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를 향한 을미 신년사
제1장 39의 면면들
이제 77개의 허들을 넘는다. 인생 허들 경기에서 그 77개의 허들을 넘는다는 말이다.
각자 운명위에 능력을 얹어 부지런히 지혜와 힘을 모아 달려온 39는 그 기록의 뛰어남을
뽐내면서 열심히 달려왔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 하면서 그 출중한 능력 계속 발휘하면서 이 해를 맞자.
아직도 철철 넘치는 39의 여력은 몇 개의 허들을 더 넘을 수 있다.
보자!
그 찬란한 행적 대구 중심으로 권원순 미술평론가 명성 얻고 있었고 금융계 인물 김극연
있었고 야구계 아까운 인물 김창영 있었고 법조계 명사 서정제 있었고 미술계 명사 이영륭
있었고 재계명사 이재섭 있었고 알찬 사업가 장세일 있었고 국회의원 정해걸 있었고
의지의 자선가 조병우 있었고 근면한 법조인 지홍원 있었고 서울 쪽은 실력 있는 언론인
김담구 있었고 기업가 김영수 중책 맡았었고 거대 산업 쌍용의 김영식 사장 있었고 명
재판관 김헌무 있었고 실력 있는 언론인 박창규 있었고 이 나라 근대사의 중심에서
활약한 걸물 사공일 있었고 철강업계 사장으로 활약한 안정준 있었고 민족역사 물줄기
뒤바꾼 대물 윤식 있었고 국방의 하늘 책임자 이광학 대장 있었고 한국 중공업에서 고급
운영 수완 보인 이수강 있었고 대 사업가 이창근과 도지사 임경호 있었고 영원한 39의
자존심 전국 일등을 기록한 정성진 있었고 금융계 귀재 정지태 있었고 항공회사 주요
간부로 역할 컸던 정태산 있었고 적지 않은 돈 수십 억 원을 모교에 쾌척한 통 큰 사업가
제경오 있었고 가히 국보라 할만한 39의 자랑 국문학자 조동일 있었고 자선의 인격자
최재선 있었고 문화부의 공직자로 공적 쌓은 허만일 있었고, 검도계의 김재일도 있었다.
반열의 말석에 끼워준다면 고맙겠다. 부산 쪽과 미주 해외 쪽은
생략하나 미국 나사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이장욱은 기록할만하다.
아까운 고인들로는 현대중공업 사장 김정국, 대 실업가 허병하있었고, 국회의원, 김해석.
관훈 클럽 남중구 싸움대장 유봉춘 대 공학박사 이건 문화부장관 이수정 대 논객 이원달.
한얼교 법통 신정일 대법관 정귀호. 바둑의 귀재 이창세 있었다. 이외에도 걸출한 인재
허다했다. 혹시 실수로 거명되지 않았다고 화낼 소인배 없을 것을 믿어 대충 적어본 인물들이다.
이 정도면 대단한 인맥 아닐까? 이 새해를 맞으면서 다시 기대를 하면서 소회와 계획된
의지를 피력한다.
제2장 39들의 시대적 위치와 심각한 자극을 주는 일본이란 나라
우리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일찍이 단군께서 좋은 곳에서 개국을 하셨는데 그 긴 세월이 흐른 현재까지 우리의 길은 참
평탄치 못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분열되어 개국함과 동시에 이 나라 운명은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일차적으로 그 주변국들의 야욕과 간섭 등으로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약소국의 운명을 안게 되었다.
중국(손문의 중국은 아님)이란 거대한 나라가 원시적 힘을 바탕으로 동양을 지배하며 오랫동안
왕좌에 앉았다. 꼭 한 가지 예만 들자.
소위 숙위(宿衛)란 명분으로 당나라에 인질과 흡사했던 김인문은 22년간 그리운 고국 신라를
떠나 당나라를 위해 전투하고 당의 명령대로 신라왕을 하라하면 해야 했다. 물론 김인문이
교묘한 방법으로 그 위기만은 피했지만 한국, 일본 등 그 주변은 당(唐)의 연 호를 쓰기까지
했으니 그 위력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김유신 여동생 문희가 어머니요 문무왕이 형이었다.
