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50
5월7일[부할 제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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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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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mjRf1_920
[인천교구 이규원 마르코(부평1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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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호자 성령의 현존과 동반을 굳게 믿으십시오!>
요즘 우리가 봉독하는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 용맹한 주님의 군사로 거듭난 사도들의 놀라운 행적을 계속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변화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이상 그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 어떤 박해나 위협에도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복음과 관련해서 한 번만 더 입 뻥끗했다가는 더 이상 안 봐주니, 입을 다물라고 해도, 사도들은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참다못한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의 옷을 찢어 벗깁니다.
맨살 위로 엄청난 매질을 해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도망을 칠까봐, 발에는 차꼬를 채웠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에 간수는 혹시나 죽었을까봐, 가끔씩 이봐요, 살아있어요? 하고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이 될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지막지한 매를 맞아 정신이 혼미할 상태 속에서도 두 사람은 어떻게든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안간힘을 다해 주님을 찬미하는 송가를 불렀습니다. 큰 목소리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잠시후 주님께서 그들의 모습에 탄복을 하시고 응답을 주셨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사도들이 탈옥한 것으로 알고 품고 있던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바오로가 만류하였습니다.
놀라운 광경 앞에 넋이 나간 간수는 즉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려 물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사람의 지성이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놀라운 광경, 그 배경에 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성령의 굳건한 현존과 활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 복음도 성령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한없이 나약한 우리들, 겁쟁이들인 우리지만, 보호자 성령께서 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두려움을 기꺼이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협박한다 할지라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눈과 마음과 지성을 밝혀 주시면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로움인지를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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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aswHQZ7Q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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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승천은 아버지의 역할을 명확히 드러낸다>
저는 본당에서 모든 일을 신자들이 알아서 하기를 바라고 큰 방향만 제시합니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동안 일일이 지시만 받아오던 삶에 익숙해져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가장 편하지만, 동시에 가장 힘들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시해 달라고. 그러면 제가 하는 노력의 효과가 반감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무서운 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무서운 아버지들 밑에 자라는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있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해서인지 아이가 엄마 젖처럼 부드러운 것만 찾아서 소의 등골을 날로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밥은 먹지 못합니다. 혹은 돈은 벌어주지만, 아이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아버지도 나옵니다. 아이들은 숨을 못 쉽니다.
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면 아이들이 엇나갈까요? 아버지의 관심은 엄마의 관심보다 아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돈으로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버는 이가 직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말할 때 그 무게는 엄마가 하는 말보다 훨씬 큽니다.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에게 주는 밥이 아버지의 돈으로 차린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엄마가 잔소리해도 어차피 같은 아버지의 돈으로 사는 사람으로 여기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그 무게가 사뭇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재정적 도움을 어머니는 자신의 것으로 녹여서 자녀들에게 줍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그것으로 성장합니다. 반면 어머니의 역할을 배제한 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직접 관여하면 자녀들은 성장을 멈춥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땅에 살며 자녀를 키웁니다. 반면 아버지는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 때 자녀들에게 평화를 주고 어머니는 땅에서 자녀들과 머물 때 평화를 줍니다. 평화를 빼앗기면 자녀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은 이제 교회라는 어머니에게 우리를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사라져주는 것이다.” 히틀러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사랑의 마음은 자라지 못했던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엄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고흐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가자 숨어있던 예술 본능이 깨어났습니다.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어머니는 땅에 머물며 자녀를 키워야 하는 이 신비를 가정이나 성당에서 적용하지 못하면 우리가 키우려는 자녀의 열매는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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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잘 되던 인터넷이 갑자기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급한 대로 전원을 끄고 다시 켜보았지만 그래도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그럴 때면 연결하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을 컴퓨터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인터넷은 회사에 연락해서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염불이든 참선이든, 밀교든 현교든, 간화선이든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을 얻게 해 주면 그 수행은 정법(正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로 걸어서 서울로 갈 때 목적지인 서울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나중에 서울에 도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불교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내가 체득한 경지가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나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됩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뜻입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고성제, 그런 고통의 원인은 내 마음 속의 탐욕, 분노, 우치(愚癡)와 같은 번뇌라는 집성제, 이들 번뇌를 모두 제거하여 고통이 사라지는 열반의 멸성제, 그리고 이렇게 번뇌를 제거하는 팔정도의 수행인 도성제입니다. 즉, 불교수행의 길에서 최종 목표는 번뇌가 소멸한 열반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듯이, 그 어떤 수행법을 선택했어도 나에게 열반을 증득하게 해 주면 그 수행법은 정법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그 부처마저도 버려야 한다.’ 임제 스님의 유명한 살불살조(殺佛殺祖)입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나를 얽어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셔버리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관념, 조사나 아라한이라는 이름에 속박되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종교적 권위로 만들어진 우상을 부셔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안 되는 인터넷을 가지고 씨름했으면 인터넷 연결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행히 스마트폰 연결이라는 방법을 알았기에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라는 공간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고,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차원을 ‘협조자.