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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민주주의가 최고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어
한국은
아직까지 아름답다
남대문 삼익패션타운에서 장사할 때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김승교 변호사...
몇년후
의료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상인을 데려가
쌍문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상담을 받을 때
김승교변호사는
현실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의료분쟁은
환자의 승소률이 희박하다는...
상인은 얘기를 듣고
모든 미련을 버렸다
모든 변호사들은
사건을 맡으려고
승소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때,,
김변호사의 진정성을 보았다...
변호사의 기득권을 버리고
한국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던 김변호사는
이정희변호사와 동지다..
나경원변호사가(국회의원)
온갖 폼을 잡고 패션화보 촬영 할 때
이정희대표는 대한문 앞 천막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피해당한 서민 옆에 함께 했던
통진당...
김승교 변호사님!!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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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모란공원 묘비에 새긴 김승교 열사의 염원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4-10
10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저명한 인권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인 고 김승교 변호사 묘비 제막식이 열렸다.
동지들은 많은 논의 끝에 김승교 열사가 마지막 투병일지에 남긴 '별이 되는 날에'라는 제목의 글에 그의 의지가 가장 잘 담겨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그것을 비문에 새겼다.
별이 되는 날에
슬퍼하지 마시라. 인생이 짧았다고
마흔 일곱에 삼십여 성상이나 태양아래 빛나게 질주하며 산 세월이었으니
슬퍼하지 마시라. 인생이 아깝다고
누구나 가는 길일지니 단지 조금 빨리 가고
늦게 가는 차이가 있을 뿐
나를 잊어 시라.
반드시 가야 하고 이겨야 할 정의의 전쟁에서
최후승리를 앞두고도 낙오한 못난이였으니
나를 잊어 시라.
동지들의 짐을 대신 져주지는 못할망정
무거운 짐을 벗들의 어깨에 떠넘기게 되었으니
다만 기억하시라. 저 하늘의 별같이
민주와 인권, 자주와 통일, 참된 평화와 평등을 위한
저항과 혁명의 길에 이름없이 쓰러져간
이들이 많았음을
부디 기억하시라.
그들이 죽어서도 반역의 굴레로 오욕과 조롱 속에
진창길을 떠돌고 있음을
참된 별이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음을
-고인이 남긴 투병일지 중에서-
김승교 열사는 인권변호사로서 억을한 약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으며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그리고 진보정치의 앞날을 개척하기 위해 자신의 가진 재부와 시간 그리고 건강까지도 서슴없이 다 바쳐 불같이 살다가 지난해 애석하게도 마흔 일곱 너무도 젊은 나이에 영면에 들어 만인을 통곡게 하였다.
오늘 그의 묘지에 비석을 세우며 가족들과 동지들은 그 김승교 열사의 염원을 기이어 찬란한 4월 봄꽃처럼 환하게 피워낼 의지를 굳게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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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 잠들다 - 故 김승교 변호사
마당쇠|16.01.20|29목록댓글 0가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기관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106호에 실린 글을 민변의 동의를 구하고 게재합니다. 민변 설창일 회원 외 7인 - 설창일, 박치현(이상 민변 회원), 김민교 변호사(가족, 민변 회원), 이형희, 정원구, 차윤영, 김진한, 김남수(이상 고대 동문), 민권연대 - 이 공동집필하고 하주희 변호사가 정리한 글임을 밝힙니다.
“항상 든든한 형이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왜 같이 시간을 좀 더 보내지 않았는지 후회가 밀려온다. 유튜브 등에 남아 있는 동영상이나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보면 아직도 옆에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다시는 형의 온화하게 조용조용 말하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누구보다 삶의 의지가 강했고, 2014년 말까지는 죽음에 대해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아직도 형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지난 2014년 12월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형이 공항에 마중 나왔을 때가 내가 본 형의 마지막 건강한 모습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던 날 2015년 7월에 귀국하겠다고 하니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하며 하늘을 쳐다보던 모습과 병원에서 고생할 때 ‘민교야’하며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요즘도 들리는 것 같다.” 고 김승교 변호사(2015년 8월 31일 작고)에 대한 동생 김민교 변호사의 회한이다.

