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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정물
반영호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강둑에 서서 샛강을 바라보았다. 샛강은 강이라 부르기에는 좁고 개울이라기에는 넓은 듯한 그런 강이다. 갈밭을 헤치고 스며 나온 안개가 수면을 덮고 내 마음까지 뿌옇게 덮는다. 머무는 것은 잠시 뿐. 물은 어디서 흘러왔다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표류하던 나뭇잎을 따라 고였음에 넘쳐 흘러가야만 했던 당신의 초상(肖像)은, 물새의 혼처럼 한번도 울어 보지 못한 채 날아가고 없다. 바람에 밀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흘러간 구름아, 지금은 어디쯤에서 얼마나 깊어져 흐르고 있는지. 여울을 마다 않고 다가왔다가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옹이진 상처만 안고 떠나간 사람.
나는 가만히 물 속을 들여다본다. 어둡고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천천히 수면 위에 솟아올라 해맑은 모습으로 미소 짓고, 물결이 일면 서서히 꿈결로 사라지는 얼굴. 바람 불어와 갈대 숲을 흔들면 아직도 잠들지 못한 영혼이 귀곡성을 낸다. 정녕 사랑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앓는 고통. 정녕 사랑은 그녀와 나 둘만 나눌 수 있는 행복일까? 한 무리의 오리 떼가 쓸쓸한 가을 하늘을 수놓는다.
나는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난날 그녀와의 만남에서 행복했던 환상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여성 대회를 앞두고 그녀는 행사 준비에 분주했다. 출근 한지 불과 몇 개월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처음 개최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헷갈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민 끝에 사회복지 담당인 내게 자문을 구하기에 이르렀단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 참모 회의에서 여성 대회가 원만히 치러지도록 협조하라는 군수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고, 나 또한 담당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터라 조만간 협회를 방문하리라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여성 회관 2층에 있는 여성단체협의회 사무실을 들어서자 그녀는 반색을 하며 맞아 주었다.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문서철을 내민다.
“성격 한번 급하시군요. 숨이라도 좀 돌리고 봅시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 한 잔 가져올 게요.”
사무실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서류며 집기들이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었고 책상과 소파에는 먼지 하나 없이 반들반들했다. 맑은 아침 햇살이 창을 뚫고 사무실 절반쯤까지 침투하여 바깥처럼 밝았다. 금방 꽂았는지 싱싱한 후리지아의 짙은 향기가 사무실을 한껏 상큼하게 하고 있다. 금남의 집은 아니나 여성 회관은 대체로 여성만을 상대로 하는 곳이고 근무하는 사람들 또한 여성들뿐인데다, 분위기마저 고요하니 사뭇 여성스럽고 아늑하다.
정갈하게 차려 내 온 연꽃 차를 마시며 서류를 검토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이 자꾸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백옥같이 흰 살결이다. 그 나이의 여인들은 대개 커트이거나 파마머리가 흔한데 치렁치렁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벌받는 아이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차를 마시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빈 잔을 그득히 채우곤 한다.
계획서에는 일련의 행사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초대장, 현수막, 팜플렛, 전단 등의 문안까지 꼼꼼하게 세워져 있어서 이 정도면 완벽하다 싶도록 기획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다 잘됐습니다.”하고 일어서기가 뭣해서 지적할 것을 곰곰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이번 행사를 신문에 크게 홍보를 해야 한다고 저희 회장님이 말씀하셨거든 요. 그런데 그쪽으론 문외한이라서 아직 못 알아봤어요. 그리고 계획서도 한 부를 드려야 하지만 아직 카피를 못했고요. 카피가 되는대로 군청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신문을 통한 홍보 관계라면 마침 제가 아는 기자 한 분이 있으니 도움을 드리도록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계획서는 번잡스럽게 가지고 오지 말고 제 메일로 보내 주시면 돼요.”
