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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예전에 일본제국주의에 관심이 많아서 이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를 카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논의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 글을 한번 올려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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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의 발전과 일본 내셔널리즘의 탄생: 강화도조약, 청일전쟁, 러일전쟁
-경제제국주의, 관제제국주의, 급진적 민족주의적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I. 들어가며
청일전쟁은 아편전쟁 이래 신음하고 있었던 동아시아의 중화질서, 즉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질서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았다. 그런데 이 전쟁은 근대국가체제를 동아시아에 완전히 이식함과 동시에 일본을 유럽근대국제체제에서 인정받는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게 만들었지 일본을 본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으로 격상시킨 것은 아니었다. 사실 무쓰 무네미쓰의 『건건록』에 기술되어 있듯이, 당시 일본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삼국간섭에 의해 승리의 과실을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으로 하여금 서구열강과 동등한 "지위"를 얻게 하였으며 이의 "내셔널리즘"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더불어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병합의 성공은 일본을 완전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발전은 이보다 더욱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발점은 1876년 '강화도 조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일본은 당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강요한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조선에 똑같이 강요하면서 양국 사이 불평등한 경제교류를 확립했다. 더불어 청일전쟁의 발발은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전개되었고, 최종적으로 러일전쟁은 정치가들의 매우 정교한 계산, 군부의 군사계획, 그리고 민간의 폭발적인 내셔널리즘에 의해 추동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완성시켰다.
이에 따라 본 글은 제국주의의 세 가지 모델 - 간접적 경제적 제국주의Der Indirekte Ökonomische Imperialismus, 관제제국주의Der Gouvernmentale Imperialismus, 급진적 민족주의적 제국주의Der Radikale Nazionalistische Imperialismus -를 강화도조약,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에 적용시켜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는 정부, 기업과 은행, 대중단체에 의해서 주도되면서 외교정책, 해외 투자와 무역, 여론 형성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면서 상호 협조체제이기도 하며, 때로는 갈등관계 속에서 제국주의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는 조선이었다. 일본의 정치가, 관료, 사상가, 경제인의 침탈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1910년 강제합병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국체(國體)를 말살시키고 민중을 억압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발전과 조선의 수난을 병행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II. 경제적 제국주의와 관제 제국주의, 그리고 일본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초기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책은 당시 대부분의 근대국가가 따르고 있던 '경제적 제국주의'의 유형을 따르고 있었다. 경제적 제국주의 이론은 가장 거시적인 형태의 제국주의 이론으로서 홉슨과 레닌에 의해 포괄적으로 연구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자체의 속성에 기반을 두는 이론으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외부 시장의 강제적 개척을 통해 해소하는 것을 주요골자로 한다. 식민지로부터 값싼 원료를 공급받으며 본국은 공업생산물을 식민지로 수출하는 행위양상에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식민지의 모든 자본, 노동, 토지를 본국에 종속시키는 형태의 제국주의이다. 19세기 열강들은 이와 같은 구조 하에서 서로 '시장' 또는 '권역'을 확보하려고 경쟁하였고, 이와 같은 경쟁이 국가간 갈등의 근본적 씨앗이 되었다.
근대일본의 모든 국가전략이 이러한 제국주의의 모델에 완전히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강화도조약을 시발점으로 지속된 對조선 불평등 무역과 이를 통한 초기 자본축적과 더불어 인구부양,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이 모델을 통해 잘 드러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근대국가체제의 작동논리에 의해 규정되지만,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해당 국가의 정치인, 관료들의 일관된 노력과 계산 및 조율을 통해 수립된다. 관료가 생각하는 "국익"(Raison D'Etat)의 개념에 따라 국가기관이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경제적 인센티브보다 때로 국가적 위신이나 지위 또는 영향력이 우선된다. 따라서 앞서 말한 경제적 제국주의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조일수호조규에서 러일전쟁에까지 이르는 일본의 관제제국주의 행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1. 조일수호조규
강화도조약, 또는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조선에서는 거류지를 중심으로 조일무역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무관세, 일본화폐의 무제한 통용을 보장받은 이 시기의 조일무역은 부등가 교환에 의한 약탈적 무역을 그 특징으로 한다. 당시 조선에 진출한 일본 거류지민은 몰락사족, 영세소상인, 빈농 등으로, 다시 말해 일본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몰락해 가는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일제 때 이민해온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을 개방시켜 놓았을 뿐, 체계적인 조선정책이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 진출에 주력하고 있던 일본의 모습은 다분히 "간접적 경제적 제국주의"의 모델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도를 보이게 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에 보이는 적극적인 조선내정개혁의 차원은 아니지만, 조선 내에 일본 세력을 점차 부식시켜 가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당시 간혹 조선과 종주관계에 있는 청국을 제거해야 한다는 대청개전론이 나오기도 했으나, 1880년대 전반까지는 조선개조-청일연대론이 우세했다.
