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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묵상글 (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 원수 탓, 불행 탓.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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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12 04:25
- 원수 탓, 불행 탓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면
정당방위 차원에서 제가 그를 실제로 죽일까? 아니 죽일 수 있을까?
지금 생각은 피하거나 방어는 하겠지만
제가 살기 위해서 그를 죽이지는 못할 것 같고 그래서 제가 죽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경우 제게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저를 죽이려고 하면
제가 살기 위해 그 아들을 제가 죽일 수 있을까요?
생면부지의 사람도 죽이지 못하는데 제가 제 아들을?
아들을 살인자 만들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막을지라도
나 살기 위해 아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고 칼로 찌른 아들 보며
경찰이 오기 전에 어서 도망가라고 현장에서 피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저 살기 위해 아들을 죽인다면
저는 아버지도 아니고 저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본래 원수이기 때문에 원수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들도 원수가 되고
사랑이 있으면 원수도 원수가 아니고 아들이 됩니다.
제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옛날에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지요.
여의도 광장이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차를 광장으로 몰아
그곳에 놀러 왔던 여러 사람을 죽게 했는데 손녀를 잃은
할머니가 교도소에 있는 그 젊은이를 찾아가 용서해주고,
세례도 주고 마침내 아들로 삼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본래 원수가 있어서 그가 내게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사랑이 없어서 그가 내게 원수가 되고,
사랑이 없으면 없을수록 내게는 원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고,
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행 선언과 연결하면
사랑 없는 사람이 불행하고 원수도 많은 법입니다.
왜냐면 원수란 그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에 원수인데
앞서 봤듯이 내게 사랑이 없을 때 그는 원수가 되고
그로 인해 내가 불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넘치면 원수는 없고 행복합니다.
왼뺨 맞을 때 오른뺨도 맞아줄 수 있는 사람이
뺨 한 대로 원수가 되고 불행해지겠습니까?
한 대도 안 맞으려는 사람 그래서 말 한마디에 존재가 휘청일 정도로
타격이 큰사람이 말 한마디에도 불행해지고 때린 그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 탓,
불행 탓,
너에게 돌리지 않고 나에게 돌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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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가수 패티킴의 히트곡 ‘그대 없이는 못살아’의 가사 일부입니다. 어렸을 때 그냥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였는데, 며칠 전에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너무 부담되고 무서운 내용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없어. 나와 함께할 거지? 그러면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 일 것 같습니다.
깊이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에 아름답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행복을 책임져 달라는 정말로 대책 없는 말이 아닐까요? 종종 데이트 폭력 문제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까?’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집착은 죄가 됩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집착은 추합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들은 입으로 사랑을 말할 뿐 집착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결코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헤어지고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위한 진정한 사랑에 집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짜 사랑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 사랑에 관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위를 뛰어넘습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잘못된 사랑인 ‘집착’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은 집착의 모습도, 욕심과 이기심이 담긴 모습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전혀 받을 것이 없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사랑하라고, 혹시 반대의 마음이 들 때라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사랑에 가까워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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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조지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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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세상에는 내가 잘했던 잘못했던,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내 뺌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나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중책이요, 그들이 한대로 되돌려주거나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책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상책을 행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뒤에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자비를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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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드는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희생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사랑을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 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내려놓으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갈라2,20) 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연장입니다. 해도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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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금주를 하신 건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79년입니다. 형제 중에 술을 잘못 배운 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며,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금주가 형에게 영향을 준 건 아니지만, 저는 아버지의 단호한 결심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성서 필사를 하였습니다. 자식이 사제가 된다는데 아버지로서 성서를 가까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성서 필사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제가 사제서품 받았을 때, 아버지는 저의 서품 성구를 족자에 써 주었습니다. 제가 받은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사제인 제가 책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신 아버지는 늘 책을 읽으셨습니다. 제게도 책을 가까이 하면 좋겠다는 걸,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은 헌팅턴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그토록 원하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장례미사 강론 중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면서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형을 대하였습니다. 형이 집을 나가면 어머니는 늘 따뜻한 밥을 한 공기 남겨 놓았습니다. 먼 길에 지친 형이, 혹시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형이 오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늘 기다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기일을 꼭 챙겼습니다. 연미사를 신청하였고, 연도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본인의 건강보다는 자식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음력이라 생일을 기억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식구들의 생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생일을 제대로 기억 못했지만, 어머니는 저의 생일을 챙겨 주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인사이동이 되면 저보다 먼저 제가 가야 할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시골 성당의 본당 신부로 갔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저의 부탁을 받고, 3년 동안 저와 함께 지냈습니다. 사제관 일도 하였고, 예비자 교리도 하였고, 환자 방문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영정 사진은 복자회 재속회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미사는 갈 수 없었지만, 추기경님께서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낌없는 사랑을 남겨 주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천상에서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선택받는 또 다른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십니다.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이 길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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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떤 드라마에서 남자 배우가 자신을 칭찬하는 상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일지 몰라.’
