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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달에는 (막3:20-30)을 통해 <예수님과 서기관들의 바알세불 논쟁>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 상열 목사 드림.
- <1. 예수님에 대한 군중들과 친속들의 반응> : ① 군중들의 반응(v20) :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의 열정과 열광은 너무도 커서 그분은 자신을 돌아볼 수가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식사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올 것을 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왔습니다. 그들은 집을 가득 채웠고, 거리로 넘쳐흘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필요보다도 호기심으로 왔지만, 다른 이들은 듣고 배우려고, 혹은 도움받고 치유 받기 위해 왔습니다.
-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왜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열광이 너무도 적은가요? 무리를 지어 그분께 몰려들어야만 하는데도 그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들은 육체와 그의 감정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들은 자존심, 명성, 권력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들은 지금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믿는 자들의 증거와 삶이 너무 약하지는 않습니까?
- ② 몇몇 친속들의 반응(v21) : 그러나 몇몇 친속들의 반응은 무리들과는 놀라울 정도로 달랐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그분의 행동에 대해 듣고는 그분이 미쳤다고 결론지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붙들어 두려고 찾았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친속들이 듣고”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들이 들었던 것들은 군중들에 대한 것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 즉 그분의 놀랄만한 이적들, 주장들, 가르침들, 또한 사람들이 그분께 드러내 보인 예언자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 그리고 그 당시 그분의 생애를 위협하는 반대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친지들로 하여금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 이처럼 친속들이라 할지라도 그릇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친속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개의치 말고 단호히 하나님께 순복하며 그분의 의지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때 친속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할 수는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선한 의도를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의지 안에서 강해지고 견고히 서는 것이 항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 <2. 예수님에 대한 종교인들의 비난> : 그리고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도 예수님의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서기관들을 파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동안과는 달리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를 걸고넘어지고 있습니다. 일명 바알세불 논쟁이라고 하는데,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이적들을 자세히 살펴본 후에, 그의 사역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힌 결과라고 매도를 합니다(v22).
- 그들의 비난은 매우 신랄했습니다. 본문에는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바알세불의 초능력 아래에 사로잡혀 있고, 거하며 지배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탄과 연합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난은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악의 화신, 사탄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권세의 근거를 오도하여 무리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도록 꾸몄던 것입니다.
- 사실 이들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 행위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새롭거나 특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악한 영을 쫓아내는 데 항상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능력은 제한적이지 않으며, 항상 효험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축사 능력의 사건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결론은 “바알세불, 즉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었습니다.
- 또한 종교인들은 고의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논박하려고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분은 협잡꾼이며 사기꾼이며 다른 사람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악한 사람이며, 악과 사단과 관련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주장은 논박당하여 사람들은 더 이상 그분을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마12:1-13).
- 하지만 당시에 귀신축출과 이적행위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메시아적 능력과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권세와 능력을 소유한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의 명성과 권위는 상승하고, 상대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는 추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것은 메시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귀신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던 것입니다. 이에 가족들마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 채 소문만 믿고, 예수님을 고향으로 데려가려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 <3. 이러한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반증> :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반증은 강력한 논쟁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논리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단이 어떻게 사단을 쫓아내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v23). 그 질문은 모면하기 어려우며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결코 악을 내쫓지 못합니다. 만일 사단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을 거슬러 행하는 것인데, 이는 사단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사단은 악을 세워 확장시키려고 하지 악을 파괴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비난은 비논리적이며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네 가지 반증으로 증명하셨습니다.
- (1) 내부의 분쟁은 항상 나뉘며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 첫째로 그들에게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나 집은 무너질 것이라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사탄이 그의 동료들을 쫓아내는 것이고 사탄의 나라는 이미 망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v24-26).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임을 피력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대리자이시지, 사단의 대리자가 아닙니다. 그분이 주장하신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을 어떤 다른 신분으로 논쟁하는 것은 모두 비논리적입니다.