메일 아이디를 부르는 대로 메모를 한 그녀는 뭔가 더 들을 게 있다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나는 금세 신문 기사 때문이란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즉시 전화를 걸어 김 기자에게 부탁하고 나니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군청 가는 도중에 신문사가 있으므로, 어차피 가는 길이라서 함께 가기로 하고 여성 회관을 나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5일장이 서는 날이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 밀려 예전보다 인기는 떨어졌고, 모든 게 싸구려로 인식되다 보니 상품의 매기는 없었으나 시장은 여전히 시골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고급화보다는 다양성이라서 당연히 질보다 양이다.
잡화, 의류, 채소전을 지나 어물전에 오니 생선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방금 잡아와 펄펄뛰는 바닷가 포구의 활어 같지는 않아도 얼음에 잠겨 있는 생선치고는 꽤 싱싱해 보였다.
-토종 순대. 국밥. 소주. 막걸리-
장날에만 여는 순대 국밥집이다. 허름한 천으로 둘러친 포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술렁이고 있었다. 기성 상설 식당에 비해 반값으로도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다. 그녀가 나를 힐끗 올려다봤다. ‘이런 음식 좋아하느냐’는 눈치다.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직 점심은 이른 시간이지만, 좋으시다면….”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은 뒤, 순대 한 접시와 막걸리를 시켰다. 우리는 음식이 나올 동안 난전의 상인들을 구경했다.
“골라. 골라. 빤쓰 골라. 브라자 골라. 천원, 천원. 무조건 천원.”
한 남자가 트레이닝복 차림 위에다 우스꽝스럽게 브레지어에 팬티를 걸치고서 스스로 흥에 겨워 손뼉을 치며 목청을 돋우어 장꾼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보기에 민망한지 그녀는 딴전을 보고 있었다.
주문한 것이 나왔다. 본래 막걸리를 좋아하는 나는 근무 중이라는 것도 잊고 한 대접을 마셨고, 그녀도 찔끔찔끔 나눠 반 대접을 마셨다.
국밥 집을 나선 우리는 장터를 지나 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서 혹은 정자에서 삼삼오오 모여, 아직도 물러갈 줄 모르고 치근거리는 초가을 한 낮의 따가운 햇살을 피하여 졸음을 달래거나 장기를 두고 있는 이들은 거의 노인들이고, 간혹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즐기고 있다. 올 봄에 새로 세워진 야외 음악당 광장에서는 롤러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어린이들이 꽥꽥 소리를 질러 대고 있다. 가만히 들어보자니 욕을 빼고 나면 대화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욕설 투성이다.
“우리 아이들도 저럴 테지요?”
“애들이니까.”
공원 옆으로 아담한 연못이 있고 연못으로 둘러싸인 섬 가운데는 목조로 된 팔각정자가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다. ‘경호정’이다. 그녀와 나는 경호정 안으로 들어섰다. 산뜻하게 도색된 단청이 새삼 절 안으로 들어선 것 같은 기분과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50~60㎝는 실히 넘을 듯한 비단잉어가 물 속을 천천히 유영하는가 하면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수면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녀가 조약돌을 주워 던지자 물고기들이 쪼르르 몰려들었다.
“오늘 초면에 너무 오랜 시간 빼앗아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아뇨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주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공원 주위를 배회하다가 신문사 앞에 이르렀고 그녀와는 신문사 앞에서 헤어졌다.
다음날 그녀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여성대회 행사 계획서는 첨부 파일로 보냅니다.’라고 되어 있고, 그 밑으로 색다른 말이 적혀 있었다.
‘PS. 시험적으로 보내는 메시지’
‘답답할 때 속상할 때, 그냥 떠들고 싶을 때, 편지를 보내도 되나요? 그래도 된다면 멜 주소를 기억하겠습니다.’
이 한 통의 편지가 진양조에서 잦은 장단이었다가 시나브로 회오리바람이 일듯이, 훗날 휘모리가 되었다.
