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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도약(The Quantum leap from Mind to No-Mind)
어린얘를 달래는 것이 모든 붓다들의 첫번째 작업이다.
양좌주亮座主가 참례하자 마조馬祖가 물었다.
"무엇을 강의하는가? "
"심경心經을 강의합니다."
양좌주가 대답했다.
마조가 물엇다.
"무엇으로 강의하는가?"
양좌주가 말했다.
"마음으로 합니다."
마조가 말했다.
"마음心은 광대와 같고, 의식意은 광대놀이에 장단을 맞추는 자와 같으며, 육식六識은 안면이 있는 자와 같은데, 어떻게 마음이 경전을 강의할 수 있단 말인가?"
양좌주가 언성을 높였다.
"마음이 강의하지 못하면 허공虛空; no-mind이 강의를 합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그렇다. 허공이 훌륭하게 강의할 수 있다."
양좌주가 소매를 떨치고 나가려 하는데, 마조가 불렀다.
"좌주!"
양좌주가 고개를 돌렸다.
마조가 말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것은 이러할 뿐이다."
이에 양좌주가 크게 깨닫고는 절을 하였다.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중아! 도대체 무엇때문에 절을 하는가?"
양좌주는 땀을 비오듯 쏟았다.
양좌주는 자신의 절로 돌아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의 논강論講을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했더니, 오늘 마조대사를 한번 만나 질문을 당하고서야 평생했던 공부가 얼음 녹듯 녹아버렸다."
그리고는 논강을 버리고 서산西山에 들어가 다시는 종적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마조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그대들 각자가 부처의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라!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이 대승일심大乘一心의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왔다."
어떤 승려가 물었다.
"무엇때문에 마음이 부처卽心卽佛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조가 말했다.
"어린 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그 승려가 물었다.
"울음을 그쳤을 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다非心非佛고 하겠다."
그 승려가 물었다.
"그밖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그대에게 말하건데, 이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적인 축제의 시작없는 시작이다. 선禪은 축제와 같다. 이것은 학자적이지 않다. 이것은 학자들을 몹시 질타한다. 왜냐하면 학자란 유한한 마음, 가꾸어진 마음, 빌린 지식, 죽은 경전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학자는 무덤이다. 선은 살아있는 장미꽃이다. 거기에 죽어있는 것이란 없다.
이것은 언제나 언제나 살아있다. 이것은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된다. 모습이 달라진다. 나무에선 낙엽이 지고 새로운 싹이 나오기 시작한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찾아온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본질은 변화지 않는다. 오직 표면에서만, 주변에서만 변화가 일어난다. 중심에서는 어떤 변화도 없다. 그 중심이 선禪이다.
이번 시리즈의 강의가 마조馬祖의 일화로 시작하게 되어 기쁘다. 그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양좌주亮座主가 참례하자 마조馬祖가 물었다.
"무엇을 강의하는가?"
그 불쌍한 학자는 자신이 사자굴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오기는 쉬워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조의 손아귀에 걸려들면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마조는 칼날처럼 예리한 스승이다. 그는 갖가지 방편으로 사람들을 죽었다. 수백명의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었다.
그 불쌍한 학자는 마조를 단한번만이라도 만나기 위해선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옛사람들은 스승을 그렇게 알았다. 그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죽인다.
그대에게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에게서 오히러 모든 지식을 빼앗아간다. 심지어 나I'라고 하는 그 느낌마저도 없어야 한다.
그 학자는 마조를 만나는 것은 한번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두번도 너무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마조가 물었다.
"무슨 경을 강의하는가?"
"심경心經을 강의합니다."
양좌주가 대답했다.
마조가 다시 물었다.
"무엇으로 강의하는가?"
양좌주가 말했다.
"마음으로 강의합니다."
마조가 말했다.
"마음心은 광대와 같고, 의식意은 광대놀이에 장단을 맞추는 자와 같으며, 육식六識은 안면이 있는 자와 같은데, 어떻게 마음이 경전을 강의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은 말할 수 없다. 마음은 저 긍극을 지적해 보일 수가 없다. 마음이 하는 일이란 고작 통제하고 지껄이는gibberish 정도이다. 곁으로 보기에는 아주 조용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정신병원이다. 이런 정신병원은 진리를 단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마치 알고있는 듯이 게임을 벌리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양좌주가 언성을 높였다.
"마음이 강의하지 못하면 허공虛空; no-mind이 강의를 합니까?"
그것은 그저 논리적이고 지적인 질문일 뿐,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조가 먼저 마음은 진리를 말할 수 없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도 그렇게 물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무심이 진리를 말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그렇다. 허공이 훌륭하게 강의할 수 있다."
양좌주가 소매를 떨치고 나가려 하는데, 마조가 불렀다.