앞서 언급된 '조선개조'의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한 것은 일본 최고의 계몽주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그는 자유와 민권을 얘기하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계몽주의의 입장에서였으며, 자유민권운동의 사상적, 이론적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정부의 이데올로그적인 위치의 인물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요컨대 세계를 문명과 비문명으로 구분하여 파악하는 사고에 의거하여 일본이 '문명표준'에 도달하고, 아시아에 대해 일본이 문명의 보급자 역할을 떠맡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유일하게 도양의 문명국인 일본이 맹주의 위치에 서서 조선과 청국의 문명화를 도움으로써 서양에 의한 아시아의 식민지화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약과 사상으로 뒷받침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책은 조선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비록 조일수호조규는 명시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언급하고 있었으나, 이는 청국과 조선의 전통적인 특별한 관계를 부정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조일수호조규의 폐해는 1882년 임오군란을 통해 나타났다. 임오군란은 쌀 지급이 계속 지체되고, 늦게나마 지급된 쌀조차 불량인 것이 드러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심각한 미곡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는 조일수호조규의 불평등 무역으로 인해미곡이 심각할 정도로 유출된 것에 기인한다. 병사들 또한 이를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관이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우연은 아니었다.
2. 청일전쟁
청일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군사적 요인을 강조하는 견해로 1890년대의 국제정세 및 일본의 국내정치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청일전쟁의 원인을 찾는 견해이다. 이는 청일전쟁을 특정한 정치현실에서 비롯된 단기적인 결정으로 보고 견해이다. 1890년대의 일본은 경제적으로 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경제공황은 도시, 농촌을 모두 포함, 빈민을 양산해 큰 사회 문제가 되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해외진출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일본은 조약개정 문제로 정당간의 대립이 치열하였다. 이러한 여론의 압력에서 타개책으로 택해진 것이 전쟁이라는 설명이다.
둘째로는 청일전쟁을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의 일관된 대외팽창의 경향으로 설명하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청국과의 전쟁은 일본 역사상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으며, 1894년의 복잡한 국내/국제정치적 상황이 개전의 좋은 구실이 있었기 때문에 시점이 그렇게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본이 1880년대 초부터 군비증강을 서둘렀다는 것과 1890년의 일본 의회에서 내각 총리의 연설은 위 견해의 논거로서 충분하다고 보인다. 당시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주권선 수호와 더불어 ‘이익선’ 수호에 대해 연설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일본이 주권적 영토를 넘어 이권이 걸린 지역을 적극 수호하겠다는 의지, 바꿔 말하면 한반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이미 표명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상술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견해는 모두 관제제국주의의 모델에 의한 정치과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거시적인 경제논리보다 관료들의 필요(necessita)에 의해 특정 행위가 결정됐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890년 의해가 개설된 이래, 일본 국내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소위 연약외교를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져, 정부 불신임안을 가결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토 정부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때 마침 조선에서의 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청국군이 출병한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조선에 출병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각계로부터 연약외교라고 비판을 받기는 했어도 이토 정부는 이전부터 對청전쟁에 대비하여 군비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군부는 이토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1893년 4월 '출사준비품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5월에는 전시대본영조례를 제정하는 한편 해군군령부를 독립시켰다. 또한 카와카미 소토쿠 참모차장은 스스로 조선과 청국을 여행하면서 군사탐정망을 조직하는 등 청일전쟁에 대비한 준비를 구체적인 세목에까지 진전시키고 있었다.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출병한 가운데, 6월 10일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성립됨으로써 일단 사태의 진정을 보았다. 이로써 더 이상 주둔의 구실이 없어지게 되었으나, 일본으로서는 국내에서 뒤끓고 있는 대외강경론을 고려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철수하는 것"은 정부비판을 배가시킬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주둔의 구실을 새로이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일본이 고안한 것이 청일 공동으로 조선내정을 개혁하자는 제의였다. 그러나 청국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일본 단독으로 수행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이 개전의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음은 무쓰 무네미쓰 외상이 『건건록』에서 밝히고 있는 바이다.
