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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文定王后)
文定王后(문정왕후) 御寶(어보)의 譜面(보면)(聖烈大王大妃之寶)
文定王后(문정왕후) 御寶(어보)의 譜面(보면)(聖烈大王大妃之寶)
地位(지위) 朝鮮(조선) 中宗(중종)의 王妃(왕비)
在位(재위) 1517年(년) 7月(월) 19日(일) ~ 1544年(년) 11月(월) 20日(일) (陰曆(음력)
前任(전임) 章敬王后(장경왕후) 尹氏(윤씨)
後任(후임) 仁聖王后(인성왕후) 朴氏(박씨)
朝鮮(조선)의 王大妃(왕대비)
在位(재위) 1544年(년) 11月(월) 20日(일) ~ 1545年(년) 7月(월) 6日(일) (陰曆(음력)
前任(전임) 慈順王大妃(자순왕대비)尹氏(윤씨) (貞顯王后(정현왕후)
後任(후임) 恭懿王大妃(공의왕대비) 朴氏(박씨) (仁聖王后(인성왕후)
朝鮮(조선)의 大王大妃(대왕대비)
在位(재위) 1545年(년) 7月(월) 6日(일) ~ 1565年(년) 4月(월) 6日(일) (陰曆(음력)
문정왕후(文定王后)
文定王后(문정왕후) 御寶(어보)의 譜面(보면)(聖烈大王大妃之寶)
文定王后(문정왕후) 御寶(어보)의 譜面(보면)(聖烈大王大妃之寶)
地位(지위) 朝鮮(조선) 中宗(중종)의 王妃(왕비)
在位(재위) 1517年(년) 7月(월) 19日(일) ~ 1544年(년) 11月(월) 20日(일) (陰曆(음력)
前任(전임) 章敬王后(장경왕후) 尹氏(윤씨)
後任(후임) 仁聖王后(인성왕후) 朴氏(박씨)
朝鮮(조선)의 王大妃(왕대비)
在位(재위) 1544年(년) 11月(월) 20日(일) ~ 1545年(년) 7月(월) 6日(일) (陰曆(음력)
前任(전임) 慈順王大妃(자순왕대비)尹氏(윤씨) (貞顯王后(정현왕후)
後任(후임) 恭懿王大妃(공의왕대비) 朴氏(박씨) (仁聖王后(인성왕후)
朝鮮(조선)의 大王大妃(대왕대비)
在位(재위) 1545年(년) 7月(월) 6日(일) ~ 1565年(년) 4月(월) 6日(일) (陰曆(음력)
前任(전임)
仁粹大王大妃(인수대왕대비) 韓氏(한씨) 昭惠王后(소혜왕후)
仁惠大王大妃(인혜대왕대비) 韓氏(한씨) 안순왕후(安順王后)
後任(후임)
昭聖大王大妃(소성대왕대비) 金氏(김씨) 仁穆王后(인목왕후)
垂簾聽政(수렴청정)
在位(재위) 1545年(년) 7月(월) ~ 1553年(년) 7月(월) 12日(일) (陰曆(음력)
前任(전임)
貞熹王后(정희왕후) 尹氏(윤씨)
後任(후임)
仁順王后(인순왕후) 沈氏(심씨)
이름 別號(별호)
성렬왕대비(聖烈王大妃)
성렬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
尊號(존호) 성렬인명(聖烈仁明)
諡號(시호) 문정(文定)
身上情報(신상정보)
出生日(출생일) 1501年(년) 10月(월) 22日(일) (陰曆(음력)
死亡日(사망일) 1565年(년) 4月(월) 6日(일) (63歲(세) (陰曆(음력)
死亡地(사망지)
朝鮮(조선) 漢城府(한성부) 昌德宮(창덕궁) 소덕당(昭德堂)
陵墓(능묘)
태릉(泰陵) 서울特別市(특별시) 蘆原區(노원구)孔陵洞(공릉동) 26-102蕃地(번지)
父親(부친) 坡山府院君(파산부원군) 윤지임(尹之任)
母親(모친) 全城府夫人(전성부부인) 全義李氏(전의이씨)
配偶者(배우자) 中宗(중종)
子女(자녀) 1南(남) 4女(녀)
明宗(명종) 의혜공주(懿惠公主), 孝順公主(효순공주), 敬顯公主(경현공주), 仁順公主(인순공주)
宗敎(종교) 佛敎(불교)
文定王后(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年(년) 12月(월) 2日(일)(陰曆(음력) 10月(월) 22日(일) ~ 1565年(년) 5月(월) 5日(일)(陰曆(음력) 4月(월) 6日(일)는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王后(왕후)이자 攝政(섭정)으로 중종(中宗)의 第(제)2繼妃(계비)이다. 諡號(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이다. 1515年(년)(中宗(중종) 10年(년) 章敬王后(장경왕후)가 昇遐(승하)하여 1517年(년)(中宗(중종) 12年(년)에 王妃(왕비)로 揀擇(간택), 冊封(책봉)되었다. 1544年(년) 大妃(대비)가 되고, 1545年(년) 아들 慶原大君(경원대군)이 12歲(세)의 어린 나이로 卽位(즉위)하자 8年間(년간) 垂簾聽政(수렴청정)으로 攝政(섭정)하였다.
파산부원군 정평공 윤지임(坡山府院君 靖平公 尹之任)과 전성부부인 이씨(全城府夫人 李氏)의 딸로, 本貫(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들 明宗(명종)의 卽位(즉위) 後(후) 約(약) 8年間(년간) 垂簾聽政(수렴청정)을 맡았다. 垂簾聽政(수렴청정)期間(기간) 中(중) 自身(자신)의 親庭(친정) 男同生(남동생)인 尹元老(윤원로), 尹元衡(윤원형), 親庭(친정) 四寸(사촌)인 尹春年(윤춘년) 等(등)을 起用(기용)하였으며, 佛敎(불교) 中興策(중흥책)을 펼쳐 보우(普雨)를 重用(중용), 禪敎兩宗(선교양종)과 僧科(승과)를 復活(부활)시켰다.
그女(녀)는 同生(동생)인 尹元衡(윤원형)에게 政權(정권)을 쥐게 하고 仁宗(인종)의 外戚(외척)이자 自身(자신)의 親戚(친척)이기도 한 外戚(외척) 尹任(윤임) 一派(일파)를 除去(제거)하기 위해 乙巳士禍(을사사화)를 일으켜 尹任(윤임)을 죽이고, 나중에는 尹元老(윤원로)를 歸養(귀양)보내기도 했다. 그女(녀)는 佛敎(불교)의 復興(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年(년)에 禪敎 兩宗(선교 양종)을 復活(부활)시키고 廢止(폐지)되었던 僧(승)과, 度牒制(도첩제) 等(등)을 다시 實施(실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僧侶(승려) 보우(普雨)를 寵愛(총애)하여 그에게 兵曹判書職(병조판서직)을 除授(제수)하는 바람에 大臣(대신)들의 不滿(불만)을 사기도 했다. 佛敎(불교)를 獎勵(장려)하고 尹元衡(윤원형)의 權力(권력) 濫用(남용)을 放置(방치)하여 士林派(사림파) 性理學者(성리학자)들로 부터 批判(비판)의 對象(대상)에 올랐다. 陵(능)은 서울 特別市(특별시) 蘆原區(노원구)孔陵洞(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이다. 성렬대비(聖烈大妃)로 불린다.
1 生涯(생애)
1.1 生涯初盤(생애초반)
1.2 揀擇直前(간택직전)
1.3 王妃時節(왕비시절)
1.3.1 入闕初期(입궐초기)
1.3.2 다른 妃嬪(비빈)들과의 暗鬪(암투)
1.3.3 灼鼠(작서)의 變(변) 前後(전후)
參考(참고):1527年(년)(中宗(중종) 22年(년) 3月(월) 쥐를 잡아 동궁(東宮)을 詛呪(저주)한 事件(사건). 分野(분야)朝鮮時代(조선시대)事由形事件性格雀鼠事件(사유형사건성격(작서사건)發生日(발생일)1527年(년)(中宗(중종) 22年(년) 3月(월)發生地(발생지)東宮(동궁)의 북정(北庭) 은행나무, 대전(大殿) 寢室關聯者(침실관련자)東宮仁宗(동궁인종), 경빈박씨(敬嬪朴氏), 복성군(福城君), 김안로(金安老), 김희(金禧)時代(시대)朝鮮(조선)性格雀鼠(성격작서)事件發生日(사건발생일)1527年(년)(中宗(중종) 22年(년) 3月(월)發生地(발생지)東宮(동궁)의 북정(北庭) 은행나무, 대전(大殿) 寢室(침실)關聯者(관련자)東宮(동궁)(仁宗(인종), 敬嬪朴氏(경빈박씨), 福城君(복성군), 金安老(김안로), 김희(金禧) 1527年(년) 2月(월) 26日(일) 東宮(동궁) 해방(亥方)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진 쥐 한 마리를 東宮(동궁)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생나무 彫刻(조각)으로 방서(榜書)를 만들어 걸어두었다.이 때 東宮(동궁)은 世子宮(세자궁)에 居處(거처)하였다. 그런데 그는 해생(亥生)이요, 2月(월) 25日(일)이 生一(생일)인 데다가 ‘해(亥)’는 돼지에 속하고 쥐도 돼지와 비슷하므로 당시의 朝廷(조정) 祭臣(제신)들은 東宮(동궁)을 咀呪(저주)한 것이라 하였다.이어 3月(월) 初(초)하루에도 이런 事件(사건)이 대전(大殿) 寢室(침실)의 전란(典欄)에서 다시 일어나자, 右議政(우의정) 심정(沈貞)이 이를 듣고 이유청(李惟淸)과 함께 王(왕)에게 아뢰어 犯人(범인)의 檢擧(검거)를 請(청)했다.그러나 犯人(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疑惑(의혹)만 커가서 당시 指目(지목)당하고 있던 경빈박씨(敬嬪朴氏)의 所行(소행)이라 하여 그의 侍女(시녀)와 사위인 홍려(洪礪)의 종들이 審問(심문) 中(중) 매를 맞아 죽었다. 또한 刑罰(형벌)에 못이겨 거짓 自白(자백)한 者(자)도 있었다.이에 경빈박씨(敬嬪朴氏)와 아들 복성군(福城君)은 함께 서인(庶人)이 되어 쫓겨났다. 그 뒤 다시 東宮(동궁)의 假像(가상)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망측스런 글을 쓴 일이 생겨, 庶人(서인)이 된 敬嬪朴氏(경빈박씨)와 福城君(복성군)은 사사(賜死)되었다.두 翁主(옹주)를 廢庶人(폐서인)으로 만들었으며, 洪礪(홍려)도 매를 맞아 죽었다.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밖으로 내쫓겼으며, 左議政(좌의정) 심정(沈貞)도 敬嬪朴氏(경빈박씨)와 結託(결탁)하였다 하여 賜死(사사)되었다.1532年(년) 이종익(李宗翼)의 上疏(상소)에 依(의)해 眞犯(진범)이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라는 事實(사실)이 밝혀졌다. 金安老(김안로)는 심정(沈貞)과 유자광(柳子光) 等(등)에게 怨恨(원한)을 품어오던 中(중) 아들 禧(희)를 시켜 雀鼠(작서)의 變(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이 事件(사건)은 아들이 駙馬(부마)로 있음을 契機(계기)로 政權(정권)을 隴斷(농단)하다가 權勢(권세)를 잃게 되자 權勢(권세)를 挽回(만회)하고자 한 金安老(김안로)의 사행(邪行)으로, 當時(당시) 政界(정계)에 큰 波紋(파문)을 일으켰다.