더 이상 부를 수도 다가갈 수도 없게 된 지금.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단지’ 후배인 나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다. 거리, 식당, 사무실, 화장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를 만나게 되는데, 오늘은 우연찮게 ‘평화협정’ 관련 자료를 뒤지다가 2007년 그가 작성한 발표문을 만났다. 향린교회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 만든 자료였는데, 각국의 평화협정을 꼼꼼히 비교 정리하며 우리에게 평화협정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그의 흔적을 만날 때마다 ‘멍’해짐을 피할 수 없었다. 다들 비슷한 마음일 텐데 그와의 인연을 감사해하며 많은 분들이 그에 대해 아낌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덕분에 삶을 정리하는데 정작 본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치명적 난점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단지’ 후배인 내가 정리하기는 그 깊이와 내용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회원들에게 그의 면모의 일부라도 전하는 것은 우리 회원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이나 가치를 정하거나 돌아보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한 문제가 무척 민감하지만 그 뜻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믿음 하에. 미처 전하지 못한 그의 이야기는 보충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본다. 그는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로라도, 지저귀는 새소리로라도, 기쁨의 빗물로라도, 눈부신 햇살로라도”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했으니까.
어린시절 - 든든한 형, 승부욕 강한 소년
그는 1968년 경남 진주에서 2남 1녀의 단란한 가정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동생이자 동료인 김민교 변호사는 그를 모험심(?)이 강하고 승부욕이 강한 소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아주 좁은 골목길 사이로 집들이 붙어있던 인사동 시절이 형제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시기였다. 거기에는 막걸리 만드는 공장이 있었고 그 옆 공터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공놀이, 딱지 따먹기(네모난 딱지치기용 딱지가 아니라 만화 그림 등이 인쇄된 동그란 딱지), 구슬치기 등 그 시절 놀이들이 유행이었다. 그는 눈썰미나 기술(?)이 뛰어나고 과감한 면이 있어 내기를 하면 항상 구슬과 딱지를 땄다. 모든 놀이들이 그렇듯이 마지막에는 시간이나 여러 사정에 쫓겨 두 명만 남게 되고(나머지는 다 털려서 구경만 하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따야 끝이 나게 된다. 그는 간혹 동생이 잃고 오면 나가서 구슬이나 딱지를 따간 친구에게 가서 복수한 후 동생에게 돌려주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 고등학교 때 보면 수학을 매우 잘했다. 경우의 수에 대한 감각이 있었던 것 같고 따라서 나중에는 바둑도 즐기는 편이었다. 약간 위험을 선호하고 승부욕이 강한 면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가족여행에서
(가운데가 김승교 변호사)
그 모험심은 가끔씩 위험한 상황이 되기도 했는데, 중학교 때는 겨울에 시골 할머니 집에 있는 강에서 썰매를 탄 적이 있었다. 당시가 겨울의 끝자락이라 강에 언 얼음이 녹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썰매를 잘 타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얼음이 강가에서 안쪽으로 한 3-4미터 되는 곳에서 강둑과 나란히 크게 갈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썰매를 계속 타다 보니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강가에서 안쪽으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열심히 놀고 있었는데, 형이 안쪽으로 가로질러 넘어오려고 하였다. 얼음 갈라진다며 오지 말라고 말렸으나, 기어코 넘어와 결국 얼음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갈라지고 말았다. 한겨울에 3명이나 물에 빠졌고, 볏짚을 태워 야외에서 옷을 말리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했던 형제는 둘도 없는 친구였고, 축구, 야구, 특히 그가 용돈을 모아 마련한 탁구대에서 쳤던 탁구는 형제를 더욱 붙어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된 후 그는 학교에서 공부에 열중했다. 진주 대아고를 다닌 그는 당시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다 그러했듯이 밤 10시 30분까지 전혀 자율적이지 않은 자율학습을 하고, 일요일도 등교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집에 와서도 공부를 했었는데 꼭 라디오를 틀어두고 해서 동생은 덕분에 음악적 소양이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운동을 좋아하고, 평범했던 그는 1986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 차분하고 말없는, 그러나 치열했던