한편 경제적 제국주의의 측면에서도 청일전쟁을 분석할 수 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이권침탈은 본격화되고, 무역면에서도 대폭적인 신장을 보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청국 상인과의 무역이 중지된 틈을 타 일본상인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사직하는 이 시기의 한일무역은 '미면(米綿)교환체제'를 특징으로 한다. 일본은 이제 종래 영국산 면포를 중계무역 하던 것에서 점차 자국산 면포를 조선에 유입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 내의 산업혁명 진행과정과 맞물리는 현상이었다. 이 시기 일본은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수입의 60~70%, 수출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미 1884년 8월에 맺은 한일잠정합동조약에 의거, 이권획득의 근거를 마련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열강들에게 분할되는 이권을 최혜국 조항에 의해 획득하거나 위협으로써 확보해 나갔다. 일본은 선 채굴강행 후 특허권 요구의 방식으로 1900년 직산광산 채굴권을 획득하였으며, 1898년에는 미국이 따냈던 경인철도 부설권을 매도받은 위에 경부철도 부설권도 획득하였다. 일본의 철도 이권획득은 당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근간이 되었던 철도를 통한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강해해 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청일전쟁은 일본이 어떻게 국내적으로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논리를 내재화시키는는지 당시 일본이 시행한 국내적 정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일본정부는 자국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아직 저급한 수준의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싼 값의 곡물이 필요했고 이는 조선을 확보해야만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팽창은 자국인민의 착취와 더불어 타국의 침탈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한다. 또한 일본은 전쟁에 대한 열기를 민중에게 의도적으로 불어넣고, 가짜 전쟁영웅을 만드는 등, 마치 2차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체제 하의 소련의 전제주의를 연상케 한다. 한편 확대되어가는 일본의 민주주의(현대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와는 구별된다)는 제국적 열기에 가속도를 붙여 사회의 일원화 그리고 군국주의화에 기여를 하였다.
3. 러일전쟁
불평등조약으로 특징지워진 제국주의 체제 아래 동아시아 세계질서는 기본적으로 청국에 대한 이권쟁탈전으로 이해되었다. 당시 제국주의의 선봉에 섰던 국가는 영국과 러시아였다. 이 둘의 대립은 동아시아에서도 목격될 수 있었다. 일례로 영국에 의한 거문도 점령은 영국과 러시아의 세계적 갈등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자국에 가해진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노력을 총력을 기울인 동시에 조선에 대해 자국의 배타적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 청국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러일전쟁은 영국과 러시아의 세계적 대립구도 안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러일전쟁으로 가는 데 있어 주목해야 할 것은 영일동맹이다. Ian Nish가 영일동맹을 두고 The Diplomacy of Two Island Empires라고 표현한 데에서 볼 수 있듯이 섬나라 제국으로서의 양국의 만남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 동맹 관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해상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섬나라로서 해상력의 확보는 자국의 안보를 수호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이다. 따라서 영일 협력의 전개와 갈등 양상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점도 해상력이다.
영일동맹에서 영국이 추구하고자 했던 바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국이 부담하고 있었던 안보적 부담을 일본에 전가하고 유럽에서의 해군 확장 경쟁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영국은 이미 독일의 맹추격을 받고 있던 실정이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자신의 Weltpolitik를 영국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 세계 도처에서 영국을 자극하고 있었다. 더불어 영국의 자랑이었던 Two Power Standard(해군 2위, 3위 국가보다 더 우월한 해군력을 보유하는 것)마저 깨지고 있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해군을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웠고 이의 부담을 일본의 협력을 통해 덜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의 지역적 경쟁에서 영국의 후원을 입으려 했다. 영국이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과 현상 유지를 위해 영일동맹을 추구했던 반면 일본의 경우 현상 변경을 위한 실질적인 동력 혹은 러시아를 압박할 수 있는 외교적 수단을 추구했던 것이다. 하야시의 『비밀회고록』과 무쓰 무네미쓰의 『건건록』에서는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전개된 삼국간섭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은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중국과 전쟁을 하고 이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전리품을 획득하지 못하였다. 이는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유아독존식의 자강을 하고 있었고, 타국의 이해관계를 상대적으로 경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야시는 타국의 후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그 파트너로서 영국을 지목하였다.
