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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갑골문》이야기
Ⅰ. 갑골문이란
갑골문(甲骨文)이란 거북의 등껍질이나 소나 양의 견갑골(어깨뼈)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지금까지 출토된 갑골문은 약 16만 편, 5,000여 자에 달한다고 한다. “한자에 대한 기피증이 있는 학생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자교과서〉같은 책으로 엮었다. 한자 조자(造字) 원리인 육서(六書), 갑골문, 금문(金文),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통해 한자에 대한 이해는 물론, 한자 전반에 관한 학습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출판사는 이 책을 소개했다. 〈나눔사〉에서 2019년에 출판한 이 책의 저자 이주은 선생은 서평에서 소개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갑골문이 만들어진 시기는 중국 상나라*와 은나라 시대로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까지 273년 동안 존재했던 은나라가 주(周)나라에게 망할 때 은나라 수도였던 하남성 안양시에서 - 당나라 때는 소둔촌(小屯村)이라고 불린 곳 - 청나라 때인 1899년 국자감 제주(國子監 祭酒) 왕의영(王懿榮)에 의해 발견된 유물로 발견 당시에는 갑골문을 용골(龍骨)이라고 불렀다.
*상(商) : 기원전 1400년경∼기원전 1046년까지 존재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로도 불리고 은나라에서 나온 유적을 은허(殷墟)라고 한다.
갑골문이 중국 최초의 한자인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존재하는데 상형(象形) 문자인 갑골문자 이전에 이미 바탕이 되는 문자가 있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으로, 그것은 갑골문보다 1천 년 전에 종정문(鐘鼎文-금문이라고 한다)이 있었다는 것으로 1980년대 섬서성 서안에서 글자가 쓰인 소량의 갑골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갑골문에는 일식·월식·성신(星辰)에 관련된 기록과 점복(占卜)에 관한 기록이 주를 이루는데, 큰비(大雨), 작은비(小雨), 가량비(糸雨), 끊임없이 내리는 비(祉雨) 등으로 비를 묘사하고, 복사(卜事)에는 ‘癸酉貞 日夕有食 佳若? 癸酉貞 日夕有食 非若? (계유정 일석유식 가약? 계유정 일석유식 비약?)’이라고 한 것은 “계유일에 점을 쳐서 저녁에 일식이 있을 텐데 길한 것인가? 아니면 길하지 않은 것인가?”라는 뜻으로 일식을 통해 길흉을 점쳤고 일식은 일반적으로 낮에 발생하지만, 저녁에 일식이 생기니 왕이 걱정이 되어 일관에게 물었을 것이다.
인류는 역사와 말(言)을 기록하기 위해 문자를 발명했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이집트의 신성문자(神聖文字-상형문자), 메소포타미아(수메르)의 설형문자(楔形文字), 그리고 중국의 한자(漢字)다. 이들 문자는 기본적으로 도화(圖畫)식 표의(表意)문자 체계인데, 다른 고대 문자 체계는 소실되거나 표음(表音) 문자로 대체되었지만, 한자만은 여전히 도화·표의를 유지하고 있다. 한자는 습득하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려우며 학습 진도또한 느리다는 단점이 있고 의미가 불분명하여 과학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아 서양 사람들의 문화를 따라갈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서양과의 발전 거리를 좁혔고 과격했던 의견들도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자에도 장점이 있다는 것인데 그 장점이란 무엇일까?
우리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도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맞춤법이 바뀌어왔다. 그래서 고대와 현대 두 단계로 나누어 보면 아무 연관도 없는 이질적인 언어로 보이기도 한다. 결코 몇백 년 전 문자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한자는 글자와 어휘 발음의 외형이 변화를 겪었지만 몇천 년 전의 문헌을 읽는데도 어려움은 없다. 이는 한자의 특징 중 하나로 중국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표음문자가 많은 음절 결합능력과 음절 변화를 통해 정확한 의미를 표현하는데 뛰어나 편의성을 보여주는데 반해, 중국어는 단음절으로 단음절을 사용해 의미를 나타내려면 의미가 혼동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표음이 아닌 표의로 발전된 것이다.
한자는 바탕이 융통과 포용이다.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연습하면 3천 년 전 상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헌을 읽을 수 있고, 또 당나라 때 한자의 발음은 몰라도 당시(唐詩)를 이해할 수가 있다. 지방의 방언도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문자가 외관상 같으므로 서사(書寫)방식으로 소통할 수도 있다. 한자의 형태를 잘 보고 이해하면 사물이 보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산봉우리 형태로 山자를 만들고 사람의 정면 모습을 따서 大자를 만들었다. 모두다 상형(象形-어떤 물건의 모양을 본땀)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象形字가 아니더라도 상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한자가 만들어진 예로 亦은 상형자인 大자에 점으로 겨드랑이를 나타난 지사자(指事字)이고, 明은 상형자인 日과 月을 합친 회의자(會意字)이다. 또 江은 상형자인 水와 음인 工을 합친 형성자(形聲字)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으로 보아 상형문자는 한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고 기본이다. 한자는 ‘언어가 문자에 반영’되었다는 점과 ‘네 가지로 발음’되는 사성(四聲)인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으로 분류된다. 그렇게 분류된 이유는 음절의 고·중·저(高中低)를 이용한 높낮이 때문이고, 현대에 와서 간서체가 널리 쓰이는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발전’하고 있다는 증거고 특징이기도 하다.
Ⅱ. 한자의 원리와 기초
한자가 처음 생긴 것은 전설 속의 삼황오제 때에 사관(史官)이었던 ‘창힐’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는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모습, 새와 동물의 발자국이 각기 다른 것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설문해자(說文解字)』서문에서 허신(許愼)은 창힐이 창제한 서계(書契-글자 부호)에 의거, 文과 字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창힐이 처음 서계를 만들 때, 사물의 부류에 의해 형체를 본떳는데 그것을 文이라 했다. 그 후 의미부(形符)와 소리부(聲符)가 더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字라고 한다.‘문’이라는 것은 사물형상(이미지)의 근본이며, ‘자’는 파생되어 점차 많아지게 된 것을 말한다.”고 했다.
한자 발생 초기에는 말과 관계없이 대상의 의미만을 담았으나 언어가 점차 생활의 도구가 되면서 말과 결합하여 문자가 담아야 할 중요한 요소인 소리까지 담게 되었다. 이것을 『설문해자』에서 字라고 했다. 현재 한자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형성구조가 바로 字다. 언어와 문자는 한 민족의 문화를 대표하게 되는데 한자는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한 문자로 한자의 기원은 ‘창힐의 창제설’외에 ‘팔괘(八卦)기원설, 결승(結繩)기원설’등이 있다.