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옥이 흔들리고, 부서졌을 때, 바오로 사도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감옥은 더 이상 굴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불행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은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욕망은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은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욕망을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욕망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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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5-11: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리라.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5절) 제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슬픔에 잠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 말씀하신다. 그분이 떠나시는 것은 당신이 영광 속에 계시며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도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갖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이제는 성령 안에서 뵙고, 제자들이 눈으로 그분을 뵐 때와 같이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9절)이라 하시는 것은, 당신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당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을 믿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오신 빛을 거절한 것이다.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숨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그분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분이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것을 우리들의 의로움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주님을 믿고 있으므로 그 의로움이 세상의 그릇됨을 밝혀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며 그때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단죄되며, 주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원수들의 죄는 단죄받을 것이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다. 사탄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다스려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기 때문이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더욱 아버지와 아들을 잘 알게 하여 주실 것이고, 당신의 인도하에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성령께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깨어있는 삶이 중요하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이란 이렇게 깨어있을 때 가능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다. 순간순간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아름답게 이어나갈 수 있는 삶으로 언제나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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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은 ‘가다’와 ‘오다’입니다. 예수님의 ‘가심’에 제자들은 ‘근심에 가득차게’ 됩니다. 지금까지 함께한 스승님의 부재가 커다란 상실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가 단순한 공허가 아님을 성령의 ‘오심’으로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전에 저는 이 말씀을, 예수님의 ‘가심’이 성령의 ‘오심’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마치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넘겨받듯, 성자의 시대가 성령의 시대로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삼위일체 사이의 바통 넘겨받기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빈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선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더 이상 지상에 머물러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중개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그분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더욱 돈독한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성령께서 오시면 “잘못 생각하는 것”(9.10.11절, 세 번 나옴)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더욱 깊은 이해와 통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은 계절 사이의 바통 넘겨받기가 아닙니다. 겨울 속에 봄이 있고, 여름 속에 가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더욱 깊고 견고하게 만드는 연속된 단계요 이어짐입니다. 이 초대의 의미를 깨닫고 더욱 깊은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성령 강림 때 우리가 청하여야 할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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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5-11)
1)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승천’에 대한 암시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라는 말씀은, “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슬퍼하기만 하느냐?”라는 꾸중입니다. 예수님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은 제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앞의 1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36)
14장에는 토마스 사도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왜 가시는지 알고 싶어 했는데, ‘이별의 말씀’이 계속되면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슬픔에 점점 더 깊이 사로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8-19) 제자들은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흘려들었을 것입니다.>
2)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라는 말씀에서, ‘진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계시’를, 또는 ‘특별한 가르침’을 뜻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는, “내가 떠나도 너희의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떠나지 않는 것은 너희에게 해롭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로움’은 ‘구원의 은총’을 뜻합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라는 말씀은, “내가 떠나도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실 것이고,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떠나야만 성령께서 오신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의 당신은 떠나시지만,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떠나심’은 ‘이별’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성령을 통해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슬퍼한 것이 아니라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3)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으면 너희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고, 너희는 그 생각을 바로잡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거스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2) 박해자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생각했지만,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을(죄 없으심을) 증명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의로우신 분’이라는 말은, ‘죄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박해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죄인이 심판받은 일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과 그것의 하수인들을 심판한 일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의 세력인 사탄을 물리치고 정복한 일이기 때문에, 사탄을 심판한 일이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죽인 박해자들을 심판한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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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 독서의 말씀은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오로 일행이 겪은 신기한 일을 전해주었습니다. 귀신 들린 하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 하녀를 부려 먹으며 돈벌이를 하던 주인들이 바오로 일행을 관가에 고발했고 게다가 군중을 선동하여 공격하였습니다.