그 이유는 영국과 일본은 공동의 적을 설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대립구도로 보았을 때 영국의 natural enemy는 러시아였고, 일본 또한 삼국간섭의 책임이 러시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동맹의 체결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영국과 일본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따라서 협상과정에서 여러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 영국과 일본은 모두 러시아와 어느 정도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영일동맹이 처음부터 러시아를 향한 공세적 동맹이라고 진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러시아의 지속된 팽창과 일본-러시아의 양자 협상의 실패는 사태를 점점 위험한 사태까지 몰고 갔다.
한편 러일전쟁은 복잡하고 역동적인 국제관계의 추이의 일환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최문형은 『국제관계로 본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병합』이라는 책에서 러일전쟁을 매우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있으며 이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국제협상에 주목한다.
이에 따르면 열강의 동아시아 분할 경쟁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영국이 웨이하이웨이를 획득하면서 시작되었다. 영국이 웨이하이웨이를 획득하자 다른 열강들 또한 조차지를 요구하며 본격적인 중국 분할 경쟁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은 미국의 마닐라 만 침공 시 적대적 반응을 보인 독일과는 달리 미국을 지원했는데 이는 러시아 견제라는 공동의 이해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미국은 적극적인 중국 문호개방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상업적 이해를 넘어 상업상의 기회를 균등히 누리면서 유럽 각국에 의해 이미 설정된 세력 범위 내에서 자국의 활동 영역을 찾아 러시아를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열강은 일본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조선의 가치를 만주 방어를 위한 Buffer-Zone으로밖에 여기지 않아 굳이 이 지역을 두고 일본과 충돌을 빚지 않으려 하였다. 러일협상에서 제시되었던 만한교환론은 이러한 러시아의 바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면서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한 채 한국을 중립화 시키려 했고, 일본 또한 만한불가분일체론을 내세워 만주 지역에도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즉, 초기 팽창정책에서 대상의 차이로 발생했던 간극이 매워지면서 본격적인 양국의 갈등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후 전개되었던 열강들의 관계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이었다. 그들은 동아시아에서 어느 한 쪽의 결정적인 패배도 원치 않았으며 다만 양 국이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해 서로를 견제하며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동맹국인 영국의 애매모호한 태도도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만주 점령정책이 심화됨에 따라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지원하여 러시아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전쟁에 휘말려들기를 경계했다. 이렇게 미국이 갑작스럽게 일본을 지원하며 대러 강경책을 폈던 데에는 비단 러시아 뿐 아니라 독일에 대한 견제가 그 배경이 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독일 해군을 견제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고 거기에 러시아가 만주를 차지하면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이 장애를 겪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러일전쟁은 복잡한 국제관계의 현실 속에서 일본의 관료들이 전략적으로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하고, "지위"를 상승시키는 데에 있었다. 케네스 파일이 지적하듯이 일본은 전통적으로 "위계적 질서"의 전통과 "지위와 위신"에 대한 편집증적인 관념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어떻게든 새로운 세계질서 하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두 차례의 거대한 전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자존감을 되찾게 하였으며, 군사적 승리로 확보할 수 있는 위신을 다시 한 번 공고화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히 독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냈으나 러시아를 불러왔다. 그런데 러일전쟁의 승리는 이 러시아마저도 몰아내었다. 따라서 일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리한 상황에서 조선정부에 대한 강압적 요구를 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 통해 조선을 보호령화하면서 식민지지배를 위한 다방면의 기초작업을 수행해 갔다. 우선 재정고문 메카타 타네타로오의 주도하에 국유지와 왕실재정을 정비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수세 확보를 위해 징세제도를 개편해갔다. 