1.3.4 王子(왕자) 出産(출산)以後(이후)
1.3.5 王妃(왕비) 廢黜(폐출) 危機(위기)
1.3.6 世子(세자) 除去(제거) 企圖(기도)
1.4 仁宗(인종) 卽位(즉위) 以後(이후)
1.5 攝政時節(섭정시절)
1.5.1 攝政時代(섭정시대)의 展開(전개)
1.5.2 權力掌握(권력장악)
1.5.3 親佛敎(친불교)政策(정책)
1.5.4 人事(인사) 問題(문제) 介入(개입)
1.6 生涯(생애) 後半(후반)
1.6.1 攝政(섭정)에서 물러남
1.6.2 最後(최후)
1.7 死後(사후)
2 家族(가족) 關係(관계)
2.1 父母(부모)
2.2 夫君(부군)
2.3 子女(자녀)
2.4 孫子女(손자녀)
3 文定王后(문정왕후)가 登場(등장)하는 作品(작품)
3.1 drama(드라마)
3.2 映畫(영화)
3.3 書籍(서적)
4 論難(논란)과 疑惑(의혹)
5 評價(평가)
5.1 肯定的(긍정적) 評價(평가)
5.2 否定的(부정적) 評價(평가)
生涯(생애) ~ 生涯(생애) 初盤(초반)
1501年(년) 尹之任(윤지임)과 全城府大夫人(전성부 대부인) 全義李氏(전의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父系(부계)로는 世祖(세조)의 丈人(장인) 貞靖公(정정공) 윤번(尹璠)의 5代孫(대손)으로 高大姑母(고대고모)가 世祖妃(세조비) 貞熹王后(정희왕후) 尹氏(윤씨)였다. 또한 從高祖父(종고조부) 윤사흔(尹士昕)의 曾孫(증손)이 章敬王后(장경왕후)와 尹任(윤임)으로 이들은 文定王后(문정왕후)에게는 9寸(촌) 三從(삼종)姑母(고모)와 三從叔(삼종숙)이 된다. 成宗(성종)의 2繼妃(계비) 貞顯王后(정현왕후) 亦是(역시) 그女(녀)의 一族(일족)으로, 5代祖(대조) 윤번(尹璠)의 四寸(사촌)인 윤곤(尹坤)의 曾孫女(증손녀)로, 12寸(촌) 할머니 뻘이 었다. 한때 그女(녀)의 親庭(친정)아버지 尹之任(윤지임)은 윤필상(尹弼商)의 11寸(촌) 조카뻘이라는 理由(이유)로 流配(유배)를 다녀오기도 한다.
그에게는 오라비 尹元凱(윤원개), 尹元亮(윤원량),尹元弼(윤원필),尹元老 (윤원로), 尹元衡(윤원형) 等(등) 5兄弟(형제)가 있었는데 이 中(중) 尹元凱(윤원개)와 尹元亮(윤원량), 尹元弼(윤원필)은 그女(녀)의 오빠였지만, 出生(출생)年代(년대)가 傳(전)하지 않는 尹元老(윤원로)와 尹元衡(윤원형)은 그女(녀)의 오빠라는 說(설)과 男同生(남동생)이라는 說(설)이 있었지만 坡平尹氏(파평윤씨) 宗親會(종친회) 族譜(족보) 確認(확인)結果(결과) 文定王后(문정왕후)의 同生(동생)들로 確認(확인)되었다. 그女(녀)는 어려서부터 聰明(총명)하고 記憶力(기억력)이 남달랐는데 王朝(왕조)實錄(실록)에 依(의)하면 '天性(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고 한다.
한편 그女(녀)의 나이 11歲(세)에 어머니 全義李氏(전의이씨)의 喪(상)을 당했다. 行狀(행장)에 依(의)하면 '11歲(세)에 어머니의 喪(상)을 당하여 3年(년) 동안 儉素(검소)한 生活(생활)을 하고 喪禮(상례)를 치르는 것이 成人(성인)과 같았으며, 아버지를 섬기는 데도 한결 같이 어머니 生存(생존) 時(시)와 같이 하고 同期(동기)들에 대한 待接(대접)도 마찬가지여서 宗族(종족)들이 모두 稱讚(칭찬)하였다고 한다.
揀擇(간택) 直前(직전)
當時(당시) 윤지임(尹之任)의 집안은 그 先代(선대)에서는 政丞(정승)과 判書(판서)를 지냈으나, 아버지 代(대)부터 벼슬길이 끊기고 子女(자녀)는 많아서 大槪(대개) 沒落(몰락) 兩班(양반)의 家庭(가정)이 그렇듯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때마침 過年(과년)한 딸이 있어 婚處(혼처)를 物色(물색)하던 次(차)에 비어 있는 中宮(중궁) 자리에 딸이 들어가게 되었다.
章敬王后(장경왕후) 尹氏(윤씨)가 죽고 곧이어 提起(제기)된 廢妃(폐비)愼氏(신씨)(단경왕후(端敬王后)의 復位(복위) 運動(운동)이 一段落(일단락)되면서, 새 中殿(중전)을 物色(물색)하던 中宗(중종)의 어머니 貞顯王后(정현왕후)는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族戚(족척) 中(중)에서 王妃(왕비)를 揀擇(간택)했던 것이다. 이는 다른 집안 사람보다는 一家(일가) 사람이 王妃(왕비)가 揀擇(간택)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尹任(윤임)의 支持(지지)와 同議(동의)도 한몫 했다. 三揀擇(삼간택) 後(후) 1517年(년) 2月(월) 王妃(왕비)로 最終(최종) 落點(낙점)되면서 入闕(입궐)했다.
王妃(왕비) 時節(시절)~入闕(입궐) 初期(초기)
1515年(년)(中宗(중종) 9年(년) 中宗(중종)의 繼妃(계비)였던 章敬王后(장경왕후)가 죽자, 1517年(년)에 揀擇(간택)되어 17歲(세)로 王妃(왕비)에 冊封(책봉)된다. 章敬王后(장경왕후)와 文定王后(문정왕후)는 9寸簡(촌간)으로, 文定王后(문정왕후)의 아버지인 尹之任(윤지임)과 章敬王后(장경왕후)는 8寸簡(촌간)이다. 章敬王后(장경왕후)와 文定王后(문정왕후)는 世祖妃(세조비) 貞熹王后(정희왕후)의 兄弟(형제)들의 子孫(자손)이다. 그女(녀)는 3살 난 元子(원자) 호를 保護(보호)할 責任(책임)이 있었고, 이것은 훗날 그女(녀)의 政治的(정치적) 立志(입지)가 强化(강화)되는 名分(명분)이 되었다.
當時(당시) 中宗(중종)은 强制(강제)로 離婚(이혼)당한 愼氏(신씨)와 死別(사별)한 尹氏(윤씨) 外(외)에도 경빈박씨(敬嬪朴氏), 희빈홍씨(熙嬪洪氏) 等(등) 새 中殿(중전) 文定王后(문정왕후)보다 더 예쁜 女人(여인)들을 周邊(주변)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章敬王后(장경왕후) 尹氏(윤씨)가 낳은 嫡室(적실)의 王子(왕자)와 敬嬪朴氏(경빈박씨)가 낳은 복성군(福城君) 嵋(미), 희빈홍씨(熙嬪洪氏)가 낳은 봉성군(鳳城君) 等(등) 王子(왕자)들이 있어 새 王妃(왕비) 尹氏(윤씨)는 그다지 반가운 存在(존재)가 아니었다. 衆臣(중신)들의 成火(성화)에 못이겨 그 자리에 누군가 앉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前任(전임) 中宮(중궁)의 가까운 親戚(친척)이며 元子(원자)를 保護(보호)한다는 名分(명분) 德澤(덕택)에 그는 後宮(후궁)들을 牽制(견제)할 수 있었다.
다른 妃嬪(비빈)들과의 暗鬪(암투)
한편 그는 入闕(입궐) 初期(초기)부터 경빈박씨(敬嬪朴氏)와 葛藤(갈등)하였다. 入闕(입궐) 初期(초기) 文定王后(문정왕후)가 王子(왕자)를 生産(생산)하지 못하자 敬嬪朴氏(경빈박씨)는 自身(자신)의 아들 福城君(복성군)을 王位(왕위)로 앉히려는 計劃(계획)을 꾸몄고, 이를 反對(반대)하던 文定王后(문정왕후)는 敬嬪朴氏(경빈박씨)와 暗鬪(암투)를 벌이게 된다.
敬嬪朴氏(경빈박씨)는 中宗(중종)의 사랑을 獨次知(독차지)하기 위하여 갖은 陰謀(음모)를 다 꾸미고 있었다. 그女(녀)는 絶世美人(절세미인)인데다, 福城君(복성군)이라는 아주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을 두고 있었다. 敬嬪朴氏(경빈박씨)는 慶尙北道(경상북도) 尙州(상주) 出身(출신)의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났으나 燕山君(연산군) 時節(시절) 採紅使(채홍사)의 興淸(흥청)으로 뽑혀 入宮(입궁)하게 되었고 追後(추후) 朴元宗(박원종)의 눈에 띄어 朴元宗(박원종)의 養女(양녀)로 入養(입양)되었다가 中宗(중종)에게 바친 女人(여인)이었다. 敬嬪(경빈)은 秀麗(수려)한 美貌(미모)만큼이나 自尊心(자존심)도 세고 猜忌心(시기심)도 强(강)했으며, 또 周邊(주변) 狀況(상황)에 對應(대응)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기지도 갖고 있었다. 入闕(입궐) 初期(초기) 그女(녀)는 獨守空房(독수공방)을 오래 하게 되었고 어렵게 受胎(수태), 出産(출산)한 아이 역시 딸이었다.