고발을 받은 로마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을 하고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발에 채운 차꼬가 풀리고 감옥 문이 다 열려버렸습니다. 놀란 간수는 문책당할 것이 두려워 자결하려고 하였지만 바오로가 말렸습니다.
그 간수가 보기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죄가 없어 보였던 데다가, 달아날 수도 있었는데도 달아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그들의 표양을 보고 감화를 받아서 말하였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적 체험을 하고 구원을 청하는 그에게 바오로와 실라스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리스의 관문 필리피 선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일화는 그 도시의 영적 형편이 마귀를 섬기는 우상 숭배 풍조에 물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한편, 바오로가 행한 사도직의 형편이 가족 단위로 선교하는 것이었음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면서도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 형제들을 부르신 데에서도 나타나듯이 가족 관계를 중시하셨습니다. 피를 나눈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뜻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면 이상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던 무렵에도 가족 단위로 복음이 퍼져나간 사정은 같았습니다. 특히 교회의 창립 주역 이벽은 권씨 문중과 정씨 문중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이렇게 하여 모인 천진암 강학회에 유항검, 이단원 등이 참가하여 자신들의 출신 고향인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집안 단위로 복음을 퍼뜨렸습니다.
경기도 양근의 선비 권철신을 찾아가 열흘 동안 설득한 끝에 그 동생 권일신까지 천주교에 입교시킨 이벽은, 정약현에게 시집간 자기 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장례를 치루면서 정약현의 동생들인 약전, 약종, 약용 등 사돈지간의 삼형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정약현의 누이 동생과 혼인한 이승훈에게는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북경에 가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 오라는 부탁까지 함으로써 동서 사이의 두 선비가 한국교회 창립의 두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후 벌어진 박해에서 한국교회의 맥을 이은 교우촌들이 죄다 천주교를 믿는 가족들의 집안 단위로 구성되었습니다. 맨 처음 교우촌이 이루어진 곳은 강원도 풍수원이었고, 그 주역은 신태보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신유박해가 끝나자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모든 기도서를 다 잃어버린 교우들이 어떻게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몇몇 순교자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용인 지방으로 찾아가 여자들과 어린이들만 남은 세 가정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신태보와 세 집안은 주일과 축일에 한데 모여 마치 한 가족처럼 기도하고 의지하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매번 40리 길을 오가야 했던 불편을 줄이고 외부의 따가운 감시의 눈길도 피할 겸해서 모두 40여 명을 모아서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살기로 결심한 곳이 조선 천주교회의 첫 교우촌, 풍수원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교우촌은 점차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양근에 살던 권일신과 철신의 집안이 효시가 되어 교우촌이 퍼졌습니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인 권천례 데레사는 냉담자였던 조숙 베드로와 혼인한 첫날 밤에 동정 부부로 살기를 원한다는 글을 써서 승낙을 받은 이래, 동정 부부로 살면서 정하상 바오로가 성직자 영입운동으로 북경에 자주 왕래하던 일을 뒷바라지하다가 부부가 함께 치명하였습니다. 양근과 가까운 포천에는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베에르와 그 아들 홍인 레오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포천 땅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치명하였습니다.
전라도 지방 교우촌의 효시가 된 집안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안입니다.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이 이순이 누갈다와 동정부부로 혼인하여 순교한 이래로 호남에 복음이 뿌리내렸습니다. 이순이의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권철신, 권일신과 처남-매부 사이로서 처남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영세하고 아내에게도 권하였으므로 이순이는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 신앙으로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약용 요한에게서 교리를 배운 윤지충 바오로는 고종사촌지간이었습니다. 윤지충의 고모가 정약용의 어머니였습니다. 윤지충은 이종사촌 형이었던 권상연 야고보에게 교리를 전했습니다.