또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각종 산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특히 미작, 면업, 견업의 품종개량 등이 집중적으로 추구되는데, 이는 일본의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원료공급지로서 한국의 농업을 일본의 그것에 예속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외에도 제일은행을 국고은행으로 삼아 일화의 유통을 꾀하는 등, 한국의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재편이 추진되었다. 일본은 이렇게 조선의 재정권을 박탈하고 외교권마저 박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히 재정권 관련 문제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이는 영국이 이집트에 대해 행한 것과 굉장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결국 거시적인 차원의 자본주의 근대국가 체제 하에서 제국주의의 행태 양상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III. 급진적 민족주의적 제국주의, 열광, 그리고 파시즘
본 글은 앞서 거시적이며 보편적인 제국주의의 양상을 체제적인 속성과 관료들의 외교행위를 통해 알아보았다. 이제부터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와 일본간의 관계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제국주의와 함께 발전하는 내셔널리즘은 기본적으로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면서 자신을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타자를 계몽시키거나 파괴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서구열강의 White Man's Burden의 논리와 유사하게도 일본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무쓰 무네미쓰와 같은 사상가 및 정치인들을 통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을 개화(開化)시켜야 한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내비쳤다. 더불어 일본민족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다스리는 신성한 민족이라는 신화적인 우월의식 또한 발전시켰다.
이와 같은 일본의 민족주의적 제국주의 인식은 특히 對조선/중국인식에서 잘 드러난다. 후쿠자와는 야만 상태에 있는 민족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권역에 포섭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시사신보에 유명한 탈아론을 발표하고 "지나,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특별히 대우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서양인이 이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처분해야 한다"고 하며 침략적인 사고를 드러냈다. 한편 그에게 침략은 정의의 발현이이었다. 그는 청일전쟁을 "문명 대 야만의 전쟁"이라고 규정하며 스스로 1만엔의 거액을 헌금했다. 더불어 시가 시게타카라는 정치가, 저널리스트, 교육가로 넓게 활동한 시가 시게타카는 한민족을 '여성적 국민'이라고 하며 그들은 근본적으로 게으르고 부도덕한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다분히 남성성과 정복을 기초로하는 '근대성'의 논리를 수용한 근대 제국주의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의 속성은 경제적 이익에 주력하는 보편적 제국주의와는 달리 특수한 면모가 있다. 보통 제국주의의 대명사인 영국과는 달리 일본은 굉장히 과격한 내셔널리즘에 의해 추동되는 파시즘으로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는 독일의 경우와 비슷한 현상인데, 일본과 독일은 모두 국민국가체제에 후발주자로 편입되었고, 두 국가 모두 전쟁을 통해 위신을 획득할 수밖에 없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양국 모두 뒤늦게 봉건적 분열 상태에서 벗어나 민족 또는 국민을 새로 '가공'하고 이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곧 전쟁이었다.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the State makes War and War makes the State)"라는 찰스 틸리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일본은 여기에 매우 부합한다.
1. 국민의 형성, 그리고 천황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국민"(Nation)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메이지 정치가들은 원래 수많은 영지와 영주들로 나뉘어있던 일본의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매우 고심했다. 이를 위해서 일본은 천황제를 건설하고 관료체제를 공고화시켰다. 이와 관련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1889년 헌법을 제정하면서 한 말은 매우 의미 있다.
"우리나라(일본)의 초석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제이다. 일본에서는(유럽과 달리) 종교가 입헌정부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없다. 비록 한때 불교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계급을 엮는 매개가 되었지만, 이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그리고 신토(神道)가 우리 조상들의 전통에 기반을 둔다고 하지만, 이 또한 국가의 중심이 되기에는 미약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헌법의 초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제도는 황실에 있다."