文定王后(문정왕후)는 後宮(후궁)들과는 事事件件(사사건건) 부딪치게 되고 獨守空房(독수공방)을 많이 하게 되면서 感情(감정)對立(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희빈홍씨(희빈홍씨) 亦是(역시) 文定王后(문정왕후)의 競爭(경쟁)相對(상대)였다. 禧嬪(희빈)은 敬嬪朴氏(경빈박씨)처럼 빼어난 美貌(미모)와 뛰어난 政治感覺(정치감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素朴(소박)하고 포근한 婦德(부덕)을 지녀서 相對方(상대방)에게 늘 好感(호감)을 주는 印象(인상)의 所有者(소유자)였다. 게다가 그女(녀)는 當時(당시)의 權臣(권신) 洪景舟(홍경주)의 딸로서 宮內(궁내)에서 相當(상당)한 影響力(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희빈홍씨(熙嬪洪氏)는 中宗(중종)이 負擔(부담)스러워하던 趙光祖(조광조) 一派(일파)를 몰아내려 할 때 나뭇가지에 꿀을 바르는 기지를 보여 中宗(중종)의 寵愛(총애)를 獨次知(독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521年(년) 洪景舟(홍경주)가 죽으면서 희빈홍씨(熙嬪洪氏)의 勢力(세력)은 沒落(몰락)하고 만다. 그러나 敬嬪朴氏(경빈박씨)의 勢力(세력)은 健在(건재)했고 文定王后(문정왕후)는 이들과 暗鬪(암투)를 벌이게 된다.
한편 별로 빼어난 美貌(미모)도 아니고 宮中(궁중)에 이렇다 할 背景(배경)도 없이 새 王妃(왕비)로 들어온 文定王后(문정왕후)는 그나마 딸들만 繼續(계속) 生産(생산)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그女(녀)는 宮中(궁중)에 自身(자신)의 勢力(세력)을 심고 또 아들을 낳을 때까지 長長(장장) 17年(년)이라는 긴 歲月(세월)을 온갖 受侮(수모)와 屈辱(굴욕)을 당하면서 참고 견뎌 내야 했다. 洪景舟(홍경주)는 死亡(사망)했지만 朝廷(조정)에서는 敬嬪朴氏(경빈박씨)와 그의 所生(소생) 福城君(복성군) group(그룹)에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等(등) 權臣(권신)이, 王世子(왕세자)를 둘러싼 勢力(세력)으로는 尹任(윤임)과 金安老(김안로)가, 그리고 文定王后(문정왕후) 쪽에는 尹元老(윤원로)와 尹元衡(윤원형) 兄弟(형제)가 3大(대) 勢力(세력)을 形成(형성)하며 서로 角逐(각축)을 다투기 始作(시작)하였다.
雀鼠(작서)의 變(변)이 터지자 文定王后(문정왕후)는 世子(세자)를 保護(보호)한다는 口實下(구실하)에 敬嬪朴氏(경빈박씨) 一派(일파)를 攻擊(공격)한다. 世子(세자)의 側近(측근)이던 權臣(권신) 尹任(윤임), 金安老(김안로) 等(등)이 敬嬪(경빈) 一派(일파)를 攻擊(공격)했고, 文定王后(문정왕후) 亦是(역시) 朴氏(박씨)一派(일파)를 攻擊(공격)한다.
雀鼠(작서)의 變(변) 前後(전후)
1527年(년) 2月(월) 26日(일) 東宮(동궁)의 해방(亥方, 24方位(방위)의 하나로 北北西(북북서) 方向(방향)에 불에 탄 쥐 한마리가 걸려있고 목제 물통에서 떼어난 나무 조각에 먹으로 쓴 방서(榜書, 方術(방술)을 적은 글)가 發見(발견)되었다. 이 幾回(기회)를 利用(이용) 文定王后(문정왕후)는 敬嬪朴氏(경빈박씨) 一派(일파)를 攻擊(공격)할 것을 操縱(조종)한다.
福城君(복성군)을 世子(세자)로 만들기 위해 王世子(왕세자)를 詛呪(저주)하는 그을린 쥐를 大殿(대전) 寢室(침실)에 몰래 넣은 事件(사건)을 敬嬪朴氏(경빈박씨)의 使嗾(사주)로 몰고갔던 雀鼠(작서)의 變(변)으로 因(인)하여 結局(결국) 敬嬪朴氏(경빈박씨) 母子(모자)가 逐出(축출)되는 結果(결과)를 빚었고, 南袞(남곤)과 심정(沈貞) 勢力(세력)도 沒落(몰락), 流配(유배) 및 賜死(사사)되었다. 追後(추후) 雀鼠(작서)의 變(변)의 眞犯(진범)이 金安老(김안로)의 아들인 김희로(金希魯) 밝혀지자 다시 嬪(빈)으로 復元(복원)되었다. 南袞(남곤)과 심정(沈貞)에게 怨恨(원한)이 있던 金安老(김안로) 等(등)이 이들을 猛攻擊(맹공격)할 때 文定王后(문정왕후)는 隱然中(은연중)에 金安老(김안로) 一派(일파)의 敬嬪(경빈) 一派(일파) 攻擊(공격)을 支援(지원)하였다. 그 뒤 싸움은 尹任(윤임) 一家(일가)와 尹元老(윤원로)와 尹元衡(윤원형) 兄弟(형제)의 大尹(대윤)과 少尹(소윤) 집안의 한바탕 血鬪(혈투)로 좁혀진다.
王子(왕자) 出産(출산) 以後(이후)
1534年(년) 自身(자신)이 낳은 有一(유일)한 아들이자 中宗(중종)의 次男(차남) 慶原大君(경원대군)을 낳기 前(전)까지는 世子(세자) 호를 保護(보호)해 줬지만, 막상 慶原大君(경원대군)을 낳은 文定王后(문정왕후)는 自身(자신)의 친아들에게 世子(세자) 자리를 앉히고 싶어하는 마음에 漸漸(점점) 世子(세자) 호를 警戒(경계)하여, 自身(자신)을 언제 죽일 거냐는 毒舌(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野史(야사)에 따르면, 文定王后(문정왕후)가 東宮(동궁)에 쥐를 利用(이용)하여 불을 질러 世子(세자)였던 仁宗(인종)을 죽이려 했다느니, 文定王后(문정왕후)가 待接(대접)한 茶菓(다과)를 먹고 仁宗(인종)이 죽었다느니 하는 所聞(소문)까지 있을 정도로 文定王后(문정왕후)와 仁宗(인종)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仁宗(인종)은 繼母(계모)인 文定王后(문정왕후)에게 孝心(효심)이 至極(지극)하였다 한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野史(야사)일 뿐이고 歷史(역사)는 勝者(승자)의 記錄(기록)이므로 仁宗(인종)을 忽待(홀대)했다는 決定的(결정적)인 證據(증거)는 찾기 어렵다.
文定王后(문정왕후)는 原來(원래) 子女(자녀)를 5名(명) 낳았으나 그 中(중)에 아들은 王子(왕자) 환(明宗(명종) 하나 뿐이었다. 그것도 34歲(세)라는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그女(녀)는 아들을 愛之重之(애지중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干涉(간섭)과 매질이 심하였다. 이는 慶原大君(경원대군)이 明宗(명종)으로 卽位(즉위)한 뒤에도 繼續(계속)되어 明宗(명종)을 괴롭혀 幼弱(유약)한 人物(인물)로 만들고 만다.
文定王后(문정왕후)가 慶原大君(경원대군)을 낳자 그女(녀)의 親兄弟(친형제)인 尹元老(윤원로)와 尹元衡(윤원형)은 慶原大君(경원대군)을 世子(세자)로 冊封(책봉)할 計略(계략)을 세웠다. 그러나 世子(세자)의 外叔(외숙) 尹任(윤임)이 이를 沮止(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女(녀)가 明宗(명종)을 낳았을 때 中宗(중종)의 첫 번째 繼妃(계비) 章敬王后(장경왕후)의 아들 仁宗(인종)의 나이는 이미 20歲(세)였다. 때문에 仁宗(인종)이 後嗣(후사)를 볼 수도 있었으므로 明宗(명종)이 王(왕)이 될 確率(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仁宗(인종)에게는 後嗣(후사)가 없었으므로 萬若(만약) 仁宗(인종)이 그대로 죽게 된다면 慶原大君(경원대군)의 王位(왕위) 繼承(계승)이 可能(가능)한 狀況(상황)이었다. 問情(문정)왕후는 그런 結果(결과)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이루어지게 된다.
王子(왕자) 환을 出産(출산)한 後(후)부터 文定王后(문정왕후)는 王子(왕자) 환을 王位(왕위)에 앉히려는 野心(야심)을 露骨的(노골적)으로 드러냈고, 世子(세자)를 保護(보호)한다는 美名下(미명하)에 尹任(윤임), 金安老(김안로) 勢力(세력)과 葛藤(갈등)했다. 그 過程(과정)에서 1537年(년) 金安老(김안로)가 文定王后(문정왕후)의 廢黜(폐출)을 企圖(기도)하려던 事件(사건)이 摘發(적발)되면서 王(왕)에게 하소연하여 金安老(김안로)를 流配(유배), 賜死(사사)시킨다.
王妃(왕비) 廢黜(폐출) 危機(위기)
한편 敬嬪(경빈) 勢力(세력)이 沒落(몰락)한 뒤 政權(정권) 掌握(장악)에 成功(성공)한 金安老(김안로) 一派(일파)는 反對派(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等(등)과 結託(결탁)하여 權勢(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 地位(지위) 高下(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威脅(위협)해 朝廷(조정)을 恐怖(공포)에 떨게 했다. 金安老(김안로)는 表面上(표면상) 世子(세자) 保護(보호)를 名分(명분)으로 세웠는데 文定王后(문정왕후)가 慶原大君(경원대군)을 王(왕)으로 앉히려는 뜻을 품은 것을 看破(간파)하고는 그女(녀)를 廢黜(폐출)시키려 한다. 이들은 文定王后(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陰謀(음모)를 꾸미다가 文定王后(문정왕후)의 堂叔(당숙) 윤안임의 密告(밀고)로 發覺(발각)되어 流配(유배)된 뒤 賜死(사사)되었다.
