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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이에서 심운택의 역사적 인물은 바로 김춘택입니다. 김춘택의 자는 백우, 호는 북헌으로 서인 노론의 중심가문인 광산 김씨의 명문 자재였습니다. 또한 숙종의 첫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고모로서 숙종의 조카였습니다. 아버지는 호조판서인 김진구였고, 할아버지는 광성부원군 김만기, 증조부가 바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 김만중입니다. 김춘택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김수항의 탄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춘택의 가문은 1689년 기사환국 이후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김춘택 역시 여러 차례 유배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김춘택은 기사환국 이후로 몰락한 집안과 서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서인 세력들을 규합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숙빈최씨와 김춘택의 만남은 1689년에서 1693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두 사람은 1670년생으로 나이도 같고 20대 초반의 한창 때 서로 만나게 됩니다. 숙빈최씨가 천한 무수리의 신분에서 숙종의 눈에 든 것은 수문록을 보면, 폐출된 인현왕후 탄신일에 성찬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다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숙빈최씨가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었다기 보다는 정치적 해석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바로 조사석이 장옥정을 숙종의 눈에 띌만한 곳에 들여보내 숙종의 관심을 얻어낸 것처럼, 김춘택 역시 숙빈최씨를 숙종의 눈에 띌 수 있게 만든 계략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김춘택은 숙빈최씨를 이용하여 장희빈을 견제하고, 서인이 정국을 뒤집을 판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황당한 점은 김춘택과 숙빈최씨의 관계는 서로 연인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면서도 김춘택은 숙빈최씨를 후궁으로 들어가게 도와주고, 자신은 그것을 서인의 세를 다지는데 이용했던 것입니다. 역사에 있어 아직도 숙빈최씨의 아들인 영조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숙빈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시키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 사람들 태반이 믿던 소문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1693년 4월 23일 성은을 받은 숙빈최씨는 첫째 아들인 영수를 10월 6일에 낳았는데요. 결국 태어난 지 두 달 만인 12월 13일 영수는 갑작스레 사망하긴 하지만, 대략 5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에 숙종의 아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694년 9월 13일에 연잉군(영조)이 태어났는데, 이것 역시 아이를 밴 날짜를 거꾸로 세어보면 영수가 사망할 때쯤 바로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수의 죽음으로 위협을 느낀 김춘택과 숙빈최씨가 다시 아이를 갖기 위해 사랑을 하였고, 연잉군은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죠. 이 때문에 영조는 집권 내내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다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1728년 3월 15일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인좌의 난은 보름 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내 190여 차례 괘서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김춘택은 장희재의 첩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숙빈최씨는 장희빈의 미모를 능가하는 미인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시대 최고 훈남훈녀의 만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귀양지를 떠돌던 김춘택은 1717년 4월 22일 객지에서 숨을 거두고, 이듬해인 1718년 3월 9일 숙빈최씨 역시 원인도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