그런 그가 왜 당나라에 가서 헌신해야 했던가? 을미년이라 해서 역사적으로 꼭 어려운 일들
많았던 것만도 아닌데 모두들 호들갑 떨고 있다. 아주 오래 전 부터 수십 번 현재 한국 같은
상황은 있어왔다.
제3장 이 시대를 관통하는 39의 일원으로서의 사명
살아서 건강하신 39동문 여러분!
이해를 맞으면서 불초 소생은 결연한 한 가지 소신을 여러분께 올립니다.
선(先)의 선(先)이란 일본의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의 검도 시합 공격 원리보다 후(後)의
선(先)이란 장자(莊子) 설검(舌劍) 론을 존중합니다.
“언제나 제일 마지막에“ 라는 철학 말입니다. 물론 그 마지막 이란 모임에 지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 파악 한 후의 공격 같은 것 말입니다.
8 15를 보고 6 25를 보고 4 19를 보고 5 16을 본 세대로서 이제 그 훨씬 뒤의 세대 뒤쪽 에서
수명은 길어 졌는데 그 수명에 비례해서 사회 존재 시간이 더 늘어지지도 않은 채 우리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장관도, 국회의원도, 기업가도 모두 모두 뒷전으로 물러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회적 기능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대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소풍삼아 청량리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차상태 형에게 이빨치료 받으러 원주에
갔습니다. 놀랍게도 환자가 꽉 차 있었습니다. 두 세 명 정도의 예약 손님이라도 괜찮은 편인데
눈 코 뜰 새 없이 진료하는 그의 노익장 아닌 소익장(少益壯)에 놀라고 기뻤지요. 바로 이것이
살아있는 우리 세대 끊이지 않는 사회참여, 현실 참여라 생각되기도 했지요.
아직도 피가 끓고 있는 소생은 그간 가졌던 욕심 아닌 꿈을 실현코자 합니다.
이제 모든 것 접고 좀 뒤로 와서 쉬라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꼭 실현코자하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재빨리 서둘러 성공함도 좋지만 소생은 볼 것 다보고 세월 흐른 만큼 익혀온
일 있어 그 후발선지(後發先至)의 장자 설검식(舌劍式) 포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 끝난 길을 때늦게 어디를 간다는 것인가? 하고는 의심을 품을 테지만 소생은
더 먼 곳에 목적을 설정하였기에 지금 그 마무리를 하고자 합니다.
그간 절륜했던 39 제형들의 그 힘의 여운을 빌리고자 합니다.
소생은 일찍이 미주에 진출하여 큰 꿈 펼치려 하였으나 의외의 불행한 일들로 그 꿈 이루지
못하고 다시 독일로 향할 계획조차 여의치 않았습니다.
1957년 3월26일 소생은 이승만 박사 생신기념 친람무도대회(親覽武道大會)경북 학생 대표로
경무대 앞마당에서 시합을 하고 있었지요. 그 대회 유도 우승자 한호산 씨는 독일로 지도자
진출하여 큰 성공을 하였습니다만 소생은 그 길조차 잘 진행 되다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
니다. 만약 미주로 진출하였으면 태권도의 이준구씨 같은 공적도 남길 자신이 있었습니다만
주변의 악조건으로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평소에 늘 생각 하는 것은 한국이 단군 이래로 최고로 국위 선양한 일은 태권도의 세계적 보급
사실이라고 여깁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태극기를 향해 경례 시키고 우리말로 가르치고 205개국에서 열심히 수련하는
이 쾌거는 싸이의 말 춤 보다 더 생명력 있는 애국적 쾌거입니다.
검도를 통해 그 일을 성취 시키고자 미주로 러시아로 중남미로 동남아로 부산히 뛰어 다녔고
중국도 국교 수교 이후 최초로 방문하여 보급을 시도하였고 독일서 이태리서 또 혹은 중남미
에서 소생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간의 행적이 이제 구슬이 되어 쌓였건만 꿸 일이 남았군요.