金安老(김안로) 一派(일파)가 죽자 尹任(윤임)은 홀로 尹元衡(윤원형)과 尹元老(윤원로) 兄弟(형제)를 相對(상대)해야 했고 尹元衡(윤원형) 兄弟(형제)는 四寸(사촌) 尹春年(윤춘년)과 勳舊(훈구) 勢力(세력)인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이감(李戡) 等(등)을 周邊(주변)에 끌어모은다.
그러나 尹任(윤임)이 文定王后(문정왕후)를 繼續(계속) 除去(제거)하려 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金安老(김안로) 等(등)과 結託(결탁)하여 文定王后(문정왕후)를 除去(제거)하고자 圖謀(도모)하였다.
世子(세자) 除去(제거) 企圖(기도)
한번은 東宮(동궁)에 불이 붙었는데 嬪宮(빈궁)이 옆에서 잠자다 깨어 발을 구르면서 얼른 뛰쳐나가자고 世子(세자)에게 哀願(애원)하였다. 그러나 仁宗(인종)은 東宮(동궁)에 불이난 것이 繼母(계모)인 文定王后(문정왕후)의 뜻이라고 斟酌(짐작)하고는 嬪宮(빈궁)보고만 먼저 나가라고 하였다. 때마침 中宗(중종)이 自身(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죽는 게 아버지에게 不孝(불효)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길을 헤치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文定王后(문정왕후)를 意圖的(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野史(야사)일 뿐이고, 實際(실제)로 東宮殿(동궁전) 火災(화재) 當時(당시) 仁宗(인종)은 깊게 잠들어 火災(화재)를 피하지 못하였는데 火災(화재) 現場(현장)을 目擊(목격)한 仁宗(인종)의 後宮(후궁)인 淑儀(숙의) 鄭氏(정씨)가 直接(직접)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仁宗(인종)을 求(구)했다고 한다. 追後(추후) 淑儀(숙의) 鄭氏(정씨)는 그 功勞(공로)를 認定(인정)받아 貴人(귀인)으로 오른다.
東宮殿(동궁전) 火災(화재) 事件(사건)의 背後(배후)로 尹任(윤임)은 文定王后(문정왕후)가 뜬所聞(소문)을 造作(조작)해 사람을 惑(혹)하게 하고, 宮衛(궁위)(內殿(내전)을 謀害(모해)하려는 證據(증거)가 明白(명백)하다고 主張(주장)했다. 이어 證據(증거)가 드러났으니 文定王后(문정왕후)에게 法(법)에 따라 死藥(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主張(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음弱(약)한 仁宗(인종)은 繼母(계모)가 그러지 않았다며 文定王后(문정왕후)를 辯護(변호)했고 그女(녀)는 劇的(극적)으로 廢黜(폐출)의 危機(위기)를 謀免(모면)하였다.
仁宗(인종) 卽位(즉위) 以後(이후)
1544年(년) 中宗(중종)이 病死(병사)하였다. 그러나 寶位(보위)를 재빨리 仁宗(인종)이 接受(접수)함으로써 慶原大君(경원대군) 推戴(추대) 試圖(시도)는 失敗(실패)한다. 이윽고 虛弱(허약)한 仁宗(인종)이 登極(등극)하였다. 이에 文定王后(문정왕후)는 大妃(대비)가 되었는데, 野史(야사)에 依(의)하면 問安次(문안차) 大妃殿(대비전)에 들어온 仁宗(인종)에게 文定王后(문정왕후) 尹氏(윤씨)는 어린 慶原大君(경원대군)을 옆에 앉혀 두고 "우리 母子(모자)가 殿下(전하)의 손에 죽는 날이 멀지 않았소. 그려, 언제쯤 죽이려 하오?"하고 脅迫(협박)하듯이 따져 물었다는 이야기가 傳(전)해진다. 그런데 仁宗(인종)은 登極(등극) 8個月(개월) 만에 疑問(의문)의 變死(변사)를 당하고 만다. 나중에 사람들은 仁宗(인종)의 죽음을 文定王后(문정왕후)의 所行(소행)이라 疑心(의심)하였다.
一說(일설)에는 仁宗(인종)이 그女(녀)가 건네준 毒(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說(설)도 있다. 모진 虐待(학대)로 仁宗(인종)을 괴롭히던 文定王后(문정왕후)는 모처럼 仁慈(인자)한 웃음을 띠며 새 王(왕) 仁宗(인종)에게 阿諂(아첨)이나 하듯 떡을 손수 가지고 들어와 勸(권)하였고, 마음 弱(약)한 仁宗(인종)은 繼母(계모)에게 孝城(효성)을 다하는 뜻에서 毒(독)이 든 그 떡을 먹고 그만 急死(급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仁宗(인종)이 抑鬱(억울)하게 죽은 事實(사실)은 闕(궐)밖으로 새어나가게 되었다. 仁宗(인종)의 抑鬱(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宮中(궁중)의 높은 담을 넘어 저자 거리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說(설)에 不過(불과)하고 實際(실제)로 仁宗(인종)昇遐(승하)의 큰 原因(원인)은 體質的(체질적)으로 病弱(병약)했던 原因(원인)도 있던데다 中宗(중종)이 昇遐(승하)하고 殯殿(빈전)을 設置(설치)하는 過程(과정)에서 文定王后(문정왕후)가 交泰殿(교태전) 近處(근처)에 있는 通明殿(통명전)에 殯殿(빈전)을 設置(설치)하여 男便(남편)인 中宗(중종)을 모시고 싶었는데 問題(문제)는 通明殿(통명전)은 狹小(협소)한데다 仁宗(인종)이 머무는 康寧殿(강녕전)과는 거리가 있어 仁宗(인종)이 자주 訪問(방문)하기에는 問題(문제)가 있었다. 結局(결국) 무리하게 殯所(빈소)를 지키다보니 病弱(병약)한 體力(체력)을 이기지 못하고 昇遐(승하)했다고 大部分(대부분) 歷史學者(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攝政(섭정) 時節(시절)
攝政(섭정)時代(시대)의 展開(전개) 乙巳士禍(을사사화), 良才驛(양재역) 壁書事件(벽서사건), 丁未史禍(정미사화) 文書(문서)를 參考(참고)하십시오.
文定王后(문정왕후)는 1545年(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王位(왕위)에 오른 아들 明宗(명종)의 뒤에서 大王大妃(대왕대비)로서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하였다. 歷史(역사)drama(드라마)에서 描寫(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垂簾聽政(수렴청정)은 어린 王(왕)을 代身(대신)하여 政治(정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mentor(멘토)의 役割(역할)이었다. 政治(정치)經驗(경험)이 없는 어린 王(왕)이 政治(정치)에 대해 大臣(대신)들과 討論(토론)한 內容(내용)을 같이 보면서, 助言(조언)을 하는 役割(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女(녀)의 垂簾聽政(수렴청정)을 反對(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관(柳灌)은 文定王后(문정왕후)의 垂簾聽政(수렴청정)에 反對(반대) 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乙巳士禍(을사사화) 때 除去(제거)한다.
明宗(명종)이 卽位(즉위)하자 大妃(대비) 兼(겸) 攝政(섭정)이 된 文定王后(문정왕후)는 逐出(축출)된 尹元衡(윤원형)과 尹元老(윤원로)를 불러들인다. 尹元衡(윤원형) 兄弟(형제)는 文定大妃(문정대비)를 등에 업고 陰謀(음모)를 꾸민다. 禮曹參議(예조참의)로 再登用(재등용)된 尹元衡(윤원형)은 兄(형)인 尹元老(윤원로)의 策動(책동)이 失敗(실패)하자, 이들 大尹(대윤) 一派(일파)와 個人的(개인적)인 感情(감정)이 있던 中樞府知事(중추부지사) 정순봉(鄭順朋), 兵曹判書(병조판서) 이기(李芑), 戶曹判書(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工曹判書(공조판서) 허자(許磁) 等(등)을 心腹(심복)으로 하여, 尹任(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中宗(중종)의 庶(서)8男(남) 單(단)에게 王位(왕위)를 옮기도록 劃策(획책)하고 있다고 誣告(무고)하였다.
한편 宮闕(궁궐) 밖으로는 仁宗(인종)이 昇遐(승하)할 當時(당시) 尹任(윤임)이 慶原大君(경원대군)의 推戴(추대)를 願(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瑠(류), 成宗(성종)의 庶(서)3男(남)을 擁立(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柳寬)·유인숙(柳仁淑) 等(등)이 이에 同調(동조)하였다는 所聞(소문)을 퍼뜨렸다. 이 所聞(소문)은 根據(근거)가 없었으나 그가 尹元衡(윤원형) 兄弟(형제)의 손을 積極(적극) 들어줌으로써 事態(사태)는 擴張(확장)되었다. 이로써 尹任(윤임) 一派(일파)를 除去(제거)하여 尹元衡(윤원형), 尹元老(윤원로) 兄弟(형제)가 朝廷(조정)을 掌握(장악)하게 된다.
1547年(년) 9月(월) 副提學(부제학) 鄭彦慤(정언각)과 宣傳官(선전관) 이로(李魯)가 京畿道(경기도) 果川(과천)의 良才驛(양재역)에서 '위로는 女王(여왕), 아래로는 奸臣(간신) 이기(李芑)가 權力(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亡(망)할 것'이라는 匿名(익명)의 壁書(벽서)를 發見(발견)하여 임금에게 報告(보고)했다. 尹元衡(윤원형) 一派(일파)는 이 事件(사건)이 윤임(尹任)派(파)에 대한 處罰(처벌)이 未洽(미흡)해서 생긴 것이라고 主張(주장)하며 그 殘黨(잔당) 勢力(세력)을 剔抉(척결)할 것을 諫言(간언)하였다. 이 말을 들은 文定王后(문정왕후)는 憤慨(분개)하여 明宗(명종)으로 하여금 尹任(윤임)의 殘黨(잔당) 勢力(세력)과 政敵(정적)들을 除去(제거)하도록 한다. 그 結果(결과) 한때 尹元衡(윤원형)을 彈劾(탄핵)하여 削職(삭직)케 했던 송인수(宋麟壽)와, 尹任(윤임)과 婚姻(혼인) 關係(관계)에 있던 이약수(李若水)를 賜死(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 정자(鄭滋), 노수신(盧守愼), 정황(鄭榥), 유희춘(柳希春), 白仁傑(백인걸), 金彎祥(김만상), 권응정(權應挺), 권응창(權應昌), 이천계(李天啓) 等(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파계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서자이자 희빈 홍씨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이때 함께 제거되었다.
