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플렉스하는 법
백수가 되었다고 원래 가지고 살던 욕구까지 싹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월급쟁이 시절 소비요정이었던 나는 성과급이 들어오면 백화점으로 달려가
명품백도 종종 질렀고 가성비보다는 가심비를 외치며 마구마구 사들였다.
그리고는 흡족한 소비를 자화자찬하며 들고 쓰곤 했었다.
그 버르장머리, 솔직히 백수가 되었다고 아주 없어지진 않았다.
백수가 되어 명품백을 가지고 나갈 데가 없으니 가방욕심은 사라졌다.
대신 다른 품목에 대한 욕구가 싸악 올라왔다.
매일 쓰는 접시며, 컵, 그리고 트레이닝복? 주1회 청소기 돌릴 정도면 부지런하다
생각했던 나도 집에만 있으니 매일같이 청소를 하는 사람이 되었고 청소도구에
대한 욕심, 이를테면 먼지흡입과 물걸레청소, 그 물걸레를 심지어 자동으로
빨아주기까지 하는 놀라운 존재가 있단 정보에 잠시잠깐 솔깃했었다.
(물론 가격 보고는 바로 꼬리 내렸지만.
백수가 움직여서 청소하면 되지 150만원이 웬말이냐…)
지금 당장 내가 꽂혀있는 아이템이라 한다면 머그컵이다.
머그컵이 없는 건 당연히 아닌데, 매일 하루 세네번은
차나 커피를 마시다 보니 맨날 설거지하고 또 마시고 하기 귀찮다.
그리고 같은 머그컵에 먹으니 좀 질린다. 전에 만난 남자가
갖다놓은 머그는 그냥 보기 싫어서 찬장 저 구석에 쳐박아뒀다.
그러니 쓸 수 있는 머그컵이어봤자 두세개다. 하나 정돈 더 있어도 되잖아?
그래서 열심히 찾는 중이다.
내가 가진 머그컵은 여행지에서 기념품으로 하나둘 모은 머그컵들이다.
하나는 훗카이도, 하나는 핀란드, 하나는 스웨덴이었던가.
이번엔 아주 고오급지고 예쁜 잔을 한번 사보고 싶다.
머그컵의 가격은 2만원에서 3만원 남짓.
여기서 욕심을 조금 더 내면 최대 5만원?
사실 치킨 한두번만 참으면 나오는 돈이다.
백수도 그 정도 사치는 부릴 수 있다!
사실 도비가 된 후로 압도적으로 가심비보다
가성비를 따지는 소비를 할 수밖에 없고 저절로 그렇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나를 위한 소비도 한다.
다들 그러려고 돈 버는 거고, 나도 그러려고 돈 벌”었”으니까.
고백하자면 얼마 전 정말 큰 플렉스를 하나 하긴 했다.
방짜유기를 사들인 것이다. 유기그릇이 얼마나 비싸고 귀하냐면
(물론 부자들이 쓰는 엄청난 정도의 고가는 아니겠지만) 결혼할 때 혼수품목으로
많이들 하는데 할인을 빼면 심하게는 2인 세트 기준으로 100만원도 넘는다.
컵 따위와 비견할 것도 아니다.
어느 날 핸드폰을 검색하다 우연히 방짜유기 판매사이트를 보게되었고
물을 담은 온갖종류의 그릇들 중 유일하게 유기그릇에서만 미네랄이
검출되었다는 모 대학교 연구 결과를 내보이며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구리가 들어간 그릇이기에 살균 항균 효과가 일부 있겠지.
하지만 나는 외쳤다. 그래 이것이야!
내꺼를 사고나니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났다.
방짜유기는 예단이나 혼수로 많이하는 거다 보니.
사실 우리 부모님은 예단 예물을 받아본 적이 없으시다.
나도 이모양 이 꼴인데다, 부모님이 시집 온 올케에게 명품백을
해다 바쳐(-_-)주고 따로 받은 선물은 없다.
(동생이 뭐라도 받았겠지만 어쨌든) 자식이라고 몇십년 쎄빠지게 키워놨는데…
사실 며느리나 사위보다도 어떻게 보면 자식들이 해드려야 되는 거 아닌가?
싶고. (소비를 합리화하는 건 아니다!) 얼마 후
부모님의 41주년 결혼기념일도 축하할 겸 과감하게 샀다.
물론, 쿠폰 할인가 모두 챙겨서 야무지게 할인받아 구입했다.
혼수포장도 몇 만원이나 따로 받길래 그냥 내가 보자기 찾아서 셀프로 했다.
아마 전국구로 따져 혼수품으로 구매하는 방짜유기
구매자분들 통틀어서 할인폭 상위 5%정도에는 랭크되지 않나 싶다.
더 저렴하게 사려면 시장에 가서 구매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선물하는 거고 입에 들어가는 물건인데 어느정도
검증된 제품을 사는 것이 안전하다 싶어서 유명한 제품으로 구매했다.
사실 우리 집 식구들은 애교도 없고 그닥 살가운 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종족이다. 생일때도 각자 생일 축하한다며 현금이나 쿠폰 몇장 쏘는 게
그간의 관행이었으니(부모님도 마찬가지). 하지만 일도 그만뒀고, 그만두는
과정에서 어쨌든 경제적인 도움도 일부 받았기에 감사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나름 열심히 혼수포장(?)을 해서 집으로 들고 갔다. 이게 뭐야? 라고 했지
뭐 이런 걸 사? 라고 안 한 걸로 봐서는 우리 부모님, 엄청 좋아하신다.
사실 예단 예물 이런거, 허례허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부모님의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아~서로의 부모님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표현하는 거구나. 꼭 다 허례허식이라고만 볼 것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늦었지만 내 손으로 이런 선물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백수라도 비싼 물건, 못 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공짜는 없으니 늘 거기엔 대가가 따른다.
방짜유기를 사면서 나도 큰 돈을 썼지만 나에게는 작지만 소중한 퇴직금이
있다. ㅎㅎ 조금 닳아 없어지면 어때. 나가서 또 돈 벌면 되지. 사지육신 멀쩡한데.
by. 길 위의 앨리스 ~ 출처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