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학자 서기(徐起)
서기(徐起.1523.중종 18∼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학자. 자 대가(待可), 호 고청초로(孤靑樵老), 본관 이천(利川).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우고, 선학(禪學)에 뜻을 두었다. 20세 때 토정(土亭)에게 공부하고, 그를 따라 두루 유랑한 나머지 바다를 건너 제주도의 한라산까지 다녀왔다.
향리에 돌아오니, 인심이 흉악하여 다시 지리산에 들어갔고, 뒤에 계룡산(鷄龍山) 공암동(孔岩洞)에 자리 잡아 후진들을 짓고 후진들을 가르쳤다. 경사(經史)를 깊이 탐구하여 침식을 잊으며, 스스로 만족하니 만년에 더욱 이름이 높았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학자.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ㆍ구당(龜堂)ㆍ봉와(蓬窩). 아버지는 서구령(徐龜齡). 사노(私奴) 출신이다.
선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신분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권문해(權文海)는 비미(卑微), 박지화(朴枝華)는 누세한족(累世寒族)으로 아버지가 서구령이라고 적고 있다. 허목(許穆)은 천인(賤人), 남하정(南夏正)은 전야인(田野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경원(黃景源)의 묘표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서승우)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익은 “집이 미천하고 세상에서는 본래 종승 심열의 종이었다”고 기록하였으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심충겸이 하사받은 노(奴)로 학문에 힘쓰고 행실이 독실하므로 면천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로 계룡산 고청봉 아래 공암(孔巖: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과 지리산 등지에서 은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홍주교수 당시 이지함(李之菡)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이때 이지함은 중봉의 학문이 고매함을 보고 성혼(成渾),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이산보(李山甫)와 더불어 서기를 사우(師友)로 추천했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서기의 교유 관계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자 서기의 문인들이 정개청(鄭介淸)이 서기와의 관계를 밝힐 것을 걱정한 사실과 정개청에게 화답한 시가 <고청유고(孤靑遺稿)>에 수록된 것으로 볼 때 기축옥사에서 정여립(鄭汝立)의 당으로 분류되었던 정개청과 일정한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축옥사에는 최영경(崔永慶), 조종도(趙宗道), 유종지(柳宗智) 등 조식(曺植) 문인들이 많이 연루되었으며, 서기가 이지함과 함께 조식을 방문한 것으로 보아 조식과도 일정한 교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는 출사에 직결되는 성리학의 이론 학습보다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학문적 정열을 쏟았다. 서기가 서경덕(徐敬德)ㆍ이중호(李仲虎)ㆍ이지함을 사사한 것도 이들의 학풍이 신분관이나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백가는 물론 기술 이론까지 통달하였으며, 선학(禪學)을 좋아하였다. 특히 이지함을 만나면서 비로소 유학이 정도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리학자이면서 노장 사상을 절충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서기가 도가적인 성향이 있었음은 박지화와 함께 언급된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박지화는 서인(庶人)이다. 박학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또한 이학으로 명성이 있었다. 서기는 천인이다. 경학에 밝아 문인들에게 가르쳤으며 사람이 산수를 좋아하여 명산에 은거하였다. 대개 화담(花潭) 문하의 제자들은 자못 기이한 것을 좋아하니 세상에서 박지화를 신선이라고 여긴다. 서기는 전지지술(前知之術)이 있다고 하였다.”
천문에도 능해 선기옥형(璇璣玉衡, 혼천의)을 만들었고, 조헌 등과 함께 중국과 다른 조선의 독자적인 천문 체계를 제시한 동방분야도(東方分野圖)를 고쳤다고 한다.
홍주(현 충청남도 홍성군의 옛 이름)와 지리산, 계룡산 근처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과 강학(講學)에만 전념하였다. 노년에는 계룡산 고청봉 아래 공암에 정착하여 6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 동안 살았다. 충현서원 별사에 배향되었다. 충현서원은 1581년(선조 14)에 서기의 제자들이 주도하고, 당시 공주목사 권문해가 쌀과 콩 등 재정을 지원하여 서기가 제자를 가르치던 공암에 세워진 서원으로, 충청남도 최초의 서원이다.