간혹 면담하다 보면 상처와 아픔을 깊이 간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면담이 이어질수록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 상처받은 사람은 있는데 상처 준 사람은 없을까?
내게 면담 오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받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실수하고 잘못하고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피해자도 될 수 있지만 가해자도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꼭 위의 대사처럼 우리는 누군가에는 좋은 사람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서 우리는 피해자일까요, 가해자일까요? 아마도 가해자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용서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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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장마철이었습니다.
매일 비가 오는 바람에 매일 동네를 걷던 제 몸은 근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살짝 비의 양의 줄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운동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나갔습니다.
물론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운동화가 젖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옷이 젖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걸었습니다.
점점 물이 들어차는 운동화를 신고.
그래도 기분 좋았습니다.
점점 옷이 젖어와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 줄 알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이미 알고 있는 고난을 우리는 걸어야 합니다.
그럴 땐 이렇게 자신에게 말하세요.
나는 알고 있었어. 운동화가 젖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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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의 평생공부
“주님,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시편139,1-2)
교황님의 동향으로 시작하는 요즘 강론이 신납니다. 피곤하거나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 88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불가사의 신비입니다. “위대한 마음의 사람(a man of great heart)”이라 격찬을 받은 교황님에게 저는 “사랑의 거인(巨人;Giant)”이란 칭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주 4개국, 제45차 사목여정에 오른 교황님은 어제 9월11일 마지막 방문국인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홈페이지 소개된 동티모르에서의 기사 내용도 반가웠습니다.
“꿈은 현실화되었다(dream come true)!”
“자유는 타인들을 존경할 선택을 의미한다.”
“나는 동티모르 사람들의 얼굴에서 발견한 웃음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은 ‘생명, 희망 그리고 미래’를 생각나게 한다.”
“교황님의 동티모르 방문은 ‘믿음의 축제’였다.”
말그대로 “사랑의 거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문득 떠오른 제목이었습니다. 저절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도 배워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2000년도 MBC의 인기드라마 제목이었고 노래도 있습니다. 이때 드라마의 인기 커플 배우는 결혼에 골인하여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인생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라 사람입니다. 평생 사랑 공부는 평생 하느님 공부입니다. 사랑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나의 실현이요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는 오늘 복음의 다음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원수 사랑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끼리끼리 나누는 유유상종의 사랑은 누구나 합니다. 진짜 사랑은 인간 누구나에게 한결같은 존중과 배려, 연민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설명이 필요없는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사랑의 복음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속마음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표현되는 느낌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솟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은 비겁한 무저항이 아니라 사랑의 적극적 저항입니다. 악순환을 끊어버림으로 악을 무력화하는 길은 이런 하느님 다운 적극적 사랑뿐이겠습니다. 우리의 원수나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 학대하는 자들은 상처받은 사랑, 결핍된 사랑의 불행한 이들일 수도 있고 또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나름대로 까닭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명령대로 사랑할 뿐이며 주님은 이런 힘을 주십니다.