은·주 시대부터 전한(前漢)시대까지 갑골과 죽간에 글자를 새기기도 하였으나 청동기에도 글자를 주조하거나 새겨넣은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금문(金文)’이라 한다. 金은 금속의 대명사로 왕실과 귀족들이 사용한 생활 용기와 제기(祭器)가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고대에는 청동이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거기에 새겨 넣은 글자를 ‘길금문자(吉金文字)라고 했고, 약칭해 금문이라 한 것이다. 생활 용기와 제기를 제외하면 대표적 기물이 종(鐘)과 솥(鼎)이었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자를 종정문(鍾鼎文)이라 한다.
중국은 고대 이래로 글자에 여러 가지 글씨체가 있었는데, 대별 되는 것으로 (1) 전국문자(篆書)는 금문뿐 아니라 죽간, 백서(帛書), 새인(璽印), 화폐(貨幣) 등 여러 재질에 문자를 새겼고 (2) 소전(小篆)은 진나라가 전국(戰國)을 통일한 뒤에 대전(大篆)을 근거로 정리한 글씨체를 말하고 (3) 예서(隸書)와 (4) 해서(楷書)는 한자 중에서 비교적 반듯한 글씨체고 (5) 초서(草書)는 날려서 쓴 글자 같아서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체로 실용성은 낮지만, 글씨체가 예쁘다. (6) 행서(行書)는 흘려 쓰는 글씨체로 행서와 초서 중간쯤으로 왕희지 등에 의해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글씨체다.
한자는 글자가 만들어질 때 어떤 확고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을 알면 한자를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원칙이 육서(六書)라는 것으로 배워두면 좋을 듯하다.
(1) 상형(象形) : 눈에 보이는 사물의 모습(形)을 본떠(象) 만든 그림 같은 글자로 山(산 모양), 止(사람의 발 모양), 大(양팔과 다리를 벌린 사람의 모습) 등이 그것이다.
(2) 지사(指事) : 눈에 안 보이는 개념이나 일(事)을 점이나 선으로 나타낸(指) 부호와 같은 글자로, 기준선 위나 아래를 나타내는 上, 下 등이 그것이다.
(3) 회의(會意) : 이미 만들어진 둘 이상의 글자가 뜻(意)으로 모여서(會) 이루어진 글자로 日+月은 해와 달이 같이 뜬 것처럼 밝으니, ‘明’이 되는 것과 창과 방패가 모여서 ‘武’가 되는 것 등이다.
(4) 형성(形聲) : 이미 만들어진 둘 이상의 글자가 일부는 뜻(形) 역할로, 일부는 음(聲) 역할로 이루어진 글자로 言+靑에서 말씀 言은 뜻, 푸른 청은 음을 나타내어 ‘청할 請’이 되고, 이빨 齒, 들을 聞도 그런 예다.
(5) 전주(轉注) : 이미 있는 글자의 뜻을 유추, 확대하여 다른 뜻으로 굴리고(轉), 끌어내어(注) 쓰는 글자로 한 글자에 두 가지 이상 뜻을 가진 것은 전주 때문으로 日은 ‘해’와 ‘날’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6) 가차(假借) : 비슷한 음의 글자를 임시로(假) 빌려(借) 쓰는 글자로 외래어 표기에 사용된다. 亞細亞, 露西亞 등이 그것이다.
육서 중에 상형·지사·회의·형성은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조자(造字)의 원리을 채택했고, 전주와 가차는 용자(用字)의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한자는 부수(部首)와 필순(筆順)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많다. 가끔 옥편을 들춰보면 부수라는 것이 있어 그것으로 한자를 찾게 되거나 획수로 찾기도 하는데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부수는 214개라고 한다. 또 필순은 좌에서 우로(十), 왼쪽 비침을 먼저(人), 위에서 아래로(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川) 바깥쪽에서 안쪽으로(向), 바깥 둘러싼 부분을 먼저 마지막에 아래 터진 부분을 닫는다(國). 대칭일 경우 중간을 먼저(小), 위쪽과 왼쪽과 아랫부분이 둘러싸인 경우에는 위쪽을 먼저 안쪽을 다음에 왼쪽과 아랫부분을 마지막에(區,臣).왼쪽과 아래쪽이 둘러싸인 경우 안쪽을 먼저, 다음 왼쪽과 아랫부분을, 오른쪽을 마지막에 쓴다는(凶,幽)는 것이다.
Ⅲ 갑골문과 금문을 통해 본 한자
갑골문과 금문을 통해 한자의 유래와 만들어진 과정 등을 보면 한자는 영어나 한글처럼 과학적이지 않을망정, 형상을 보고 글자를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에서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인류를 품은 한자’라고 했는데, 책에 소개된 한자를 모두 옮기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중요한 몇 자라도 살펴본다.‘꽃 華’는 금문에서 화사하고 흐드러지게 핀 꽃 모양을 그렸는데, 여기서 꽃이라는 의미가 생겼다. 하지만 지금은 中華에서 보듯 꽃보다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장쑤(江蘇)성에서 신석기 유적지 암각화에 꽃으로 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이는 꽃을 조상이라고 본 꽃토템을 형상화한 것이다.
民은 금문에는 예리한 침 같은 것으로 한쪽 눈을 찌른 모양인데, 옛날에는 적을 포로를 잡을 경우, 남자는 한쪽 눈을 찔러 노동력을 보존하되 반항 능력을 줄여 노예로 삼았다. 民은 원래 노예였으며 이후 통치를 받는 계층이라는 의미에서 ‘백성’다시 ‘사람’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확장된 것이다. 화합(和合)은 가정, 사회, 국가 어디에나 요구되는 덕목이다. 화합이 바로 상생의 길이고 상생은 상대(相)를 살리는(生)것이다. 동양에서 和를 강조한 정신은 이런 이유에서다. 和는 의미인 口와 소리인 禾(벼 화)로 이루어진 글자로 피리 약(蘥)자가 禾자로 줄었으며 口가 왼쪽에 위치한 좌우 구조였으나, 예서체에서 다시 지금처럼 口가 오른쪽으로 놓이게 되었다. 和는 피리소리처럼 음악의 調和가 원래의 뜻이었다. 합주(合奏)에서 보듯 악기는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가지되 다른 악기와 화합을 이룰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준다. 또한 合은 아가리(口)를 뚜껑으로 덮은 모양인데, 뚜껑이 꼭 맞아야 증발과 변질을 막을 수 있듯이 화합은 음악처럼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딱 맞는다는 뜻이다.