충청도 지방 교우촌의 효시가 된 집안은 이단원과 이존창의 집안입니다. 두 사람 다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충청 지방에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의 집안도, 강완숙 골롬바도 그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듯 가족 단위로 믿음을 받아들여 다시 그 가족들이 연합하여 교우촌을 이루었던 이 전통이 한국교회의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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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죄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를 업보마냥 껴안고 삽니다. 죄는 사라질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분신으로 평생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죄를 이겨 내고 오롯이 선한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죄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오셨고 죄인들을 부르러 십자가를 지셨으며, 죄인과 함께 돌아가시면서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를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상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고단한 지상의 삶을 견뎌 내셨습니다. 죄는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서로의 나약함을 어루만질 수 있는 자리로 다시 이해되어야 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서로 심판하고 대적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죄를 없애는 것이며 서로의 장벽과 단절을 뛰어넘는 것이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세상은 각자의 판단을 내세워 다투고 대립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함께 껴안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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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지난 주일부터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일까요?
특별히 ‘죄’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 번역 성서는 이를 좀 더 뜻을 살려 번역하였습니다. 곧 “그분(성령)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동이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제 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그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실수와 잘못이라는 수렁 속에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다.”라고 자책하며,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죄라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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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16,7)
제 삶의 여정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픈 날은 누이와 엄마가 떠나간 날들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벌써 50년도 넘었지만, 누이가 떠날 때는 정말 마음이 슬펐으며, 엄마 돌아가실 때는 정말 마음이 아프고 아렸습니다. 인생은 會者定離 라는 말처럼, 인생은 만남이 있으며 헤어짐이 있고, 태어남이 있으면 죽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떠나보내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황망하게 떠날 줄 몰랐기에 더욱 마음이 슬프고 아파서 차마 떠나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누이 떠나보내고서는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눈물을, 하지만 엄마 떠나보낼 때는 그 슬픔과 상실의 아픔이 제 삶과 신원의 밑뿌리를 흔들 만큼 충격이 컸습니다. 참 오래도록 방황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엄마 돌아가시고 눈물로 지새우던 7개월 후 성직자 · 수도자 성령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으며, 그 세미나에서 어느 수녀님의 죽음은 완전한 치유이다, 는 말 한마디가 저의 마음 깊이에 뭉쳐 있을 뿐, 풀어지지 않은 슬픔과 아픔의 죄책감에서 벗어나 엄마의 떠나가심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엄마를 편안히 제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던 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집착 곧 변명이었으며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엄마의 죽음보다 엄마에 대한 이기적인 제 사랑의 집착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저에게는 아주 귀한 날을 맞아 책상 위 빛바랜 엄마 사진을 보면서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때늦은 후회가 되살아납니다. 하지만 저보다 주님은 제 어머니를 더 잘 아셨고 사랑하셨나 봅니다. 당시 어머니가 겪으셨던 고통은 육체적인 아픔이 아니라 자식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심리적이고 영적인 아픔이었습니다. 사제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야 하는 많은 십자가의 무게로 힘겨워하셨기에 주님께서는 모든 삶의 묶임과 짓눌림에서 자유롭게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당신 마련한 거처로 제 어머니를 불러 가셨습니다. 치유해 주시고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저는, 마치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실라스’가 감방에서 기도하던 중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려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듯이, (사16,22~34참조) 저 역시도 죄책감과 사랑의 집착이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를 제 마음에 붙잡아 두려던 집착에서 풀어드리고 놓아버리자, 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낳아주신 엄마에게 집착함에서 벗어나 영적인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시선을 돌릴 수 있었고 하느님 안에서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표현처럼, 어머니는 떠나야 했고, 어머니가 제 곁을 떠남으로 생긴 빈자리를 받아들일 때 새로운 차원에서 어머니께서 저와 늘 함께하고 계심을 더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는 있음에도 함께 있지 못했지만, 떠나가신 다음에는 ‘아니 있음’으로 함께 할 수 없지만 늘 함께 있음을 더 강하게 느낍니다. 제 어머니는 제 마음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내가 떠나는 게 더 이롭다.”(16,7) 라는 말씀을 저는 이렇게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인간적인 시선에 볼 때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현존하시기를 바라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현존, 여기 지금 함께 계심’에 집착하기보다 ‘주님의 부재, 여기 아니 계심’에서 참된 믿음의 성장과 영성 생활의 심화를 더 강하게 체험할 수 있으며 체험해야 합니다. 또한 부재 가운데 현존을 의식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가르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된다고 봅니다. 주님의 부재는 성령의 현존을 향한 열림이며, 성령의 오심은 주님의 떠나심을 위한 발판입니다. 여기 아니 계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여기 저희와 함께 계십니다. 떠나신 분이 오히려 더 가까이 계시기 위해서는 육의 떠남과 영의 오심이 필요했고, 이것이 곧 떠남이 가져다준 이로움이라고 봅니다. 