참 그때 러시아행 밤 비행기를 타고 출발 하려던 시각 조동일 형 부부 우연히 만나함께 떠나던
기억 새롭습니다. 아이오와, 시카고, 뉴욕, 덴버, 로 한 바퀴 돌면서 검도 지도 여행을 떠나
그곳서 만났던 친구들 생각납니다. 1990년도 대한 우슈협회 실무부회장을 맡아 히로시마
아시안 께임에 채택 되게 했던 행보, 중국 연변대학 무술교수 초청하여 수년에 걸친 우리
전통무술 연구물로 대한 체육회 연구 상을 수상하기도 했고요.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
(二道白河)에 수련장을 세우고 검도 기공수련을 해왔고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등지의 검도
보급을 시도했고 이제 마무리 작업으로 한국 전통무예를 집대성해서 우리 것으로 승부를
보고자 합니다. 이때에 문득 아베총리의 조부란 작자이자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
(阿部信行)의 악담같이 남기고 간 말을 되새겨봅니다.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 하건대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 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
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놨다.“
그리고 일본 주둔 미군 맥아더사령부가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11일 아베 총독
을 심문할 때 그는 "일본 식민정책은 한국인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이었으며 한국인
은 아직도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된 정부 형태가 되면 당파 싸움
으로 다시 붕괴할 것"이라며 남북 공동정부 수립을 적극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베의 사돈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91세ㆍ1896~1987) 그는 만주국을 건설하며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때에 심장에 비수 꽂히듯이 와 닿는 말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 보다 더
무서운 식민 교육을 심어 놨다.” 참으로 그러하다.
일본사람 다물러가고 일본 검도 유도 태권도. 합기도 그대로 남아있고 서울역 서울시청
한국은행 건물 들 일본 음식 스시 우동 돈부리 등 일본음식문화 그리고 일본 사고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시피 합니다.
일본이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가 쉽게 만만히 볼 나라입니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막연하게 일본을 얕보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신라시대 석우로란 장군이
일본 왕을 욕했다고 왜인들이 신라 땅에 와서 석우로(昔于老)) 장군을 잡아 바로 신라 땅에서
불태워 죽였지요. 그때도 신라가 일본보다 강했는데도 그런 치욕을 당했단 말입니다. 또
임진왜란은 일본의 국력이 우리보다 못해 대륙을 향한 침략을 감행 했을까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이미 군사상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그때 일본의 조총은 50만 자루,
유럽 대륙이 보유한 전체 총기를 능가하는 숫자였습니다. 그리고 전국시대 무수한 전투경험의
전투력 강한 정규군 30만 명, 그 절반이 조선에 투입된 15만 병력이었습니다.
그때 조선은 정규군은 5만∼6만명,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도 채 못 되었고 일본은 2000만에
육박했고 일본 인구가 우리를 따라잡은 것은 통일신라 시대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더 벌어진 한일격차는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뒤 일본의 수도가 된
에도(江戸)는 18세기 인구 100만의 세계 최대 도시가 됩니다. 그때 청(淸)의 수도 베이징과
프랑스 파리의 인구가 50만, 영국 런던의 인구가 80만이었습니다. 한양 인구는 30만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은 이때 이미 가부키를 통해 세계 최초로 회전무대를 만들어냈고, ‘소바’와 ‘스시’ 같은
세계 최초의 패스트푸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위축되어서도 아니 되고
터무니없이 일본을 얕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할 나라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4장 남북한 공동주적은 일본이다
이런 절박한 일본 행태를 기준하여 소생은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늦게나마 출발하고자 합니다.