새삼 결코 값싼 사랑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주님 “사랑의 전사”가 되어 온힘을 다해 용감히 실천할 사랑이요, 이렇게 불가능하다 싶은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받을 상이 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계속 구체적 사랑의 실천을 명령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몰라서 심판이요 단죄지, 우리가 정말 얼마나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는지, 또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면 알수록 심판과 단죄는 멈출것이요 끊임없는 사랑의 용서와 나눔이 뒤를 이을 것입니다. 새삼 이런 사랑의 실천에 앞서,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기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은 우리에게 샘솟은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열정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이 더욱 사랑의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고무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는 한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본질이며 존재이유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이유인 하느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온힘으로 온마음으로 온정신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샘솟는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을 선물하실 것이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저의 길이 굽었는지 살펴보시고,
영원의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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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사랑하렵니다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내어주렵니다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보듬으렵니다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용서하렵니다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자비로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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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사랑의 덕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로 우리는 사랑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교회가 들었던, “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이랍니다”(아가 2,4)라는말씀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계율들이 설 때 그 깃발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사랑이 어떻게 가장 높은 곳에서 비롯되어 율법을 복음의 축복아래 놓는지, 율법은 벌로 앙갚음할 것을 명합니다(탈출 21,23-36 참조).
복음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치며,굶주리는 사람에게 참을성을 주고 은총의 상을 내립니다. 상처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운동선수야말로 얼마나 완벽한 선수인가요!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이처럼 하느님의 위로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만이 사람을 완전히 위로해 줄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존재로 알려진 하늘나라다. 하느님만이 “나는 ~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있음은 무언가가 자체적으로 하느님을 어느 정도 담고 있음을 뜻한다.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생명은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에 달려 있다.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만이 완전히 위로할 수 있다. 위로를 주는 것은 존재다. 위로를 완전하게 주는 분은 하느님뿐이다. 하느님만이 충만하게 존재한다. 나는 ~이다 라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느님 밖에 없다. 하느님, 곧 충만히 존재하는 존재만이 위로를 충분히 줄 수 있다. 엑카르트는 요한 복음 8장 12절의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를 설명하면서 먼저 “나는 ~이다”라는 진술에 골몰한다. 레이몬드 브라운과 같은 현대의 학자들처럼, 엑카르트도 예수가 말한 “나는 ~이다”라는 진술과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야훼가 스스로 자기를 일컬어 말한 이름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본다. 브라운은 출애굽기 3장 14절을 “‘야훼’의 의미를 말해 주는 가장 중요한 성서 구절”이라고 말한다.(238)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영혼 승화의 비결
이 얼마나 기막힌 마음씀씀이일까? 춤에 들떠서 중요한 로사리오 기도까지 생략하던 히야친타였는데.... 이 얼마나 놀라운 진보인가! 그 얼마나 감탄스러운 열심언 ! 묵주 기도를 드려야 할 약속을 날마다 친구들에게 깨우치는 것은 제일 어린 그녀였다. 일단 이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
소녀는 하늘의 어머니께 대한 사량의 성실함을 드러내기 위해 갑자기 모든 것을, 재미있게 노는 것이나 이야기라도 뚝 그쳐.버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사랑하는 영혼은 사랑을 하도록 이끌고 노력하는 영혼이다. 히야친타의 바람은 자신이 성모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크리스찬 모두가 성모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가족 한 사람 한 사람마다가 자신의 열심에 동참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미 알고 있듯이 이 세 아이의 가정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이름을 훌륭하게 빛내고 있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두 가정 다 그들의 눈에는 완전한 모범적 가정으로 비치지는 않았다.