언제나 시끄러운 정치의 政은 ‘바르다’는 正과 통한다. 그런데 바를 正과 다스릴 政은 무엇이 달라서 그렇게 시끄러운 것일까? 正은 政이란 글자에서 ‘매질할 복(攵)’자를 없앤 글자다. 매질하는 강제성을 없애고 자발적으로 바르게 변하게 하는 것은 리더십에서 필요한 부분이다. 리더가 앞장서서 하면 뭐가 바르지 않겠는가? 노나라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란 바로 잡는 것입니다”(政者 正也) -『논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앞에 웅크리고 있는 ‘해태상’은 왜 거기 있는 것일까? 그것은 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해태(廌-치)는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동물로 법에 기초한 통치가 확립되기 이전에는 해태가 옳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뿔로 받아 죽였다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글자가 생기면서 물水+갈去가 합쳐 法이 되었는데, 이는 물의 속성을 강조한 것이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고 그것이 법의 정신인 보편성, 일관성, 형평성을 기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中은 가운데를 의미한다. 해(日)의 변형이라는 설, 바람의 방향을 측정하기 위한 장대에 매단 판이라는 설도 있으나, 자신의 씨족을 표시하기 위한 깃발의 상징 부호였다는 주례(周禮)의 기록으로 볼 때 씨족을 상징한 깃발을 매단 모양이 맞을 것이다. 요즘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 과거에는 집단에 큰일이 있으면 넓은 터에 깃발을 세우고 군중을 모이게 했는데 이때 깃발은 중앙에 세워져 가운데라는 개념을 넘어 기준 또는 표준의 의미였다. 中과 心이 합쳐진 글자가 忠인데 心은 심장의 상징이다. 중국인들은 생각과 감정이 모두 머리가 아닌 심장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공자는 ‘군자의 마음은 평안하고 넓지만, 소인의 마음은 항상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했고, 맹자는 ‘평생토록 할 근심은 있지만 하루 아침의 걱정은 없다’고 했다. 군자가 소인보다 걱정을 적게 하는 것은 걱정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중심인 忠을 가지고 있어서라는 것이다.
黑과 黨은 글자는 닮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다. 黑은 의미부고, 尙은 소리부로 『설문해자』에서는 黨을 신선하지 못하다. 썩었다는 뜻으로써 정의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무리 짓고 편 가르는 행위로 예나 지금이나 경계해야 할 행위로 인식되었다. 『금문』에 따르면 黑은 이마에 문신(文身)을 한 사람을 그려놓았는데 이는 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의 하나인 묵형(墨刑)에서 검다는 의미가 새겨진 것으로 여기서 다시 어둡다. 혼탁하다. 불법. 사악함 등으로 파생되었다. 黑에 出이 더해지면 출(黜-물리칠)로 ‘색깔이 검게 변하여 못 쓰게 되다’는 뜻이었으나, 이후 폐기하다. 제거하다. 내몰다는 뜻까지 생겼다. 이처럼 黑은 단순히 검은색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부정적인 뜻까지 가지게 되었으며, 黨은 ‘썩은 무리들’이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게 되었다.
사람이 모여 사는 都市에서 都는 의미부 읍(邑)과 소리부 자(者)로 구성되었는데, 『설문해자』에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宗廟)가 설치된 읍을 都라 하였고, 邑 중에서 크고 중요한 곳을 都라 했다. 이로써 도는 대도시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고 으뜸가는 都를 수도(首都)라고 한다. 살 곳을 함께 건설하는 여(舁-마주 들)의 모습에서 천(遷)이라는 글자가 생겼고, 천도(遷都)는 기존의 도시를 폐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삶터를 만들기 위해 새 도시를 건설한다는 뜻이다.
갑골문에서 保는 사람이 손을 뒤로하고 아기(子)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을 매우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는데,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아이를 등에 없었으며 이런 전통은 갑골문 시대에 이미 있었다. 이로부터 ‘보호(保護)하다’는 뜻을 갖게 되었고, 保에 옷衣가 더해진 褓는 아기를 보호해 주는 ‘포대기’를 뜻하고, 土를 더한 작은 성堡는 적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는 작은 성을 말한다. 흙으로 쌓는 성을 뜻하는 것은 보호한다는 뜻 외에 어린아이라는 의미소(意味素)가 있기 때문이다.
한자 幸은 소전체에서부터 등장하는데, 사람이 거꾸로 선 모습 요夭, 즉, 죽는 것의 반대개념으로 불요(不夭)를 幸이라고 했다. 幸은 ‘죽음을 면하다’는 뜻에서 행복이라는 뜻이 담기게 되었다. 이후에 巡幸과 같이 임금이 지방 시찰의 뜻을 포함하기도 했는데, 고대 사회에서 임금의 지방 시찰은 幸한 일이었고 지방민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는 일로 인식되었다. 幸에 人을 더한 倖도 ‘행복한 사람’이란 뜻이며, 僥倖은 ‘뜻밖의 행운’이란 뜻이다.
서구가 말(logos) 중심주의였다면, 동양은 자연중심적이다. 말(言)로 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며,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글자가 ‘거짓 僞’다. 거짓말 와(譌) 자의 속자인 ‘그릇될 와(訛)’는 말(言)이 진실을 변화시킨다(化)는 사실을 형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든 글자다. 한자에 ‘만들다’는 뜻을 가진 글자는 造와 作이다. 作이 옷을 만드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造는 청동기물이나 화폐 등과 같이 개인이 아닌 국가가 만들 수 있는 물품의 제조를 뜻한다. 造는 作에 비해 더욱 큰 것을 만든다는 의미로 차이가 있다.
거리와 마을을 나타내는 里는 『금문』에서는 밭의 형상인 田과 흙을 뭉쳐놓은 형상 土로 구성된다. 밭은 경작지의 상징이고 땅(土)은 거주지의 상징이다. 그래서 里는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게 되었고, 鄕里가 원래의 뜻이었다. 5린(隣)을 里로 불렀는데 隣은 다섯 집(家)을 헤아리는 단위다. 지금의 개념으로 보면 里는 다섯 마을 정도가 될 것이다. 다섯 집이 隣, 즉 이웃이었다면 隣이 다섯 개 합쳐 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理는 ‘玉을 다듬다’가 원래 뜻으로 원석에서 옥을 분리하기 위해서 무늬결에 따라 나누어 다스려야 가능하다. 그래서 理는 ‘다스리다’는 의미가 들어간 것이다. 옥의 무늬결처럼 존재하는 사물의 理致나 條理도 여기서 파생되었다.
손자 지원이 이름에도 있는 志는 선비 士와 마음 心으로 구성되었는데, 전국시대에는 갈지(之)와 마음 心으로 되어 있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즉 지향(志向) 한다는 것이었다. 『시경』에 ‘시란 뜻을 말한 것이고 노래란 말을 읊조린 것(詩言志 歌永言)’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뜻이 나아가는 바가 바로 志이고, 志는 아직 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뜻을 말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詩다. 그러나 한나라 때 예서(隸書)에서 志가 之에서 士로 바귐에 따라 선비(士)의 마음(心)이 곧 뜻이라고 해석되었고, 志는 마음이 가는 길이라는 원래의 넓은 의미에서 선비의 뜻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선비라고 해서 모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선비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선비의 뜻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 誌인데 선비의 뜻을 말로 기록한다는 뜻이고, 공식적인 기록을 말한다.
