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막염에 각막염으로 도져서 눈가에 얼음팩을 달고 사는 리블루입니다. 할 수 있는게 집에 박혀 책만 들입다 파는 것 뿐이네요;;
어제부턴 서중석 교수님의 『6월 항쟁』을 읽고 있습니다. 6월 항쟁의 배경, 동력, 전개, 각계 반응, 이면 등을 심층적으로 다룬 책이기에 눈깔이 빠질 것 같아도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가던 와중에 흥미로운 부분을 봤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정계 측 양대 산맥이었고, 라이벌이었고, 자중지란으로 두번이나 군부독재 세력에게 재집권 기회를 헌납하고, 결국 한 번씩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양 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이야기입니다. 6.26 평화대행진으로 5공 정권의 국가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긴급조치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전두환 정권의 복심이었던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전격적으로 직선제 개헌 수용을 6월 29일 선언함으로써 6월 항쟁이 결실을 맺게 되는데요.
당시 상황을 보면 전두환, 민정당은 긴급조치 선포가 자칫하면 군부 소장파, 또다른 '전두환'에 의한 12.12, 5.17이 될 것을 우려해 이도 저도 못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여기서 전두환-노태우 중 어느 쪽이 먼저, 그리고 주도적으로 4.13 호헌 철회, 직선제 개헌을 주창했는지는 양자의 증언이 엇갈립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4.13 호헌 자체가 구 유신세력과 12.12 세력의 알력다툼으로 인해 '단임제'를 할 수 밖에 없는 전두환의 자구책이었다는 점입니다. 노태우를 차기로 세운 것 자체가 이 '친구 아이가'의 물태우가 퇴임 후에도 자기 뒷배를 봐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니까요. 그런데 당장 6월 항쟁 분위기를 보면 만약 직선제 개헌 이후에 야당 대통령이 나온다면 이후 역사가 보여준 것 처럼 광주학살, 12.12, 5.17 쿠데타 단죄 등으로 조리돌림을 당할게 불보듯 뻔했습니다. 노태우 역시 기껏 후계자가 되었고, 당선이 보장되는 간선제가 아닌 직선제로의 개헌은 결코 반길 수 없는 내용이지요.
『6월 항쟁』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다음과 같이 풀어냅니다.
======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권할 때 반드시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점을 얘기하지 않으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중략)...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 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떠오르는 사례가 '이승만 고사'다...(중략)...신익희 민주당 후보 말고 또 한 명의 유력한 야당 후보가 나온다는 것은 진심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1954년과 다르게 조봉암이 쉽게 후보 등록을 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 이승만 권력 강화의 비결인 북진 통일의 문제점과 허구성을 샅샅이 고발한 '평화 통일', 전쟁을 전후해서 있었던 수많은 주민 집단학살 사건과 권력의 횡포를 고발한 '피해 대중을 위한 정치'를 들고 나왔어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 까닭이 있었다...(중략)
노태우와 전두환은 특단의 다른 조치도 강구해봤겠지만 야당 후보가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6월 항쟁』제 5장 무릎 꿇은 전두환 신군부 체제-6.26 대행진에서 6.29 선언으로 5. 야당 대통령이 나오더라도 6.29선언이 나왔을까. p589~591
======
때문에 6.29 선언에서 김대중의 사면 복권은 범야권 민주화 세력에서 요구해오던 것이었지만, 전두환-노태우 역시 차후를 위해 무조건 추진해야했던 것입니다.
=====
...(전두환은)그날 오후에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라고 말했다. 또 김성익에게 6.29선언의 전말을 얘기할 때에도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김대중을 풀어 출마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 내가 대통령을 하면서 안가에서 야당 사람들과 만나서 깊이 있는 얘기를 들어보면 양 김 씨는 서로 안 믿는다고 했다. 철천지원수라는 거였다"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6월 항쟁』제 5장 무릎 꿇은 전두환 신군부 체제-6.26 대행진에서 6.29 선언으로 5. 야당 대통령이 나오더라도 6.29선언이 나왔을까. p592
=====
6.29선언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양김의 충돌을 통해 직선제 개헌 이후에도 정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5공 독재세력의 계산이 있었던 것이지요.(무념)
이후 역사는 뭐 아시다시피 이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양 김의 분열로 어부지리를 얻은 노태우는 씐나게 청와대로 들어갔다가 어제의 친구를 백담사로 쫓아내고 여소야대 정국에서 피를 토하다가 3당 합당으로 한숨을 돌리죠.
