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걸음
팔월 마지막 토요일은 큰조카로부터 벌초가 있다고 연락을 받은 날이었다. 본디 구월 초 예정했다만 고향을 지키고 계신 큰형님 일정에 변경이 와 당겨졌다. 올해는 추석이 늦게 들어 벌초가 좀 이른 감 있어도 차량이 덜 복잡할 때 벌초를 먼저 마치는 것도 좋을 듯했다. 자손이면 당연히 고향을 다녀와야 하는 걸음이다. 먼 선대는 유사가 있고 5대조부터가 집안 형제 조카들 몫이다.
간밤 사둔 생선꾸러미를 챙겨 동이 트기 전 창원에 사는 작은 형님이 운전한 차로 갔다. 아직 노염이 있는 때라 조금이라도 서늘한 아침나절 일찍 벌초를 마칠 생각이었다. 고향에 닿아 큰형수님이 차리신 아침밥을 먹고 서둘러 마을 뒤 선산으로 올랐다. 이미 큰형님은 증조부님 산소까지 벌초를 마쳐 놓았다. 고향 집에서 멀지 않은 벽화산 조부모님과 부모님 봉분 벌초를 하면 되었다.
큰형님과 조카가 예초기를 짊어지고 벌초를 하고 나는 작은형님과 선산 곁의 밤 밭에서 밤을 주웠다. 밤은 수확 시기별로 조생종 중생종 만생종으로 나뉘는데 선산 옆엔 조생종이라 팔월 하순이면 알밤이 떨어졌다. 그런데 개체 수가 워낙 많이 불어난 멧돼지가 햇밤을 먼저 시식했다. 벌레 먹은 밤은 용케도 구분해 먹질 않았다. 밤나무 그루터기는 멧돼지가 헤집고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큰형님은 일손이 달려 밤을 주울 겨를이 없다고 했다. 동생들 보고 틈이 나면 지인들과 동행해 와 밤을 얼마든지 주워가라고 했다. 한 시간여 주운 밤은 마대 자루에 가득했다. 밤을 줍는 사이 부산 작은형님과 대구 동갑내기 사촌과 조카도 닿았다. 예초기로 자른 풀을 갈퀴로 긁어내니 풀이 무성했던 산소는 깔끔하게 달라졌다. 술잔을 올려 절을 하면서 벌초를 마친 보고를 드렸다.
선산 아래 집안의 가까운 형님뻘 되는 선대 봉분에도 큰형님이 매년 벌초를 하는 곳이 있었다. 아까 예초기로 잘라둔 풀을 긁어내고 숙부님 산소로 갔다. 숙부님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말년은 대구에서 보내셨다. 정년 이후 평생을 봉직한 부산을 떠나 대구 사촌 근처로 가서 노후를 보내다 몇 해 전 작고하셨다. 숙모님도 별세하면 고향에서 영면하지 않으실까 생각된다.
숙부님 산소 앞에는 언젠가는 닥칠 일이지만 큰형님이 잠들 자리까지는 마련해 두었다. 세월 따라 장묘문화가 달라지기에 그 이후는 아직 구상 중이다. 형님과 조카들이 나서니 숙부님 산소도 벌초를 수월하게 마쳤다. 잔을 채워 절을 드리고 자손이 다녀감을 보고 드렸다. 집으로 내려가 나는 조카와 같이 또 다른 곳에 벌초를 다녀올 일이 있었다. 그곳은 벽화산성 증조모님 산소였다.
증조모님 산소가 벽화산성에 있게 된 데는 연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 별세하신 증조모님은 그 당시 식민지배자들의 엄격한 규제로 우리 고을에선 벽화산성만이 묘지로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성에는 수 백 기 무덤이 산재한 공동묘지다. 침략자가 역사 유적을 교묘하게 파괴시킨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산성 여러 무덤들은 아직 벌초 시기가 일러 우리가 가장 먼저 다녀가는 경우였다.
벌초를 마치고 집에 닿으니 선산에서 주워온 알밤을 봉지에다 담아 두었다. 큰형수님이 대가족 점심을 차려냈다. 마당에 자리를 펴서 형제 조카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대구 사촌과 작은형님은 바쁘게 돌아갔다. 나는 큰형님과 조카의 일손을 도울 거리가 남아 있었다. 지난겨울 참나무 토막에 표고 종균을 심어두었더랬다. 그 참나무토막을 받침대에다 세우는 일이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밭둑으로 갔다. 표고 종균을 심어둔 참나무는 하얀 점들이 박혀 있었다. 먼저 삼각 지주를 세워 가로로 막대를 걸쳤다. 그곳에다 참나무 토막을 걸쳐 두는 일이었다. 참나무 둥치가 큰 것은 혼자 들기 힘에 겨웠다. 큰형님과 두 조카가 힘을 모으니 짧은 시간 해결 되었다. 빠르면 올 가을부터 표고버섯을 맛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땀을 좀 흘린 하루였다. 15.08.29
첫댓글 맏이 노릇, 맏며느리로 사는 평생을..
가족간의 우애도 큰형수님 손에 달렸지 싶습니다.
돈독한 정을 느끼고 갑니다.
주이돈님은 친형님이신가예?
의령에 거주 하시니 존함만 익히고 있습니다^^
그분, 항렬이 같은 집안 형님입니다.
예!! 그러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