그와 대학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그의 첫인상을 하나같이 차분하고 말이 없었다고 한다. 세미나나 토론할 때도 너무 말이 없어 “말 좀 하라”고 할 정도였다. 법대 학회실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고, 다른 동기들처럼 큰 소리로 연설을 하지도 않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좌중을 뒤흔들어 놓는 사람도 아니었다. 늘 뒷자리에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웃고 있는 말없는 친구였다. 같이 대학생활을 보낸 한 동기는 그로부터 거친 말이나, 누구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없이 순수한 그의 생각과 마음의 반영된 것이었을 거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이렇게 한 없이 인자하기만 하던 그가 1년 후배에게 크게 화를 냈던 얘기는 아직도 같이 학교를 다녔던 법대 86, 87학번들에게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87년 뜨겁던 6월을 보내고, 여름방학 때 그를 비롯한 2학년 3명, 1학년 1명이 지리산행을 떠났다. 방학이라 각자의 집에서 출발하여 진주로 모인 4인은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산을 좋아하던 그는 등산을 할 때도 쉽고 편하고 빠른 길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힘은 더 들어도 물소리 새소리 나무냄새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길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 때도 조금 편한 중산리에서 칼바위 코스가 아니라 계곡코스를 선택해서 길고 힘든 등반이 되었다. 함께했던 신입생은 등산 경험도 없고, 가파른 중산리 계곡에서 비까지 맞고, 또 비에 젖은 텐트와 모포로 무거워진 배낭까지 멘 터라 무척 힘들어했다. 선배들은 배려 차원에서 이 후배의 짐을 나누어 메고 후배에게는 단 한가지 물통만을 짊어지게 했다. 힘들게 1박을 하고 천왕봉에 올랐고, 천왕봉을 오르자마자 시간 때문에 다시 하산을 재촉했다. 그런데 신입생은 선배들이 쉴 틈도 없이 바로 출발하자 심통이 났고, 화가 난 채 능선을 따라 혼자서 먼저 질주를 해 버렸다. 당시는 큰 물통 하나로 음료와 식수를 모두 해결했어야 했고, 뒤따라간 선배들은 아무리 쫓아가고 후배를 만날 수 없었고 더운 여름 목이 마르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결국 두어시간이 지난 후에야 선배들과 후배는 조우했고, 그 때 그는 무척 화를 냈었다. 그 신입생은 대학생활을 통틀어 그의 화를 이끌어낸(?) 유일한 후배였고, 그가 화를 냈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동료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그는 ‘좋은 사람’ 이었다.

그러나 그는 싸움 앞에서는 어떤 싸움에서도 몸을 사리거나 뒤로 빠지는 법이 없었다. 특히 대학 2학년, 1987년 민주화 항쟁의 격동이 시작된 때 그는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리를 가리지 않고 투쟁하였다. 그 때쯤에는 사람들 앞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연설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동지들과 함께여서 행복했소’라고 할만큼 ‘동지’들을 생각하고 좋아하고 또 아꼈다. 1988년, 여름만큼이나 뜨겁던 통일운동을 준비하며 화염병을 만들 때도 불량(?)을 골라내는 일은 늘 그의 몫이었다. 꼼꼼할 뿐만 아니라 행여라도 동지들이 다치면 안된다는 그의 말과 마음은 어떤 실수도 허용하지 않았다. 뜨겁던 여름을 보내고 그 해 가을 그는 군대에 갔다.
복학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그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차윤영 선배의 말로 정리하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다. “승교는 참 착한 친구였지! 나중에 진보당 활동을 하면서 많이 독해지긴 했지만. 대학 시절의 승교는 항상 선한 눈매의 미소를 잃지 않는 맘 착한 벗이었지! 승교는 1989년 대학교 4학년 때 군대에 먼저 간 것에 대해 동지들에게 늘 미안해했지! 그 미안한 맘 때문에 군대 갔다와서 변호사가 된 이후 더 열심히 활동했다고 봐!”
그는 1990년 복학을 한 후에도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그는 여전히 특별한 말없이도 왁자하게 노는 데 여념 없는 새내기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편하고 좋은 선배였고, 투쟁에 있어서도 몸을 사리거나 뒤로 물러앉는 법이 없이 치열했다. 그런 그를 후배들과 더 친해지게 만들었던 얘기를 박치현 변호사가 들려준다.