參考(참고):1547年(년)(明宗(명종) 2年(년) 尹元衡(윤원형)·윤인경(尹仁鏡) 等(등)과 더불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一名(일명) 정미사화(丁未士禍)]를 일으켜 지난날 尹元衡(윤원형)을 彈劾(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尹任(윤임) 집안과 婚姻(혼인) 關係(관계)에 있던 이약수(李若水)를 사사(賜死)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熿)·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만상(金彎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等(등) 士林派(사림파) 20여 名(명)을 流配(유배)하였다.
權力(권력) 掌握(장악)
그러나 丁未士禍(정미사화) 以後(이후) 尹元衡(윤원형)과 尹元老(윤원로)가 싸우게 되자 親庭(친정) 同生(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文定王后(문정왕후)는 그 中(중) 尹元衡(윤원형)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尹元衡(윤원형)의 四寸(사촌)인 尹春年(윤춘년)은 尹元衡(윤원형)의 使嗾(사주)를 받고 다음과 같이 兄(형) 尹元老(윤원로)를 彈劾(탄핵)하는 上疏(상소)를 올렸다. 上疏(상소)가 올려지자 文定王后(문정왕후)는 한참을 苦悶(고민)하다가 尹元衡(윤원형)의 손을 들어준다.
“ 臣(신)이 삼가 살피옵건대 위장 尹元老(윤원로)는 性品(성품)이 奸詐(간사)하고 器質(기질)이 放恣(방자)하니, 이런 態度(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한 가지 착함도 記錄(기록)할 것이 없고, 만 가지 惡(악)한 것만 갖추어서 富貴(부귀)를 생각하는 마음만 품었고. 君臣(군신)의 義理(의리)는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 스승의 家産(가산)을 破産(파산)시키고 宗親(종친)의 땅을 빼앗고 사람을 함부로 죽여 百姓(백성)의 怨聲(원성)을 샀으며, 國母(국모)와 宗嗣(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
結局(결국) 尹元衡(윤원형), 尹春年(윤춘년), 尹元老(윤원로) 等(등)의 싸움에 끼어 든 누이 文定王后(문정왕후)는 結局(결국) 오빠를 죽이고 男同生(남동생)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싸움판을 終結(종결)시켰다. 이 일로 尹元老(윤원로)의 아들 尹百源(윤백원)은 叔父(숙부) 尹元衡(윤원형)과 堂叔(당숙) 尹春年(윤춘년)에게 怨恨(원한)을 품고 明宗妃(명종비) 仁順王后(인순왕후)의 外三寸(외삼촌)이자 孝寧大君(효령대군) 家門(가문)의 後孫(후손)으로 새로운 權臣(권신)이 된 이량(李樑) 一派(일파)에게 붙었다. 그러나 文定王后(문정왕후)는 尹百源(윤백원)에게만큼은 同情(동정), 好意(호의)를 베풀었다.
親佛敎(친불교)政策(정책)
그女(녀)는 佛敎(불교)의 中興(중흥)을 計劃(계획)하였다. 그런데 文定王后(문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佛敎(불교)의 兩宗(양종)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말을 맨 먼저 내놓았던 領議政(영의정) 이기(李芑)도, 士林(사림)의 反對(반대)로 事態(사태)가 불리해지자 양종을 다시 세워서는 안된다는 上疏(상소)를 올렸다. 卽(즉) 양종과 禪科(선과)를 設置(설치)하고 보우(普雨)를 끌어들이는 데 衆臣(중신)들이 强(강)한 拒否(거부) 反應(반응)을 일으키고, 또 文定王后陵(문정왕후능) 明宗(명종) 自身(자신)도 이에 대한 確固(확고)한 信念(신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 問題(문제)였다. 그러나 1551年(년) 그女(녀)는 佛敎(불교) 中興策(중흥책)을 推進(추진)하고 尹元衡(윤원형), 이기(李芑) 等(등)이 다시 이를 積極(적극) 同議(동의)함으로써 佛敎(불교) 中興策(중흥책)이 推進(추진)된다.
이때 文定王后(문정왕후)가 내세운 名分(명분)은 寺刹(사찰)이 도둑의 巢窟(소굴)이 되니까 陽性化(양성화)하자는 것이었다.
“ 중들은 날로 繁昌(번창)하고 軍額(군액)은 날로 減縮(감축)되고 있으며 寺刹(사찰)은 도둑의 巢窟化(소굴화)가 되고 있는데, 하루 아침에 중들을 逼迫(핍박)하여 모두 還屬(환속)하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니, 萬若(만약) 이들을 統率(통솔)하는 者(자)가 있으면 寺刹(사찰)로 隱身(은신)하는 者(자)들이 날로 늘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佛敎(불교)의 힘을 빌어 國家(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중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 弊端(폐단)을 救濟(구제)할 對策(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뜻이 이미 決定(결정)되어 끝내 고칠 수가 없으므로 오늘 굳이 내 뜻을 朝廷(조정)에 말하는 것이다. ”
그러자 反對(반대)하는 편에서도 上疏(상소)를 올려 맞불을 놓았다.
“ 災變(재변)이 끊이지 않고 凶年(흉년)이 繼續(계속)하여 百姓(백성)들이 負役(부역)에 시달리다 못하여 모두 중이 되고 있는 터에, 何必(하필)이면 異敎(이교)를 세워 統率者(통솔자)를 두어 중이 되는 꼴을 막자는 것입니까? 오히려 兩宗(양종)의 設置(설치)로 중들의 勢力(세력)이 擴大(확대)되면 절로 들어가 이를 忌避(기피)하고자 하는 者(자)들이 많아질 것이며, 그 避害(피해)가 날로 더 커질 것입니다. ”
그들은 이 밖에도 佛敎(불교)의 弊端(폐단), 그 原理(원리)의 異端性(이단성), 土木(토목) 工事(공사)의 不當(부당)함, 그리고 보우(普雨)의 非道德的(비도덕적) 行實(행실)을 들어 反對(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王(왕)후는 繼續(계속)해서 佛敎(불교) 中興(중흥)은 어쩔수 없는 일이니 反對(반대)하지 말라며 號筒(호통)쳤다. 乙巳士禍(을사사화)와 丁未士禍(정미사화)의 피비린내 나는 殺戮(살육)을 目擊(목격)한 大臣(대신)들은 結局(결국) 그들이 어떻게 處身(처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文定王后(문정왕후)는 만일의 事態(사태)를 對備(대비)해 尹元衡(윤원형), 이기(李芑) 等(등)을 움직여 僧(승)과 復活(부활)과 仙敎(선교) 兩宗(양종) 復活(부활)을 위해 佛敎(불교) 宗團(종단)에 대한 照査(조사)를 繼續(계속)했다. 尹春年(윤춘년)이 尹元衡(윤원형)의 뜻을 받들어서 文定王后(문정왕후)의 崇佛(숭불) 政策(정책)을 推進(추진)하고 있음을 눈치챈 大臣(대신)들은 이 때에도 모두 그의 뜻을 받아들이며 어물어물 넘어가 버리고 만다.
篤實(독실)한 佛敎(불교) 信者(신자)인 그女(녀)는 승과[僧科:高麗(고려)와 朝鮮時代(조선시대), 僧侶(승려)에게 法戒(법계)를 주기 위해 行(행)하던 國家(국가)의 考試制度(고시제도)]를 復活(부활)시키고, 僧侶(승려) 普雨(보우)를 가까이 하는 等(등) 佛敎(불교)에 대해 友好的(우호적)인 政策(정책)을 實施(실시)했다. 1550年(년) 奉恩寺(봉은사)에 禪宗(선종)을 두고 봉선사(奉先寺)에 敎宗(교종)을 두게 하여 禪(선)·敎(교) 兩宗(양종)을 復活(부활)시켰다. 한편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과 더불어 300여 寺刹(사찰)을 國家(국가)公人(공인) 정찰(淨刹)로 하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年(년) 동안 4,000여 名(명)의 僧侶(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復活(부활)시켜 휴정(休靜)·유정(惟政) 等(등)을 拔擢(발탁)했다.
그리고 僧侶(승려) 보우(普雨)를 寵愛(총애)하여 그에게 兵曹判書職(병조판서직)을 除授(제수)하는 바람에 大臣(대신)들의 不滿(불만)을 사기도 했다. 또한 오라비의 妾(첩)이지만 같은 佛敎(불교) 信者(신자)이기도 했던 정난정(鄭蘭貞)을 아꼈다. 하지만 이는 性理學者(성리학자)들의 强(강)한 反撥(반발)을 招來(초래)하게 되었고 死後(사후) 그女(녀)에 대한 惡評(악평)의 原因(원인) 中(중)의 하나가 된다. 文定王后(문정왕후)가 죽고 난 뒤 佛敎(불교)는 普雨(보우)가 妖僧(요승)으로 몰려 歸養(귀양)갔다가 殺害(살해)당하는 等(등) 다시 彈壓(탄압)받게 된다.
그女(녀)의 佛敎(불교) 中興策(중흥책)에 儒敎(유교) 思想家(사상가)들의 反撥(반발)은 極甚(극심)했다. 그러나 그女(녀)가 이를 强(강)하게 밀어붙이자 明宗(명종)도 이를 統制(통제)하지 못한다. 後日(후일) 그女(녀) 가 죽은 날 使臣(사신)들의 論議(논의)를 보면 "佛寺(불사)를 崇奉(숭봉)함이 限度(한도)가 없어서 內外(내외)의 倉庫(창고)가 남김없이 다 枯渴(고갈)되고, 賂物(뇌물)을 公公然(공공연)히 주고 받고 百姓(백성)의 田地(전지)를 마구 빼앗았으며, 內需司(내수사)의 奴婢(노비)가 制度(제도)에서 放恣(방자)하게 굴고 主人(주인)을 背叛(배반)한 奴婢(노비)들이 못에 고기가 모이듯, 숲에 짐승이 우글거리듯 절로 모여들었다.(明宗(명종) 20年(년) 4月(월) 6日字(일자)고 했다.
