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하는 선불교는 견성이 목표
-무량억종광의 빛의 위신력
참선하는 선불교를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주의 본체가 되는 공(空), 그것을 선불교에서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깨치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 깨달음 가지고는 아직도 멉니다.
나는 그것을 시작이라고 합니다.
공부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진짜 공부의 시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깨달아서 이제 탐진 삼독 번뇌를 제거하는 보림을 해야 되는 거예요.
집착을 끊어버리는 보림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림이 완성되는 것을 진짜 견성이라고 합니다.
성철스님의 말씀이 맞는 거예요.
진짜 견성, 그 자리를 나는 아라한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선불교를 추종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적은 열반에 머물기 때문에 아직도 멀었습니다.
또 윤회를 완전히 벗어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아라한은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현지사에서는 삼계 탈출을 권합니다.
보살, 보살 인가를 받아 삼계를 벗어나는 한없이 십만억 불토(佛土)
저쪽으로 가야 극락세계가 있으니 거기에 나야
영원히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세상에 오지 않는단 말이에요.
거기는 극락의 세계입니다.
거기는 너무너무도 청정하고 너무너무도 만족해요. 모든 것이 만족해요.
털끝만큼이라도 고통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 세상에 가면 미래제가 다하도록 죽지 않아요.
품계가 더 올라가면 올라갔지 퇴전하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법교단 현지사에서는 보살이 되기를, 극락왕생하기를
1차 권합니다. 그건 아시죠?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저 소리가 무슨 소리인고?’ 하실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금 인간고해(人間苦海)에서 살지 않습니까?
인간고해에서 살아요. 신문 TV 라디오를 들어보세요.
하루가 멀다 하고 큰 사건이 터지잖아요. 사람들 불쌍하게 살잖아요.
모두모두 다 앞길이 막막하다고 해요. 인간은 그래요.
인간세상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은 생 병고(病苦)없이 건강하게 살고,
노인이 되어서 죽을 무렵에 치매라든지 중풍이라든지 식물인간이라든지
나쁜 병 걸리지 않고 잠자듯 가야 됩니다.
이승을 떠난 이후는 높은 하늘이나 윤회를 벗어난 아라한 세계나
삼계를 탈출한 저기 극락에 왕생해야 됩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러기를 바라고,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서
이렇게 금강좌에 올라와서 법설(法說)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선불교, 공(空)을 깨치고 공성(空性)을 증득하는 것,
이것이 성불(成佛)이 아니거든요.《법화경》〈비유품〉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불이 아닙니다. 뭐가 성불이냐?
그 후에, 그런 후에 더 염불을 하고 보살행을 하고 공부를 해서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어야 돼요.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어야 돼요.
보살이 되려면 극락세계에 자기 아기보살의 몸이 있어야 됩니다.
보살이 되면 아기보살이 생기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보살이 못돼요.
또 붓다는 저 높은 상적광세계에 자기 불신이 생겨야 됩니다.
자기 불신이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붓다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법화경》〈비유품〉에는
“공성을 증득한 것으로 성불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리불 존자가 한 말이에요. 일찍이 공성을 증득했지요.
그 사람들은 깨쳤지요.
다 깨친 줄 알았는데 부처님께서 수기(授記)를 하시는 것을 듣고
“아!~ 깨달음이 끝이 아니구나.
앞으로도 계속 보살행을 해야 되고 공부를 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자기의 색신(色身)을 절대계에 가져야 돼요.
자기의 원만보신을 절대계에 상적광세계에 두어야 거기를 붓다라고
하는 거예요. 불신(佛身)을 두어야 붓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그것을 모릅니다.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요.
그래서 공(空)을 깨치고 자기가 다 된 것처럼, 붓다가 다 된 것처럼
마음이 불(佛)이라고 하면서 불 ‧ 보살을 모독하고 능멸까지 합니다.
그 사례는 많습니다. 악담을 하지요. 능멸을 하지요.
이 무서운 대망어(大妄語)를 짓고 있는 것을 나는 좌시할 수 없어요.
그러지 말고 너희들 더 공부해라.
‘왜 공을 깨치고 공성을 증득한 것으로 자기가 성불한 양 생각하느냐?’
그거예요.‘《법화경》을 봐라.’ 그거요.