“1990년 1학년 여름방학 학회실에서 승교형을 처음 보았다. 군대를 막 제대한 까마득한 선배는 첫 방학을 맞아 족구며 술자리며 왁자하게 노는 데 여념이 없는 새내기들 사이에 끼어서,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말도 없이 조용한 선배가 그 어린 후배들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던 기억이다. 우리는 그때 승교형을 왜 그리 편하게 생각했던 걸까? 한 학번 선배만 되도 깍듯했던 시절에.”

1990년 9월 4일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는 분단 이후 첫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다. 그 즈음 그는 9월 7일 한겨레신문 사회면 기사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남북의 총리들에게 청년학생들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일군의 대학생들과 함께 역사적인 현장으로 달려가다가 호텔 앞에서 경찰들에게 연행되었다. 그런데 그 신문기사에 실린 이름이 이후에 그를 모르는 후배들의 입에서조차 회자될 정도의 추억담을 만들었다.
그는 그 대학생 무리에서 단연 고학번이었기 때문에 기자는 사지가 들려서 연행되고 있는 그를 쫓아가며 이름이 무언지 물었다. 그때 그는 "김승교요, 김승교"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으'를 '어'로, 반대로 '어'는 '으'로 발음하는 진주 사람이었다. 그러니 기자의 귀에는 그것이 "김성교요, 김성교"로 들렸다. 기자는 계속 쫓아가면서 "김성교요?"라고 확인했고, 이에 그는 "아니요. 김승교요, 승교!"라고 말했다. 기자는 끝내 ‘김선교(고대법학 3)’로 알아듣고 기사를 쓰고.
신림동, 사법시험 합격
이렇게 학교생활을 하던 그는 1995년 1차시험에 합격했고, 신림동에서 다시 만난 학교 동기들과 2차 시험을 준비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변호사가 되어서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부하던 당시를 떠올리는 친구들은 공부를 하는 과정에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다. 항상 말없이 특별한 의견을 내세우지 않던 그였지만, 공부와 관련한 토론이 벌어지면 무서운 집중력으로 양보와 포기가 없었다. 하지만 밥을 먹으며, 함께 산책을 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여전히 조용하고, 친구들의 말에 허허 웃으며 양보하는 그였었다. 토론을 할 때 하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한 대 쥐어박고 싶다가도, 밥 먹고 산책하며 아무것도 아닌 말에 허허 웃으며 ‘그랬나?’ 하는 말에 다시 스르르 마음이 녹아 내렸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잘은 몰라도 그는 어쨌든 자신의 합격,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던 건 분명했던 것 같다. 그는 한차례의 낙방을 경험했지만,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99년 28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인권의 옹호자로, 국가보안법에 맞서다
1999년 28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곧바로 민변에 가입했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꿈과 신념을 향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특히 그는 야만적인 국가보안법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든든한 인권의 옹호자였다. 그의 장례식장에 수많은 당시의 학생운동가들이 몰렸던 이유이다. 1999년은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면서, 단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당선되는 동시에 한총련 탈퇴서를 쓰거나 수배가 되거나 하는 선택을 강요받았던 시기였다. 그와 유사한 시기를 보냈던 수많은 선배들이 자신들이 했던 행위를 답습했을 뿐인 후배들에 대해서 온갖 비난을 퍼부으며 ‘역사는 끝났다’를 외치며 국회로 들어가던 때라 그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그는 개업하고 나서 7~8년 동안 한총련 사건, 범민련 사건 등 국가보안법 사건을 홀로 도맡아 변론하다시피 하였다.
