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현재 서울 탑골공원 내에 있는 대원각사(大圓覺寺) 비(碑)는 세조 11년(1465)에 원각사를 세운 내력을 기록하여 성종2년(1471)에 세웠다. 원각사 창건 내력을 기록한 비문은 김수온(金守溫)이 짓고 성임(成任)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강희맹(姜希孟)이 썼으나 마멸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전문이 기록되어 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전하(세조)께서 즉위하신지 10년인 갑신년(1464)에 공이 이뤄져서 정치는 안정되고, 예는 질서를 갖추고 악(樂)은 화평하여 국가가 한가하고 백성과 만물이 성하고 평안하니, 주상은 드디어 지도(至道)에 정신이 엉기고, 현교(玄敎)에 묵묵히 염원하여 억조의 창생과 더불어 함께 덕의 본을 세우고, 같이 수역(壽域)에 오르기를 생각하여, 여래(如來)가 일대에 설법한 삼장(三藏) 12부(部) 중에 오직 대원각(大圓覺)이 진돈교(眞頓敎)의 진전(眞詮)이므로, 정치하는 여가에 친히 구결(口訣)을 정하여 한(漢)ㆍ언(諺)을 다 붙여서 장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대승(大乘)의 도를 들을 수 있게 하였다.
이 해 여름 4월 경술일에 효령군(孝寧君) 보(補)가 회암(檜菴)의 동편 언덕에 석종(石鍾)을 세워 석가의 사리(舍利)를 안치(安置)하고, 눌러 법회(法會)를 열어 원각경(圓覺經)을 강의하는데, 이날 저녁에 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신승(神僧)이 단상(壇上)을 횡행하며, 서기(瑞氣)가 넘쳐흘러 광채가 어리어 비치고, 감천(甘泉)이 널리 젖어 사리의 분신(分身)이 8백여 개가 되었다. 5월 갑인일에 보는 영적(靈跡)을 갖추고 사리를 받들어 아뢰니, 전하는 왕비와 더불어 함원전(含元殿)에서 예불(禮佛)을 드렸는데, 사리는 또 4백여 개를 분신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백관이 전(箋)을 올려 하례를 하니, 이에 중외(中外)에 대사령을 내리고 의정부(議政府)에 전지(傳旨)하기를, “현겁(賢劫)의 천불(千佛) 석가(釋迦)가 넷째 번을 차지하여 도는 시방(十方)을 덮고 지혜는 이계(二界)를 휩쓸며, 법을 설명하고 생(生)을 초도(超度)하나니, 그 도에 관한 책자가 지나(支那)에 유입된 것이 8만 4천여 부인데, 원각경 하나가 구경(究竟)의 과(果)를 일으킨 본이 된다. 그러기에 나는 명구(名句)를 번역하고 그 의(義)를 발휘하여 장차 유포(流布)하려던 차에, 마침 백부 효령군이 법회(法會)를 개설하여 제불(諸佛) 여래(如來)가 신변(神變)을 나타냄이 이 경지에 이르렀으니, 오탁(五濁)의 상계(像季)에 흔히 볼 수 없는 일인즉, 마땅히 흥복(興福)의 구찰(舊刹)을 중건하여 원각이라 이름하고, 최상의 법문(法文)에 의를 붙이게 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시니, 여러 신하가 머리를 조아리고 손 모아 절을 하며, “감히 왕의 아름다우신 명령을 공경히 받들지 아니하오리까.” 하였다.
절은 도성 안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주위는 2천여 보(步)였다. 처음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자 절은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더니, 종(宗)이 이미 혁파되자 절도 역시 곧 폐하여 공청(公廳)이 된 지가 거의 40년이었다. 이듬해 6월 을묘일에 전하가 친히 그곳에 거둥하여 두루 바라보니, 백악(白嶽)이 북쪽을 지키고, 목맥(木覔)이 남쪽을 끼었으며 그 위치는 양지가 되고, 그 땅은 매우 조촐하여 대찰을 세우기에 알맞기에, 곧 신 보(補) 등에게 명하여 제조(提調)를 삼아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래서 먼저 집을 동북의 모퉁이에 가설하고 비로소 불상을 만드는데, 문득 황색 구름이 일어 옥상을 덮고, 공화(空花)가 흩날려 떨어져서 오색이 모두 갖춘 것을 보게 되었다. 보 등은 급히 장계를 아뢰니, 전하는 근정전(勤政殿)에 납시어 여러 신하의 하례를 받고 특사를 내렸으며 백관에게 관작 한 계급씩을 올려주었다.