- (2) 사단의 나라는 늑탈 당한다는 것입니다. : 또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밝힌 후에,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v27) 여기서 표현된 ‘강한 자’는 사탄을, ‘강한 자의 집’은 사탄의 나라의 권세를, 그리고 ‘집의 세간’은 사탄으로부터 속박받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강한 자를 결박하는 자’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 침입자가 세간을 늑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를 결박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사단의 나라를 침입하십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의 나라와 세력을 제압하고, 그곳에서 속박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정복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지금도 이 세상과 악의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이처럼 사단의 나라는 늑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비유는 실제로 (사49:24-25)과 흡사합니다. 한 사냥꾼이 맹수를 제압하고 그 맹수로부터 희생물들을 풀어준 것처럼, 예수님은 사탄을 결박하고 사탄의 나라에 갇힌 백성들을 구원해주십니다. 이런 사탄의 세력이 패배하는 그 현장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2:30-31)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했고, (골2:15)에서는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3)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적이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 심지어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헐뜯는 훼방까지도 용서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v28) 사람들은 이 영광스런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는 죄는 없습니다. 얼마나 그 죄가 무시무시하고 나쁜가에 관계없이 사람은 어떤 죄라도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 돌아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만 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제한적이지 않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을 훼방했는가에 관계없이 용서하실 것입니다.
- (4) 그러나 단 한 가지, 사함 받지 못할 죄를 범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v29). 즉 하나님의 일을 사단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촉구를 거절하는 것, 성령의 조명에 스스로 눈이 먼 행위, 성령께서 죄라고 책망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죄를 짓는 행위, 성령의 사역을 반대하는 행위, 자신의 죄로 가득한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행위, 등등.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무시하는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 또한 이 본문은 문맥의 흐름상 열두 명의 제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전 단락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당신이 소유한 놀라운 능력과 권세를 수여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길 의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결국 변화산 아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여 귀신을 축출하려 했던 제자들은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9:19-20).
-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여전히 무능하고 소극적인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신들의 분명한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위해 다양한 능력과 영역들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 사업장, 학교, 그리고 직장은 분명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의 단계를 넘어서 그것들에 대한 사명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구를 주시고 각자의 영역으로 보내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 사탄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통해 우리가 부여받은 능력과 영역을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신들의 사회적 명성과 신분 상승을 위해 사용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부여받은 능력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값진 밑거름으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 (결론) :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는 점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성이 지성답게 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이라면 그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이고 있는 행위는 지극히 파렴치한 것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터무니없이 예수님을 중상모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예리한 논증으로 반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바로 이런 지혜가 아닐까요? (끝)
- 이번 달에는 (막3:7-12)을 통해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통하여 군중과 악한 귀신에게 끼친 예수님의 영향>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 상열 목사 드림.
- 사실 사람들에게 미친 예수님의 영향은 믿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불과 몇 달 안에 온 민족이 약속된 메시아, 나사렛 예수라 불리는 사람을 좇으려고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종종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오늘 본문 구절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우리는 (v7과 8)의 본문 말씀에서 두 번씩이나 “큰/허다한”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 <1. 본문의 배경> : 사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종교적‧정치적 지도자 모두가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직면하기 전에도 여전히 엄청나게 가르치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분의 때는 오지 않았으므로, 그분은 아직까지는 죽음에 넘겨져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회당으로부터 나와 탁 트인 갈릴리 바다로 옮기셔야 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군중을 대상으로 회당이나 도시에서 사역하시기에는 그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몰려드는 사람들의 북새통으로 그분은 몸이 짓눌려 생명까지 위태로울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 <2. 사람들에게 미친 예수님의 영향> : 사실 군중에게 미친 예수님의 영향은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종종 간과되거나 과소평가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열렬히 예수님을 원했는지는 군중들이 모인 사실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 (1) 첫째로, 많은 무리들이 예수께로 모여들어 진실로 그분을 원했습니다. : ① 먼저 몰려온 지역들을 살펴보면, 군중들은 갈릴리 전역으로부터 몰려왔습니다. 15,000명이나 그 이상의 인구를 지닌, 200개 이상의 도시로 둘러싸여 있는 갈릴리 지역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군중은 유대와 예루살렘으로부터도 왔습니다. 그 말은 무려 거리가 100마일, 즉 160km나 되는 긴 여행길을 헤쳐왔음을 의미합니다.
