진실한 지혜는 모든 상에 대해 분별하여 앎을 여의었다). “무위법신”란, 법성신을 가리킨다(법성은 적정寂靜하여 인연의 조작을 여의었으므로 무위라고 부른다). 법성은 (모든 상을) 적멸(寂滅)하였으므로, 법신은 상이 없다. 상이 없는 까닭에 모든 상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상호장엄이 곧 법신이고(의정장엄은 법신을 본체로 한다. 따라서 상은 체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법신을 떠나서는 그 어떤 상도 없다), 아는 것이 없는 까닭에 알지 못하는 것도 없으므로, 일체종지가 바로 진실한 지혜이다.
“진실”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지혜는 조작이 아니고(非作: 본체의 성품이 공하므로, 분별하여 아는 조작이 아니다), 조작이 아님도 아님(非非作: 목석과 같은 무지 혹은 공에 빠진 이승의 非作이 아닌 묘용이 있다)을 밝힌 것이고, “무위”로써 법신을 나타내는 것은, 법신은 색이 아니고(非色: 형상이 있는 색이 아니므로, 이를 “無相”이라 부른다), 색이 아님도 아님(非非色: 아무것도 없는 非色이 아니라 인연 따라 각종 형상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를 “無不相”이라고 부른다)을 밝힌 것이다.
아닌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앞서 말한 非非作과 非非色), 어찌 아닌 것의 부정(非非)이 “긍정”이 될 수 있겠는가(어떻게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그릇됨(非)”이 없는 것을 “옳음(是)”이라고 부르지만, 자성 본연의 “옳음”은 “옳음에 대한 부정(非是)”을 상대로 세운 “옳음”이 아니다. 긍정에 대한 부정(非是)과 부정에 대한 부정(非非), 백 개의 부정(百非)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까닭에 “청정구(淸淨句)”라고 말한 것이다. 이른바 “청정구”란, 진실한 지혜, 무위법신을 가리킨다.
*是非: 여기서 시와 비는 전후 문장의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시”를 “긍정”“옳음” 또는 “(무엇무엇)이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비”를 “부정” “그릇됨” 또는 “(무엇무엇이) 아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차례로 서로 거두어들인다( 輾轉相入): 서로 포함하고 거두어들이며, 서로 보완하고 도와서 일을 완성한다.
*지혜는 조작이 아니고 조작이 아님도 아님(智慧非作、非非作): 지혜는 분별하여 아는 작(作)이 아니며, 또한 나무나 돌처럼 무지하거나 이승(二乘)이 공(空)에 빠지는 비작(非作)도 아니다. 작(作)은 분별하여 아는 조작이다. 비작(非作)은 분별하여 아는 작이 아니다. 왜냐하면 법성(法性)은 본래 공(空)하여 여여부동(如如不動)하기 때문이다. 비비작(非非作)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그런 비작이 아니며, 연(緣)에 따라 묘용(妙用)을 일으킬 수 있는 이른바 "반야는 아는 것이 없으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般若無知, 無所不知)"이다.
*법신은 색이 아니고, 색이 아님도 아님(法身非色、非非色): 법신은 형상이 있는 색(色)이 아니며, 아무것도 없는 비색(非色)도 아니다. 색(色)은 형질이 있고 공간을 차지하며 변할 수 있는 물질이다. 비색(非色)은 형상이 있는 물질이 아니며, 연기(緣起)하는 그 자리가 바로 공성(性空)이다. 비비색(非非色)은 허공처럼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연(緣)을 따라 다양한 형상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성품이 공하지만(性空) 연기(緣起)를 방해하지 않는다.
*아닌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어찌 아닌 것의 부정이 “긍정”이 될 수 있겠는가(非於非者,豈非非之能是乎): “아닌 것”을 부정한다고 “부정의 부정”이 어떻게 “긍정”이 될 수 있는가? (세속의 논리에서는 “부정의 부정은 긍정과 같다”라는 주장이 있다) “···부정함(非於)”은 능히 부정할 수 있는 능비(能非)이고, “아닌 것(非者)”은 부정되는 대상인 소비(所非)이다. 상대되는 능소(能所)가 있으면 그것은 실상의 본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릇됨”이 없는 것을 “옳음(是)”이라고 부르지만, 자성 본연의 “옳음”은 “옳음에 대한 부정”을 상대로 세운 “옳음”이 아니다(蓋無非之曰是也,自是無待夫非是也): 일반적으로 말하는 "옳음(是)"은 "그릇됨(非)"을 부정함으로써 세운 "옳음(是)"이다. 그러나 자성 본연의 "옳음(是)"은 절대적으로 잘못이 없고, 모든 그릇됨을 초월한 "옳음(是)"이므로, "옳음에 대한 부정(非是)"을 상대로 세운 "옳음(是)"이 아니다.
【왕생론】
此清淨有二種,應知。
【번역】
이 청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마땅히 알라.