그女(녀)는 中宗(중종)의 陵寢(능침) 周邊(주변)에 흙을 盛土(성토)하였는데, 이는 中宗(중종)의 첫 陵寢(능침)자리의 땅이 낮아 文定王后(문정왕후)가 自身(자신)이 죽은 뒤 中宗(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러나 貞陵(정릉)의 地帶(지대)가 낮은데다가 해마다 비가 오면 흙이 쓸려가고 齋室(재실)까지 물이 차게 되어 結局(결국) 보토(補土)에 많은 費用(비용)이 들고 效果(효과)가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普雨(보우)의 建議(건의)를 받아들여 1562年(년) 그가 주지(住持)로 있는 봉은사(奉恩寺) 近處(근처)로 中宗(중종)의 陵(능)을 이장(移葬)시켰다.
또한 巫俗(무속) 信仰(신앙)에도 깊은 關心(관심)을 보였다. 僧科(승과)는 1565年(년)에 廢止(폐지)되는데, 普雨(보우)는 尹元衡(윤원형)과 정난정(鄭蘭貞)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해인 明宗(명종) 21年(년) 4月(월) 濟州島(제주도)에 流配(유배)되어 濟州(제주) 牧使(목사) 변협(邊協)에 依(의)하여 誅殺(주살)되었고, 그가 主唱(주창)했던 仙敎(선교) 兩宗(양종) 禪科(선과)는 兩司(양사)에서 論議(논의) 끝에 革罷(혁파)되었다.
人事(인사) 問題(문제) 介入(개입)
그女(녀)는 정난정(鄭蘭貞)의 紹介(소개)로 普雨(보우)를 만나면서 그를 寵愛(총애)한다. 정난정(鄭蘭貞)은 奉恩寺(봉은사)의 僧侶(승려) 普雨(보우)를 文定王后(문정왕후)에게 紹介(소개)시켜 兵曹判書職(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一時的(일시적)으로 佛敎(불교)가 隆盛(융성)하기도 했다. 文定王后(문정왕후)는 奉恩寺(봉은사)의 僧侶(승려) 普雨(보우)를 兵曹判書(병조판서)에 앉히는 等(등) 駭怪(해괴)한 人事(인사)를 行(행)하기도 했고, 禪宗(선종)과 敎宗(교종)을 모두 復活(부활)시키고 僧科(승과)를 復活(부활)하는 한편 普雨(보우)를 道詵寺(도선사) 住持(주지)로 삼고 都大禪師(도대선사)로 올려놓기도 했다. 王(왕)의 固有(고유) 權限(권한)인 人事(인사) 問題(문제)에까지 積極(적극) 介入(개입)하게 되자 明宗(명종)의 不滿(불만)은 極(극)에 달하게 된다.
明宗(명종)은 그女(녀)의 지나친 執權慾(집권욕)을 牽制(견제)할 窮理(궁리)를 한다. 明宗(명종)은 그女(녀)의 政權慾(정권욕)에 不滿(불만)을 품고 한때 乙巳士禍(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伸冤(신원)하고 新進(신진) 士林(사림) 勢力(세력)들을 登用(등용)시켜 外戚(외척)들을 牽制(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그女(녀)의 妨害(방해)로 失敗(실패)하고 말았다. 結局(결국) 明宗(명종)은 失意(실의)에 빠지게 되고 意欲(의욕)을 잃게 된다.
그女(녀)는 女王(여왕)으로 富(부)를 만큼 王權(왕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自身(자신)의 權力(권력)을 利用(이용)하여 親庭(친정) 同生(동생) 尹元衡(윤원형)의 暴壓的(폭압적)인 權力(권력) 獨占(독점)과 濫用(남용)을 後援(후원)하고 있었고, 儒敎(유교) 社會(사회)를 標榜(표방)하고 있는 朝鮮(조선)에서 僧服(승복)을 입은 僧侶(승려)를 兵曹判書(병조판서)에 올릴 정도로 政事(정사)를 個人的(개인적)인 感情(감정)으로 處理(처리)하고 있었다. 그女(녀)의 越權行爲(월권행위)가 繼續(계속)되자 明宗(명종)을 包含(포함)해 大部分(대부분)의 臣下(신하)들과 百姓(백성)들은 그女(녀)가 빨리 죽기만을 鶴首苦待(학수고대)하고 있는 狀態(상태)까지 가게 된다.
더구나 明宗(명종)이 成人(성인)이 된 뒤에도 攝政(섭정)을 繼續(계속)했다. 明宗(명종)은 12歲(세)의 어린 나이에 卽位(즉위)했으므로 그가 長成(장성)할 때까지 6年間(년간) 垂簾聽政(수렴청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1551年(년) 明宗(명종)이 滿(만) 18歲(세)로 法的(법적) 成人(성인)이 된 뒤에도 垂簾聽政(수렴청정)을 繼續(계속)했고, 1563年(년)까지 攝政(섭정)을 繼續(계속) 하게 된다.
生涯(생애) 後半(후반)~攝政(섭정)에서 물러남.
그러나 佛敎(불교) 中興策(중흥책)에 대한 反撥(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김종직(金宗直)은 數(수)많은 門徒(문도)들을 키워냈기에 己卯士禍(기묘사화)로 趙光祖(조광조) 一派(일파)가 犧牲(희생)되고 乙巳士禍(을사사화)로 또다른 直系(직계)인 이언적(李彦迪)系列(계열)이 肅淸(숙청)되었어도 士林(사림) 人事(인사)들은 繼續(계속)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王后(왕후)는 이들의 非難(비난)과 反撥(반발)을 繼續(계속) 接(접)하였다. 結局(결국) 이렇게 辨明(변명)한다.
“ 佛敎(불교)는 곧 異端(이단)이니 마땅히 拒絶(거절)해야 한다. 다만 祖宗朝(조종조) 以來(이래) 아주 끊어 버리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惟獨(유독) 廢(폐)하랴. 내가 이 일 때문에 主上(주상)에게 부끄러움이 있으니, 이 또한 내가 나라를 위하는 誠意(성의)의 일단이라. ”
그러나 그女(녀)의 佛敎(불교) 中興策(중흥책)에 대한 反撥(반발)은 繼續(계속) 되었다.
1553年(년)(明宗(명종) 8年(년)18歲(세)가 된 明宗(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形式的(형식적)인 節次(절차)였을 뿐이고, 實際(실제)로는 尹元衡(윤원형) 等(등)과 協力(협력)하여 政事(정사)에 繼續(계속) 關與(관여)하였다. 1563年(년)까지 攝政(섭정)으로 朝廷(조정)의 政事(정사)에 關與(관여)하였고, 攝政(섭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朝廷(조정)에 影響力(영향력)을 行事(행사)하였다.
最後(최후)
1563年(년) 孫子(손자)인 順懷世子(순회세자)가 죽자 明宗(명종)은 더욱 失意(실의)에 빠져 政事(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그女(녀)는 다시 政事(정사)를 主觀(주관)하게 된다.
1565年(년) 陰曆(음력) 4月(월) 갑자기 病勢(병세)가 심해져 病席(병석)에 눕게 되었다. 5月(월) 5日(일)(陰曆(음력) 4月(월) 6日(일) 病席(병석)에서 遺言(유언)을 남겼고, 그날 午後(오후)에 世上(세상)을 떠났다. 享年(향년) 65歲(세)였다. 바로 國喪(국상)이 宣布(선포)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文定王后(문정왕후)의 死亡(사망) 消息(소식)을 듣고 "불여우 같은 년, 독한 년, 더러운 년"하면서 喚呼(환호)하여], 問題(문제)가 되기도 했다.
死後(사후)
文定(문정)의 諡號(시호)가 내려지고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한 殿閣(전각)은 전호(殿號)는 문덕(文德)이라 하였다. 1565年(년)(明宗(명종) 21年(년) 尹元衡(윤원형)은 失脚(실각)당했으나 그女(녀)의 親庭(친정) 同期(동기)라 하여 목숨만은 保全(보전)하였다. 그러나 그女(녀)가 죽자 言官(언관)들은 尹元衡(윤원형) 一派(일파)에 대한 彈劾(탄핵)을 繼續(계속)하였고 尹元衡(윤원형)과 정난정(鄭蘭貞)은 江陰縣(강음현)에서 自決(자결)하게 된다. 죽은 뒤 男便(남편) 中宗(중종)의 陵寢(능침) 옆에 安葬(안장)되려 하였으나 結局(결국) 京畿道(경기도) 楊州郡(양주군) 蘆海面(노해면) (孔陵洞공릉리(現(현) 서울 蘆原區(노원구) 孔陵洞(공릉동)의 태릉(泰陵)에 安葬(안장)되었다.
