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주(Liege, 플- Luik. ) 주
벨기에 동부에 있는 주.
동쪽으로 독일과 접한다. 위이·리에주·베르비에·바렘 등 4개 행정구로 구분되는데, 주도는 리에주 시이다.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몇몇 지역에서 독일어를 사용한다. 독일어 사용지역으로는 외펜에말메디, 장크트피트, 이전의 모레네 중립 행정구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아직도 독일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이곳은 약 1,000년 동안 독립적인 승정왕들의 관심 대상 지역이 되었는데, 그 당시 이들의 보호령은 헬데를란트 상부에서 프랑스 접경지대인 샹파뉴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교령은 깊게 만입된 형태여서 이웃하는 주들의 보호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부르고뉴인들이 지배하던 네덜란드의 북서지역과 남동지역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15세기에 이 지역은 특별히 중요한 곳이었다. 16세기부터 승정왕들은 대체적으로 네덜란드의 합스부르크 통치자들과 협조관계에 있었다. 17세기에 프랑스인들이 이 지역을 침략하여 1795년 프랑스 혁명전쟁중 이곳을 합병했으나 1815년 네덜란드로 넘어갔다가 1830년 벨기에 영토가 되었다.
뫼즈·암블레브·우르트·베드르 강 등이 흐르는 이 지역의 농토에서는 여러 가지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헤즈바이는 식양토로 덮인 서북지방의 백악층 고원으로 이곳에서는 곡물과 사탕무를 생산하며 가축들을 사육한다. 북동지방에 있는 페드허브 고원의 습기가 많은 식양토에는 목초지와 과수원이 있고 당밀과 치즈를 생산하고 있다. 뫼즈 강 유역에서는 시장출하용 채소와 낙농제품을 생산한다. 남부와 남동부에는 아르덴 고원에 속하는 콩드로와 오트파뉴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농업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서 고지대에서는 돼지나 젖소를 사육하고 골짜기에서는 낙농과 귀리·호밀·밀·토끼풀·토마토 등을 재배한다.
스파 지역과 우르트·암블레브 강을 따라 이루어지는 관광업이 주(州)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아르덴의 여러 지역 중 특히 외펜에말메디 구에는 산림이 울창하며, 황량한 오트파뉴의 히스(heath)가 자라는 일부 황무지는 자연보호지로 남아 있다.
주요공업지역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리에주와 인근 위성도시를 중심으로 뫼즈 강 유역을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베르비에 주위의 베드르 강 유역에 있다. 상브르-뫼즈 탄전 중 가장 동쪽에 있는 분지가 리에주 주위에 있다. 탄광, 코크스 제조가마, 제강소, 화학·야금 공장 등이 뫼즈 강 유역을 따라 펼쳐져 있으나, 석탄채굴은 줄어들었다. 베르비에 지역은 벨기에 양모산업의 중심지이다. 다른 인구집중 지역으로는 뫼즈 강 유역에 있는 위이와 아르덴 지역에 있는 시장, 외펜·스파·스타블로·장크트피트 같은 휴양도시들이 있다.
이 지방의 교통편으로는 뫼즈 강 운하, 알베르 운하, 6개의 간선도로, 그리고 몇 개의 국제철도 등이 있다. 특히 암블레브와 우르트 강 유역을 포함하여 이곳에는 옛 성곽이나 수도원들이 많다.
리에주(Liege, 프: Liège, 왈롱어: Lidje 리치,(독). Lüttich-뤼티흐. (네덜란드어, 플). Luik-라위크. ) 시
벨기에 동부 왈롱 지방에 위치한 공업 도시로 리에주 주의 주도.
우르트 강과 뫼즈 강이 만나는 곳에서 뫼즈 강을 끼고 있다. 북해로 통하는 알베르 운하가 시작하는 곳이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고대 로마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558년에 작성된 문헌에서 '비쿠스 레우디쿠스'(Vicus Leudicus)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로마인들에게는 레오디움으로 알려졌다.
