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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김영산 시인 / 갈치의 추억 외 4편by 파스칼바이런 2022. 3. 27.
김영산 시인 / 갈치의 추억 1985년 초겨울, 제주포구 한낮 생멸치국 맛나게 끓여준 火匠 소년이랑 곰보 아저씨랑 다방에서 죽치다가 저녁나절 환히 집어등 밝힌 뱃머리 두드리며 멸치를 부르다 부르다가 멸치떼가 보이지 않자 멸치잡이 작파하고 몇 킬로미터 그물을 쳐 고등어잡이 할 때, 한밤중 산더미 같은 파도 속에 그물을 끌어올리자 주렁주렁 매달린 푸른 고등어 사이사이에서 활시위를 당기며 찬연한 은빛 갈치가 떠오른 일. 김영산 시인 / 19층 아파트 문방구점을 하는 아들 내외가 있는 할머니가 또 불쑥 찾아왔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더니, 자기 집인양 아주 조용히 들어왔다 검버섯 낯으로 새색시처럼 안방을 기웃기웃 하였다 이 방에서 손주와 함께 살았다 했다 그리고 19층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하염없이 허공 벽을 바라봤다 몇날이 지나 문방구점에 들렀다 할머니 잘 계시냐 물었다 자꾸만 어디로인지 돌아다니신다 했다 옛집을 못 잊어하신다 했다 김영산 시인 / 시(詩)가 사기라는 네 말을 이젠 부정할 수 있겠다 나는 지난 겨울 영흥에 갔었다 거기서 돌 가져왔지 사람 얼굴 크기만한 돌을 파도 무늬가 새겨진, 고뇌에 찬 얼굴 형상 돌을 내 책상 한 귀퉁이 놓고 날마다 바라본다 그 제단(祭壇) 위에 가끔 향불 피우지 처음 있은 일이지 돌 가져온 것도 이렇듯 기도하는 것도 당신도 내 방에 돌어와 봤을 테니까 보았겠지 돌멩이와 그릇에 담긴 재를 아마 무심히 우리가 각방을 쓰기 시작한 게 처음 있는 일이지 결혼 심육년 째 별거 아닌 별거 가장 가까이서 먼 거리를 본다 수십 번 이혼이라는 말보다 몇 달 째 갑갑한 침묵보다 무심한 백치 같은 눈빛 당신의 고요한 눈빛 나는 병원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지 아내여 나는 수술실에서 보았지 당신 배를 가를 수 있는 데까지 가르고 한무더기 내장을 드러내 보여주는 의사의 손 돼지 뱃속 같은 당신 속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당신은 인공항문을 달았지 그게 복개수술보다 아프고 수치스럽다는 걸 나는 안다 복대로 허리를 친친 감고 넋나간 사람처럼 집안을 걸어다닌다 여전히 직장에 나가 맑은 소리로 라디오 방송을 하고 텔레비전에 나가 밝은 얼굴로 말한다 그러다가 집에 와선 침대에 누워 꿈쩍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당신은 안방에 누워 입을 다문다 나는 영흥에서 가져온 돌을 보고 신령스러운 푸른 빛 감도는 두 눈이 푹 꺼진 콧대는 높고 입은 말한 적 없는 얼굴 형상의 돌을 다시 본다 김영산 시인 / 오리 오리에는 퍽이나 많은 우리 모양이 있다 오리는 목을길게 늘어뜨려 어딘가를 바라볼 때나, 노란 부리로 날갯죽지 겨드랑이를 다듬을 때나, 둠벙 속 자맥질하여 오리궁뎅이를 보일때나, 그 물고기를 물고 ??거리며 삼킬 때나, 둥둥 떠서 멱 감다 노랗게 편 물갈퀴로 노를 저을 때나, 두리번두리번 채마밭 닭풀 쪼을 때 주걱 같은 부리에 잘근잘근 걸려 있을 때나, 해질녘까지 부산함이며 그저 멍하니 멀뚱멀뚱한 눈이며 쭉 내밀어진 입이며 팔자걸음 뒤뚱뒤뚱 집으로 돌아올 때엔 퍽 많이도 우리를 닮아서 어느날인가 둠벙에서 오리들이 사라지고 나면 둠벙가에는 흰 깃털이며 오리걸음만 남는 거라 김영산 시인 / 서쪽의 아파트 -다시 반야를 그리며 당신이 걔신 아파트를 날마다 바라봅니다 당신이 사는 아파트는 높은 벽이어서 아파트벽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그러면 당신은 벽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군요 나는 내 눈을 돌려 바라보지 않으려 하지만 나도 어느새 벽속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이 떠난 뒤 나만 벽속에 갇혔습니다 당신이 계신 서쪽의 아파트를 날마다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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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체험하지 못한 마음을 댓글로 남깁니다.
모두 벽화(창비) 시집에 들어있는 시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