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며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선택받은 자의 목소
리가 수 만 명의 목청을 뚫으며 조용히, 그러나 다소 긴장과 압박을
주며 모든 이들에게 들려왔고, 주위에 몰려있던 모든 백성들은 그와
그의 영원하신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갈림길의 아이들이여. 내 앞에 서라]
열 살을 갓 넘어 보이는 선택받은 자의 후계자인-갈림길의 아이
들- 10명의 아이들은 자신들 주위를 감싸고 있는 끝없는 행렬 가운
데 일렬로 섰고, 위대하신 선택받은 자는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선택받은 자는 휘나에. 그녀를 새로운 선택받은
자로 임명한다]
웅장하며 신비로운 목소리가 이딜리포네아의 전언을 우렁차게 선
포했다.
- 시, 싫어!! -
고난과 역경의 선택받은 자로 임명된,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던
아이는 선택받은 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아이의 째
지는 듯한 비명과 몸부림을 보면서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고, 곧
그 아이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한 마디를 남겼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운명. 너는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포르세네온력 110년 』
1. 선택받은 자
포르세네온력 117년 어느 여름.
뚜벅뚜벅-
화창하지만 어느 때보다 한적한 오후. 빛을 다루는 신인 이페아는
점점 그 따사로운 눈길을 모든 만물들에게서 거두어 갔으며, 온 대
륙은 점점 붉은 빛에 덮여졌다. 마치 자신의 눈길이 거두어 지는 것
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모든 이들에게 온 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
다.
이 장면을 토대로 이페아를 모시는 페란 왕국의 국보 제 1인
『창조와 빛』이라는 서적 제 1장 첫줄에서는 [이페아의 눈길은 탄
생과 소멸을 뜻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새벽녘엔 희미하지만 밝은
빛을 뿜어내는 이페아의 눈길은 경이롭고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축
복을 한 몸에 받으며 탄생한 조그마한 생명체에 비유하고 있고, 어
느 때보다 뜨겁고도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낮은 건장하고 생기 발
랄한, 인생에 있어 최 절정기인 청년을 비유하고 있으며, 지금같이
불그스름한 빛을 뿜어내며 온 대륙을 포근히 감싸는 오후는 모든
이들의 우러름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주변사람들을 충고와 따스한
눈길로 감싸주는 노년기를 뜻하며, 빛이 사라진 후 정적만이 가득한
밤은 모든 것을 고스란히 땅 속에 묻어 둔 채 눈을 감는 죽음을 뜻
한다.
페란 왕국, 시아난 왕국, 네슬란 왕국, 포르세네온 왕국, 소브 왕
국. 이렇게 다섯 국이 모여있는 대륙 중, 해안 가에 위치하여 지리
적 이점으로 인해 당당히 제 1의 상업도시라는 명찰을 달고있는 포
르세네온 왕국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활기찼던 거리가 지
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따스한 이페아의 눈길을 받으며 점점 붉은
빛으로 치장해 나아갔다.
왕국 중앙에 위치한 이딜리포네아 신전 또한 순결과 온화를 상징
하는 흰색의 대리석과 소박함이 붉은 빛 이페아의 눈길과 서로 어
우러져 마치 신이 대륙에 강림하는 듯, 신전 전체가 붉게 타오르는
정경을 이루어 실로 화려하면서 소박한 아름다움에 절로 탄성이 나
올 정도로 대단한 풍경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런 절경을 뿜어내는 이딜리포네아 신전 내에서는 지금
뚜벅뚜벅 규칙성 있는 발소리와 다소 불안하면서도 불규칙적인 발
소리, 두 가지의 소리가 이중으로 겹쳐져 대리석 복도를 웅웅 울리
고 있어, 혹시나 신전 근처를 지나가며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행인
이 있다면 자연스레 눈살을 찌푸리게끔 만들었다.
뚜벅뚜벅-
- …… -
탁탁탁-
- 휘나에, 날씨도 맑은데 우리, 밖에 나가서 놀지 않을래? -
조용한 신전을 시끄럽게 떠들며 복도를 쿵쿵 울리는 존재 둘은
다름 아닌 17, 18세 정도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였다.