"좌주!"
양좌주가 고개를 돌렸다.
마조가 말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것은 이러할 뿐이다!"
무심無心; No-mind...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유년, 청년, 장년, 노년의 마음이 각각 다르다. 마음은 끊임없이 쌓아가고 끊임없이 관점을, 관념을, 종교를 바꾼다. 마음은 전혀 믿을 것이 못된다. 그것을 의지할 수가 없다. 오늘은 공산주의자이지만 내일은 그것을 반대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무신론자이지만 내일은 유신론자가 될지도 모른다. 마음은 마치 여기 인도 푸나Poona의 오염된 공기처럼 후끈거린다.
무심은 오염되지 않는 그대의 본성이다, 시종일관始終一貫. 마조는 말하고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것은 이러할 뿐이다!"
무심은 그대가 듣는 것과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자신의 노래를 하고 있다. 그대가 듣든 그렇지 않든 그 음악은 거기에 있다. 물론 그대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춤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영원의 춤이다.
이에 양좌주가 크게 깨닫고는 절을 하였다.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중아! 도대체 무엇때문에 절을 하는가?"
양좌주는 땀을 비오듯 쏟았다.
양좌주는 자신의 절로 돌아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의 논강論講을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했더니, 오늘 마조대사를 한번 만나 질문을 당하고서야 평생했던 공부가 얼음 녹듯 녹아버렸다."
그리고는 논강을 버리고 서산西山에 들어가 다시는 종적을 보이지 않았다.
마조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나를 금세기의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일컫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나를 만나게 되면 그대는 사라진다. 그대 소식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된다. 그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단 한번의 만남만으로도 충분하다!
언젠가 마조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그대들 각자가 부처의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라!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이 대승일심大乘一心의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왔다."
어떤 승려가 물었다.
"무엇때문에 마음이 부처卽心卽佛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조가 말했다.
"어린 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모든 깨달은 자들은 어린얘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 말을 사용해 왔다. 어린얘를 달래고 어루는 것은 모든 붓다들의 기본적인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어린얘가 성장하면 어느 날부터 때리기 시작한다. 참된 가르침은 그대가 충분히 성숙하고, 충분히 중심에 자리잡고, 충분히 수용적이고, 충분히 깨어있을 때만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붓다도 공연히 때리진 않는다. 일단 어린애가 울음을 그치면 붓다들의 접근방법 자체가 달라진다. 그는 더 이상 마음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는다. 일단 스승이 그대의 의식을 마음으로부터 떼어내고 나면 진짜 가르침은 아주 간단해진다.
무심이 붓다 이다.
에고는 미완성이다.
에고 없음이 깨어있음이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이 순간 철저하게 죽어라.
그때 무심이 붓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이렇게 존재해 있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자애로움이 넘치는 이들은 마음이 붓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것은 순전히 그들의 자애심 때문이었으며 그대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다. 그대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으면, "그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그대가 자신이라고 여긴 것은 비누거품에 지나지 않다. 내면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그대의 본성이다."라는 말을 듣고 미쳐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의사는 약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잘 알고있다. 어느 순간에 가서 제자가 사라진 그 자리에 그저 순수한 공간만이 남도록 하기 위해 궁극적인 후려침이 필요하다.
저 순수한 공간(pure space)으로부터 모든 것이 꽃피어난다.
저 순수한 공간(pure space)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
저 순수한 공간(pure space)이 그대의 실체being이다.
그 승려가 물었다.
"울음을 그쳤을 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다非心非佛고 하겠다."
그 승려가 물었다.
"그밖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그대에게 말하건데, 이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무심無心, 순수한 침묵은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life)이며 의식(consciousness)이며 지복(blissfulness)이며 영원한 존재(eternal being)이다. 이것은 물건이 아니다.
지난밤에, 저는 직관intuition과 깨달음enlightenment이 다르지 않다고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들이 둘다 무심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직관이 우리
의 내부에서 작용할 때 우리는 조금이나마 깨달음의 맛을 보고있는 것이 됩니까?
그대는 간단한 질문을 가지고 많은 의문들을 낳았다. 첫째, 지난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이다. 얼마나 반복해야 겠는가? 이 밤을 제외한 어떤 밤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밤을 제외한 어떤 밤도 없을 것이다! 그대는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고심하고 있다. "직관과 깨달음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둘다 무심이기 때문입니까?"
그대들 모두는 여기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는 붓다들의 만남의 장소이다.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를 어떻게 이름붙이든 상관없다. 직관intuition... 무슨 뜻인가? 그것은 '내면으로부터의 앎'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도tuition, 교사tutor가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 바깥 지식을 가지고 교사 선생 교수들이 하고 있는 것이 지도이다.