그런데 6월 항쟁 시기를 보면 이미 양 김 뿐만 아니라 민주화세력, 전 국민, 온 세계가 직선제 개헌 이후 양김의 화합 여부에 관심을 쏟은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6.29선언 이후 10월 25일 고려대 대운동자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 참석한 양 김.
이후 두 사람이 걸어갈 길을 함축하는 사진입니다(...)
=====
6.29선언이 나오자마자 그 순간부터 최대의 관심은 김대중의 출마 여부였다. 1986년 11월 5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되면 사면, 복권이 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라고 말했기 대문에 그와 관련해서 대통령 선거 출마 문제로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었을 터 인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중략)
...김대중계라고 하더라도 동교동 권역에서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이중재는 "공인의 약속으로서 지켜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0미터 거리에 있던 노승환은 "상황이 바뀌지 않았느냐?"고 반문했고, 5미터 안 지근거리에 사는 김대중 비서실장 권노갑은 "말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중략)
(7월 1일 민추협 공개 회견자리에서) 이 자리에서 양 김은 "두 사람의 단합을 염원하는 국민의 뜻을 우리는 결코 어기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중략) 그들이 국민과 세계에 약속한 네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현 정권의 일관된 정책은 두 김 씨를 갈라놓는 것이지만 우리는 절대 흔드림 없고 한 치의 간격도 없이 단합하며
2. 민주화가 될 때까지 또 그 이후에까지 협력하며,
3. 우리는 절대로 표 대결로 싸우지 않겠으며,
4. 80년과 같은 우매한 짓을 하지 않으며 국민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는 것이다.
-『6월 항쟁』제 5장 무릎 꿇은 전두환 신군부 체제-6.26 대행진에서 6.29 선언으로 2. 노태우의 6.29선언과 김영삼, 김대중의 반응. p546~547
=====
이 약속이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질 줄 그때 그 사람들을 몰랐습니다
아오 이 븅신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왜 양 김은 80년에도 '우매한 짓'으로 5공 정권을 창출하는데 본의아니게 손을 보탰음에도 같은 일을 반복한 것일까요?
노회한 정치인인 김영삼, 김대중은 둘의 분열이 어떤 결과를 몰고 올 것인지를 몰랐던 것일까요?
왜 양 김은 군부독재 세력에서 민주화 세력으로의 정권 교체 열망을 무시하고 분열하게 된 걸까요?
왜일까요?
ps. 오타가 있어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눈깔이 보이다 말다하니 키보드 치는 게 고역이네요ㅠ
첫댓글 잘 읽었어요. 6.29가 이뤄진 데에는 올림픽 때문에 세계인들 이목이 집중된 상황도 한 몫했다더군요.
당대 사람들이, 생각보다 독재타도에 대한 열망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직선제 개헌의 의의를 그리 크게 두지 않은 것일지도요. 그냥 하면 좋고 안해도 그냥 살고...
지금와서 독재정권의 만행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도 '당대 사람들은 독재고 뭐고 잘먹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니들만 열내?'하는 의견을, 심지어 지금도 보고는 하거든요.
양김도 그 점을 간과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 올림픽 때문에 미국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네요. 80년 과 84년 올림픽 때 서방과 동방이 서로 보이콧 했죠. 이것을 미국이 88 올림픽 때 서방과 동방이 화해분위기 만드려고 하는 올림픽 열리는 자신의 우방국가인 한국에서 독재문제로 항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 서방입장에서 별로 좋지 않으니깐
6월 항쟁의 양상을 보면 5공 정권 타도, 직선제 쟁취에 대한 범국민적 지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국민 여론이 이전과 다르게 민주화세력, 특히 학생운동 세력에 호응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3월 시위에는 시민들이 전경들의 학생 연행에 항의하거나 시위 구호에 박수로 호응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6.10 시위부터는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가 6.26 평화대행진에 이르러서는 경찰력이 일부 지역에서 유명무실해지게 됩니다. 말씀대로 시민 동조가 적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리블루 // 그렇군요! 절대 소수의 리그가 아니었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87년 대선 결과를 보면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1위를 하긴 했지만, 이는 김영삼, 김대중, 여기에 김종필이 각각 28%, 27%, 8.1%를 차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 유신세력인 김종필은 차치하더라도 양 김이 단일화를 했다면, 김대중 후보가 86년의 불출마 약속을 지켰다면 5공 세력이 재집권할 일은 없었겠지요.
양 김이 다 나오면 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랬는지가 정말 의문입니다...ㅡ.,ㅡ;;;
6월 항쟁으로 노태우가 단 1표도 얻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건지...
독재타도의 열망은 뭐 그리크지 않았을겁니다.