히야친타네 집에서는 원래가 묵주 기도를 매일 드리지 않았었다. 따라서 집안 식구가 한데 모여서 묵주 기도를 바친다는 것은 히야친타에게 있어서 바로 사도적 사명의 첫번째 노력인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발현의 그날부터 그녀는 어머니 곁에 가서 매달리며 열심히 이 신심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조르는 성미인지라 결국 그녀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게 되어 날마다 충실히 정확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묵주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어머니 올린삐아는 후에 교회측 조사석상에서 이에 관해 아이들이 발현자에게 순종하기 위해 스스로 로사리오 기도를 드렸을 뿐 아니라 이 신심이 널리 전세계에 보급되기를 얼마나 바랐으며 또 이를 위해 극진히 노력했었던가를 말했다.(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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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6,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하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수도 생활을 살아오면서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마음에 조금씩 겹겹이 쌓여가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속성을 말하자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단어에서 자慈는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고, 비悲는 다른 이의 슬픔을 덜어준다는 뜻을 내포한다고 합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부처의 마음을 가리키는 불교의 핵심 덕목입니다. 성경에도 자비라는 표현은 신구약에선 무려 245번이 나올 만큼 빈번하게 나옵니다. 새로운 번역에서는 ‘자애慈愛’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는데 하느님의 사랑, 호의, 인자 등 복합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자비란 어원은 어머니 자궁을 의미하는 라하밈 rahamim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는 곧 자궁을 의미하며, 자궁은 모든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자비는 단지 측은히 여기는 마음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존재의 조건, 상황에 온전히 잠김이며 함께함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에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고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자비로운 존재가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大慈大悲하시며 同體大悲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같은 자비를 강조하지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쨌든 그리스도교에서나 불교에서나 자비(=사랑)는 구원을 위한 최고의 실천 윤리이며, 구원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은 두 종교 모두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인이 “원수를 사랑하고,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속옷도 벗어주며, 달라는 사람에게 줄 수 있도록”(6,27~30) 자비로워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에게 이처럼 자비를 베푸셨고, 자비를 체험한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하고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잘해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야 할까요?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그리고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속옷도 벗어주어야 합니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내 것을 훔쳐 간 사람에게서 되찾으려 하지 말아야 할까요? 이 모든 것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납득할 수도 없거니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한없이 크신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께서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그냥 단순하게 “너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비를 실천할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6,35)라고 축복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자비 실천은 계산적인 주고받음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비를 베풀어 주셨듯이 우리 또한 아빠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으로 자비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사도 바오로는 일깨워 주시며, 이런 자비의 실천이야말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의 효성이며 효도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자비의 실천은 아빠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우리의 자비 실천은 우리의 힘이나 소유를 나누는 것이 아닌 단지 아버지의 자비를 퍼서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을 닮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살려는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는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1콜3,12)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자비하신 아빠 하느님처럼 우리 또한 자비로운 존재와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자비로우신 당신을 닮아 저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자비를 살고 싶으니 힘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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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사랑보다는 용서가 더 /
박윤식 [big-llight] 2024-09-11 ㅣNo.175879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가난하고 비폭력의 삶을 살았다. ‘마하트마’는 그의 본 이름이 아닌 명예로운 호칭으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라나. 그는 1948년 기도하러 가던 중 힌두교 광신자가 쏜 총에 맞았다. 그는 죽어 가면서도 살인자를 보려 하였지만, 보지는 못했다. 힘이 빠진 그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 얼굴을 거쳐 이마에 올려놓았는데 그게 화해의 표시였다. 세상을 향한 그의 마지막 동작이었다. 이게 간디를 인류 모두의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어떻게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를 이렇게 사랑할 수가 있을까? 그 길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거다. 그분께 깊이 뿌리내리면 그 열매 또한 사랑으로 맺게 하기에. 참으로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는 모든 원한을 그렇게 사랑으로 갚았다. 예수님께서도 원수를 보복하지 말라시며,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 주는 자비를 베풀라신다. 사랑하는 이들끼리는 사랑에 빠진다지만, 원수라 여기는 이를 사랑하기란 정말로 강한 의지가 따라야만 할 게다.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헐뜯는 이, 곧 원수 같은 이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에게 축복을 기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리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라는 그 엄청난 피비린내 나는 보복의 법을, 그분께서는 네 한 뺨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마저 내밀라시며 사랑 계명으로 바꾸셨다. 또한 남이 해 주기 바라는 그대로 그저 남에게 해 주라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소극적인데 있지 않고 오히려 ‘나 아닌 남’에게 적극적인데 그 뚜렷한 특징이 있다는 거다.