직관은 그대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존재이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실한 존재계(existence)에서는 명칭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대는 결국 묻는다. "직관이 우리들 내부에서 작용할 때... "
아니다, 직관은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거기에 있다. 작용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대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휴식상태이다. 그대의 중심은 작용 비작용을 너머서 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한다. 이해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가 마음의 장난에 속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속지마라. 기억하라, 직관은 그저 존재한다. 그것은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존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하나의 체험의 두가지 명칭들이라고 말한다. 직관intuition, 깨달음enlightenment, 깨어있음awakening, 불성佛性; buddhahood - 바로 움직이지 않는 절대 부동의 중심축을 일컫는 말들이다.
그대가 그것을 맛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대는 그것을 전부 맛보거나, 아니면 전혀 맛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나뉘지 않는다.
이 기회에 개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일러 주겠다. 어떤 사전, 어떤 백과사전도 도움이 안될 것이다. 그것들로는 전혀 개체individual와 불가분성不可分性을 연결시킬 수가 없다. 그것이 나누어질 수 없다면 맛볼 수도 없다. 그대가 그것을 갖든, 아니면 무지 속에 그대로 남든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깨달음을 조금 맛보았다." 그것은 그렇게 작용하지 않는다.
그대는 "나는 부분적으로 깨달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존재하라 - 전체적으로. 그대의 전체적인 존재를 어떻게 부를 것인지는 그대에게 달렸다. 나는 잠시 깨달음이란 단어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어둠, 절망, 고뇌, 부정성을 몰아낸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대를 그대의 긍정적인 존재로 데려간다. 그것은 그대를 에워싸고 있는 우주가 고동칠 때마다 "예스"라고 말하는 바로 그대 가슴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그것을 부분적으로 체험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부분적으로만 그대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좀더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순간 나는 그대를 삼분의 일 정도만 사랑한다."
그대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은 그대가 정신 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사랑조차도 나누어지지 않는다. 깨달음을 언제나 사랑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둘 사이에 유일하게 닮은 점이 있다면 둘다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부분적인 삶을 살고있다. 부분적으로 사랑을 한다. 그것은 확실히 거짓이며 피상적이며 진실하지 못한 기만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명상을 한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은 저 위대한 체험을 부분적으로는 허락하지 않는다. 자연은 미국식이 아니다. 그대가 할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할부割部 개념은 존재계와는 정반대이다. 필요하다면 왜 전부를 갖지 않는가? 그대는 물건을 분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존재being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을 분할하는 순간, 그것은 죽어버린다.
과학적인 사고로 볼때는 그것은 아주 곤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분석하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분석될 수 있을 때만이 그 존재를 받아드린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분석될 수 없다. 따라서 과학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가, 어떤 불멸의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부인해 왔다. 그것은 정말 재미있는 현상이다. 과학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실험실 안에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없다. 그는 자신도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 그 자신을 직접 실험실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하나 하나 해부하며 그 특징들과 기능들을 살펴본 다음 다시 꿰매지 않으면. 살아있는 존재를 나누었다가 다시 결합하면 당연히 시체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생명은 사라지고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60회 생일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웃 꼬마들은... 그는 꼬마들, 동물들, 새들, 나무들과 무척 친했다. 그는 평생을 진화를 연구하는데 받쳤다. 그리하여 그는 성장하는 모든 것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는 비록 늙었지만 꼬마들과 무척 친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웃 꼬마들은 모두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의 생일이 다가오는데 무엇을 선물할까? 세계적인 과학자에게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까? 그 자리에는 각지에서 들어온 값비싼 선물들이 수북할텐데 우린 무얼 선물하면 좋을까? 그는 우리들의 둘도 없는 친구니 뭘 선물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 그들은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종류의 곤충들, 개구리들, 물고기들, 메뚜기들 등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라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 그것은 개구리 머리에 메뚜기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찰스 다윈이 깜짝 놀랄 것을 생각하며 흐뭇해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을 곤충들과 동물들의 성장과 진화를 연구해 왔기 때문이다.
"이 곤충을 뭐라고 부르는지 보자."
꼬마들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이름난 과학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피조물을 찰스 다윈에게 보이며 물었다.
"이 곤충을 아나요?"
찰스 다윈조차도 잠시동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것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꼬마들이 이것을 어디서 발견했단 말인가? 그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꼬마들은 말했다.
"그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그가 말했다.
"그래, 이것의 이름은 수리 수리 마수리hocus pocus란다."
어떤 것도 부분적이라면 수리 수리 마수리가 될 것이다. 전체는 여기here에서 배우는 언어이다.
그대를 이 순간this moment으로 데려오기 위해 나는 온갖 방법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이 무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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