705년경에는 마스트리히트의 주교였던 성 람베르트가 이 곳에서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업을 완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살해당했고 리에주에서 기독교 순교자로 여겨지게 된다. 성 람베르트의 뒤를 이어 리에주 주교로 임명된 성 후베르트는 이 곳에서 성 람베르트의 성유물을 보관하는 바실리카를 건립했고 이 곳 근처에 리에주 주교 관저를 설립하게 된다.
721년에는 성 후베르트가 자신의 마스트리흐트 로마 가톨릭교회 관구를 이곳으로 이전 해옴에 따라 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리에주는 985년부터 1794년까지 리에주 주교후국의 수도가 되었다. 리에주 주교후국의 초대 주교후(최초의 승정왕)였던 노트게르(Notger)는 도시를 지적이고 종교적인 중심 도시로 개조했는데 리에주 군주국이자 모산파(派)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이는 리에주가 중세 시대에 유럽의 주요학문중심지와 문화적인 중요성을 유지하는 계기가 된다.
리에주는 많은 교회당으로 유명했는데 가장 오래된 성 마르틴 교회는 682년에 건립되었다. 리에주는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독립성을 갖고 있었다.
리에주는 중세 후반부터 몇 세기에 걸쳐 군주의 전략적 지위 상승을 위한 군사적 목표로 여겨졌고 반란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비교적 일찍부터 도시의 서쪽을 바라 볼 수 있는 가파른 언덕 위에 성이 건립되었다.
이 지역에 자치행정권(1185)과 시민특권(1195)이 주어지고 상인 조합에게 마을 평의회대표권이 수여된(1303) 이후, 상인 조합과 귀족 사이에 한 차례 세력다툼이 있었다. 귀족들이 급습에 실패하여 1312년 이들의 무장 세력은 생마르탱 교회에서 주민들에 의해 화형되었는데, 이 사건은 말생마르탱(Male SaintMartin)으로 알려져 있다. 1313년 노동자와 대부분의 상인 조합에게 정치적 평등권이 주어졌다.
1345년에는 리에주 시민들이 앙젤베르 3세 드 라 마르크(Engelbert III de la Marck) 주교후를 상대로 무장 반란을 일으켰고 도시 인근에서 앙젤베르 3세가 지휘하던 군대를 격파했다. 이를 계기로 리에주에서는 32개의 길드가 시 정부의 유일한 정치적 지배권을 공유하는 독특한 정치 체제가 형성되었다. 각 길드에 소속된 주민들마다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고 각 길드마다 평등한 권리가 부여되었을 정도로 지금까지 저개발 국가들이 알고 있던 민주적인 정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제도는 위트레흐트로 확산되었고 리에주에는 중세 시대에도 살아남은 민주주의 정신을 남겼다.
15세기인 1465년과 1467년에는 부르고뉴 공국의 네덜란드 지배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이 때 이곳은 저항하여 대담왕 샤를한테 2차례 약탈당했다. 1468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11세 국왕, 샤를 1세 드 부르고뉴 공작이 리에주를 기습 공격하면서 크게 파괴되었다. 1477년 샤를이 죽은 뒤 이 도시는 재건되어, 이후부터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았지만 리에주 주교후가 실질적인 지배자 역할을 맡았다. 리에주 교구가 반종교 개혁을 계기로 분할되면서 리에주 주교후국은 종교 국가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16세기에는 승정왕 에브라르 드 라 마르크의 통치 밑에서 새로운 번영을 이룩했다. 승정왕과 시민들 사이에 일어난 새로운 투쟁으로 1684년 민주제도가 붕괴되었다. 17세기부터는 쾰른과 신성 로마 제국의 북쪽에 있던 주교후국을 지배하고 있던 비텔스바흐가의 지배를 받았다.