이와 함께 보편적 교육제도 또한 '국민'의 형성에 매우 중요하게 일조했다. 1890년 헌법이 제정된 직후 정부는 교육에 관한 엄격한 규정을 내렸다. 교육이 애국심을 주입하고 고취시키는 일차적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에 따라 전 국민이 하나의 거대한 관료와 군사 대학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더불어 국가의 전 관료체계가 국민의식을 고양하고 사회의 모든 조직을 국가의 목적에 알맞게 조정하였다. 즉, 관료가 강화되면서 민간의 자원을 전부 총괄할 수 있게 되고, 반대로 민간은 내셔널리즘에 힘입어 더욱 폭발적인 호전성을 보이게 되며 때로는 관료의 계산을 넘어 행동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체제는 전체주의를 탄생시키기에 알맞은 밑거름이 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나치즘)은 인종, 국가, 민족 등에 기초한 긴밀하게 조직된 정상적이고 유연하게 기능하는 근대적 관료주의적 "체제"이다. 이러한 독재체제 하에서 일반국민들은 아무런 비판과 생각 없이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부속품에 불과하다.
이렇듯 메이지 시대에 형성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에 대한 국민의 믿음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은 거대한 현상이었다. '천황'의 기원이 15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할지라도, 메이지만큼 천황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은 메이지 천황 개인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러일전쟁에 의해 배가된 '분위기'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러일전쟁이 부여한 천황과 국가에 대한 환상은 일본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면서, 후일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부작용을 잉태하였다.
2. 러일전쟁과 일본 사회
전체주의, 파시즘과 같은 체제가 발전하려면 대중이 정치과정에 동원되고 참여하는 어느 정도의 민주정치의 발달이 있어야 한다. 대중민주주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성인남자의 보통선거권 도입, 의무교육과 징병제의 실시, 노동운동의 성장과 사회보장 제도의 도입, 그리고 광범위한 언론의 존재가 필요하다. 일본은 이러한 조건을 청일전쟁 때 어느 정도 미약하게 갖추고 있었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상당부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러일전쟁 이후 일본 사회가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정계와 언론, 문학, 집단활동, 교육부문간 적극적인 협조체제가 형성되면서 가능했다. 파시즘은 어떤 병리적인 현상이라기보다 특정 조건들이 구비되면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러일전쟁은 비서구국가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 정면을 맞부딪혀 승리한 첫 사례로서 전 세계적으로 파급을 미쳤다. 많은 비서구인들이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며 우러러보았고, 한편 러시아는 패전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이 혁명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국내차원에서 볼 때, 일본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은, 국민의식 및 자아의식의 고양과 더불어 정치와 사회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일본 국내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기대하고 있었던 배상금은 만족스럽지 않았고, 사할린 땅도 반쪽밖에 획득하지 못했다는 불만이 있었다. 이에 정부에 대한 일본인의 불신은 쌓여만 가고, 이후 하비야 폭동과 같은 반강화운동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청일전쟁 개전 이후 "일등국"을 향한 집념에 사로잡혀 증세와 징병과 같은 힘겨운 복종을 강요당해 온 민중들에게 강화조약의 내용은 굴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불안과 허탈감이 일시에 폭발한 하비야폭동을 통해 당시 일반인들이 얼마나 배타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제국의 관념에 빠져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전쟁 종료 후 군인들의 '개선대행진'을 열광적으로 축하했고, 국가를 위해 죽어간 병사들의 심정을 공유하는 국민으로 배양되었다. 관념에 지나지 않던 국가가 현실세계에 재현되어, 비록 환상일지라도 국민은 국가라는 집단 안에 존재하는 자신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국민은 제국주의적 정부를 오히려 소극적이라고 규탄하기도 한다.
한편 이와 같은 '국민의식'은 언론과 문인들에 의해 더욱 고취되고 호전적이게 되었다. 이 시기 저널리즘은 주전론에 입각해 이를 홍보하고 이에 반대되는 논조의 글을 검열하였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서도 '각성된 일본인'을 강조하는 새로운 '일본인론'을 주창하며 서구에 종속되지 않은 "대일본제국"을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러일전쟁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 볼 수 있는 관민협조도 인상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년단체들의 재편도 주목할 만하다. 총력전으로 치러진 러일전쟁을 통해 청년단체는 후방지원활동, 즉 총후활동을 통해 국정 운영자에게 새롭게 인식되었다. 정부는 총후활동을 통해서 보여준 청년과 청년단체의 활약을 전쟁기간중의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국정협력체제로 구축하려고 하였다. 또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여전히 주변정세의 불안과 막대한 전쟁비용, 전후처리비용 때문에 군비의 강화와 긴축 재정을 다시금 중심정책으로 설정하였다. 전쟁 이후에도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내무성은 국민의 자발적인 협조를 유도하기 위하여 지방개량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년단체의 일상적인 국정협력체제는 지방개량운동을 통하여 전개되었으며 청년단체는 그 과정에서 지방의 긴축재정을 보완하는 사업중심단체로 활용되었다. 또한 내무성은 미래의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청년에 대한 교육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육군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일본군인의 우수성에서 찾았고, 이는 한편 군대교육의 강화, 나아가 예비군인으로서 청년을 재생산하였다. 이에 따라 육군은 재향군인회를 창설하고, 이를 사회에 안착시키기 위하여 청년단체를 활용하였다. 그 결과, 청년단체->군대->재향군인화라는 연령에 따른 계열화는 일본 사회를 군국주의화하는 데 기여했다.