그는 단지 피고인들을 조력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들과 한몸이 되어 투쟁하였고, 변론의 기회를 배움과 발전의 장으로 삼고,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으로 승화시켰다. 덕분에 그는 국가보안법 ‘전문’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 이름이 주는 한국사회에서의 영광과 오욕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물론 그것은 인권옹호를 목표로 하는 변호사로서의 그의 선택이었고, 신념의 반영이었다. 정말이지 그의 설득력 있는 변론 덕분에 그래도 우리는 지금 국가보안법 변론에 나서는 우리들은 훨씬 더 많은 법리와 논리를 가지고 변론에 임할 수 있다. 특히 그가 펼쳤던 날카로운 법리적 지적과 변론문은 이후 국가보안법 재판에서도 두고두고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다 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특별한 민변 활동,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변호인
그는 민변 활동에서도 매우 특별한 장을 연 사람이었다. 2001. 6. 23.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코리아국제전범재판’에서의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 법률지원단으로 활동했던 것이 그 중 하나이다. ‘코리아국제전범재판’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전쟁범죄 가담 행위’를 묻는 것으로서 매우 다양한 이력을 가진 세계적인 반전평화운동가와 법률가들이 참석한, 전세계 양심들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반평화 범죄와 반인도적인 폭력에 반대하는 연대와 화합의 장이었다. 당시 전 세계 18개국 40여명의 전범재판 판사, 검사, 배심원이 참여했고 그들 중에는 독특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

램지 클라크 전 미국 법무부장관과 한국 전 헌법재판관이었던 변정수 변호사가 공동 수석검사로 참여했고, 지텐드라 샤르마 전 인도 대법관이 재판관으로 참여했으며, 독일 해군제독 출신인 평화운동가 엘마 슈마엘링 등 세계적인 반전평화활동가들이 참여하는 자리였다. 거기에 심재환 변호사와 함께 검사로 이름을 올린 그는 한국전쟁당시 미군에 의해 희생된 양민학살 유족들과 함께 “미국 정부는 한/조선반도에 자신의 의지를 실행해 보겠다는 무법적인 결의에서 미국 헌법, 전쟁과 군대에 대한 권한위임법, 권리장전, 유엔 헌장, 국제법, 그리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법률을 위반해 왔다”는 점을 밝히고, 재판부로부터 “전체 한국/조선에서의 미군 점령의 즉각적인 종식, 이 지역으로부터의 모든 미군 기지와 병력 그리고 지뢰를 포함한 물자의 철거, 환경 피해의 교정, 그리고 북한/북조선에 대한 공개적 및 비밀 작전의 중지를 요구한다”는 권고를 이끌어내는 데 한국의 몇 안되는 법조인으로서 기여했다. 특히 그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경청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이를 각종 규범 위반으로 정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위 국제전범재판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2002년 ‘조선일보 민간법정’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제강점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친일행위에 앞장서고 역대 독재정권에 기생하여 사회제반 영역에서의 개혁과 민주화운동을 저해하고 민족분열을 조장하는데 앞장서 온 조선일보에 대한 국민 일반의 광범위한 공분에 의거하여 그 책임을 묻고 참언론의 지표를 제시하여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취지로 개최된 민간법정에는 김인회 변호사가 같이 검사로 참여하고 고영구 변호사가 재판장으로 참여하여 범죄를 ‘생산’하는 조선일보를 단죄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그가 하는 일은 우리사회에서 매우 구조적인 문제임에도 문제제기 자체가 터부시되는 곳을 드러내고 해결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피해자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가 수행한 수많은 변론들, 펼친 주장들, 어루만졌던 피해자들, 함께 했던 숱한 현장투쟁들은 그가 얼마나 정의로운 인간이었나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는 민변 내에서도 한없이 든든한 선배였다. 수없이 많은 열정적이고 용기 있는 가까이 지내며 존경하는 변호사들이 있지만, 내가 그를 각별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가 가진 한없는 든든함 때문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곁을 지켜줄 것 같은 좀처럼 받기 힘든 그런 느낌. 작년 강화도에서 열린 미군문제연구위원회와 자유법조단 오키나와 지부와의 평화교류회 때였다. 그는 정말 모처럼 그 교류회에 참석하였다. 당연히 언제나처럼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지도 말씀을 많이 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참석했는지를 기억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지만. 2014년 교류회는 우리가 주최국이었는데 몇 가지 실무적인 일에 대한 불협화음과 사건 때문에 너무나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행사를 책임지고 있는 우리 변호사들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적어도 나에게는) 호텔 직원과의 분쟁을 해결하겠다며 모두 매달려 있었다. 일어도 잘 못하고, 여전히 행사도 익숙치 않은 나와 초대받은 오키나와 변호사들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때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유일한 사람이 그였다. 여전히 그는 특별한 말없이 자신이 있는 방으로 오키나와 변호사들을 불러들여 잘 모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과자를 내어오고, 술을 꺼내오고 하여 자연스러운 대화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정말 ‘덕분에’ 살았다. 그때 내가 그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더 많이 표현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후회가 된다.