9월 갑자일에 절의 정전(正殿) 위에서 서기가 솟아올라 창공을 능질러 함원전(含元殿)에 연속하므로, 여러 신하는 또 전(箋)을 올려 하례를 드리니, 전하는 대사(大赦)를 내렸다. 이에 역군들이 모여들었는데, 위에서는, “너무 서둘지 말라.” 해도 부지런히 일하고 사중(四衆)은 서로 시주하여 오직 뒤질까 저허하였다. 그래서 10월 을묘일에 이르러 낙성을 고하니, 칸으로 치면 모두 3백여 칸이다. 불당(佛堂)이 한가운데 우뚝하여 대광명전(大光明殿)이란 액호(額號)를 내리고, 왼쪽은 선당(禪堂)이 되고 바른 쪽은 운집(雲集)이라 하고, 문은 적광문(寂光門)이라 하고, 다음 바깥문은 반야문(般若門)이라 하고, 다음 바깥문은 해탈문(解脫門)이라 하고, 종각(鍾閣)은 법뢰각(法雷閣)이라 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청은 향적료(香寂寮)라 하였다. 그리고 동편에는 못을 파서 연을 심고, 서편에는 동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정전 뒤에다 장경(藏徑)을 장치하여 해장전(海藏殿)이라 하였다. 또 13층의 탑[窣覩婆]를 세워 분신사리(分身舍利) 및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안치(安置)하고 보니, 전당(殿堂)ㆍ요사(寮舍)ㆍ창고(倉庫)ㆍ주방[廚湢]이 각각 위치와 순서를 얻어 규모가 굉장하고 금벽(金碧)이 휘황하며, 장려(壯麗)한 제작의 아름다움은 그 짝이 적으며, 심지어 건퇴(犍椎.鍾磬)의 도구와 항시 사용하는 모든 기구까지도 다 풍부하게 갖추어졌다.
다음 해 4월 8일에, 명하여 여러 절에 있는 운석(韻釋)들을 불러 크게 법회(法會)를 배설하고,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전독(轉讀)하면서 낙성을 하게 함과 동시에, 전하는 친히 도량에 나아가 시종(侍從)ㆍ신료(臣僚) 및 외지에서 빙문(聘問) 온 자로 하여금 모두 들어와 예를 드리게 하였다. 이 때에 오색구름이 떠돌고 천화(天花)가 비에 어울리며, 흰 용(龍)이 공중에서 굼틀거리고, 두 학이 구름 사이에 오락가락하며, 아름다운 상서가 밀려드니, 만인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특히 사승(寺僧)에게 쌀과 필육을 내려 주었다.
또 그 이듬 해 4월 8일에, 탑이 완성됨으로써 법회를 베풀고 전하께서 친히 거둥하시니, 또 천화와 서기와 사리의 기적이 있고, 또 하얀 기운[白氣]이 치솟아 올라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 가로 공중에 뻗혀 빙 돌아 바퀴가 되어 중중첩첩하여 다함이 없고 햇볕이 노랗게 되니, 승니(僧尼)와, 도속(道俗)이 우러러 바라보며, 두 손을 이마에 얹고 절을 드리는 자가 억만으로 계산되며, 환궁(還宮)하게 되어서는 학생(學生)ㆍ기로(耆老)ㆍ교방(敎坊)들이 모두 노래를 올리며, 도성 안의 남녀들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메우고 서로 뛰고 춤추니 환호 소리는 우뢰와 같았다. 전하는 특사령을 내리고 백관에게 벼슬 한 계급씩을 올려 주니, 백관들이 입을 모아 청하기를, “신(臣)들이 엎드려 보옵건대 큰 가람(伽藍.절의 이칭)을 짓고, 큰 법당(法幢.法旗)을 세우고, 큰 법회를 열어서 신기한 상서가 한 가지만이 아니었으니, 실로 전고에 듣기 드문 일이옵니다. 오직 부처의 도화(道化)가 불가사의 일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전하의 지극하신 덕이 도에 엉겨서 묵묵히 최상승(最上乘)에 계합한 까닭이오니, 돌에 새겨 영원한 세상에 보이도록 하여 지이다.” 하니, 이에 신 수온(守溫)을 불러, “글을 지으라.” 하시므로, 수온은 명령을 받들고 황송하여 감히 사양을 못하였다. <이하 세조 찬양부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