또 현지사에서 그렇게 줄곧 외치는 것을 한번 들어보세요.
불신을 두어야 부처인 거예요.
그 불신의 장엄함을 전번 시간에 이야기했을 거예요.
우리 부처님의 불신, 원만보신을 전번 시간에 말씀했습니까?
팔만사천 털구멍에서 무량억종광을 방사합니다. 방사할 수 있습니다.
무량억종광이라는 것은 이런 자연의 햇빛이 아니어요.
또 견성할 때 드러나는 자성광도 아니어요.
그것보다 수천만 배나 수승한 빛이어요.
그 빛은 천 가지도 더 되고 만 가지도 더 되고 억 가지도 더 되고
아승지의 서로 다른 색깔로 뭉친 무량광이어요.
이 무량광이 불가사의한 빛이어요. 이 무량광을 얻어야 붓다인 거예요.
이 무량광을 보고 그 무량광으로 몸이(불신이) 이루어져야 되요.
그것을 불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몸뚱이,
그것을 얻어야 붓다인 거예요. 그 작업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몇 번인가 스님이 이야기했을 거예요.
나유타하고도 아승지겁 전에 이 우주에서 가장 훌륭한 수행자가
두 분 있었는데 결국 우리 부처님이 불신을 얻었다.
다른 사람은 탈락했어요. 지금까지도 불신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수행자는 지금 다른 종교를 창교해서 그 세계의 수장이지요.
불신을 못 얻었어요. 불신을 못 얻으면 불신 얻은 사람하고 상대가 안 됩니다.
이 불신, 무량광이라고 하는 것은 방금도 이야기했지만
억 가지도 더 되는 색깔의 뭉침이어요.
그 빛을 방사할 때 대적정삼매의 힘으로 방사해요.
빛을 방사할 수 있는 거예요.
미간에서도 나오고 손바닥에서도 나오고 그 빛이 나오는 곳이 열 군데입니다.
열 군데를 모르니까《화엄경》에는 다섯 군데로 써놓았더군요.
진짜는 열 군데입니다. 밀장이니까 다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털구멍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털구멍에서 방사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빛이 너무도 찬란하고 너무도 청정하고 너무도 밝고 강하기 때문에
온 우주의 빛을 순간에 먹어버립니다.
마치 어두운 방안에서 전등불을 탁 켜보세요.
순간에 환하지요?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붓다는 우주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우주본체와 하나가 되면서 우주자체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불신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그 수승한 보살도 무량억종광은 아니어요.
무량억종광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살과 붓다를 비교하면 붓다가 억만 배나 수승한 거예요.
자, 그 불신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지혜가 구족되어 있고
자비가 구족되어 있고 복덕이 구족되어 있습니다.
붓다 정도 되면, 불신을 갖게 되면 이 사바세계를 살 수 있는 복력이
있는 거예요. 사바세계를 살 수 있는 복력, 여러분 서울시를 산다고 해도
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 사바세계를 살 수 있는 복력이 갖춰지는 거예요.
그것뿐입니까? 팔만사천 신통이 문제가 아니어요.
팔만사천 신통은 저 외도의 수장들도 합니다.
도리천왕도 하고 앞에서 말한 전륜성왕도 하고 타화자재천왕도 해요.
그렇지만 부처님과 도저히 겨룰 수 없는 신통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하면 무량억종광으로 내는 신통은 저것들은 못 해요.
무량억종광의 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한 외도의 세계가 있다고 합시다.
저것들이 정법회상에 도전해 온다고 합시다.
순식간에 포위해서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게 무량억종광의 신비로운 점입니다.
정법문중의 이야기를 좀 한 것입니다.
이 정법문중이라는 것은 우리 부처님을 교주로 하고 많은 삼계의 붓다님들,
그리고 극락정토의 보살님들 약사궁의 보살님들,
여타 우주의 많은 곳에 있는 이 보살들이 뒤에 있어요.
그분과 우리는 한 식구예요.
내가 붓다면 삼계의 모든 붓다님들과 빛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붓다님들끼리는 그렇습니다.
자, 앞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천 년 넘은 역사를 지닌 선불교, 그건 아닙니다.
그쪽으로 가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살려면 이쪽으로 귀의(歸依)해야 해요.
이 법문을 들어봐야 해요.
출처:2015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