죄인들도 반대급부가 분명하면 다른 이들을 어느 한 순간에는 돌보아 줄게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자비의 계명이 있기에.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철천지원수도 사랑하라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라고 이르신다. 이렇게 할 때만이 증오와 경멸의 삶이 평화의 길로 나아갈 게다.
사과나무는 많은 열매로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하고 가지를 잘라 집을 짓게 했으며, 줄기를 잘라 배도 만들게 했다. 나이가 들어 앉아 쉴 곳이 없자 자신의 그루터기도 내어 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게 감사하는 우리는 마냥 자비로울 수밖에. 자신이 거저 얻은 것으로 돈을 벌었고 집을 지었고 여행을 떠났으며 쉬기까지 하였기에. 그러니 누군가 자신의 것을 가져가더라도 자신도 그렇게 받았기에 그것에 자비로울 수 있다. 감사하니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하려는 것보다 하느님께 감사하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이기에. 이것을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살과 피를 내어 주셨다. 용서는 어쩌면 덕이다. 평생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순간에 용서하려 든다. 이게 실패하는 크나 큰 이유다. 기회가 온다면 ‘늘 좋게 말해야지!’ 한다. 허나 때로는 뼈아픈 인내와 훈련이 필요하다. 상대를 위해 ‘억지라도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리하면 상대가 조금은 더 좋아 보인다.
이것만이 헐뜯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해지리라. 이렇게 사랑에서 용서는 시작되리라. 서서히 좋게 생각해 가는 게, 용서의 시작이니까. 정녕 상대방 입장에 서 주는 게, 용서의 출발이다. 사랑과 용서에는 그 어떤 계획이 없다나. 지금 용서하고 사랑하는 게 바로 출발의 시작이다.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말은 사랑과 용서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사랑보다 용서가 더 절실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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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부담스럽지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였다면 스스로 복음을 재단할 수는 없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잘하고, 나쁘게 하는 사람에게 나쁘게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합리적인 행동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와 같은 동물도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단순히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인간답지 않습니다.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이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대로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카 6,35)는 다시 이것도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려면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여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 살아 있다면, 분명 그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과는 삶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전원을 켜면 기계가 돌아가고 끄면 멈추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힘으로만 살고 있는지는 그 행위를 보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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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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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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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천상적 사랑, 참사랑을 요구하시는 주님!
너무나 억울하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들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피정 센터를 찾은 분들 가운데 참으로 많은 분들이 그런 사연 한 보따리를 안고 오십니다.
그를 떠나 보낸 이후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그분들 바라보며 너무 환하게 웃고 다녀도 안 되겠구나,
너무 행복한 표정 지어도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가 없는 이 세상,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분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를 불시에 떠나보내고 난 후 사는게 사는게 아닌 분들, 차라리 내가 그를 대신해서 먼저 갔으면 하는 마음에, 밥숫가락 뜨는 것조차 송구스런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게 한 그 웬수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요?
참으로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복음의 가르침,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대목을 접할 때 마다 화딱지가 하늘 끝까지 솟구치니 참으로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은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고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원수는 보통 어떤 사람을 두고 원수라고 합니까?
국어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나 자기 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결국 원수는 나를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트린 사람, 잘 나가던 내 인생을 끝장나게 만든 사람, 내 가정을 산산조각나게 만든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니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의 양보,너그러운 관용, 신사다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적극적인 천상적 사랑, 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라는 말씀,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넘어서야 가능합니다.
자아를 완전히 초월해야만 가능합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적당히 한걸음이 아니라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넘어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인성을 극복하고 신성을 획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요원해 보이겠지만 언젠가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우리의 시야가 좀 더 광대해지고,
우리 안에서 신성이 점점 성장해가는 어느 순간, 불가능해보이던 예수님의 권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 인간은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성향에서 이타적 성향으로, 인간적 사랑에서 신적 사랑으로 나아가 마침내 기꺼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그날, 우리 삶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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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 믿음의 황금률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만의 관습이다. 주님의 말씀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눈에는 눈.”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29절) 이것은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주님께서는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29절)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우리는 스테파노에게서 볼 수 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라며 용서를 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인인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자비는 더없이 훌륭한 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는 복수심을 없애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37-38절)라는 말씀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와 자비의 실천을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두 자선을 하여야 한다.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께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악행을 갚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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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법원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어떻게 남을 심판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은 환경이 만듭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머무느냐가 곧 나의 모습입니다.