【왕생론주】
上轉入句中,通一法入清淨,通清淨入法身。今將別清淨出二種故,故言「應知」。
【번역】
이상 차례로 서로 거두어들이는( 輾轉相入) 구절에서 (극락세계의 의정장엄을 일법구로 귀납함)에 “일법”을 통해 (장엄청정공덕성취 중의) “청정”에 들어가고, “청정”을 통해 (진실한 지혜, 무위법신 중의) “법신”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제 “청정”을 두 가지로 구별하려는 까닭에 “마땅히 알라”라고 말한 것이다.
【왕생론】
何等二種?
一者器世間清淨;
二者衆生世間清淨。
器世間清淨者,如向說十七種莊嚴佛土功德成就,是名器世間清淨。
衆生世間清淨者,如向說八種莊嚴佛功德成就、四種莊嚴菩薩功德成就,是名衆生世間清淨。
如是一法句,攝二種清淨義,應知。
【번역】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하나는 기세간의 청정이고(의보),
또 하나는 중생세간의 청정이다(정보)이다.
기세간의 청정이란, 앞서 말한 17가지 불국토 공덕의 장엄성취를 기세간의 청정이라 부른다.
중생세간의 청정이란, 앞서 말한 여덟 가지 부처님 공덕의 장엄성취와 네 가지 보살 공덕의 장엄성취를 중생세간의 청정이라 부른다.
이처럼 “일법구” 속에 두 가지 청정의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왕생론주】
夫衆生為別報之體,國土為共報之用。體用不一,所以應知。然諸法心成,無餘境界;衆生及器,復不得異,不得一。不一則義分,不異同清淨。
「器」者,用也。謂彼淨土,是彼清淨衆生之所受用,故名為器。如淨食用不淨器,以器不淨故,食亦不淨;不淨食用淨器,食不淨故,器亦不淨:要二俱潔,乃得稱淨。
是以一「清淨」名,必攝二種。
【번역】
중생은 각자 별업(別業)으로 감득한 과보체(정보, 체)이고, 국토는 중생의 공업(共業)으로 감득한 수용처(의보, 용)이다. 체와 용이 다르기 때문에 (이 차이에 대해)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은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서) 다른 경계는 없다(마음밖에 법이 없다). 따라서 중생세간과 기세간은(정보의 체와 의보의 용) (똑같이 마음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라면) 다르다(異)고 할 수 없고(의보와 정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똑같다(一)고 할 수도 없다(체와 용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세간과 기세간이) 똑같은 모습이 아니므로(不一), 의미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고, (모두 마음으로 지은 것으로 본체가) 다르지 않으므로(不異), (마음이 청정할 때) 함께 청정해진다.
“기(器)”는 용(用)이다. 말하자면 저 극락정토는 저 극락정토의 청정한 중생들이 수용하는 곳이므로 “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컨대 깨끗한 음식을 깨끗하지 못한 그릇에 담으면, 그릇이 깨끗하지 못한 까닭에 음식 역시 깨끗하지 못하게 되고, 깨끗하지 못한 음식을 깨끗한 그릇에 담으면 음식이 깨끗하지 못한 까닭에 그릇 또한 깨끗하지 못하게 되므로, 반드시 (음식과 그릇) 둘 다 청결해야만 깨끗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정”이라는 명칭에는 반드시 기세간의 청정과 중생세간의 청정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왕생론주】
問曰:言衆生清淨,則是佛與菩薩。彼諸人天得入此清淨數否?
【번역】
묻기를: 이른바 중생의 청정이란, 부처님과 보살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저 극락정토의 인천들도 이 청정한 중생에 포함되는가?
【왕생론주】
答曰:得名清淨,非實清淨。譬如出家聖人,以殺煩惱賊故,名為比丘。凡夫出家者,持戒破戒,皆名比丘。又如灌頂王子,初生之時具三十二相,七寶即為所屬。雖未能為轉輪王事,亦名轉輪王,以其必為轉輪王故。彼諸人天,亦復如是,皆入大乘正定之聚,畢竟當得清淨法身。以當得故,得名清淨。
【번역】
답하기를: (이런 인천들에게) 청정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나, 실제로는 청정하지 않다. 예컨대 출가한 성인은 번뇌의 도둑을 죽였기 때문에 비구라고 부르고, 범부가 출가하면 지계를 하든 파계를 하든 역시 모두 비구라고 부른다. 또 예컨대 관정을 받은 전륜왕자는 태어나자마자 32상을 갖추고 칠보를 소유하게 된다. 비록 아직은 전륜왕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지만, 역시 전륜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반드시 전륜왕이 되기 때문이다. 저 극락정토의 인천들 역시 이와 같아서, 모두 대승의 정정취에 들고 반드시 청정법신을 증득하게 된다. 반드시 청정법신을 증득하는 까닭에 청정이라고 부른다.
*출가한 성인: 출가란, 재가의 생활에서 벗어나 사문의 청정한 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성인이란, 대소승에서 견도위 이상, 혹업을 끊고 진리를 증득한 사람으로, 범부를 상대로 성인이라 부른다.
*관정왕자: 전륜왕의 후계자이다.
*칠보: 1. 금륜보(金輪寶) 2. 백상보(白象寶) 3. 감마보(紺馬寶) 4. 마니보주(摩尼寶珠) 5. 옥녀보(玉女寶) 6. 주장신보(主藏臣寶) 7. 주병신보(主兵臣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