벽 없이 사방이 뚫려있는 긴 복도는 붉은 빛 이페아의 눈길을 고
스란히 받으며 동시에 흰 대리석과 자연스레 조화시켰고, 주위에 주
욱 깔려있는 잔디와 꽃나무도 붉은 빛으로 치장해 마치 가을이 다
가온 것 같았으나, 이러한 절경도 시끄러운 두 남녀(정확하게는 소
년)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순결의 신인 이딜리포네아를 섬기는 신관답게 두 남녀는 흰색 신
관복장을 하고, 양쪽 어깨에는 각각 흰색 긴 네모난 천과 붉은 색
천을 달고 있었는데, 소년 신관의 옷엔 흰색 천이, 여자신관의 옷엔
붉은 천이 달린 것을 봐 여자 신관이 소년신관보다 지위가 높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년 신관은 귀를 덮을 정도의 짧은 갈색머리와, 시원스럽게 동그
란 두 눈은 머리색과 비슷한 갈색 눈동자로 인해 매우 순수해 보이
고, 웃을 때 양 볼에 보조개가 들어가 매우 해맑아 보이는, 전체적
으로 준수한 외모의 17세 정도의 소년이었다. 그에 비해 소녀 신관
은 검은 색 긴 생 머리를 길게 풀어놓은, 소년과 비슷한 또래로 보
이는 소녀였는데, 얼굴은 동그란 검은 눈동자와 오똑한 코, 조그마
한 얼굴로 비교적 예쁜 편에 속하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
리며 언뜻언뜻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가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차 보
였다.
- …… -
가뜩이나 날카로운 눈을 찡그리며 묵묵히 앞만을 보고 걸어가고
있는 여자신관 옆으로 소년신관은 환한 미소를 얼굴 가득히 그려내
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나 여자신관은 소년신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치 투명인간 대하는 듯 무시하며 계속 해 긴 복도를
걸었다.
뚜벅뚜벅-
- 아니면, 심심한데 도서관이나 가서 고대 서적 읽을까? -
- …… -
뚜벅뚜벅-
이럴 때 보통 다른 이들 같으면 자신의 말이 먹힌 것에 대해 무
안 감을 가지고 말 걸기를 포기하거나 당사자에게 시비를 걸 듯도
하지만, 소년 신관은 휘나에라는 소녀신관의 대답이 없어도 마치 이
것이 일상생활인 듯, 애초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듯, 얼굴에서 웃
음을 잃지 않으며 계속해서 휘나에에게 말을 걸었다.
- 아! 우리 몸도 뻐근한데 오랜만에 마법훈련이나 할까? -
- …… -
뚜벅뚜벅-
- 그것도 싫다면 정원 가서 산책이나 하… -
- 닥치고 따라와 -
소년신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나에의 목소리인 듯한 고음
의 얇은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들려왔다. 그러나 얇은 목소리와는
대조되는 조용하고 무거운 성량 때문에, 그녀는 현재 매우 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상대방의 몸을 절로 움츠리게 만들었다.
- 하핫, 그래. 그래 -
그러나 소년신관은 이런 휘나에의 행동엔 익숙해져 있다는 듯 약
간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곤, 멈춰 서지 않고 자신보다 대략 열
발자국 앞서서 걸어가는 휘나에의 등을 바라보며 시원스럽게 대답
하곤 그녀를 뒤따라갔다.
- 같이 가! -
- …… -
힘차게 뛰어가는 소년신관 덕에 그가 입고 있던 헐렁한 신관 복
은 바람에 이리저리 풍성하게 휘날렸고, 결국엔 옷 속 안으로 바람
이 들어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로프자락을 두 손으로 잡아 올린
채 엉성하게 휘나에에게 뛰어가야 했다.
- 우차! … 야! 기다려, 야-호… 가, 같이 가자니까∼ -
- …… -
남자신관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걸어가는 휘나에.
남자신관과 그녀의 사이는 이제 목소리 톤을 약간 높여야 될 정도
로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 이런…. 그 성깔하고는. 쳇 -
남자신관은 잠시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휘나에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짧은 갈색 머리를 긁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항복의 의미
에서의 미소인지, 난처함의 웃음인지 알 수 없는 괴상한 미소를 입
가에 머금은 채, 양손을 옆으로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 했다.
- 또 내가… 져 줘야겠지? …… 에라∼ 그놈의 성깔 언젠가는 고치
겠지, 뭐. 일단은, 눈감아 줘야지. 쳇, 이게 뭐냐…! 남자의 수치다!
바보 같은 놈 -
씨익-
아직도 끝나지 않은 복도를 쿵쾅쿵쾅 울리며 마치 개울물을 건너
는 듯한 포즈를 한 채 뛰어가는 갈색머리 소년 신관과, 그 앞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 소년신관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묵묵
히 복도의 끝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여자신관.
- 야아아-! 같이가아∼ 휘나에! -
- …… -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본다면 분명 배꼽잡고 웃을 일
이었다. 그러나 이딜리포네아 신전의 지위가 높은 신관이나 대 신관
이 이 모습을 본다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