그는 이렇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과 함께 흘렀다. 그가 떠나던 길에 내가 추도사를 할 때 김남주의 ‘혁명의 길’을 떠올린 것도 그의 이런 점 때문이었는데, 그가 남긴 말들 곳곳에 같은 ‘시’가 녹아 있었다. 감사한 우연이었다. “하늘의 태양 아래서 이름을 빛내며 살기란 쉬운 일이다. 어려운 것은 지하로 흐르는 물이 되는 것이다 소리도 없이. 밤으로 떠도는 별이 되는 것이다 이름도 없이”
접견을 거부당한 변호인, 변론권 수호의 새 장을 열다
노무현 정권 때 공안당국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민주노동당의 존재감을 훼손하기 위해 나타났던 ‘일심회’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사람의 이성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국가보안법이 배제와 낙인의 논리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정원과 검찰은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피의자들을 압박하고 있었고, 언론 역시 386 정치인들이 관련되어 있다며 연일 대서특필하였다. 이미 ‘역사’의 일부로 있는 여러 공안 사건들이 있었지만, 노무현 정권 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행위라고 공격을 받게 되었고, 피의자들은 그동안 함께 지냈던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심회’ 관계자들을 민주노동당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당시 민주노동당의 분당의 원인이 되었고 제명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는 훗날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에서 ‘헌법안의 진보’와 ‘헌법밖의 진보’의 기준이 되었다. 이처럼 국가보안법은 일단 낙인찍히면 같이 ‘놀면’ 안되는 그 놀라운 배제의 논리를 모두에게 보여주었고, 그것은 소위 진보진영 안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그런 배제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당연하게도 그를 포함한 변호인들이 변론에 나서게 되었다. 거의 매일같이 이어지는 국정원, 검찰 수사에 피의자들은 지쳐갔고, 수사권의 오용에 대응해 변호인들은 순번을 정하여 매일 접견을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피의자들이 검찰로 송치된 이후 어느 날 느닷없이 검찰은 그의 변호인 접견을 불허했다. 피의자들이 소지한 문서 중에 그가 일심회 조직의 포섭대상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므로 피혐의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피의자들을 접견하여 수사를 방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서울중앙지검 검사실에서의 접견은 물론이고 서울구치소에서의 접견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일은 버젓이 이루어졌고 그는 검찰의 위헌적인 변호인조력권 침해의 시정을 구하는 준항고를 제기하여 검찰의 불허처분이 위법하다는 결정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도 변호인의 접견이 불허된 이후 다른 변호인이 접견하기까지 위법한 상태가 지속된 상태에서 작성된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였다.
그는 불의를 용납하지 않기 위해 어느 것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 사건은 그 외에도 법리적 쟁점들이 상당했는데, 국가기밀로서 아무런 실질적 가치가 없는 신문기사까지 기밀이라고 검사는 주장했고, 이를 배척하고 ‘기밀성’에 대한 축소 해석 판례를 정리한 것도 그였다.
동지들과 함께 비를 맞는 “빈민 변호사”
2000년 10월 21일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이하 ‘실천연대’)를 결성하게 되고, 부설기관인 한국민권연구소 부소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가 가장 애정을 가졌고, 끝까지 함께 한 실천연대, 그리고 실천연대가 해산된 뒤, 새로운 구성원들과 함께 새로 만든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이하 ‘민권연대)로 이어지는 15년의 질기고 진한 인연, 가장 사랑한 동지들과 함께 한 시작이었다.
한국민권연구소 부소장에서 소장으로, 실천연대 상임대표로, 민권연대 공동의장으로 활동 해온 그는 본인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활동을 하기 보다는 스스로 ‘바지 소장’ ‘바지 대표’라 부르며 일꾼과 회원들의 판단을 존중했고, 그러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예리하게 문제를 짚어내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일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 하며 격려를 하다가도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할 때는 함부로 단정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이야기 하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이름을 알리는 일은 극구 사양하면서, 자신은 그저 ‘동지’들과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걸 좋아하던 김승교 변호사... 그래서인지 회원들에게 기억되는 그는 웃고, 노래하고, 술잔을 나누는 자리에 언제나 함께 하고 있었다. 운동이 힘들수록 편한 분위기, 즐거운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그는 지향이 같고 기질이 같은 회원들과 어울리는 것을 유독 좋아했다. 때문에 회원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MT나 워크샵, 야유회, 회원들의 경조사가 있으면 ‘절대 참석’ 하려고 노력했고, 그런만큼 그와 관련된 많은 일화와 추억들이 기억되고 있었다.