오셨기에 떠나셨고, 떠나셨기에 하늘에 우리가 머물 자리를 마련하시고 다시 오실 것임을 믿습니다. ‘여기 지금 아니 계심’으로 낙담하고 근심하기보다 ‘어제 함께 계셨음’에 감사하며 사랑받았던 추억을 마음에 새기면서, 떠나시면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보호자이신 성령을 우리 마음에 초대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늘 함께 계시면서 세상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16,8) 바로 잡고 진리와 자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여 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리고 가정이 오늘 ‘바오로와 실라스’가 간수에게 들려준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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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들이 책 추천을 해 달라고 해서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도저히 읽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분이 두꺼운 책 읽기를 꺼리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책도 두꺼운 책의 분류에 들어가는지 성경을 도저히 못 읽는 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긴 얼마 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은 7.2 권이라고 하더군요. 1년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도 50%에 달한다고 하니, 두꺼운 책을 읽기란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인지라 긴 문장에 대해서는 난독증이 걸린 것처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한 해시 태그만을 쫓고, 짧은 글과 짧은 영상으로 지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진실일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진실은 복잡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복잡하고 길게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 자체를 거부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말도 안 되는 흑백 논리로 서로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하버트 조지 웰시의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뜬 청년이 눈먼 부족에게 ‘본다’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먼 부족은 눈뜬 청년을 조롱하고 배척하지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세상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알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요. 이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큰 잘못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에 다시 오를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 찹니다. 아마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능함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모두 우리를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과 늘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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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떠나보면 알거야>
비가 내렸습니다. 봄에 내리는 비는 농사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귀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얘기하는 것보다, 다른 이가 얘기하면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루카 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작은 아들은 모든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을 깨닫는 만큼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깨닫는 만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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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걸음>
요한 16,5-11 (성령께서 하시는 일)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걸음>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나를 보내신
분을 떠났던
첫 걸음과
나를 보내신
분께 닿을
마지막 걸음
그 사이 잇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걸음들
홀로 걷는 듯
제 잘난 맛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를 보내신
분과 멀어지는
걸음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더디더라도
쉼 없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가는
걸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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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경험합니다. 특별히 성당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이사를 가고 이사를 오고, 단체를 떠나고 들어오는 것이 꽤나 잦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이전에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관계, 죽음으로 인한 작별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같은 일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비교적 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맞이했던 결정적인 이별의 순간들을 생각해 봅니다. 죽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사건을 제외 한다면 제 삶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이별은 출신 본당을 떠날 때, 첫 본당을 떠날 때, 그리고 공부했던 로마를 떠날 때였습니다.
사제의 임기 혹은 공부 기간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만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별이었고 심지어 준비가 가능한 이별이었음에도 헤어짐이 아쉬워 저는 종종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만큼 계속해서 연락도 주고받을 수 있고 멀리서나마 서로 소식을 접할 수 있음에도 왠지 모르게 당장의 작별이 섭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정들었던 누군가와의 이별은 언제나 아쉽고 서운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이전까지 함께 공유했던 시간 혹은 습관처럼 함께하던 시간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별이 있기에 새로운 만남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첫 본당에서 로마로 떠나지 않았다면 새로운 친구들과 청년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며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본당의 신자분들 또한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정을 생각해보면 결국 헤어짐과 만남이 우리의 삶의 폭을 넓혀 주고 더 큰 사랑을 불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날 것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이별이 못내 아쉽고, 또 한편으로는 그 이후를 두려워하고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야만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오시어 그들의 마음을 밝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세 가지 오해가 성령을 통해 극복될 것이라고 예고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으십니다.