솔직히 그 메일을 읽는 순간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채팅을 통하여 쉽게 만나 불륜의 관계로 이어지고 가정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 나는 어떻게 답장을 쓸 것인가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모처럼 만에 고민다운 고민을 해야만 했다.
막연하지만 그녀는 분명 내성적인 조용한 성격을 지닌 듯 했다. 그가 하는 일이 여성 운동이긴 하지만 직업에 비해 활동이 소극적이며 능동적이지 못했다. 친구도 별로 없고 이웃과도 친근하게 지내지 않는 모양이다. 평소 생활 한복을 즐겨 입는 것으로 보아 무척 보수적임을 직감할 수 있을뿐더러, 어쩌면 몸매 쪽에 자신이 없을 거란 생각을 갖게 하기도 했다. 이는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그녀의 언어나 행동, 옷차림에서 감지해 낸 나의 그녀에 대한 인상이다.
‘보낸 행사 계획서 잘 받아 보았습니다. 추신과 함께…’
누구나 새해를 앞두고 새로운 각오를 한 두 가지씩은 하게 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매년 되풀이되면서도 지켜지지 않던 담배를 끊겠다는 일, 그리고 원시인에서 탈출해 보겠다는 일이었다. 남들이 나를 원시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첫째 운전면허가 없는 것이고, 둘째 핸드폰이 없는 것, 셋째로 컴맹이라는 것이었다. 현대인에게 필수라는 이 세 가지를 갖추지 못했으니 문명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외에도 두 세 사람만 모이면 벌인다는 고스톱, 당구나 테니스, 볼링, 그리고 바둑 등 현대인이 즐기는 오락을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즐기는 흥미 본위의 자질구레한 잡기에 능하지 못하다. 취미를 가져 보려고 노력은 해도 내겐 그쪽 방향으로 아예 기질 자체가 없는지 곧 싫증이 났다.
아무튼 나의 새해 각오는 담배를 끊는 것과 원시인 탈출이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10개월가량이나 담배를 끊었고, 컴퓨터도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워드를 치게 됐으며 제법 인터넷 사이트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닐 줄도 안다. 휴대폰을 구입하면서 문자를 보내고, 전화번호를 입력하거나 간단한 메모를 저장하는 것도 배웠다. 면허증을 따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뿐이었다. 군대에서 3년간 운전 경험이 있어 별 무리 없이 면허증을 취득하였고 허름한 중고 지프차를 구입해 굴리고 다닌다. 이를 해결하고 났으니 올해의 목표는 모두 이룬 셈이다.
컴맹이었던 내가 우연히 컴퓨터에 심취하여 워드는 물론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볼 수 있게 됨으로서 그녀와의 접근을 가능케 했다. 처음 하루에 한 번 정도 업무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안부를 묻는 메일이 오갔으며, 어느 날부터인지 하루에 두 번 세 번으로 횟수가 늘어갔고, 편지의 내용 또한 일반적 안부에서 개인의 일상이며 직장과 가정의 잡다한 얘기까지 오가게 되었다.
‘오늘은 토요일. 모두들 나가고 혼자 있는 여유로운 아침. 나도 모르게 멜을 열고 그쪽을 향합니다. 혹시나 하고 열어 보니 답장은 없고, 보낸 편지도 아직 읽지 않았네요. 바쁘실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번에 유치환 선생님이 이영도 여사께 쓴 편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열 번을 찾아가 거절당해도 평생 당신을 찾아갈 것이라는」멜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과분한데 언제쯤 만날 수 있게 될는지요. 사실은 여성 대회와 신문사 건으로 꼭 만나 상의할 일도 있고 해서요.’
첫 메일을 주고받은 후 보름 정도 지난날 만나자는 제의가 온 것이다. 이제 서먹서먹하던 마음 따위는 언제 그랬었나 싶었다. 하긴 하루에 평균 5통을 받았다면 75통이나 받은 셈이고, 나 또한 보내고 받는 형식이어서 75통은 보냈을 테니, 오간 편지가 도합 150여 통은 실히 될 것이다. 나는 쾌히 응낙의 편지를 썼다.