바이킹의 예를 들어봅시다.
바이킹은 먹을 것이 없는 춥고 척박한 산지에 살던 이들이 더는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약탈자가 된 예입니다.
누가 전쟁을 좋아할까요?
척박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사람은 어째서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떠날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되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주님께서 포근히 안아주고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착할 수밖에 없고, 서로 자주 싸우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은 집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 머무느냐에 의해 내가 형성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엔 파라오의 압제하에서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을 탈출시킨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원 예물을 받아 성막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전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전 안에서만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치하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부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받는 환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판사는 그 전 해 12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판사들의 애환과 직업병’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기본적으로, 판사는 생산적인 직업이 아니다.”라며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울러, 판사라는 직업은 원고와 피고, 검사와 피고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재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러분, 그래도 자녀들을 판사 시키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2010-8-3, 조선일보 기사 참조]
모 부장판사는 왜 판사라는 직업을 하면서 그리 비관적이었을까요? 이것은 그가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과 같은 심판을 하는 재판정의 피고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환경이 있고 그 환경 안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피오렐로 라 과르디아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제99대 뉴욕시장을 역임하는 등
뉴욕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법률 경력을 쌓았으며
뉴욕에서 판사로도 재직했습니다.
라 과르디아가 뉴욕시의 판사였을 때 한 남자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그 앞에 끌려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빵을 훔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법이 위반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처벌해야 했지만, 상황은 비극적이며 사회가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돌보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남자에게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 벌금을 지불하기 위해 즉시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냈습니다.
그런 다음 법정으로 향하여 그에 대한 책임은 뉴욕 모든 시민에게도 있다고 하며 생존을 위해 빵을 훔쳐야 했던 그 사람에게 돈을 모아서 주도록 하였습니다.
모은 돈은 피고인과 그의 가족을 돕기 위해 전달되었습니다.
왜 같은 위치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심판관의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성전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보일까요?
그 사람이 믿고 사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누가 되기를 원합니까? 성전은 누군가의 죄를 없애는 일을 위해 창조가 진행되는 때는
영원히 지속할 것이지만, 재판정은 이제 사랑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조원동 주교좌성당에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재판관으로 하늘에 떠 있는 예수님만이 성전 중앙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 옆에 세웠습니다.
신자들이 성전의 주인을 심판관이 아닌 엄마처럼 보이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서받는 환경에 있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성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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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수란,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입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27-36).”
1)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다.” 라는 생각을, 또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은 일종의 고정관념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계명들을 주신 분이 아니라,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계명들을 주신 분입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셨다면, 신앙생활은 아주 적은 수의 성인 성녀들이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소수의 정예 요원들만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루카 10,30).”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일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쪽이었고, 박해를 받는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일입니다.
3)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강도당한 사람’은 원수 같은 유대인이고,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가 아니었는데도, 또 자기에게 잘해 준 이가 아니었는데도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대가’나 보상금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닙니다.
치료를 하느라고 사용한 돈을 돌려 달라고, 또는 갚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돌려받는 것 자체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당장 목숨이 위험하니까 응급조치를 한 것이고, 치료와 간호가 필요하니까 그것을 한 것입니다.
그 일에 무슨 이유나 욕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랑 실천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4) 31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도 있는 ‘황금률’입니다(마태 7,12).
이 ‘황금률’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적용하면,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자기 입장에서’가 아니라,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일입니다.
<“만일에 내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일들을 ‘착한 사마리아인’이 나에게 해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원수 같은 사람인데,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그가 베풀어 준 일들을 보답하거나 보상할 능력이 나에게는 전혀 없는데, 그런데도 그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응급조치를 해 주고,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시간과 자기 돈을 들여서 밤새워 나를 간호하고, 나의 치료비와 숙박비를 대신 내주고......
