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고기를 굽습니다. 조금 전에 설명했던 아로제(arroser) 과정을 잊지 마세요. 이 과정을 거치면 로즈마리와 타임, 마늘의 풍미가 더해지면서 고기가 마르지 않고 촉촉하게 됩니다."
서울 압구정동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 3층. 파크하얏트서울의 부총주방장 김민규 셰프가 프라이팬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아로제'니 '데글라세(déglacer)' 같은 프랑스어 요리 용어가 나올 때마다 셰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 적은 여성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발사믹 식초는 오래된 것일수록 풍미가 좋습니다. 저는 이 제품을 주로 써요." 김 셰프가 식초병을 들어 보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제품명을 기억하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까지 있었다. 전문용어에 낯선 요리 재료까지 등장하는 모습이 전문 요리 학원의 수업 풍경 같지만, 셰프의 설명을 듣고 있는 여성들은 모두 평범한 일반인이다. "아이에게 줄 갖가지 간식을 직접 만들어 먹인다"는 30대 주부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아 파스타도 종종 해 먹는다"는 20대 대학생, "요리 초보라 설명 듣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다"는 직장인도 있었다. 이들이 참여한 요리 수업의 이름은 '가정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프렌치 요리 노하우'다.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스테이크와 프랑스식 야채 요리 라타투이, 토마토 타르트를 직접 만들어 보는 수업이다.
이 수업을 위해 김민규 셰프가 직접 준비한 재료들은 모두 김 셰프의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구입한 것이다. "프렌치 요리라고 하면 기념일에 격식을 차려 먹어야 하는, 셰프만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해 왔잖아요. 하지만 요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외식을 하면서도 파스타에 피자, 짜장면에 짬뽕 외에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고 집에서도 프랑스 가정식, 멕시코 요리 같은 낯선 음식을 해먹는 사람이 늘어났어요."
프랑스 파리와 리옹의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배운 김 셰프가 처음 한국에 자리 잡았을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보통 '파인다이닝'이라고 부르는 고급 레스토랑이 프렌치의 전부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이태원과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와인도 한잔 하고, 가볍게 식사도 할 수 있는 '비스트로(Bistrot)'도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프랑스 가정식, 멕시코 요리, 러시아와 페루 요리… 다양해진 요리 문화
프랑스 요리뿐만 아니다. 일식이나 중식 같은 접하기 쉬운 나라의 음식도 훨씬 다양화됐다. 일본이나 중국 현지 가정에서나 나올 법한 가정식 요리집이 생겨나고 있고 오키나와 요리, 광둥 요리같이 지역적 특색을 살린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서울 이태원이나 홍대앞, 동대문 지역을 중심으로는 러시아 요리, 페루 요리, 불가리아 요리같이 쉽게 접하기 힘든 나라의 요리 전문점도 많이 생겨났다. 서점에 나온 요리책도 살펴보자. '리얼 푸드트럭 레시피: 따라하고 싶은 미국 길거리 음식' '또띠아' '실버 스푼: 이탈리아 요리의 바이블' '한 그릇에 담는 중국 가정식'. 국가와 장르를 막론하고 다양한 요리책이 쏟아지고 있다.
말 그대로 요리 문화가 다양해졌다. 2~3년 전부터 유행했던 '쿡방'이나 '먹방' 같은 TV 프로그램이 요리와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해외여행이나 유학 등 해외체류 경험을 한 사람이 늘어난 것도 요리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데 한몫을 했다. 요즘의 요리 문화를 보면 단순히 음식을 먹는 데 그치지 않고 배경이 되는 문화를 이해하며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 2층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행 가기 전 요리책 읽어보기
요리와 도서관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쿠킹라이브러리'라는 이름에 맞게 2층은 도서관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국내외의 요리 전문책 1만1000여권이 늘어서 있는 서고에는 없는 것이 없다. 주말을 맞아 이곳에서 남편과 함께 "'요리 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말한 박지우씨는 쿠킹라이브러리를 벌써 세 번째 방문했다. 이날 찾고 있던 레시피는 그리스 전통음식인 무사카와 수블라키다. "신혼여행을 그리스 산토리니로 다녀왔거든요. 남편과 얘기 나누다가 신혼여행 때 생각이 나서 이곳에서 레시피도 보고 글도 읽으며 추억을 되살리고 있어요." 박씨는 조만간 일본 규슈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여행 가기 전에 요리 책을 읽고 갈 계획이다. "규슈 지방에는 우동이 유명하다는데 여기에 일본 요리책이 많더라고요. 집에서 정통 일본식 우동을 만들어 먹어보고 여행을 가서 또 먹어볼 생각이에요."
쭉 진열된 서가 한복판에는 각종 향신료가 전시된 공간, '인그리디언츠 하우스'도 있다. 190여종의 향신료가 마련된 이 공간에서는 접하기 힘든 향신료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서울 연남동에서 친구와 함께 들렀다는 김가현씨는 '가람마살라'라는 향신료를 발견하고 신기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요즘 인도 요리에 빠져서 대학로나 이태원의 인도 식당에 자주 가거든요. 인도 요리에 이 향신료가 많이 쓰인다는 얘기만 들었지 직접 냄새를 맡아보고 맛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곧바로 서가로 향한 김씨는 친구와 함께 인도 요리 레시피도 찾아봤다. "우리 이거 놀러 가서 한번 만들어 먹어보자"는 김씨의 말이 들렸다.
요리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즐기고 이해하며 나누는 문화생활이라는 인식은 쿠킹라이브러리 곳곳에 배어 있다. 김민규 셰프의 수업이 끝난 3층 키친에서는 다음 요리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앞서 진행한 요리가 전문 셰프에게서 지식과 기술을 전해 받는 수업이었다면 저녁에 진행될 요리는 '셀프 쿠킹', 말 그대로 참여자들이 알아서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다. 2층 서가에 전시된 ‘이달의 레시피’ 중 원하는 요리를 선택해 책을 보고 직접 요리를 해 먹은 다음 3층이나 4층의 식사 공간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방식이다.
이달의 레시피는 책 '하루 30분 요리가 된다'에 나오는 일식 고로케 정식, '셰프의 빨간 노트'에 적힌 삼겹살 콩피 또는 자유롭게 만들어보는 라자냐다. 쿠킹라이브러리 관계자는 "커플이나 가족 등 소규모 집단이 와서 직접 요리를 해 먹는 경우도 많지만 회사에서 단체로 찾아와 회식과 문화생활을 겸해 요리를 해 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1인당 2만원이면 요리 재료와 레시피가 모두 준비가 되니 식당에서 사 먹는 것과 가격 차이가 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함께 요리를 하면서 대화도 나누고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모임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3층 키친에는 널찍한 발코니가 딸려 있다. 발코니 한쪽에서 재배하는 각종 허브는 쿠킹라이브러리 내에서 쓰인다. 김민규 셰프의 수업을 들으며 직접 만든 스테이크와 라타투이, 토마토 타르트를 먹던 사람들은 한동안 허브 향에 취해 있었다.
"분명히 서울 한복판인데 허브 향에 색다른 음식까지, 여행을 온 것 같네요."
이들에게 직접 만든 모히토 음료를 따라주던 김민규 셰프도 말을 거들었다.
"셰프로서는 이처럼 사람들이 낯선 요리를 친숙하게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