‘왜 아니겠습니까. 행사도 자꾸 가까워 오는데 바쁜 중 말문을 못 열었을 뿐, 언제라도 좋습니다. 그리고 어느 신문사인지요?’
답장이 금세 왔다.
‘소개해 주셨던 신문사인데 광고를 내 달라는군요.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해 볼 게요. 만나는 건 여성대회 행사 끝난 후가 어떨까요. 모든 일정이 오후 5시에 마무리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장소는 그쪽이 정하시고요.’
그러고 보니 여성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편지를 접하고 난 뒤의 가슴은 벅차게 설레었다. 기쁨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편지함을 다시 열었다. 아이디를 치는 손끝이 사뭇 떨렸다. 혹시나 잘못 본 것은 아닐지. 또는 새로운 편지로 긴급한 어떤 사정으로 인해 약속을 취소하지나 않았는지. 괜한 걱정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새로운 편지가 한 통 배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참.’
제목부터가 궁금증을 유발케 한다.
‘그날 애 아빠는 아이들을 데리고 용인 에버랜드를 가요. 오는 길에 시댁을 들렸다 온다고, 밤늦게나 귀가한다 했어요. 그래서 저는 저녁 시간이 많아요. 그쪽 사정은 어떠신지…’
숨을 길게 쉬었다.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이 그녀의 가족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들도 아이들이거니와 남편이 심히 걱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가정이란 테두리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지켜져야 할, 아내며 어머니의 역할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보면, 우리가 만나는 시간에 가족이 부재중이라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남편과 아들 딸 남매다. 그녀가 소개하는 그녀의 가정 형편은 대강,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남편은 약대를 나와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원으로 결혼 후 줄곧 10여 년간을 개발 팀에 재직 중이란다. 낮에는 회사에 나가고 밤에는 대학원에 나가 공부하는 전형적인 주경야독 학구파라 했다. 멀리 고향을 떠나 직장 생활만 하다 보니 친구도 별로 없는데다가 소심하여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이따금 직장 동료 몇몇과 좋아하는 술을 마시는 게 고작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넓지만 좁고 깊이 있게 살고 있는 평범한 남편이란다. 큰아이는 초등학교를 갓 입학하였고 작은아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단다.
맞벌이 부부 라지만 불구의 몸으로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고 있는 형의 생활비까지 부담해야 하고,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교육비는 그리 들어가지 않으나 남편의 대학원 뒷바라지가 만만치 않으니 가계가 빠듯할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문사 측과 얘기가 잘 안 되는군요. 아시다시피 행사비가 빠듯한데 요구하는 광고료가 만만치 않아요.”
“얼마나 되는데요?”
“행사비가 적다는 걸 잘 아시지만, 자그마치 예산의 20퍼센트나 되는 걸요.”
“그래요? 그럼 제가 김 기자를 만나 보겠습니다.”
지역 신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광고다. 전 부수를 유가로 배부한다면 수지맞는 사업이겠지만 구독료를 내는 독자는 10퍼센트에 불과한 실정이고 보면 이번 여성 대회와 같은 빅 행사야말로 광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셈이다. 김 기자에게 전화를 하니 귀찮다는 듯 상관하지 말란다. 내심 내라도 대신 광고비를 내주고 싶어, 만나서 얘기하자고 해도 한마디로 거절이다. 난감했다.
여성 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우리가 만나는 날이기도 했다. 밤새 부푼 가슴은 쉬이 가라앉을 줄 몰랐다.