사랑이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기. 내 입장과 내 기준으로 판단해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일.>
5)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원수란, 원래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는, ‘같은 계명’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원수를 사랑한 일이면서 동시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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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마음으로 조금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큰 상처를 주고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니 참으로 막막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시니 그런 일이 가능하겠지만, 부족하고 약하며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미숙한 존재인 나로서는 원수의 잘못을 그저 용서하는 수준도 아니고 다짜고짜 그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너무나 무리한 요구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원수는 처음부터 원수였던 게 아닙니다. 나와 원수가 된 이들 중 약 90% 정도가 나와 잘 알고 지냈던, 꽤나 친했던 이들입니다. 그들 중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으며 같은 성당 교우들도 있지요.
그렇게 잘 지내던 이들이 왜 갑자기 ‘원수’가 되었을까요? 내가 그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그들을 무턱대고 믿었다가 그들이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대로 따라주지 않는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는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돈을 꾸어주기도 하고 이것 저것 잘 챙겨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사람은 나를 그 정도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점이 실망이 되고 서운함이 되고 상처가 됩니다. 그 상처를 계속해서 곱씹을수록 상태가 심해지고 내 마음에서는 미움과 원망이라는 고름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굳어지면서 그는 나에게 더 이상 상종 못할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사람을 믿은 게 왜 잘못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을 신뢰하는 것 자체가 윤리 도덕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함부로 믿는 건 절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나중에 어떤 선택을 할지 나 자신조차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믿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믿을까요? 다른 사람을 믿는 그 근간에는 나 자신을 믿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성찰 없이 나 자신이 어떤 일을 충분히 잘 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나 자신이 그런 잘못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버리니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 기대하고 믿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는 이유는 다른 이들을 통해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걸 채우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혼자 힘으로는 그것을 다 채울 수가 없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기대와 바람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대로 따라주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면서 말이지요.
그렇기에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원수는 결국 내가 스스로의 욕심에 휘둘려 다른 사람을 함부로 믿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 욕심을 버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자비’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입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지를 잘 압니다. 또한 자기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도 자기처럼 부족한 존재임을 알지요. 그래서 섣불리 다른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대로 그가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부족함은 오직 하느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자기 것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베풀고 나누면 하느님께서 거기에 넘치도록 후하게 덤을 얹어서 나에게 큰 은총과 복으로 되돌려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직 하느님만을 굳게 믿으며 다른 이의 부족함과 약함, 실수와 잘못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사람에게 실망할 일도, 내 마음 속에 원수를 만들 일도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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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
초대교회의 걸림돌 중에 하나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마음이 약한 교우가 그 음식을 먹고 양심의 가책을 갖는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배경에서 보면 이 문제는 심각하지만 사실 이교도에서 개종한
그리스도 신자는 그 관습에 익숙했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는 구약의 율법에서 젖어 살았기 때문에
이해의 폭이 좁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는 교우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말라는 뜻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이제까지 갖고 있던 관습이나 사고방식을 비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그런 것에서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고
또 너그럽게 이웃을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자신의 성격에 묶여서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이나 성격에서 자유롭기가 힘들기에 교회에서는 양심성찰의
시간을 갖고 매일 자신을 둘러보라는 권고를 합니다.
로마에 있을 때 진풍경 중에 하나는 오전 수업이 끝나거나 오후 수업이 끝날 때
교수 신부님을 만나러 수도원을 찾으면 많은 교수 신부님들이 정원을 거니는
모습을 봅니다.
그 시간이 양심성찰의 시간이라고 하더라구요.
저렇게 단순하고 훌륭히 사는 수도 성직자이며 교수분들이 매일 두 차례나
양심성찰을 하는 것이 큰 감동이었습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기 쉬운 부정적인 심성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우리도
매일 자신을 둘러 보는 양심성찰의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매일 자신의 허물을 고치며 기쁘게 사는 삶이 된다면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적어도 남을 탓하지는 않기 때문에 오히려 겸손과 함께
자신에게 진지할 수 있겠지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에 상반되는 말이라면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라는 내용이겠지요.