스승을 부르는 말에 先生이 있다. 先은 갑골문에서 발(止)이 사람(人) 앞으로 나간 모습에서 ‘먼저’라는 의미였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道를 아는 자를 선생이라 하는데 그것은 먼저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경험을 중시했던 고대에 먼저 태어난 것은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로 교육의 주체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학문을 파헤친다는 학구(學究), 선생을 존중하여 서쪽에 앉게 한다는 서석(西席), 스승과 제자의 자리는 한 키(丈)정도 떨어져야 한다는 뜻의 함장(函丈), 스승을 모범 삼아야 한다는 사범(師範) 등이 스승을 이르는 말이다. 사부(師傅)는 군사 지도자(師)와 베 짜는 기술자를 지도하고 이를 전수하는 사람(傅)을 합친 말로 가장 중요한 전문기술의 전수자를 일컫는 말이다.
文은 ‘무늬’를 뜻했다. 갑골문에서 사람의 가슴 부위에 칼집을 새겨 녛은 모습이었는데 이는 원시시대 사람이 죽으면 피를 타고 나와 영혼이 분리된다고 믿었기 때문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은 사람의 경우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될 수 있도록 칼집을 내어 피를 흘리게 하거나 주사(朱砂-붉은 안료)를 칠하여 ‘피 흘림’을 통해 영혼을 분리하는 주술 행위가 있었다. 이로부터 文은 시신에 새긴 칼집이라는 뜻에서 무늬라는 의미가 되었고 이후 文이 글로 文人이라는 의미까지 갖게 되자 원래의 무늬라는 뜻은 紋으로 분화된 것이다. 文은 인간의 정신이나 정신의 내면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어원적으로 무늬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정신이 아닌 육체의 아름다움 혹은 치장이란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는 유한한 육체에 칼집을 내어서 인간 정신의 영원함을 보전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정신의 내면을 설정하는 것은 결국 言이 아니라 文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젊은 시절 한때 나름의 화두이기도 했던 ‘正義’라는 글자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正은 囗(나라국)과 止(갈지)로 구성되어, 나라(囗)를 정벌하러 가는(止) 모습에서 정벌의 의미를 그렸다. 국이 가로획(一)으로 변해 지금의 正이 되었는데 정벌 즉 전쟁은 언제나 초법적이고 法 바깥에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타당하지 않거나 합의할 수 있는 명분마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바르다’는 의미로 正이 나온 것이다. 원래는 彳(조금걸을 척)을 더해 征이었으나 正으로 바뀐 것이다.
義는 양의 뿔과 날이 여럿 달린 창인 我로 된 글자로 창(我)과 양 뿔(羊) 장식을 단 ‘의장용 창’으로 그려졌다. 죄진 사람을 징벌한다는 해태를 양으로 묘사했듯이, 양은 악한 자를 처벌하는 해태와 통하는 개념이었다. 또 我는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내부의 적을 처벌함으로써 단결을 고취하기 위한 상징이었기 때문에 의장용 창인 我가 ‘우리’라는 의미도 가진다. 따라서 義는 ‘우리’라는 집단 내부의 결속을 다져 정의를 실현하고 구현하는 창인 셈이다. 법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라면, 정의는 城(囗)을 정벌하러 간다(征)는 뜻과 우리(我) 공동체 내부의 善을 실현하는 대단히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樂과 藥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연관이 있는 것일까? 갑골문에 樂은 두 개의 幺(요,실타래)와 木이 합쳐진 모습으로 나무로 만든 현악기를 뜻한다. 여기에 소리부인 白이 더해져 악기에서 음악이라는 뜻이 생겼다. 또한 藥은 樂에 풀 艸(초)를 더한 것인데, 고대 중국에서는 禮와 함께 개인의 심성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개념이 음악, 즉 樂이었다. 음악은 마음이 안정되고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즐거움과 좋아한다(樂-요)는 의미가 이에서 생겼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藥은 지금의 화학 물질이나 가공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풀이 대표적이었는데, 藥은 樂에 풀을 더한 것이다. 또 毒은 머리에 비녀를 꽂은 여인(每) 둘이 더해진 모양인데 비녀 등 장식물을 여럿 꽂아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범하고 정숙한 부인과 달리 많은 장식물로 치장하고 화장을 짙게 한, 아름다우나 남자를 파멸로 이끌 여성의 모습을 닮았다. 毒은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어머니(母)와 비교될 수 있을 정도기는 하지만 유혹이 너무나 강해 사람을 파멸로 끌고 가는 여인을 말한 것이다.
세계 여러 문맹권에서 번개는 햇빛과 마찬가지로 번식과 파괴의 양면성을 가지는 상징으로 이해되지만, 특히 중국에서는 자연의 큰 힘과 무한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번개(申)를 제사(示)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어느 신보다 중시한 모습으로 신(神)이 그려졌다. 번개는 음전기와 양전기가 만나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음과 양의 결합은 새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래서 坤은 대지와 음(陰)을, 대지가 갖고 있는 생명력(申)을 상징한다. 申은 지금은 간지로 쓰이지만 갑골문에서는 번개의 모양으로 그려졌다. 이후 申이 간지로 가차되자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雨를 대해 電(번개전)으로 분화되었다. 坤과 같은 의미인 地는 여성의 음부를 뜻하는 也를 더해 대지의 생명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사람의 정면과 머리를 크게 그린 大의 모습에다 하늘에 맞닿음을 그린 天은 태양과 같은 만물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羊은 착하고 순한 동물로서 좋은 의미로 쓰였다. 도덕의 지향점인 善, 예술의 지향점인 美에도 羊이 들어 있다. 곡선 모양의 뿔과 고기와 젖, 가죽과 털까지 유용하고 중요한 존재였기에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이라는 犧牲羊이란 말도 생겼다. 羊에 제사상인 示가 더해진 것이 祥인데 羊을 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다. 신에게 제사 지내고 신의 계시가 길조(吉兆)라고 믿었기에 ‘상스럽다’는 뜻이 생겼다. 善은 갑골문에는 羊의 눈(目)을 그렸다가 이후에 目대신에 다투어 말할
경이 더해졌고, 다시 지금처럼 변한 것이다. 羊의 눈으로 묘사된 善은 羊의 정의로움과 정직함을 상징한 글자다. 訟은 말다툼, 즉 송사로 是是非非를 가린다는 羊의 상징성을 나타낸다. 긴뿔을 가진 羊은 부정한 이를 들이받아 죽이는 동물이라는 상징으로 해치(獬豸), 즉 해태는 정의와 법의 수호신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享과 亨은 같은 이유로 출발한 글자로 종묘(宗廟)의 형태로 모든 제물로 드리는 ‘삶은 고기’를 말했다. 이후 둘로 분화되어 享은 제사를 받드는 입장에서 ‘누리다’는 뜻, 亨은 제사를 잘 모시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형통(亨通)의 의미로 쓰였다. 亨에 다시 불화(火)를 더하면 烹(삶을 팽)으로 토사구팽(兎死狗烹)에 쓰인 그 글자다.