家族(가족) 關係(관계)~朝鮮(조선)의 王妃(왕비)
文定王后(문정왕후) 尹氏(윤씨)
本貫(본관) 坡平(파평) 出生(출생) 1501年(년) 12月(월) 2日(일)(陰曆(음력) 10月(월) 22日(일)
死亡(사망)1565年(년) 5月(월) 5日(일)(陰曆(음력) 4月(월) 6日(일) (63歲(세)
朝鮮(조선)의 旗(기) 朝鮮(조선)
朝鮮(조선)의 旗(기) 朝鮮(조선) 漢城府(한성부) 昌德宮(창덕궁) 昭德堂(소덕당)
父母(부모)
本貫(본관) 연일 정씨(延日 鄭氏)
生沒年(생몰년)연일 정씨(延日 鄭氏)
父母(부모) 父(부)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 坡平(파평) 1475年(년) - 1534年(년) 윤욱(尹頊)
母(모) 전성부부인(全城府夫人) 全義李氏(전의이씨)
1475年(년) - 1511年(년) 이덕숭(李德崇) 남양 홍씨(南陽 洪氏)
府君(부군) 朝鮮(조선) 第(제)11代(대) 國王(국왕) 중종(中宗)
出生(출생) 1488年(년) 4月(월) 16日(일) (陰曆(음력) 3月(월) 5日(일)
死亡(사망) 1544年(년) 11月(월) 29日(일) 陰曆(음력) 11月(월) 15日(일) (56歲(세)
朝鮮(조선) 朝鮮(조선) 漢城府(한성부)
朝鮮(조선) 朝鮮(조선) 漢城府(한성부) 昌慶宮(창경궁) 歡慶殿(환경전)
子女(자녀)
爵號(작호)
이름 生沒年(생몰년) 配偶者(배우자)
長女(장녀) 의혜공주(懿惠公主) 옥혜(玉惠) 1521年(년) - 1564年(년)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
次女(차녀) 효순공주(孝順公主) 옥련(玉蓮) 옥린(玉麟) 1522年(년) - 1538年(년) 능원위(綾原尉)구사안(具思顔)
三女(삼녀) 경현공주(敬顯公主) 옥현(玉賢) 1530年(년) - 1584年(년) 영천위(靈川尉)신의(申檥)
長男(장남) 명종대왕(明宗大王)
경원대군(慶原大君) 환(峘) 1534年(년) - 1567年(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第(제)13代(대) 國王(국왕)
四女(사녀) 인순공주(仁順公主) 1542年(년) - 1545年(년)
孫子女(손자녀)
의혜공주(懿惠公主)
孝順公主(효순공주)
敬顯公主(경현공주)
明宗大王(명종대왕)
仁順公主(인순공주)
한의(韓漪)
한완(韓浣)
한순(韓淳) 구홍(具弘) 신사정(申士楨) 순회세자(順懷世子)
文定王后(문정왕후)가 登場(등장)하는 作品(작품)Drama(드라마)
《교동 마님》 (MBC, 1981年(년), 俳優(배우): 김용림)
《風蘭(풍란)》 (MBC, 1985年(년), 俳優(배우):김혜자)
《林巨正(임꺽정)》 (SBS, 1995年(년), 俳優(배우):김청)
《趙光祖(조광조)》 (KBS, 1996年(년), 俳優(배우):김민정)
《女人天下(여인천하)》 (SBS, 2001年(년)~2002年(년), 俳優(배우):전인화)
《대장금(大長今)》 (MBC, 2003年(년)~2004年(년), 俳優(배우):박정숙)
《傳說(전설)의 故鄕(고향) : 귀서》 (KBS, 2008年(년), 俳優(배우):이덕희)
《天命(천명)》 (MBC, 2013年(년), 俳優(배우):박지영)
《獄中花(옥중화)》 (MBC, 2016年(년), 俳優(배우):김미숙)
《魔女(마녀)寶鑑(보감)》 (JTBC, 2016年(년), 俳優(배우):김영애)
《朝鮮生存基(조선생존기)》 (TV朝鮮(조선), 2019年(년), 俳優(배우):이경진)
映畫(영화)
《文定王后(문정왕후) (映畫(영화)》(1967年(년)- 최정임
書籍(서적)
《女人天下(여인천하)》 박종화, 1965年(년)
《王妃(왕비)의 男子(남자)들》 윤태현, 화산문화, 2007年(년)
論難(논란)과 疑惑(의혹)
尹任(윤임), 尹元老(윤원로) 殺害(살해)의 背後(배후)라는 疑惑(의혹)이 있다. 文定王后(문정왕후)는 章敬王后(장경왕후)의 오빠로 族叔(족숙)인 尹任(윤임)을 謀陷(모함)하여 죽이고, 다시 四寸(사촌) 尹春年(윤춘년)을 시켜서 自身(자신)의 親兄(친형) 尹元老(윤원로)를 죽인 尹元衡(윤원형)의 누이이기도 했다. 또한 尹元衡(윤원형)은 愛妾(애첩) 정난정(鄭蘭貞)을 끌여들여 貞敬夫人(정경부인) 자리에 올리고 糟糠之妻(조강지처) 金氏(김씨)를 毒殺(독살)한 人物(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骨肉相爭(골육상쟁)의 背後(배후)에 文定王后(문정왕후)가 있었다는 것이다.
評價(평가) ~肯定的(긍정적) 評價(평가)
宮中(궁중)에 들어와 온갖 못된 陰謀(음모)를 꾸미고 피의 肅淸(숙청)을 서슴없이 自行(자행)한 朝鮮朝(조선조) 最惡(최악)의 女人(여인)이었다는 評價(평가)를 받고 있다. 그女(녀)는 巫俗(무속) 信仰(신앙)에도 깊은 關心(관심)을 보였고, 普雨(보우)라는 僧侶(승려)를 가까이 하여 佛敎(불교)를 크게 일으켰으나, 來世(내세)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전혀 없는 冷血(냉혈) 人間(인간)이었다. 모질고 毒殺(독살)스럽다 는 批判(비판)도 있다.
그女(녀) 自身(자신)도 政治(정치)에 끼어든 女性(여성)이라는 否定的(부정적)인 評價(평가)를 받아서, 肅宗(숙종) 當時(당시) 肅宗(숙종)의 어머니인 明聖王后(명성왕후) 金氏(김씨)가 誣告罪(무고죄)로 處罰(처벌)받게 된 오빠들을 辯護(변호)하자 南人(남인)들이 文定王后(문정왕후)를 다시보겠다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흔히 의붓아들인 仁宗(인종)을 毒殺(독살)한 疑惑(의혹)의 背後(배후)인 慓毒(표독)스러운 악후(惡后)라는 評價(평가)와 朝鮮(조선) 王朝(왕조) 歷史上(역사상) 가장 英敏(영민)한 王妃(왕비)로 崇儒抑佛(숭유억불) 社會(사회)에서 佛敎(불교)를 儒敎(유교) 傳統(전통)에 어긋나는 異端(이단)이지만 朝鮮(조선)王室(왕실)의 祖上(조상)때부터 믿어온 傳統(전통)宗敎(종교)이므로 尊重(존중)해야 한다는 論理(논리)로 保護(보호)하였으며, 政治的(정치적) 波瀾(파란)과 大臣(대신)들과의 葛藤(갈등)에도 中宮(중궁)의 자리를 굳세게 지킨 女傑(여걸)이란 評價(평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때로는 어진 어머니요 착한 아내처럼 行動(행동)하면서 實際(실제)로는 惡(악)한 짓을 저질렀고, 나라를 위한 誠意(성의)의 일단으로 佛子(불자)가 되었다면서 結局(결국)은 佛子(불자)의 이름을 더럽혔던 두 얼굴을 가진 女人(여인)임에 分明(분명)하다.'는 酷評(혹평)도 있다.
그女(녀)의 지나친 執權慾(집권욕)은 結局(결국) 明宗(명종) 代(대)의 混亂(혼란)을 加重(가중)시키는 原因(원인)으로 作用(작용)하기도 했다. 아무런 名分(명분)도 없이 但只(단지) 個人的(개인적)인 感情(감정)을 앞세우고 自身(자신)들의 權勢(권세)를 維持(유지)하기 위하여 兄弟(형제)를 使嗾(사주)하여 또 다른 兄弟(형제)를 죽였다는 批判(비판)도 있다.
그렇지만 文定王后(문정왕후)의 歷史的(역사적) 記錄(기록)이 안 좋은 理由(이유)는 朝鮮時代(조선시대) 같은 境遇(경우)는 男性優越主義(남성우월주의) 社會(사회)였던 時節(시절)이라 女性(여성)이 政治(정치)에 나서는 것 自體(자체)를 容納(용납)할 수 없던 時節(시절)이었다, 文定王后(문정왕후)의 政治的(정치적)인 干涉(간섭)부터 士大夫(사대부)들은 그女(녀)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朝鮮(조선)은 儒敎(유교)를 國敎(국교)로 崇尙(숭상)하던 國家(국가)였는데 이를 無視(무시)하고 佛敎(불교)를 復興(부흥)시킨 人物(인물)로 僧侶(승려) 普雨(보우)와 함께 우리나라 佛敎(불교)를 中興(중흥)시킨 人物(인물)이기도 하다. 儒敎的(유교적) 視覺(시각)으로 보면 文定王后(문정왕후)와 僧侶(승려) 普雨(보우)는 指彈(지탄)과 問題(문제)의 對象(대상)이었지만 佛敎界(불교계)의 立場(입장)에서는 그들은 佛敎(불교)가 萎縮(위축)되던 朝鮮(조선)時節(시절) 佛敎(불교)를 復活(부활)하고 中興(중흥)한 偉大(위대)한 人物(인물)이기도 하다. 實際(실제)로 佛敎界(불교계)에서 僧侶(승려) 普雨(보우)는 現在(현재)까지도 偉人(위인)으로 推仰(추앙)받고 있다.
文定王后(문정왕후)의 佛敎(불교) 復活(부활)에는 여러 意味(의미)가 있었다. 그女(녀)는 모든 人間(인간)은 平等(평등)하다라는 佛敎(불교)의 理念(이념)을 받아들여 嫡庶(적서)를 差別(차별)하지 않아 宗親(종친)들에게도 寬大(관대)했으며 中宗(중종) 죽고 三年喪(삼년상)이 지난 後(후) 後宮(후궁)들이 出宮(출궁)할때도 모두 挽留(만류)하여 宮闕(궁궐)에 살게 配慮(배려)해주었다. 逆謀(역모)에 連累(연루)되어 스스로 나간 희빈홍씨(熙嬪洪氏)와 雀鼠(작서)의 變(변) 事件(사건)에 連累(연루)된 敬嬪朴氏(경빈박씨)를 除外(제외)한 모든 中宗(중종)의 後宮(후궁)들을 中宗(중종) 死後(사후)에도 모두 闕(궐)에 남아 살게 되었는데 中宗(중종)의 後宮(후궁) 中(중)에서 長壽(장수)한 後宮(후궁)으로는 中宗(중종)의 璿源系譜(선원계보)에 없는 貴人(귀인) 韓氏(한씨)이다. 그女(녀)는 宣祖大王(선조대왕)때까지 宮闕(궁궐)에서 살다 죽는다.