그 중 성령으로 극복 될 첫 번째 오해는, ‘죄에 관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에 일을 하며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음을 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일어난 이러한 오해는 결국 제자들에게 전달되는 성령의 힘과 은총으로 점차 극복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의 기적으로 하느님을 믿게 되는 간수의 모습처럼 서서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오해는 ‘의로움에 관한 것’입니다. 현재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모르는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현재 예수님이 돌아가신 상태이며 결국 그들의 의로움이 승리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당분간 계속될 것인데, 그들이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의 힘과 은총을 계속해서 느끼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의로움을 점차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심판’에 관한 오해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심판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또한 완벽한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함으로써 심판을 받고 자취를 감춘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 즉 죽음과 악을 상징하는 사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죄가 사라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확실한 승리가 이뤄졌음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통쾌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죽음 이후의 심판 때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결실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습을 취하고 계셨을 때는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으셨으나 이제는 이런 모든 제약을 뛰어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상으로서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완전히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결정적인 도구는 성령, 바로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 성령은 제자들에게 장차 고유한 은사를 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게 할 것이고, 결국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범죄자로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인간의 삶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의 결과가 바로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시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슬픈 이별은 성령의 선물로 변화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는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고하시는 성령은 지금 이 미사 중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오늘 하루,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실 보호자 ‘성령’께 보호를 청하며, 스스로 행실로써 복음을 드러내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성령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며 남기신 가장 커다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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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께서 하시는 일>
“아름다운 삶”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역시 오늘도 서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칠창으로 시작되는 하루입니다. 답답하면 하루에도 벌떡 일어나 만세칠창을 합니다. 이 또한 기도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성령님 만세!’에 초점을 둡니다. 며칠전 읽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 나오는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영혼을 가지고 짐승을 닮아서는 안된다. 신체의 직립으로도 우리는 짐승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제 아무리 숭고한 것이라 할 지라도 물체들에다 영혼을 내던지라는 말이 아니다. 숭고한 사물이라 할지라도 의지의 안식을 거기서 찾는 다는 것은 결국 정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신체는 물체들 가운데서 숭고한 것을 향하도록, 즉 본성적으로 천체들을 향하도록 똑바로 세워져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 역시 영적 실체로서 영적사물들 가운데서 숭고한 것으로 고양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오만불손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경건한 의덕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두발로 서있을 수 있는, 두발로 걸을 수 있는 축복에 감사해야 합니다. 직립인간답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존엄한 인간품위를 지키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하늘의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요즘 세상 떠나는 분들을 대하며 화두처럼 저절로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다들 때가 되니 떠나는 구나! 어디로 가나?”
이에 대한 답을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믿는 이들 역시 그들을 보내신 하느님께 간다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떠나심이 우리에게 이로움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미 주님께서 보내주신 보호자 성령께서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주님을 닮아 무죄한 삶, 의로운 삶, 진실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직립인간답게 품위있는 삶, 자유로운 삶, 아름다운 삶,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의 소소하면서도 확실한 깨달음 역시 성령님의 은총입니다. 다음 다산의 말씀도 이런 깨달음의 소산이겠습니다.
“삶의 무게는 온전히 나의 것이지만, 죽음의 무게는 가족들이 함께 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잘 떠나는 죽음이 가족들에게 최고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만으로, 세상은 평안해지기 시작한다.”
구원은 가까이에서부터 시작됨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주 예전에 민들레꽃 홀씨들 날려 보내며 써놨던 “영원한 삶”이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꽃졌다하여 끝난 것은 아니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
민들레 홀씨 형제들!