새隹(추)와 불火(화)로 구성된 글자가 焦(그을릴초)인데, 새를 불에 굽는 모습에서 ‘굽다’는 의미다. 새는 다른 고기와 달리 작아서 굽을 때 한 눈을 팔았다가는 모두 태워버리기 십상이다. 불을 피워 새를 태워버릴까 안절부절하는 조바심을 내다는 뜻에서 焦燥(초조)라는 말이 나왔고 焦는 ‘절대 한눈팔지 말고 집중한다’는 의미다. 點(점)은 의미부 흑과 소리부 점으로 이루어졌는데 黑은 갑골문에 묵형(墨刑-이마에 먹물을 넣는 형벌)의 모습에서 검다는 뜻이다. 占은 갑골문에서 卜(복)과 口(구)가 결합된 모양인데 卜은 占을 칠 때 불로 지진 거북딱지나 동물 뼈가 갈라진 흔적을 상형한 글자로 口는 그것을 보고 길흉을 해석한다는 의미로 쓴다. 점괘를 해석한다는 것에서 ‘살펴보다’의미로도 쓰인다. 占夷臺?
Ⅳ『설문해자』로 풀어보는 한자
『설문해자(說文解字)』는 후한 때 유학자이자 문자학자 허신(許愼)이 지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부수별 자전을 말하는데, 갑골문과 금문을 풀이한 것이다. 여기에 보면 不은 꽃받침의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로 꽃의 암술 씨방을 뜻하고 이후 부정의 뜻으로 가차되었다. “새가 날아 올라 위로 올라가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鳥飛上翔不來也)”라고 하여 불신(不信), 즉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맹(盟)은 해와 달 아래서 피를 나누어 마시며 맹세한다는 데서 ‘맹세하다’는 뜻이다. 소면(素麪)은 고기붙이를 넣지 않은 국수라는 뜻이고, 역(逆)은 의미요소인 ‘가다’라는 辶(착)과 발음요소인 거스를 屰(역)이 더해진 글자로 ‘거스르다’라는 뜻이고 ‘거꾸로’가 파생되었다. 력(力)은 땅을 파는 농기구의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로 쟁기질에 힘이 필요하다는 데서 힘의 뜻을 나타내었고 『설문해자』에서는 힘줄(筋)이라 하였다. 오진(誤診), 오인(誤認), 오해(誤解)의 誤는 말의 뜻 言과 ‘큰소리칠’吳가 더해진 글자로 큰소리치며 장담하는 말은 대부분 일을 그르치게 한다는 데서 ‘그르치다’는 뜻을 나타낸다. 잘못, 의혹이란 뜻은 파생된 것이다. 認은 상대의 말을 참고 귀를 기울인다는 뜻에서 ‘인정하다’는 뜻.
權(권세 권-저울질하다. 大小·輕重을 분별하다는 뜻)은 나무 木과 황새 雚(관)이 더해진 글자로 『설해문자』에서는 ‘황화목(黃華木)이라 하여, ‘나무로 만든 저울’이란 뜻이었으나, 이후에 저울질하다 권세, 권리라는 뜻으로 파생되었다. 事(일사)는 손으로 붓을 잡고 있는 모양을 형상한 글자로 ‘기록하는 일을 맡은 사관’을 나타냈으나, 일이란 뜻으로 파생되었다. 是(시)는 해(日)와 바르다는 정(正)의 변형자로 해처럼 바른 것이 없다는 데서 ‘곧다’는 뜻으로 쓰인다. 사(史)는 장식한 붓을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로 언행을 기록하는 벼슬아치, 사관을 나타냈으나 이후 역사라는 뜻으로 파생되고, 선사(先史)는 역사 이전의 역사를, 야사(野史)는 민간이 사사로이 기록한 역사를 말한다.
化(화)는 바르게 서 있는 사람(亻)과 거꾸로 서 있는 사람(匕-비수비)을 형상화한 글자로 원래 ‘바꾸다’는 뜻에서 ‘되다’의 뜻이 파생되었다.『설문해자』에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敎行也)’라고 했는데, 교화(敎化)는 ‘가르쳐 변하게 하다’는 뜻. 앞전(前)은 ‘가다’는 뜻인 행(行)과 ‘그치다’는 뜻인 지(止), 그리고 배를 말하는 주(舟)로 이루어진 글자로 배가 수로를 따라 간다는 데서 ‘나아가다’는 뜻이었으나 ‘앞’이란 뜻은 파생되었다. 『전문』에 止와 舟가 변해 月(월)과 刂(도)가 더해졌다. 죽음을 타나내는 死(사)는 갑골문에 흐트러진 뼈를 뜻하는 歹(알)과 비수 비(匕)로 구성되었는데, 옛날 중국에서 사람이 죽으면 다 썩은 뒤에 뼈를 주워 모아 장례를 치렀는데 이를 반영한 글자다.
媤家(시가), 媤宅(시댁)에서 媤는 ‘여자(女)+생각 사(思)’로 이루어진 글자다. 여자가 생각하고 가야 할 곳은 시부모가 사는 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정작 중국에서는 거의 쓰지 않고, 한국에서만 쓰인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복음(福音)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한 구원의 말씀을 말하는데 福은 제단과 술항아리의 상형으로 『설문해자』에는‘거슬림 없다(備也)’라고 했다. 또 음(音)은 ‘소리의 뜻을 나타내다’에서 ‘소식’이라는 뜻이 파생된 글자다. 歲月(세월)의 歲는 의미요소인 步(보)와 발음요소인 戌(술)이 더해진 글자로 가을에 낫으로 곡식을 수확하면 한 해가 간다는 데서 ‘한 해’라는 뜻이고, ‘나이’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戌은 낫이나 도끼의 상형이다.
別味(별미)에서 別은 뼈를 나타내는 과(叧)와 칼인 刂(도)로 구성된 글자인데 본뜻은 ‘나누다’이다. ‘헤어지다, 다르다’로 파생되었다. 味(미)는 의미요소인 입(口)와 아닐 미(未)가 더해진 것으로 ‘맛보다’는 뜻이다. 나도 가끔 느낄 때가 있는 향수에 관한 시에는 최치원이 유학시절에 고국 신라를 그리며 ‘창밖에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窓外三更雨), 등불 아래 마음은 고국을 달리네(燈前萬里心)’라고 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鄕愁(향수)에서 鄕은 음식상을 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은 모습을 본뜬 글자로 ‘마주 보고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다. 愁는 가을과 마음이 합친 글자로 가을에는 만물이 쇠락해 마음이 슬퍼진다는 데서 ‘근심하다’는 뜻이다.