人間(인간)은 平等(평등)하다는 佛敎(불교)理念(이념)을 받아들였던 文定王后(문정왕후)는 妾室(첩실)인 정난정(鄭蘭貞)을 賤(천)한 身分(신분)이라고 無視(무시)하지 않고 아꼈으며, 그女(녀)의 同生(동생) 尹元衡(윤원형)도 文定王后(문정왕후)의 影響(영향)을 받아 身分(신분)을 差別(차별)하지 않아 정난정(鄭蘭貞)은 自身(자신)을 差別(차별)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忠僕(충복)이 되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文定王后(문정왕후)는 尹元衡(윤원형)에게 命(명)하여 庶孼許通法(서얼허통법)을 施行(시행)하기에 이른다. 庶孽許通法(서얼허통법)이란 庶出(서출)도 科擧(과거)에 應試(응시)할 수 있게 하는 制度(제도)인데 當時(당시) 士大夫(사대부) 立場(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制度(제도)였다. 結局(결국) 文定王后(문정왕후)의 支援(지원)을 等(등)에 업은 尹元衡(윤원형)은 明宗(명종) 8年(년) 10月(월) 左贊成(좌찬성) 尹元衡(윤원형)이 領議政(영의정) 沈連源(심연원), 左議政(좌의정) 상진(尙震), 右議政(우의정) 윤개(尹漑) 等(등)과 함께 庶孽許通(서얼허통)을 要求(요구)하는 上疏(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그 內容(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材(인재)의 優劣(우열)은 타고난 氣質(기질)의 純粹(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左右(좌우)되는 것이지 出生(출생)의 貴賤(귀천)과는 關係(관계)가 없습니다. 萬一(만일) 才質(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妾(첩)의 몸에서 났는데, 庶孼(서얼)이라고 해서 登用(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人材(인재)를 取(취)함에 貴賤(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서얼(서출)들도 科擧(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果敢(과감)한 주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吏曹判書(이조판서) 안현(安玹) 等(등)은 反對(반대)를 했다. 그러나 尹元衡(윤원형)은 다른 벼슬아치들과 合勢(합세)하여 結局(결국) 庶孽許通法(서얼허통법)을 通過(통과)시켰다. 庶孽許通法(서얼허통법)은 人間(인간)은 平等(평등)하다는 佛敎(불교)의 理念(이념)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篤實(독실)한 佛敎(불교) 信者(신자)였던 文定王后(문정왕후)의 支持(지지)를 받아 通過(통과)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庶孽許通法(서얼허통법)이 通過(통과)되자 全國(전국) 各地(각지)에서 抑鬱(억울)한 일을 당한 奴婢(노비)들이 尹元衡(윤원형)의 邸宅(저택)으로 몰려들었으며, 이를 明宗實錄(명종실록)에서는 "主人(주인)에게) 罪(죄)를 지은 노복(奴僕)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들어 그 數(수)가 대단히 많다" 라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佛敎(불교)를 復活(부활)하기로 한 文定王后(문정왕후)는 僧侶(승려) 普雨(보우)를 登用(등용)하여 只今(지금)까지 排佛政策(배불정책)에 依(의)해 사라진 仙敎(선교) 兩宗(양종)을 復元(복원)하였다. 그리고 撤廢(철폐)된 僧科(승과)를 復活(부활)시켰는데 이때가 明宗(명종)5年(년) (1550年(년) 12月(월)이었다. 이어 鳴鐘(명종)6年(년)(1551年(년) 에는 奉恩寺(봉은사)를 禪宗(선종)의 本寺(본사)로 삼고 普雨(보우)를 判禪宗事都大禪師(판선종사도대선사) 兼(겸) 奉恩寺(봉은사) 住持(주지)로 任命(임명)하였다. 그리고 奉先寺(봉선사)를 敎宗(교종)의 本寺(본사)로 삼고 수진(守眞)을 判敎宗事都大師(판교종사도대사) 兼(겸) 奉先寺(봉선사) 住持(주지)로 任命(임명)한다. 이런 一連(일련)의 政策(정책)에 이어 復活(부활)된 僧科(승과)가 實施(실시)되었다. 그리고 明宗(명종)6年(년) (1551年(년) 11月(월) 道僧(도승)을 위한 誦經試驗(송경시험)을 치루고 明宗(명종)7年(년) 兩宗(양종)의 僧選考試(승선고시)인 僧科(승과)가 實施(실시) 되었는데, 復活(부활)된 僧科(승과)에서 禪宗(선종) 合格者(합격자) 21名(명), 敎宗(교종) 合格者(합격자) 12名(명)이 輩出(배출)되었다.
이와 같은 佛敎(불교) 中興策(중흥책)의 結果(결과) 敎團(교단)이 活氣(활기)를 띠게 되고 有能(유능)한 人物(인물)이 모여들게 되는데, 仙佛敎(선불교) 中興(중흥)의 큰 人物(인물)인 西山大師(서산대사) 휴정(休靜)도 이때의 僧科(승과)를 通(통)해 輩出(배출)되었고, 뒤에 禪敎兩宗判事(선교양종판사)를 歷任(역임)하였고 四溟堂(사명당) 유정(有定)도 그 後(후)의 僧科(승과)에 登用(등용)되었다. 이 當時(당시) 復活(부활)된 僧科(승과)를 通(통)해 輩出(배출)된 人物(인물)들은 뒤에 일어나는 壬辰倭亂(임진왜란)의 克服(극복)에 많은 功(공)을 세우게 된다.
이렇게 文定王后(문정왕후)의 業績(업적)들이 가려진 理由(이유)는 그女(녀)가 誘發(유발)한 政策(정책)들이 客觀的(객관적)으로 봤을때는 훌륭한 政策(정책)임에도 불구하고 士大夫(사대부)(兩班(양반)들 立場(입장)에서는 反撥(반발)을 誘發(유발)하는 政策(정책)들이었기 때문에 그女(녀)의 惡評(악평)은 士大夫(사대부)들의 觀點(관점)에서 적혀진 惡評(악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實際(실제)로 文定王后(문정왕후)의 業績(업적)들이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모두 記錄(기록)되어 있다.
否定的(부정적) 評價(평가)
文定王后(문정왕후)의 天性(천성)을 두고 '강한(剛狠)'이라 表現(표현)했는데, '한(狠)'은 사납거나 性質(성질)이 거세고, 怨恨(원한)을 품거나 마음이 비뚤어짐을 意味(의미)하는 漢字語(한자어)이므로, 實錄(실록)에서 堂代(당대)의 王妃(왕비)를 두고 露骨的(노골적)으로 辛辣(신랄)하게 性格(성격)을 記錄(기록)한 것은 異例的(이례적)인 일이다.
堂代(당대)의 史官(사관)들은 文定王后(문정왕후)의 垂簾聽政(수렴청정)과 政敵(정적) 肅淸(숙청), 外戚(외척) 尹元衡(윤원형)의 專橫(전횡)과 佛敎(불교) 復興(부흥)에 대해 激烈(격렬)하게 非難(비난)하고 批判(비판)하였으며, 後代(후대)에도 文定王后(문정왕후)는 많은 儒學者(유학자)들의 指彈(지탄)의 對象(대상)이 되었는데, 肅宗(숙종)의 어머니인 明聖王后(명성왕후)가 지나치게 國政(국정)에 干涉(간섭)하려 하고 洪水(홍수)의 變(변) 事件(사건)을 일으켜 麟坪大君(인평대군)의 아들들을 誣告(무고)한 事件(사건)을 두고 南人(남인)의 조사기(趙嗣基)는 '文定王后(문정왕후)를 다시 보는구나' 하며 批判(비판)하고 王大妃(왕대비)의 國政(국정) 干涉(간섭)을 批判(비판)하는 訴(소)를 올리며 文定王后(문정왕후)에 比喩(비유)하기도 하였다.
使臣(사신)은 論(논)한다. 尹氏(윤씨)(文定王后(문정왕후)는 天性(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인종(仁宗)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尹氏(윤씨)가 그를 꺼리자,그 아우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아우 윤임(尹任)과 틈이 벌어져,尹氏(윤씨)와 世子(세자)의 양쪽 사이를 얽어 謀陷(모함)하여 드디어 대윤(大尹)·소윤(小尹)의 說(설)이 있게 되었다.
— 《明宗實錄(명종실록)》 31券(권) (中略(중략)—
이때 사람들이 모두 仁宗(인종)의 고위(孤危)를 근심하였는데
中宗(중종)이 昇遐(승하)하자 仁宗(인종)은 孝道(효도)를 極盡(극진)히 하여 尹氏(윤씨)를 섬겼다.
그러나 仁宗(인종)이 大妃(대비)에게 問安(문안)할 때, 頻繁(빈번)히 怨望(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官家, 仁宗(인종)는 우리 家門(가문)을 살려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仁宗(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 하고 또 喪中(상중)에 過度(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서 우상(憂傷)이 되어 昇遐(승하)하게 되었다.
主上(주상)(明宗(명종))이 卽位(즉위)하게 되어서는,
當時(당시) 제공(諸公)들이 그의 강한(剛狠)함이 반드시 나라를 해칠 것을 근심하여, 임조(臨朝)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대개 그 시세가 부득이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곧 禍(화)를 부를 뿐이었다.
얼마 못 가서 문득 큰 獄死(옥사)를 일으켜 前(전)에 仁宗(인종)을 扶護(부호)한 사람을 모두 逆賊(역적)으로 指目(지목)하였다.(中略(중략)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과 中外(중외)에서 權力(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年(년) 사이에 朝廷(조정)의 政事(정사)가 탁란(濁亂)하고 廉恥(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困窮(곤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宗嗣(종사)가 亡(망)하지 않은 것이 多幸(다행)일 뿐이다.
— 《明宗實錄(명종실록)》 31券(권), 明宗(명종) 20年(년)(1565年(년) 4月(월) 6日(일) (妊娠(임신)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功(공)이 있다 하여, 때로 主上(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所有(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號筒(호통)을 쳐서, 마치 閔家(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明宗(명종)의 天性(천성)이 지극히 孝誠(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상(明宗(명종))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비(尹妃)는 社稷(사직)의 罪人(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 《明宗實錄(명종실록)》 31券(권)—
윤비(尹妃)는 천성이 엄의(嚴毅)하여 비록 상(明宗(명종)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垂簾聽政(수렴청정)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하는 것도 모두 상(明宗(명종)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佛敎(불교)에 마음이 蠱惑(고혹)되고 宦官(환관)을 信任(신임)하여 나라의 倉庫(창고)를 다 기울여 승도(僧徒)들을 奉養(봉양)하고, 남의 田地(전지)와 奴僕(노복)을 빼앗아 內豎(내수)를 富裕(부유)하게 하며 賞罰(상벌)이 僭濫(참람)하여 사람들이 勸戒(권계)되지 않았다.
게다가 權勢(권세)가 外戚(외척)으로 돌아가 政事(정사)가 사문(私門)에서 나오고 賂物(뇌물)이 公公然(공공연)히 行(행)해지며, 紀綱(기강)이 紊亂(문란)하고 국세(國勢)가 무너져서 將次(장차) 救援(구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多幸(다행)히 明宗(명종) 大王(대왕)이 전의 잘못을 깨달음에 힘입어 將次(장차) 크게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는데, 정령(政令)을 베푼지 오래지 않아서 문득 昇遐(승하)하니, 아, 슬픈 일이다.— 《明宗實錄(명종실록)》 31券(권)
梁芳秀(양방수) 文定王后(문정왕후)를 찾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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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수 2021-03-31 오후 5:55 ~ 귀한 자료 참으로 잘 봤습니다. 늘 삼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