39 제형들의 뜻있는 격려만 있다면 자신 있습니다. 차상태형의 치과진료 희망자가 문전성시를
이루는 장면에 자극받아 결의를 굳게 다집니다. 새해로 바뀌면서 기획하고 진행하는 이 힘겨운
행보에 성공을 촉진하는 뜨거운 격려를 복망하는 바입니다. 제형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
합니다. 백세 이상 검도 대회가 있는 일본 검도를 이기기 위해서라도 꼭 성취해야 하고 끝으로
아베총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좋은 기회 놓치지 말고 남북한 동시에 일본이 주적이라는
공동보조를 맞추어야 할 것 입니다. 여야정쟁 그치고 남북한 한목소리로 일본을 주적으로 삼아
함께 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모든 대결 제쳐두고 북한과 함께 아베의 망언을 계기로 일본을 주적으로 삼아
같이 대결하는 길을 모색함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엉뚱한 방향에서 통일의 실마리를 풀 수도
있습니다. 이제 진실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위에 덮씌워져 우리의 실체가 가리어진
부분을 씻어내어 우리의 본 얼굴 찾기 노력을 할 때라 생각 합니다.
소생은 소생대로의 꿈 실현을 위한 우리 얼굴 찾기위해 우리얼굴세수하기, 우리 몸 때 벗기기
작업으로 우리의 실체를 찾을 것이며 소생이 할 수 있는 기능 전통무예를 살려 국 내 외적으로
보급하고 앞서 태권도가 그랬듯이 세계화에 진력 할 해를 올해로 잡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관심만 가져주시면 성공 할 것을 자신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외침 900여회 중 일본의 침략이 720 여 회 라는 사실은 영원히 함께할 나라
아님을 말해줍니다.
여포 관운장 장비가 가야에 태어났더라면 별 볼일 없었을 것이고 김유신과 말을 잘 타는
마숙(馬叔)이란 별명의 거도(居道) 장군 등이 저 넓은 중원에서 태어났더라면 김유신은 제갈량
칭기즈칸 앞지르는 공 세웠을 것이고 거도 장군은 여포 앞지르는 장군 되었을 것입니다.
지구를 돌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못하고 뒤쳐진 위치에서 애송하는 한시(漢詩) 세 편
올립니다.
愛誦 漢詩 2題
數年徒守困 헛되이 곤함을 지키어
空對舊山川 오랜 산천 마주보기 몇 몇 해더뇨.
龍豈池中物 못은 용이 오래 깃들일 곳이 아님이여
乘雷欲上天 이제 사 우레 소리 높이 천공에 오르리.
-劉備-
心在山東身在吳 마음은 산동에 있고 몸은 오에 있네.
飄蓬江海漫嗟吁 강해에 유랑하여 부질없이 한숨만 지우 누나
他時若遂凌雲志 다른 날 만약에 뜻을 이루고 본다면
敢笑黃巢不丈夫 내 한번 웃어보리, 황소가 대장부 아니더라고
水滸志의 -松江-
남이장군의 시 북정가(北征歌)
白頭山石 磨刀盡 :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 :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말리리.
(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 :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하면
(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 : 뒷날 그 누구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후세수칭 대장부)
장검(長劍)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 일엽제잠(一葉제岑)이 호월(胡越)에 잠겼에라
언제나 남북 풍진(風塵)을 헤쳐 볼까 하노라.
첫댓글 劍農 형! 乙未 새해에 福 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하시기를 祈願합니다. 검농 형을 만났을 때나 을미 신년사를 보나 혈기 충만한 기백은 한결같으시구려. 부럽습니다. 大望을 이루는 그 날, 기대하겠습니다.
이루어야 하고 이룰 것입니다. 청암형의 댓글 큰 힘이 되네요. 건강 잘 챙기시고 만사형통 하소서
검농형 역시요 건강하소서.
아아 유유창천(悠悠蒼天)!제갈량이 뜻을 못이루고 세상 떠나면서 마지막 추풍 오장원에서 하던 탄식을 기억합니다
우리 39들은 54세에 천수를 다한 제갈량보다 20년 이상 더 살았고 모두들 자신의 꿈들을 다 이루었으니 현명들 하지요. 1년간 소주형의 행적을 보면서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하는 한해가 되고 그 동안의 경험 재산을 밑천 삼아 큰 성공을 향해가는 그 원년을 삼습니다. 배전의 지도편달과 관심을 가져 주시면 소제 에게는 큰 힘이 될 것 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운 빕니다. 이 시각 아침 운동 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