언제 떠나 어디에 닿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임만이 알 뿐이다
몇날 동안 참 행복했고 화려했다
이제 샛노랗게 빛났던 하늘사랑 추억 가득 담고
임바람 불기만 기다릴뿐이다
꽃졌어도 계속되는 생명 바로 영원한 삶이구나
죽어 사라져도 끊임없이 사랑의 홀씨들 나눴던 삶
죽음은 없다
영원한 삶이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생명이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2001.5,4
무려 23년전 글이지만 지금도 새롭습니다. 예수님은 떠났지만 보호자 성령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홀씨들이 되어 계속 주님 파스카의 꽃을 피어냅니다. 주님의 일을 계속합니다. 이런 시 또한 성령님께서 주신 깨달음이며 성령님의 은총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끊임없이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이 되어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라와 실라스입니다. 두 제자들은 깊은 감방에 갇혀 있는 수인들이지만 영혼은 참 자유롭습니다.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이에 놀란 간수는 수인들이 달아난줄 알고 자결을 시도하자 즉시 바오로는 이를 만류하였고 상황을 깨닫고 마음을 추스린 간수와 두 제자간 주고받은 대화가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두 제자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 일화는 다시 한 번, ‘하느님께서는 굽은 선들에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성령의 사람, 바오로와 실라스입니다. 복음선포자들과 간수에게 재앙같은 사건도 그들 모두를 위한 아름다움이 여기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글자들(the most beautiful letters)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만일 우리 삶중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중심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런 하느님 친히 쓰신 아름다운 글자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날마다 굽이굽이 굴곡진 인생길에도 주님은 똑바로 아름다운 글자를 써내려 가실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며, 우리의 곡선 인생 여정중에도 주님은 계속 아름다운 글자를 써내려가심으로 우리 모두 아름다운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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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늘은 주제와 좀 동떨어진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내용인데 제자들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이유가 자기들도 거기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싫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도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오늘은 어디로 갈 건지를 일부러 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옛날에 ‘어디로 갈거나’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이 강을 건너도 내 쉴 곳은 아니오. 저 산을 넘어도 머물 곳은 없어라.’ 그때는 이 노래가 우리의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과도 어울려서, 그리고 꽤 철학적인 가사가 마음에 들어 가끔 흥얼거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저 감상에 젖어 흥얼거린 것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지금처럼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디로 가는 것과 관련하여 옛날의 저는 이 세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 세상을 넘어 어디로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게 되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복음의 주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고, 초월하였기에 죽음에 초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친 얘기라면 한 발은 이미 저 세상에 있고 다른 한 발은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양다리 걸치기인데, 보통 양다리 걸치기는 안 좋은 뜻이지만 지금 저의 경우는 이 세상을 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한 발 딛고 있지만, 심정적으로 발을 확실히 담그고 있는 곳은 언젠가 가야 할 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몇 주 전 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일 저일 벌이기보다는 하나라도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후배들에게 이롭지 않겠냐는 충고를 들었는데 저를 콕 찌르는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제겐 오래전부터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지론이 있는데, 그것이 저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늘 경계했던 것이 제가 시작한 일 제가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 하거나 제가 시작한 일이 성공적이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주란 편안함에 대한 안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에 안주하는 것도 있고 남자에게는 일에의 안주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제가 시작하고 하던 일을 즉시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그러해야 할 때이고,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제게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떠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죽는 것은 두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선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닥치면 떠나길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를 늘 물으며 살아야 하고, 간다면 골로 가지 않고 아버지께 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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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16,5)
<오심과 떠나심!>
오늘 복음(요한16,5-11)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제자들 마음에 근심으로 가득하겠지만,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이롭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셔야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오시고,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 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심과 떠나심!'
예수님의 오심(성탄)과 떠나심(승천)은 모두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다시 구하시려고 우리 곁을 떠나십니다.
다가오는 주일(5.12)이 예수님의 떠나심을 경축하는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보내드리고,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보호자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다시오심, 곧 재림을 잘 준비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각종 재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죽음의 문화의 결과입니다. 엇그제 주일에 집중 호우로 인해 근처 마을에 물난리가 났고, 다른 남쪽 지역에서는 실종자가 숨진 채로 발견되는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창조 활동으로 이 세상에 왔고, 또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인생은 오고 떠나감의 인생입니다. 왔다가 떠나가는 인생, 그것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公手去) 인생'입니다. 합천 본당에서는 어제 한 분(장윤분 루시아.92세)이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보내드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주님, 이 세상을 떠난 장윤분(루시아) 자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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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mMoAtUlmW6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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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 7)
오시는
성령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어떤 것도
부여잡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집착없이
떠나시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예수님의
여정 안에
있습니다.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철저한
자기봉헌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진실하신 뜻은
성령님으로
드러납니다.
바람직한
관계정립은
십자가를 통한
자기봉헌에서
비롯됩니다.
자기봉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떠남 속에
새로운 만남의
길이 있습니다.
조건 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삶은 흐르는
것입니다.
떠날 때와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시는 때와
떠나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떠남에 있고
구원은
맞이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곳에
어떠한 때에
있는지요.
하느님께
마음의 눈길을
돌리는 기쁜
오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매 순간이
하느님의
가장 좋은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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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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