【고청 서기 묘갈(孤靑 徐起 墓碣)】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 학자 서기의 묘갈. 고청 서기 묘갈은 서기의 무덤 앞에 세운 작은 돌비석이다. 고청 서기의 묘소에는 총 4기의 비석이 있다. 그 중 묘소 중앙에 있는 고청 서기 묘갈은 1775년(영조 51)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친구인 박지화(朴枝華)가 짓고 묘지는 조헌(趙憲)이 썼으며, 행장은 고청의 5대손인 서행원(徐行遠)과 충청감사 홍계희(洪啓禧)의 주선으로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가 지었다.
서기의 묘(墓)와 묘비(墓碑)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번지에 있는 고청봉의 동쪽 사면 중턱에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25㎝, 폭 46㎝, 두께 24.5㎝이다. 그 후 이 묘갈이 오래되자 1935년 임간재에게 글을 부탁하여 묘갈명이 새롭게 세워졌다. 이 비는 1775년 세워진 묘갈 앞쪽에 있다.
묘소 우측에는 처음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비문에는 ‘고청거사서공기지묘(孤靑居士徐公起之墓)’라 하여 쓰여 있다. 이를 살펴보면 고청 사후에는 ‘거사(居士)’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묘소 맨 좌측에 묘갈명이 낙후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후손들이 최근에 세운 묘갈명 1기가 세워져 있다.
서기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서는 현재 전해지는 내용이 매우 소략하고 단편적이며, 문헌에 따라 서로 다른 경우가 많아 많은 부분이 분명치 않다. 그러하기에 이 묘갈은 서기의 생애를 알아보는 데 더욱 중요한 유적이다.
서고청설화(徐孤靑說話)
조선 중기의 학자 서기(徐起)에 관한 설화. 고청은 그의 호이다. 천민 출신으로 학덕이 높았던 서고청에 관한 인물전설로, <매옹한록(梅翁閑錄)> <해동이적(海東異蹟)> 등에 수록된 문헌 자료와 충청남도 당진, 전라북도 부안 등에서 채록된 구비설화가 있다. 설화의 내용은 서고청의 출생담이 중심이다.
당진에서 채록된 설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고청의 어머니는 이진사 집 하인이었는데, 문둥병에 걸려 주인집에서 쫓겨나 유성 온천 근방의 공암(孔岩)이라는 바윗굴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소금장수가 비를 피해 바윗굴로 들어왔다가 여자를 보고 관계를 맺은 뒤, 성만을 가르쳐 주고 달아났다.
그 뒤 여자는 잉태를 하고 문둥병도 나아 다시 주인집에 들어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서고청이다. 서고청은 종노릇을 하며 서당에서 어깨너머로 공부를 하였다. 후에 그는 재주가 인정되어 주인집에서 공부를 시켰다.
친구들이 아비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하자 서고청은 어머니에게 자기의 출생 사연을 물어서 듣고는 공암 근처에서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암을 바라보고 웃는 소금장수 영감을 만나 웃는 이유를 물어본즉, 그가 바로 자기의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부자 상봉을 하였다.
그 뒤 서고청은 서당을 개설하여 많은 학동을 가르쳤는데, 서당이 분벽사창(粉壁紗窓 : 하얗게 꾸민 벽과 비단으로 바른 창이라는 뜻으로 주로 여자가 거처하는, 아름다운 방을 이르는 말)이었다. 어느 날 서고청이 출타한 때 한 사람이 찾아와 서당에 똥칠을 하고 사라졌는데, 서고청이 돌아와서 학동들로부터 지함이 그랬다는 사연을 듣는다.
<매옹한록>에는 서고청이 심씨 집(沈忠謙)의 사노(私奴)로 되어 있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상(沈相)의 모부인이 과부로 살면서 심상을 키웠는데, 서고청을 한 번 매질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밖에서 갈도성(喝導聲 : 지체 높은 이의 행차 때, 길 인도하는 下隷가 앞에 서서 소리를 질러 행인을 비키게 하는 소리)이 요란해 물어보니, 사대부들이 서고청이 죄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방문하는 소리라고 하였다. 이에 부인은 서고청을 불러 문자를 아는지 확인하고 아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서고청이 늘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서 아들을 가르치자 부인은 뒤에 서고청에게 양인이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서고청은 분수를 범하는 일이라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서고청은 송익필(宋翼弼)·정충신(鄭忠信)과 함께 삼노(三奴)의 명인(名人)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서고청의 기구한 출생담과 천민의 신분으로 학문을 성취한 이야기는 유능한 인물이 주어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을 보여 준 것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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