IV. 결론
앞서 살펴보았듯이 근대국가체제가 동아시아를 본격적으로 침투한 이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 새로운 체제의 행위자로 발전하면서 당시의 논리를 내재화시켰다. 근대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산업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은 당시 모든 열강들에게 '제국주의' 정책을 수립하는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 또한 그렇게 하였다. 이와 같은 구조적 배경 아래 일본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소위 국제정치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현실주의적' 정책을 펼치면서 나름대로의 생존, 그리고 팽창을 도모했다. 홉슨이나 레닌이 말하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또는 경제적 제국주의가 구조적 바탕이 되고, 한편 일본이 교묘한 계산을 이용해 팽창할 수 있었던 정치적 역량이 관제제국주의의 부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일본은 체제의 후발주자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무력행사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적 경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전쟁행위에 적합한 국가-사회체제를 수립하도록 하였다. 이는 일본의 '인민'을 천황을 중심으로 '국민화'시키는 작업을 수반하였으며, 사회의 모든 조직을 총력전 체제에 알맞게 재편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과정에서 파생된 이데올로기들은 일본이라는 국가를 신성한 국체로 신격화시키는 데 주력하며 다분히 낭만적인 속성을 띠고 있었다.
팽창을 요구하는 제국주의의 구조, 힘이 모든 사안을 좌지우하는 현실주의의 전통, 그리고 천황제와 결부된 내셔널리스트 이데올로기가 삼위일체처럼 결합되어, 자유주의적 전통이 일본에 자생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막았다. 비록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 체제로 넘어가지만, 이 안에서도 앞서 언급된 삼위일체는 꾸준히 작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언제나 본격적인 파시즘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요컨대 근대국가 수립 및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제국주의, 관제제국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적 제국주의가 결합되면서 나타나는 전체주의적 속성은 일본의 근본적이고 전통적인 특이성에 기인하기보다는 근대성(modernity)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의해 심화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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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수전공 수업관계로, 오구마 에이지의 [일본 단일민족 신화의 기원]이란 책을 본 적 있는데, 이 책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 이후 한동안은 일본도 서구열강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모든 일본 국민이 천황가의 후손이라는 국체론이 강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대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대외팽창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기 위해 일본 민족이 주변 여러민족들로부터 혼혈이 이루어진 민족이란 주장이 대두되었다더군요.. 일본인은 여러 민족의 혼혈이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지니고 있으며, 더 나아가 세계 곳곳의 조상의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논리로요..
이러한 일본인 혼혈설이 나중에 내선일체론과 연결되어서 제국주의 논리를 강화시켰다고 합니다. 이 책 중간에 한 일본 지식인이 내뱉었던 문장이 제시되었는데, "일본인의 조상은 세계 곳곳에 있으며 이 조상들의 땅을 회복할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환빠식 논리였지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본토와 조선을 분리시켰으며 분명히 식민지로 간주했습니다만..(같은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과 조선이 받았던 대우는 천지차이였다더군요..)
대만이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조선이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대만이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더군요..;; 나름 헌법제정도 가능했고..
역시 후지무라 교수의 청일전쟁을 참고하셨군요. 청일전쟁 서술부분에서 뉘앙스가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꽤 좋은 책이죠. 가볍지만 무거운...^^
일본의 근대에대해 잘알았네요~ 감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