-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군중은 팔레스타인과 아라비아가 인접한, 훨씬 남쪽에 자리한 이두매로부터도 왔습니다. 이두매는 에돔 또는 에서의 땅에 대한 헬라와 로마식 이름이었습니다. 즉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오기 위해 엄청난 거리를 여행해 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것뿐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요단강 동쪽 편에 살았던 주민들을 지칭할 때 언급하는 요단강 건너편으로부터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군중은 북부로부터, 베니게의 외국 영토로부터, 그 민족의 주요 도시인 두로와 시돈으로부터도 왔다는 것입니다.
- ② 더군다나 이들 큰 무리들이 예수님께 몰려온 이유는 “그의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왔다는 것입니다(v8).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직접 보고 들은 이들의 증언을 들었거나 혹은 예수님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선지자인 메시아가 오셨다는 증언은 맹렬한 불길처럼 퍼져갔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많은 이들은 일어나 그들의 짐을 꾸려 그분께로 나아왔습니다.
-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 은혜에 대한 놀라운 일을 증언하고 말하는 일의 중요성이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좀 더 신실하게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을 전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와 그분을 따르겠습니까?
- (2) 둘째로, 무리들이 그분을 에워싸고 밀어서 그분을 짓누를 지경에까지 이르러 그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 (v9-10)입니다.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효능이 자신들의 몸으로 흘러들어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여” 서로 밀고 당겼으므로 그분의 몸을 몹시 압박할 지경에까지 나아갔습니다(v10).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밀어붙이는 군중이 너무 많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무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해변으로부터 좀 떨어진 거리에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v9).
-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이런 사람들과 같은 정도의 열정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만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 즉 예수님의 구원하는 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사55:6)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말씀하셨고,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렘29:13)에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그 당시에도 허다한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온 것입니다.
- <3. 악한 귀신에게 미친 예수님의 영향> : 그런데 악한 귀신들에게 미친 예수님의 영향은 더욱 극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임재는 저들 마음속에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귀신에 대한 그분의 능력은 믿는 자들에게는 도리어 큰 위로와 확신이 되었습니다.
- 악한 귀신은 예수님께 복종했습니다. 그들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적인 세계에서나 영적 존재의 차원에 있어서 위대한 힘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통제 아래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v11) 악한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인정하였으며,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했습니다.
-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즉 군중들은 고침을 받고자 하여 예수님을 만지려고 “핍근히” 했지만, 그들은 아직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모르며, 그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행하는 이가 누구인지, 비록 그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할지라도, 아니 그래서 고침을 받을지라도, 아직은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악한 귀신은 그분의 신성을 즉시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고 외쳤습니다(v11). 이처럼 영적 지각력이 있는 귀신들은 즉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리지만, 사람들은 단지 도움이 필요해서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그 귀신들은 그분께 대한 헌신으로 인해 그분 앞에 엎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했으므로, 종말이 되기 전에 그들을 예정된 지옥으로 던져 보내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서 엎드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악한 귀신, 모든 악한 사람은 공포와 두려움의 상태에서 자신이 지옥에 처해지지 않도록 이처럼 고백하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악한 귀신의 고백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v12).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고백은 이런 귀신들의 고백이 아니라, (시51:17)에서처럼 오직 상하여 통회하는 심령의 고백, 즉 변화되어 회개하는 삶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사66:2)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 (결론) : 여러분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바닷가까지 여행길을 떠나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요단 동편에서부터 나아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토록 간절히 주님을 찾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통회하고 상한 심령이 되어 주님께 나아간 적이 있나요? 혹시 악한 귀신처럼 주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시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즉각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영적 지각력을 갖고 계신가요? 단지 나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핍근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매우 큰 무리였지만, 그 멀고 먼 곳으로부터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는 왔지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리고 그분께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무리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또 주님을 올바로 알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