그런 추억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에 그는 유서에서도 ‘나는 동지들이 밥 한 끼라도, 술 한 번이라도 근심 걱정없이 즐길 수 있기를...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을 위해 사고픈 것 사고, 하고픈 것 맘 편히 하기를 바랬소. 이젠 그것마저 도와줄 수 없게 되었구려.’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 운영으로 부채가 늘어가던 시기에도 매월 활동가들의 활동비를 걱정하여 별도로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먼 길을 떠나기 얼마전에도 자신의 휴대폰에 사람들의 생활을 걱정하며 누구는 얼마, 누구는 얼마.. 50명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활동비를 챙겨달라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회원들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놓았던 그를 “빈변, 빈민 변호사”라 부르며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보내었다.
그는 특히 모든 일정에서 원로 어르신들의 식사, 자리, 숙소 등의 의전을 직접 담당해서 챙겼고, 원로 어르신이나 선배가 있는 자리라면 2시간이든, 3시간이든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한번은 지리산에서 열린 민권연대 수련회에 선배 운동가가 참석했는데, 다소 지나친 선배의 태도에도 그는 예의를 다해 끝까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새벽녘 빗길 속에 차를 타고 떠나는 선배를 우산도 없이 배웅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은 회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으로 남아,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고 한다.
2008년 이명박 정권 출범 후, 다시금 사나워진 국가보안법의 칼날은 곧바로 실천연대를 겨냥했고, 2012년 그도 결국 ‘변호사 자격을 정지’ 당하게 되었지만, 그는 후회없이 망설임없이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후 그가 통합진보당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최고위원 등의 직책을 맡고 당 활동에 집중하던 시기, 민권연대 활동가들은 그가 당 활동에 전념하고, 민권연대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민권연대 공동의장 사임의 건’을 총회 안건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탄압이 들어올 시기인데 내가 비록 변호사 자격정지 상태이지만 명색이 변호사이니 함께 하는 것이 힘이 될 것이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어떻게 나 혼자 피할 수 있나, 비가 내리면 함께 맞자”라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진심은 모든 회원들의 마음을 울렸고, 그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함께 활동한 심재환 변호사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진실한 사람, 삿되지 않은 사람이다. 누구나 깊은 인상을 받는 그의 선하고 해맑은 미소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공명이나 출세, 축재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었다. 그는 직위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표, 의장 등 이른바 고위직을 맡아 일할 때 그것을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소명으로만 여겼던 일꾼이었고, 늘 겸손하였다. 그는 입발린 소리로 떠들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일을 하여 몸으로 길을 열어가고 타의 모범이 되는 실천가였다.”
피고인이 된 변호인
공안당국의 무소불위의 행위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그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지 1년도 안된 2009년 어느날 ‘실천연대’ 사건으로 기소되어 피고인이 되고 말았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는 6. 15. 공동선언 이후 결성된 회원이 2,000명이 넘는 등록된 비영리 민간단체였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2008년 9월 27일 실천연대 주요간부의 자택 및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4명의 간부를 구속 기소하였다. 그는 같은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공안기관이 제출한 증거목록만 367쪽이었고, 그에 대한 공소사실만 37개였다. 국가보안법의 칼날은 그를 정조준하였고, 그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0년 7월 23일 대법원은 4인의 대법관의 반대의견을 뒤로 한 채 실천연대를 이적단체로 확정하였다. 이미 선행한 사건의 판결이 있던 터라 한없이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예의 그 허허웃음과 날카로움으로 재판에 임했다. 결국 그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집행유예가 확정되면서 그 누구보다 좋아하고 맹렬히 활동했던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어쩌면 그가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한 것은 정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심재환 변호사는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변호사로서의 생활은 그저 성실한 직업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자주통일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파수꾼으로서의 그것이었다. 억눌리고 빼앗긴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해 묵묵히 외길을 걷는 참 인간이었다. 그는 오로지 민중사랑의 정신으로 일관한 전투적 변호인이었고, 실천적 운동가였으며, 민중적 정치인이었다.”