그런거야 사실 일부 엘리트들의 구호이고....=ㅅ=;;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진심으로 열받아 버린거죠.
그때문에 대학생 같은 일부 엘리트 계층만 거리로 나간게 아니라
저것들 또 시위질이내 하고 짜증내던 사람들까지 다몰려 나갔거든요.
촛불집회만 가지고도 이명박이 그 고생을 했는데 그게 수십배 확대되서 전국적으로 벌어진게 6월 시위죠.
그걸 진압하려 들다간 시리아처럼 되는겁니다.
시리아야 종교전쟁 양상에 계층간의 괴리도 커서 그런 헬게이트가 열렸어도 정권이 살아남았지만
우린 아니죠. 진압명령 내렸다간 역쿠데타가 벌어질 상황이었어요.
단순히 미국 눈치만 본건 아니죠
꿈꾸는 나무 // 책에서도 미국의 역할은 제한적으로 보더군요. 이보다는 박종철 고문치사가 '자식 가진' 부모 세대에게도 독재정권의 폭압이 남 일이 아니란 것을 실감시켜 공분을 샀고, 4.13 호헌조치가 기름을 끼얹은데다가 학생운동 노선이 난잡하고 현학적인 CA에서 대중 운동을 표방하는 NL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등 복합적 요인이 '기적적으로' 6월 항쟁을 낳았다고 진단합니다.
여튼 6월 항쟁의 흐름을 보면 진짜 저자 말마따나 역사의 간지, 신의 섭리라고 보이더라구요.
그 해 KAL 858기 사고가 터지고 김현희는 선거 전날 압송돼 들어 오죠..
역대급 북풍이 불긴했죠. 그래도 36%만 얻었고, 양 김이 단일화만 했으면...
정치인의 제일 목표는 정권교체가 아닙니다. 집권이죠
정권교체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치인이 아닌 운동가.
양김은 철저하게 정치인이었음. 다만 집권을 위해 운동가들을 이용한것일뿐
'정치인' 이었죠. 확실히
그런데 그 노회한 정치인들이 도대체 뭘 믿고 갈라섰는지 의문입니다. 둘이 갈라져도 이길 자신이 있었는지...
리블루// 이른바 "4자 필승론"이었습니다. 김영삼/노태우가 경상도 표를 가르니까 자신은 전라도표 + 민주 세력표 얻어서 이길 수 있다는 계산. 하지만 이것이 망상이었음은 결과로 나타났죠. YS도 나름 민주화 운동을 해온 투사였기에 그도 민주화 운동에는 지분이 있다는 계산을 미처 잊었거나, 과소평가했던 것입니다.
YS 다음엔 상황이 좀 바뀌어서 97년 대선 때는 그야말로 바로 이 구도가 재현되었습니다만..... 여하튼 저때 단일화는 YS로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법의활 // 이때의 책임은 김대중씨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요. 왜 불출마 선언을 엎어버린건지...나이+건강이 걱정되었나;;;
김대중 입장에서 김영삼으로의 단일화는 결국 자신의 정치 커리어가 대통령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름다운 통합/단일화는 없습니다. 통합/단일화를 통해 위로 올라선 측이 상대방을 철저히 밟아버리는게 수순입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때도 그랬고 손학규가 친노를 다시 불러들일때도 그랬습니다. 김대중이 김영삼과 단일화를 했다면 김영삼은 김대중을 차기 대선후보로 나서지 못하게 밟아버렸을 가능성이 90% 넘습니다. 둘의 기반이 너무 달라요. 물론 김대중이 쉽게 밟힐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밟기로 작정하면 어찌되는지는 김대중이 제일 잘 알겠죠.
리블루// 다만 이 부분에서 김대중만 지나치게 질타했던 것이 과거 조중동 쓰레기들의 양김 분열 책동이자 전라도가 그렇지 뭐 의식의 확산 전략이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조중동이 지금의 일베충들 하는 역할까지 했던 시기인데, 사설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걸 연봉 몇백 몇번씩 받아 쳐먹는 사설위원이 할 수가 있는 소리인가 하는 괴설이 난무합니다. -_- DJ 진영에선, 과거에 YS한테 공천권이었나 당권을 양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YS한테 호되게 당했었고 그 이후로 DJ가 YS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DJ는 YS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도 받고 연설 능력도 있었으므로, 정상적인 민주주의 룰대로라
면 YS가 나한테 양보해야 한다..... 이런 생각도 하고 있었고요. 물론 뭐 이건 틀린 얘긴 아닌데 문젠 현실은..... YS가 지적했던, "DJ 니는 전라도 사람이라서 군부가 싫어하고 빨갱이 운운 소문도 퍼져서 국민들 일부가 영 불안해한단 말이야!!" 이건 영 좀 불쾌한 소리고 DJ한텐 그야말로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인신 모독이이었습니다만 적어도 현실이었거든요.
