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인 충북 영동에 건립되어 있는 난계 박연의 동상과 기념관
- 조선에는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박연(1595~?)보다 앞서 국정에 많은 공적을 끼친 순조선인 박연
(1378~1458)이 있었다. 충청도 영동 사람인 박연은 태종 11년(1411) 문과 장원으로 출사한 뒤 세
자시강원 문학에 제수되어 충녕대군(세종)을 가르쳤다. 세종 즉위 후에는 악학별좌에 제수되어 불
완전한 각종 악기 정리, 새로운 형식의 악보 찬집, 편경을 필두로 여러 종류의 새로운 악기 발명, 궁
중의식에 향악 대신 아악 채택 등 조선 초기의 악학(樂學)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예문관 대제학 시절 수양대군의 보위 찬탈에 반대한 죄로 3대9족이 멸화(滅禍)를 당할 위기에 처했
지만, 수양의 배려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곧 죽었다. -
우리 주변에 보면 건강염려증 환자들이 의외로 많다.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겠지만 우리 집에도 저쪽
건넌방에 한 사람 살고 있는데, 어디가 조금만 이상하면 자가진단을 내려 금방 중환자실에 입원이라
도 해야 될 것처럼 야단법석을 떤다. 매주 3~4일은 여기저기 동네 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이것저것
약을 타온다. 내과, 안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한의원, 심심하면 치과에도 간다. 경대 위, 서랍 속,
냉장고 - 약을 보관하는 장소도 제각각이다. 저게 다 어디로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많은 약을 잘도 찾
아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저자 박영규도 「조선 명저 기행」의 「동의보감」 편 서문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
의 건강을 가장 중시한다.’고 써놓았다. 서양의 격언에도 ‘…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라며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즘 TV를 보면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방청객들을 불러 모아놓
고 무슨 증상에는 어떤 음식이 좋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건강염려증을 부추긴다. 각 매스컴의 건강강
좌도 과잉투성이다. 건강과 수명은 오로지 삼신할머니의 몫이다. 운명에 순응하며 마음 편히 사는 게
가장 건강한 삶의 방식이다.
허준은 선조 29년(1596) 「동의보감」 집필에 착수하여 14년 만인 광해왕 2년(1610)에 완성했으며, 3
년 뒤인 1613년 내의원에서 내의원字(활자 이름)로 출간했다. 허준은 총 25권으로 된 「동의보감」을
집필하기 위해 동양 각국의 의서 230여 권을 참조했다. 의학 및 약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은 이
후 조선에서 7종, 중국에서 5종, 왜국에서 3종이 연차적으로 출간되었다. 각국에서 이 책들이 출간된
횟수는 각각 수백 번이 넘는다. 책이 나오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왜국 의학계에서도 필독서
로 권장할 만큼 큰 관심을 끌었다. 「동의보감」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의학사에서도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동의보감」 이전에도 의학 관련 서적은 더러 출간되었다. 세종 15년(1433)에 발간된 「향약집성
방」(총 85권)과 세종 27년(1445)에 발간된 「의방유취」(총 365권) 등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분량
이 너무 방대한데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 경륜이 있는 의원조차 읽기를 꺼렸다.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게 정직한 분석일 것 같다. 중국과 왜국에서 출간된 다른 수많은
의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해 「동의보감」은 분량도 간략하게 축약했고 내용도 되도록 쉽게 써서 초보 의원도 능히 이
해할 수 있도록 편찬했다. 특히 같은 질병을 두고 내용이 다른 중국과 조선의 처방을 병기함으로써
양국 의원들이 서로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일찍이 독자인 의원들을 이처럼 자상하게 배려한 의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출간된 적이 없었다. 「동의보감」이 허준 혼자서 완성한 의서가 아니라는 주
장도 있다. 동양 각국의 수많은 의서를 참고했을 뿐만 아니라, 편찬에도 양예수‧이명원‧김응탁‧정예
남‧정작 등이 동참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은 목차 구성에만 관여했을 뿐 집필은 오로지 허준
혼자서 도맡아 해낸 게 맞다.
궐내에서 어의를 겸하며 집필에 몰두하던 허준은 선조가 재위 41년 만인 1608년에 승하하자 그 책임
을 지고 의주로 귀양을 갔다. 「동의보감」 집필에만 몰두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훗날 다산
정약용도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을 간 덕에 「목민심서」를 필두로 500여 권의 주옥같은 명저를 남기
지 않았던가. 광해왕은 1609년 허준을 해배하여 한양으로 올라오게 했으며, 허준은 마지막 박차를 가
해 1610년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게 되었다.
허준은 3대 원칙을 정해놓고 「동의보감」을 집필했다. 첫째, 병을 고치는 방법보다 병에 걸리지 않
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둘째, 중국과 조선의 고대 의서들에서 요점을 추려 간결하게 설명했다.
셋째, 약초는 모두 조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초목을 택했으며, 조선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그대
로 적용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병행했다. 훈민정음 병기는 그 이전에는 어떠한 책에서도 시도해본 적
이 없는 획기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25권의 「동의보감」을 순한글로 번역한 책은 700페이지짜리 3권 분량이다. 「동의보감」은 별도로
된 목차 2권 외에 내경 편 6권, 외형 편 4권, 잡병 편 11권, 탕약(총 1393종) 편 3권, 침구 편 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은 전문적이라 소개를 생략한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의 글
「조선 명저 기행」 소개 끝
첫댓글 무더위가 이러려니 하지만 무척 더운날씨 입니다. 습도 까지 있어 미국보다 더 덥다는 아이들 성화에 에어컨을 상시 틀고 있어 이것 역시 습관화 된듯 밤 동안도 몇차례 가동을 합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이 아직 아니어서 주중 냇가를 찾는 그늘 쉼터가 붐비지 않고 시원할것 같아 검색을 해봅니다. 활기찬 한주 잘 시작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