신선이 산다는 仙界(선계)의 仙은 사람과 산, 즉 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신선을 말하고, 界(계)는 의미 밭(田)과 발음 介(끼일 개)가 더해진 글자로 밭과 밭 사이를 구분하기 위해 끼워 놓은 경계를 뜻한다. 오늘날 ‘장소’와‘범위’라는 뜻까지 파생되었다. 共助(공조), 共動(공동), 共生(공생)에 쓰이는 共은 ‘스물’의 뜻인 卄(입)과 ‘두 손으로 받들다’는 뜻인 廾(공)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여러 사람이 물건을 두 손으로 받들고 있는 데서 ‘바치다’는 뜻이다. 舌(설)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로 혀를 뜻한다. 『설문해자』에는 ‘입 안에 있는 맛을 구별하는 것’이라 하였다. 貧(빈)은 재물의 상징인 조개 패(貝)를 나눌 분(分)한 글자로 ‘가난하다’는 뜻이다. 富(부)는 집(宀)과 복(畐)으로 되어 ‘갖추다’는 뜻이었으나, ‘많다, 가멸다’로 파생되었는데, 집면(宀)은 지붕의 상징이고, 가득할 복(畐)은 배가 볼록하고 둥근 바닥을 가진 술항아리의 상형이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통제사로 한산도에 머물 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歌)는 남의 애를 끊나디’하는 나라에 대한 깊은 근심을 읊조린 적이 있다. 여기서 수루(戍樓)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戍는 사람(人)과 창(戈)으로 되어 ‘지키다’는 뜻, 樓는 나무(木)과 포갤 루(婁)가 더해져 다락의 뜻으로 누각과 망루가 파생되었다. 『설문해자』에는 다락집(重屋)이라 했는데, 망루는 ‘주위를 살피기 위해 높이 세운 다락집’이라는 뜻이다.
太는 두 팔과 다리를 벌린 사람의 형상인 大와 관련이 있을까? 없다. 太의 의미요소는 ‘동일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부호인 二와 발음요소인 大가 더한 글자로서 ‘크고도 크도다’는 뜻을 나타낸다. 물론 클태(泰)의 약자라는 설도 있다. 金은 쇳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푸집을 형상화한 글자로 쇠를 나타내며 돈으로 파생되었다. 惡은 마음(心)과 버금 아(亞)로 이루어졌는데 ‘나쁘다’는 뜻이고, 亞는 종묘나 분묘를 만들기 위해 다져놓은 터를 위에서 내려다본 상형이다. 憎惡(증오), 好惡(호오)처럼 ‘미워하다, 싫어하다’로 읽을 때는 ‘오’로 읽는다.
『설문해자』에 市販의 市는 ‘물건을 매매하는 곳(賣買所之也)’, 販은 재화인 貝와 되돌릴 反으로 된 글자로‘팔다’는 뜻으로, ‘싸게 사서 비싸게 팔다(買賤賣貴者)’라고 했다. 行은 사람이 다니는 사방으로 통하는 네거리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인데 본래는 ‘네거리’라는 뜻이었으나 ‘다니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行은 행과 항으로 읽히는데, ‘줄지어 가다’는 行列(행렬)로, 친족 등급의 차례를 말할 때는 行列(항렬)로 읽는다. 洞窟의 窟은 구멍인 혈(穴)에 굽힐 屈(굴)이 더해진 것인데, 몸을 굽혀 들어가는 구멍이라는 뜻이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黑은 ‘타오르는 불꽃이 굴뚝을 지나가 그을린 모양’이라는 설과 ‘묵형(墨刑)을 당한 죄수’라는 상형설이 있으며, 검다는 뜻은 같다. 검은 색은 북쪽(北方色也)이라고 『설해문자』에서 말했다.
꽃 화(花)는 풀 초(艹)와 될 화(化)로 꽃이란 뜻이다. 본래 꽃을 화(華)라했으나 가차 되어 ‘빛나다’는 뜻으로 쓰이자, 花가 생겼다. 妙策에서 妙는 여자와 젊을 소(少)로 이루어졌는데, 젊고 아름다운 것에서 ‘이쁘다’는 뜻이 생겼고, 젊다. 미묘하다는 파생되었다. 策은 대나무와 가시 자(朿)로 된 글자로 본래 ‘채찍’의 나타냈으나, 이후 대쪽과 대책, 꾀라는 뜻으로 파생되었다. 머리 頭(두)는 머리라는 혈(頁)과 발음요소 두(豆)가 합쳐진 글자로 『설문해자』에도 머리(頭也)라고 했다.
Ⅴ고사성어에 담긴 의미
재덕겸비(才德兼備)
‘능력이 우선 조건이고 도덕성이 다음이다.’는 뜻으로 중국인의 일반적 가치관과는 부합하지 않는 말이다. 덕재겸비(德才兼備)는 ‘도덕성이 우선 조건이고 재능은 다음 조건이다’는 말이 맞을지 모른다.
和而不同 同而不和
『논어』「자로」편에 공자는‘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라고 했다.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힘을 합친다는 것과 개인의 이익을 좇는 것이라는 말일텐데, 선택은 개인의 몫이고 공감능력의 문제일 것이다.
甘呑苦吐(감탄고토)
甘은 달다. 呑은 삼키다. 苦는 쓰다. 吐는 토하다는 뜻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이를 두고 감탄고토라고 한다.
竭澤而漁(갈택이어)
‘연못의 물을 전부 마르게 하여 고기를 잡는다’는 말로 진(晋)나라 문공이 성복(城濮-산동성)에서 초나라와 싸우게 되었는데 초의 병력이 진에 비해 막강했다. 이에 문공이 호언(狐偃)에게 물었다. “초의 병력이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해야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호언이 답했다. “예절을 중시하는 사람은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주군께서는 속임수를 써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문공은 옆에 있던 이웅(李雄)에게도 물었다. 이웅은 비록 호언의 의견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어 고기를 잡으려 한다면, 어찌 고기를 못 잡겠습니까? 그러나 내년에는 잡을 고기가 없을 것이며, 산의 나무를 모두 불태워 짐승을 잡으려 한다면 못 잡을리 없겠지만 내년에는 잡을 짐승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속임수를 써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해도 영구적인 해결책은 못될 것입니다.”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쓰는 이 말은 『여씨춘추』「효행」편에 나온다.