이웃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은 속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얼핏 보기에는 인간적인 멋이 없어 보일 수 있고 싱겁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아픈 체험 후에나 가능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부가 또 자녀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라면 사랑과 함께 초연한
삶이 될 것입니다. 무관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 하겠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제자들이 생활에서 지켜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지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루카 6,33-34)
마음을 비우는 사람이라야 이 말씀의 정신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진정으로 이웃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5절)
그리고 ‘완전한 자리’가 ‘자비로운 자리’가 되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하루가 내 이웃에게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 된다면 오늘 하루는
얼마나 멋지고 복되겠어요?
내 이웃을 이해하지 못하는 좁은 마음이면 그 자체가 불행과 슬픔의
부메랑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오고 또 돌아 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따뜻하고 베푸는 마음은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또 다시 나에게
돌아오고 또 와서 이제는 이웃까지 행복하게 만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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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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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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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돌보시고 지키시는 은혜를 누리는 삶
<2024.9.12>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6:1~14절)
❝돌보시고 지키시는 은혜를 누리는 삶❞
❚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세심하게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어떠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까?
➲ 세심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1~7절).
엘리사의 제자들이 엘리사와 함께 거주하는 곳이 너무 좁아 요단으로 가서 살 곳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1~2절). 거처할 공간이 좁아졌다는 것은 엘리사의 제자들이 많아졌음을 말해 줍니다. 엘리사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함께 갑니다(3절). 제자 중 한 명이 쇠도끼를 빌려 나무를 베다가 물에 빠뜨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는 당시 구하기 어려운 비싼 쇠도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매우 당황하며 낙담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 도끼가 어디에 빠졌는지를 묻고 나뭇가지를 베어 그곳에 떨어뜨리자, 쇠도끼가 기적적으로 떠오르고 그 제자는 도끼를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제자의 어려움과 난처함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엘리사를 통해 기적적으로 방법으로 도와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삶의 어려운 문제 앞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 자신의 실수로 문제가 일어나고 사고가 벌어질 때에라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므로 회복의 자리에 인도해 가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우리 자신을 돌보아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로, 때로는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세심한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다양한 문제로 인한 염려와 근심 앞에서라도 세심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세밀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8~10절).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전쟁을 하고 있던 무렵에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군대를 이동하면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 정보를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알려 주므로 이스라엘이 위기를 모면하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8~9절). 인간의 계획과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한 그곳에 사람을 보내어 그곳을 엄하게 경계하도록 하였는데, 그와 같이 경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10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람의 군사력과 정보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처지였지만, 아람의 군대에게 패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가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했을 때, 전쟁에서 패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매 순간 영적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우리 역시 사람의 전략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의 전략과 지혜를 더욱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며 도우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승리의 비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날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므로 세밀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신실하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11~14절).
아람 왕은 자신의 공격을 미리 알아채서 정확하게 대비하며 막아 내는 이스라엘을 보며 ‘마음이 불안하여...’ 신하들을 불러모아 추궁하였습니다. 그것은 내부에 스파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파이를 색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신복 중 한 사람이 엘리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알려줍니다(11~12절). ‘왕의 침실에서 하신 말씀’까지 안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곧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람 왕은 엘리사를 그냥 놔둔 상태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엘리사를 찾기 시작합니다.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는 보고를 받은 아람 왕은 기마와 병거와 중무중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습니다(13~14절). 아람 왕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가 이스라엘의 병거인 엘리사임을 알았으나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사탄과 세상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자로 살아갈 때 그리고 교회에서 중직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도 우리는 세상의 핍박이나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영적으로 민감하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며, 우리가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또한 아시는 분이십니다(시 139:2~4).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돌보시고 도우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지키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의 뜻과 사명에 집중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매 순간 신실하게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실수나 잘못으로 힘든 지경에 처했을지라도 세심하게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영적 도전 앞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하여 도전과 유혹 앞에서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께로 시선을 고정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삼하 6:1~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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