1691년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04년에는 제1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이끄는 잉글랜드(영국) 군대가 바이에른 주교후-프랑스 연합군의 지배를 받고 있던 리에주를 점령했다. 18세기 중반에는 프랑스 백과사전파의 사상이 리에주로 확산되었고 1789.8.18에는 리에주 공화국을 수립한 리에주 무혈혁명이 일어나 귀족통치가 끝났다. 이 혁명은 1791년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진압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94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리에주를 점령하고 합병하였다. 종교적인 체제를 강요하는 한편 성 랑베르 대성당을 파괴했다. 1801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교황 비오 7세 사이에 체결된 협약에 따라 리에주 주교후가 폐지되었다. 1815년에 개최된 빈 회의에 따라 네덜란드 왕국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다른 지역과 함께 리에주를 차지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지배는 1830년에 일어난 벨기에 혁명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혁명에서 이곳 주민들은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벨기에의 지배를 받게 된 리에주는 주요 공업 도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강철 생산이 진행되었으며 1891년 요새화되어 뫼즈 강 방어를 위한 중요한 성채가 건립되었다.
2차례의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 점령당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 심한 공중폭격을 받기도 했다. 공업지대인 뫼즈 강 유역은 상업중심지로 제철·제강·유리제품·채탄·무기제조·동제련 등과 같은 산업이 이루어진다. 가까이에 탄전이 있어서 제철, 기계 따위의 공업이 활발하다. 면적은 69.39km2, 인구는 197,355명(2018.1.1 기준), 인구 밀도는 2,800명/km2이다.
리에주에 위치한 역사적 도심 지역인 카레 구역(Carré), 오르샤토 구역(Hors-Château), 우트뫼즈 구역(Outremeuse)은 뫼즈강과 인접한 공원, 대로, 리에주 요새로 유명한 곳이다. 오르샤토 구역과 리에주 요새 사이에는 374개로 구성된 계단인 몽타뉴 드 부랑(Montagne de Bueren)이 있다.
이전에 생폴 수도원이었던 성당에는 성 람베르트와 샤를 대제의 성골함이 있다. 그밖에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고딕 양식의 교회로는 생드니, 생자크, 생마르탱, 생크아(1150년부터 금으로 된 3폭패널화 소장)와 세례 연못(1108)을 갖고 있는 생바르텔르미 성당 등이 있다. 15세기에 세워져 18, 19세기에 보수된 승정왕의 궁정은 지금 법원으로 쓰인다.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이었던 생로랑은 1796년 이래 군대 병원이 되었다.
왈로니아(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지역)의 문화중심지로서 연주회장, 극장, 오페라하우스, 여러 개의 훌륭한 박물관,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가 살던 집 등이 있다.
사도 파울루스(성 바오로)에게 봉헌한 성당이자 성 람베르트의 영묘가 안치된 리에주 대성당이 있다. 그 외에 독일-로마네스크 혼합 양식을 띤 성 바르텔레미 교회, 성 마르탱 교회, 성 드니 교회, 성 자크 교회를 비롯한 교회당이 들어서 있다. 리에주에 위치한 주요 박물관으로는 라 보브리(La Boverie, 미술관), 왈롱 민속박물관, 왈롱 예술·종교 예술박물관(모장 예술 작품 전문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메종 쿠티우스, 1600경 설립), 그랑 퀴르티위스 박물관(Grand Curtius, 고고학 박물관), 안셈부르크 장식미술박물관, 무기박물관 등이 있다.
주립대학교(1817)는 1960년대에 남부의 새로운 부지 위에 전체적으로 다시 지어졌다. 로열 음악학교(1887)는 외젠 이자이가 설립한 바이올린 학교로 유명하다. 또한 리에주의 주요산업체들과 제휴하여 설립한 국립연구소와 기술학교가 몇 개 있다.
서유럽에서 3번째로 중요한 하항이며, 벨기에에서 2번째로 큰 철도중심지이다. 리에주 서부 비에르세에는 리에주 공항이 위치하고 있다. 뫼즈강에 위치한 리에주항은 유럽에서 3번째로 규모가 큰 하항으로서 벨기에 안트베르펜, 네덜란드 로테르담과는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리에주는 서유럽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서 독일 쾰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프랑스 파리를 연결하는 국제 철도 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리에주는 유럽 고속도로 25호선, 40호선, 42호선, 313호를 비롯한 고속도로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