거시안목(巨視眼目)
인간의 중요 부분는 대부분 앞에 달려 있다. 사람은 전면 동물이다. 다만 버릴 것을 내보내는 항문은 뒤쪽 아래에 있는데, 앞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민감하나 뒤에서 일어나는 일은 둔감하다. 또 남의 뒤(단점)는 잘 보지만, 내 뒤의 것은 잘 안 보인다. 그러나 내 뒤를 볼 수 있어야 내 앞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넓게 멀리 내다보는 거시안목(巨視眼目)을 가져야 한다.
결초함환(結草銜環)
結草報恩과 같은 뜻으로 결초와 함환의 고사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晋나라 위무자는 병이 들어 아들 위과에게 자신이 죽으면 애첩이 아직 젊으니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라고 했다가 막상 임종을 앞두고는 번복하여 자신과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위과는 아버지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 유언에 따르지 않고 개가시켰다. 그 뒤 진나라 장수로 출전한 위과는 秦의 장수 두회에게 쫓기고 있을 때, 문득 한 노인이 나타나 엮은 풀을 널어 뜨리는 바람에 두회가 넘어졌고, 이를 본 위과는 두회를 생포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나는 당신이 개가시킨 여자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내 딸의 목숨을 살려 준 은혜에 보답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춘추좌시전』에 나온다.
한편, 함환은 한나라 양보가 아홉 살 때 화음산에서 상처를 입어 날지 못하는 꾀고리 한 마리를 치료한 뒤 날려 보내 주었다. 그날 밤 꿈에 서왕모의 사자라는 동자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며 백환(白環-흰옥구슬) 네 개를 주면서 다음에 자손들이 모두 백환처럼 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동자의 말대로 양보는 아들 진, 손자 병, 증손자 사, 현손 표 등이 모두 출세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후한서』「양진전(楊震傳)」에 실려 있다.
양두구육(羊頭狗肉)
얼마 전에 이준석 국민의 힘 전대표가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말로 국힘의 소위 윤핵관들을 비난한 적이 있었는데, ‘양의 머리를 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겉보기와 다르다는 말이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양두구육은 송나라 때의 오등회원(五燈會元)에도 같은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영공(靈公)은 궁중에서 미인에게 남장을 시켜 걸어 다니게 하고 그 모습을 즐겼다. 실로 특이한 취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공의 취미는 제나라 전체에 널리 알려지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남장한 미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였다. 옷차림만으로는 남녀 구분이 모호해져 다소 혼란스러운 사회문제로까지 변질되었다. 그러자 영공은 궁궐 안에서만 미인들의 남장을 허용하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백성들 사이에서는 남장미인이 유행하였다. 영공은 재상 안자(晏子)에게 백성들이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안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대왕께선 궁궐 내의 미인들만 남장을 하도록 하고, 궁궐 밖의 백성들에겐 금했습니다. 이는 소머리를 문간에 걸어 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하여 백성들에겐 금하면서 궁궐 안에서는 미인들이 남장하는 것을 용인하십니까? 궁중에서 금하면 백성들도 곧 순종하고 따를 것입니다.”
이런 안자의 말을 듣고 영공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 말이 옳소. 지금 당장 궁궐 안의 미인들이 남장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겠소.”
영공의 명이 떨어지자 궁궐 안의 미인들도 전처럼 여장을 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남녀의 성별에 따라 옷을 가려 입게 되었다. 미인이 남장을 하는 해괴한 풍조가 저잣거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구전에 의해 원문의 ‘소머리’가 ‘양머리’로, ‘말고기’가 ‘개고기’로 바뀌어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사자성어가 태어났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나,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두고 이 말을 즐겨 쓴다. 겉모습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뜻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것이 있다. 군자가 배워서는 안 될 천박한 재주를 이르는 말이다. 맹상군(孟嘗君)은 제나라 선왕 때 재상을 지낸 전영(田嬰)의 아들이다. 전영에게는 40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는데, 맹상군은 지위가 낮은 첩의 아들로 5월 5일에 태어났다. 이날은 불길하다 하여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며 자랐다. 다만 어머니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은밀히 돌봤는데, 그가 자라면서 현명하고 똑똑해 전영은 맹상군을 설(薛)의 영주가 되게 하였다. 영주가 되자 맹상군은 재산을 털어 빈객들을 초대하여 예우하였는데 인재들이 모여들어 식객이 수천이 되었다.
秦나라 소왕이 이 소문을 듣고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지만, 맹상군이 진나라를 위해 헌신하지도 알 수 없고 진나라를 도모할지도 모른다는 신하들의 만류로 소왕은 마음이 변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제나라에 두었다가는 진나라에 대적할 것을 우려한 소왕은 그를 죽이기로 했다. 이를 눈치챈 맹상군은 소왕의 애첩에게 접근했으나 애첩은 맹상군이 소왕에게 준 호백구(狐白裘-여우털로 만든 가죽옷)를 달라는 것이었다. 맹상군이 식객들과 의논하자 한 사람이 그것을 얻어오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진나라 창고에 있는 호백구를 훔쳐서 가져왔으므로 어떻게 가능했느냐고 묻자, 자신은 본래 개를 잘 훔치므로(狗盜) 가능했다고 대답했다.
이 호백구를 첩에게 바치니 첩이 소왕을 구워서 맹상군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맹상군은 진나라를 탈출해 한밤중에 국경인 함곡관에 이르렀으나 함곡관은 첫닭이 울기 전에는 누구도 통과할 수 없었다. 자신을 쫓아올 진나라 군사를 염려하고 있을 때 마침 식객 중에 닭울음 소리(鷄鳴)를 잘 내는 이가 있어 닭울음 소리를 흉내 내어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맹상군」에 나온다.
구밀복검(口蜜腹劍)
입에 꿀을 바르고 있지만 배 속에 칼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친한 체하지만 속으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든가, 돌아서서 헐뜯고 끌어 내리는 경우를 말한다. 여기도 고사가 전하는데, 이임보(李林甫)는 현종이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잘 보여 출세한 사람이다. 현종은 황후와 사별한 뒤 줄곧 양귀비에 파묻혀 정사를 돌보지 않고 국사를 이임보에게 맡겼다. 그는 명망이 높거나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만한 상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해 버렸는데, 그중에서도 바른말을 잘하는 선비를 꺼렸다. 하지만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일지라도 오히려 현종에게 천거하여 상대를 안심시킨 후에 공작하여 쓰러뜨리는 수법을 썼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두려워 “이인보의 입에는 꿀이 있지만 배 속에 칼이 있다”고 하였다.
口蜜腹劍과 비슷한 말로는 면종복배(面從腹背), 양질호피(羊質虎皮), 양봉음위(陽奉陰違), 양두구유(羊頭狗肉), 소중유검(笑中有劍), 소면호(笑面虎), 소리장도(笑裏藏刀), 면종후언(面從後言), 동상이몽(同床異夢), 동상각몽(同床各夢), 표리부동(表裏不同) 등이 있으며, 신문 정치면에 자주 등장하는 고사성어로서 『십팔사략』과 『자치통감』에 나온다.