진보정당에서 미래를 찾다

그는 ‘짤린 변호사’ ‘짤변’이라고 스스로 부르면서 여전히 낮은 곳에서 어려운 이들의 벗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또 그 이후의 좌절과 여러 정치지형의 변화를 겪으면서 결국 결사하고 단결한 민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선배, 친구, 후배들이 기존 정당을 통해 국회로 갈 때도 그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래서 그는 민주노동당 도봉 국회의원으로 출마를 하기도 했고, 통합진보당이 만들어졌을 때 선거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이해관계가 뒤섞인 요청들을 정치적으로 혹은 규범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그 후 그는 중앙위원, 최고위원 등을 맡아 일하였다. 그는 이 나라 정치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민중들의 진정한 정치적 대변자가 되는 일에 진력하였다.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은 법무부에 의해 정당해산이 청구된 후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할 때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였다. 해산 청구된 정당의 최고위원으로, 같이 어울리면 다칠세라 어느 누구도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이미 병마가 들었던 까만 얼굴에 예의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며. 그는 평생을 제국주의와 싸운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존경했다. 후세 변호사의 묘비에 쓰인 신념,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를 몸소 실천했던 그였다.

그의 장례식장과 49재 등 그를 추모하는 자리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었다. 실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특별하게 여겨진 것은 그와 대학시절을 함께 했던 여러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그가 품었던 뜻과 의지가 ‘지금’ 자신의 삶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가 품었던 꿈과 이상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고,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각오들을 선배들이 역시 요란하지 않지만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밝히는 것이었다.
여전히 많은 사색과 실천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가 비운 자리를 도저히 그대로 채울 수는 없겠지만 그의 뜻과 꿈을 되짚어 기리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그를 추억하는 동문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미 세상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사람들의 입장이 바뀌었고, 입장이 바뀌니 생각도 바뀌었다. 고집불통 승교는 그 자리를 꼿꼿하게, 묵묵하게 지켰다. 사랑이 많은 승교는 가난한 이, 핍박받는 이, 그리고 고통 받는 이들을 떠날 수 없었다. 입장에 따라 바뀌는 사상은 사상이 아니고, 자리에 따라 변하는 원칙은 원칙이 아니니까. 그래, 그렇지. 그렇긴 하지만 화가 난다. 왜 그렇게 일찍 가야 했는지. 지금 만난다면 ‘좀 적당히 하지’ 하며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고대 법대 86 김진한)
“승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살았을때의 기억을 더듬는 일
그게 무슨 의미이랴
상촌 신흠이 말했던가
‘산다는 것은 맡겨놓은 것을 사는 것’이라고
.....
삶은 맡겨놓은 걸 살아간다 하지만
김 변의 삶에 한 없이 부끄러워 그를 그리며
나의 삶의 이정표가 되기엔 너무나 큰 삶을 산 친구였다
심장속에 남는 삶을 살아온 승교야
너를 그린다
너와 친구로서의 인연
동지로서의 인연을 준
하늘에 감사한다“(고대 동문 김남수)
첫댓글 어찌 더일을 해도 되는 귀인은 명이 짧을꼬~~
헛튼 불량 정신갖은 자들은 그리도 목숨이길고~~
이렇게 정의를 말하려는 사람은 어찌 용기가 쉬이~`나지않으며~~
도둑질하는 자들은 야금야금 얌체로 가져가는데 아직도 용기는 바닥이라~
죽음이 무서운지 맨날 담에라고 시부렁 하는구나~`
확 치미네요
너무 일찍 가신 분이죠 ~~
검색을 해보니
통진당 분들 훌륭하신 분들이 많네요
동지애도 많으시고
천손민족의 고향인 북두칠성으로 칠성판 타고 훨훨 떠나셨습니다..
남북통일의 염원으로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이명박정부에 의해서 폐쇄된 6.15공동선언실천연대를 이끄신 분이지요, 안타깝습니다.
아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