여하튼 YS는 DJ한테 믿음을 주는 데 실패했고 DJ는 자기 유리할 대로만 현실을 보려 했다, 뭐 그런 게 되겠습니다.
마법의활 // 좋은 정리 감사합니다.
결론내리면 '비극'이네요. 어렵게 국민들이 이룩한 민주화가 거물 정치인의 깊은 골에 빠진 격이니까요...
양김분열에는 선의와 올바른(!) 판단도 있긴 했습니다. 김대중은 김영삼이 대통령을 하기엔 지적인 능력 면에서 부적절하다고 보았고, 김영삼은 김대중이 군부독재를 끝내고 군부를 확실히 숙청하기엔 너무 유화적이라고 보았죠. 외환위기와 전두환 사면이라는 결과를 보면 둘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리고 현재시점에서 양김분열에 대해 보통 김대중이 양보했어야 한다고 논해지는 건, 딱히 김영삼이어야 할 당위성이 있어서라기 보단, 김대중이라면 몰라도 김영삼쪽이 저 상황에서 양보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 탓이 큽니다(...) 김대중은 이걸 남은 평생 후회합니다만, 김영삼은 뭐 지금 물어봐도 본인 탓이라곤 안 할듯(...)
YS성향이 자기 행동을 돌이켜보고 성찰하는 타입은 아니긴 하죠. 뭐, 그럴 양반이 아니니 하나회도 거리낌없이 밀어버릴 수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도 양 김의 성향 차이와는 별개로 그때 그 시점에선 YS의 집권이 시대적 요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87년에 필요했던 것은 척결과 청산이지 타협과 유화가 아니었으니까요. 여튼 6월 항쟁 이후 상황은 다시봐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YS 의 집권이 시대적 요구라고 보긴 힘듭니다. YS = 척결과 청산, DJ = 타협과 유화 라고 하셨는데 별로 동의가 안되지만 맞다고 하더라도 타협과 유화의 DJ 가 YS 와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것은 그 당시 그만큼 둘의 간극이 벌어져 있었다는것을 뜻하고 그럴경우 정상적인 민주주의라면 단일화 없이 나가서 국민의 선택을 받는게 맞는겁니다.
가만 보면 단일화를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것 같아 오히려 아쉽습니다. 독재 세력이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행동하도록 만든 87년 선거는 민주화 운동 세력이 집권에 실패했더라도 결국 그 자체로 민주화 운동 세력의 승리라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YS에게는 3당 합당(...)이 있기에 척결과 청산으로 보기에 거부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회 척결이나 새누리당의 미필 정당화에 기여한 점은 있으니까요.
단일화에 대해선 DJ측이 이미 86년에 직선제 개헌때 공언한 것이 있기 때문에 책임소지를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그리고 단일화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신지는 알겠습니다만 87년 대선에서 민주화 세력이 바란 것이 정권 교체를 통한 군부독재의 종식인지, 양 김의 정면 대결인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단일화 자체가 여러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나 이것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단일화를 해서라도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의 열망이
있으니까요. 정치인 개인의 승리나 이력과는 별개로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 정치가 아닐까 합니다.
뭐, 단일화에 대한 가치평가를 떠나서 87년의 정권교체 실패가 3당 합당을 낳고, 영호남 지역주의를 심화했고, 정치적 민주화는 달성했지만 그 외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는 완성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입장이라서요. 비약이라면 비약이지만요;;;
트라콘// DJ가 충분히 숙청을 할 수 있다고 봐도 이제 와서 평가하자면 DJ가 88~92년 임기를 하고 YS가 92~97년 임기를 하면 삼저호황이 지나간 시점에 레임덕인 YS가 국가를 맡게 된다는 점이(...)
그리고 87년 대선은 그 이전의 선거에 비하면 매우 공정했습니다만, 국가예산이 총동원되고 안기부의 총력을 다한 공작이 있었으여 군을 위시한 부재자투표는 솔직히 신뢰하기가 무리인 선거이기도 했죠. 지금도 남아있는 기울어진 경기장은 말할 것도 없구요. 이런 수준의 조건은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선거는 아닙니다. 제6공화국 첫 대선의 의미보다는 6월항쟁을 완결지을 수 있는 최후의 전장이라는 의의가 더 크게 부여될수밖에 없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