군맹무상(群盲撫象)
여러 맹인이 코끼리를 더듬는다는 뜻으로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사물을 그릇 판단함을 일컫는다. 『불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어느 날 임금이 코끼리를 끌어오게 하고는 소경들에게 만져보게 하고는 생김새를 물었다. 이에 상아를 만져본 맹인은 코끼리는 큰 무처럼 생겼다. 귀를 만져본 맹인은 키(箕-곡식 까부는)처럼 생겼다. 머리를 만진 소경은 돌처럼 생겼다. 코를 만진 소경은 절구공이처럼 생겼다’는 등 각자 자신이 만진 부분을 이야기했다.
『불경』에는 이에 대해 “선남자들이여, 이 소경들은 코끼리를 제대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 말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떠나서 또 달리 코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코끼리를 불성을 일부분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나 모든 중생에게는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군맹평상(群盲評象), 군맹상평(群盲象評)도 같은 말이다.
낙성관지(洛城款識)
낙관(落款)은 송대 이후에 생긴 것으로 글씨나 글을 완성한 뒤 저자의 이름, 화제(畫題), 화찬(畫讚-그림의 여백에 써넣은 찬사 글이나 시가詩歌를 적는 일), 그린 장소, 제작연월일 등을 적고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하고, 송대 문팽(文彭-1498∼1573)이 전각(篆刻)을 예술적 기호 및 필수품으로 내세우면서 작품 완성 후 자신이 전각한 인장을 찍는 것이 형식화되었다.
새 발의 피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계란유골(鷄卵有骨)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고사성어 가운데 하나이다. 황희정승이 청백리로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종이 하루 동안 사대문 안으로 팔러 들어오는 모든 것을 나랏돈으로 구입해서 방촌(厖村-황희의 호)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쏟아져 계란 한 꾸러미 외에 아무것도 팔러 들어오지 않아 결국 임금의 하사품은 계란 한 꾸러미가 전부였다. 방촌이 감사한 마음으로 계란을 받아먹으려고 보니 ‘재수 없는 놈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계란은 골(骨)아서 하나도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비슷한 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새 발의 피’로 옮겨진다. 여기서 피를 혈액(blood)으로 알고, 일부 사전도 ‘새의 가느다란 발에서 나오는 피’라며 ‘아주 하찮은 일이나 극히 적은 분량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피’는 제패(稊稗)라는 식물의 이름으로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었다’는 속담에서처럼 식용으로 쓰였던 식물을 말한다. 오랜 가뭄에도 살아남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식물, 벼농사에서는 아주 귀찮은 존재가 피다. 배고픈 새들의 발아래 있는 피 이삭 몇 개 정도는 먹잇감으로 너무 적은 양이라는 말이다. 결국 ‘조족지혈’에서 혈(血)은 음을 빌린 것(音借)이 아니라 ‘피’라는 뜻의 음을 빌린 것(訓音借) 것이다. 이와 같이 한자의 음뿐만 아니라, 뜻의 음을 빌려 표기하는 방식을 이두(吏讀)라고 한다.
능지처참(陵遲處斬)
능지처참에 대해서는 잘 못 알았던 것 같다. 말이나 소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능지처참으로 알고 있었지만,(국어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나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은 거열형(車裂刑)이다. 능지처참은 능지와 처참 합성어로 능지는 경사가 완만한 구릉을 천천히 올라 간다는 뜻으로, 죄인을 산 채로 팔, 다리, 어깨, 가슴을 잘라 냄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처참은 능지를 한 뒤,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는 참수(斬首)를 말한다. 이런 혹형(酷刑)의 대명사는 夏나라 마지막 왕인 걸(傑)과 銀나라 마지막 왕 주(紂)가 꼽히고, 우리나라에서는 사육신과 허균(許筠)이 이 형벌을 받았다.
득룡망촉(得隴望蜀)
‘용 땅을 얻으니 촉 땅도 탐난다’는 말로 ‘말馬 두면 종도 두고 싶어진다’는 속담과 같은 말이다. 광무제 유수(劉秀)가 후한(25∼225)을 세우기 얼마 전 대장군 잠팽이 룡의 외효를 포위하자 촉의 공손술은 이육을 보내 외효를 구원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수는 개연과 경엄을 보내 상방을 포위케 하면서 덧붙이기를 ‘용을 평정하고 나면 다시 촉을 가지고 싶다(旣平隴 復望蜀)’고 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룡과 촉은 감숙성(간쑤성)과 사천성(쓰촨성)의 옛 이름으로 당시는 중국의 심장부로서, 이 두 곳을 차지하면 천하를 얻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수어지교(水魚之交)
김유신이 만년에 자신을 문병 온 문무왕에게 말했다는 이 수어지교는,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고자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고 관우와 장비가 어린(당시 27세)공명에게 예우가 너무 지나치다고 불평하자 이에 유비가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다시는 불평하지 말라.”고 한데기인한다. 이 말은 『삼국지』「촉사」외에도 『열녀전』,『정관정요』,『관자』등에도 나온다.
삼수갑산(三水甲山)
고사성어는 매우 중국적으로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도 많다. 앞에서 본 계란유골도 그렇고 함흥차사(咸興差使), 황희정승이 ‘네 말이 옳다’고 하자, 이를 지켜본 조카가 판결의 잘못을 지적하자 ‘네 말도 옳다’고 한 삼가재상(三可宰相), 두문불출(杜門不出), ‘힘이 좋은 대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데’서 유래한 벽창우(碧昌牛)도 우리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수갑산은 함경도 개마고원 북서쪽의 삼수와 동북쪽의 갑산을 묶어서 가리키는 말로 지형이 험하고 교통이 불편한데다 춥기로 유명해 옛날에는 유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산골이다 보니 처녀들이 시집갈 때까지 조기 한 마리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고, 해산물 접촉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유배를 오거나 군수 등으로 발령받아 가게 되면 해산물을 먹지 못해 영양 불균형으로 질병에 걸리기 일쑤였는데 풍토병이랄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삼수갑산을 가다’는 말은 매우 힘들고 험난한 곳으로 가거나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Ⅵ『설문해자』를 통해 본 사자성어
여리박빙(如履薄氷) ‘아주 얇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위험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重言復言(중언부언), 死角地帶(사각지대), 萬事亨通(만사형통), 無我之境(무아지경), 苦肉之策(고육지책), 美食觀光(미식관광), 作心三日(작심삼일), 多才多能(다재다능), 矯角殺牛(교각살우) 등은 널리 알려진 고사성어로 설명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