‘밤새 앓았습니다. 수천 수만의 단어가 내 가슴에 와 부서졌습니다. 마음을 싹둑 자르고 눈을 감았습니다. 안 된다는 건 어느새 마음뿐. 오늘 당신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밤은 어떠하였는지요.「알았다」는 짧은 편지를 끝으로 고이 잠드셨을 당신의 밤은 어떠했을까요? 설렘으로 잠 못 이룬 저의 이 가슴만큼 당신도 그러하셨는지요.’
그녀가 시를 곧잘 쓴다는 것은 몇 번 신문 문예면에 게재된 바 있어 이미 그 실력을 알고 있던 터였지만 매번 편지는 한편의 시와 같았다.
집에는 멀리 부산에 있는 친구의 부친상에 다녀온다고 말했다. 검은 양복과 검은 넥타이까지 매고 집을 나설 때 아내는 술 많이 잡숫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런 아내에게 더없이 미안한 마음이 그지없이 솟구쳐 올랐다.
행사장인 공설운동장 입구에서 신문사 김 기자를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함께 단상 쪽으로 향하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하고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곧 눈을 아래로 깔았다. 생활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그녀는 얼굴에 짙은 홍조를 띠고 있었고, 안내를 맡은 모양인지 우리를 내빈석으로 인도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김 기자가,
“저 여자, 요즘 한창 인기가 좋지.”
“왜, 무슨 일로?”
“참, 사람도. 여성 단체 담당이면서 아직 깜깜인 모양이군.”
“글쎄….”
“얼마 후면 여성단체협의회장 선거가 있잖아. 자그마치 후보가 5명이나 된다는데, 소문에는 저 여자만 잡으면 당선이라고, 후보자들이 하나 같이 저 여자한테 매달린대. 실은 나도 이 행사 취재를 하러 여기 왔다기보다는 후보자들과 저 여자에 대하여 동태를 살피러 왔어. 오늘 저녁 모종의 썸싱이 있을 거라는 제보를 받았거든. 잘하면 한 건 근사한 걸 주울 수도 있지.”
“그럼, 그 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게 광고 건이 아니구먼?”
“겸사 겸사지. 그리고 자넨 현 회장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고 있나? 그 동안 무리 없이 이끌어 왔다고 보는데…”
“글세. 이 부서로 온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 그런데 현 회장과는 뭐라도 걸리나 왜 그런 말을 하지?”
“나중에 얘기함세.”
김 기자는 잠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두어 차례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있었고, 의전이 시작되었다. 자세히 보니 사회대의 진행자가 그녀였다. 톤이 조금 높은 목소리에 카랑카랑 또박또박한 말소리는 유리 조각으로 가슴을 그어 대는 듯했고 듣기에도 한 점 빈틈이 없어 보였다. 이따금씩 내 쪽으로 보내오는 그녀의 시선으로 하여 어색하게 나는 딴전을 피우기도 했다. 지루했다. 환영사, 대회사, 격려사, 치사, 축사에 뭔 시상이 그렇게 많은지, 시작 한지 1시간이 소요되어서야 비로소 요식 행위가 끝나고 체육 경기로 이어졌다. 그때 그녀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김 기자가
“야-, 아나운서를 해도 좋을 아름다운 목소리시군요.”
“별 말씀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잘 나가신다고 들었는데….”
좀 비틀리는 말투로 묻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과가 준비되어 있는 텐트로 향하면서 연실 김 기자는 기자다운 면모를 보이려는 듯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었고, 그녀는 마치 질문할 것을 예상하고 답변 자료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차근차근 발음도 정확하게 답변을 했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 질문 요지는 이 행사와는 무관한 협의회장 선거에 관한 이야기였다. 텐트 안에는 기념식에 참석했던 기관, 사회, 봉사단체장과 지역 유지들이 그대로 옮겨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언제든 궁금한 것이나 의심되는 점이 있으면 저희 사무실로 오세요. 전화를 주셔도 좋고요.”
그녀의 태도에 처음 당당하던 김 기자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듯 했다. 나는 속으로 매우 기뻤다. 혹여 행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김 기자의 질문으로 인하여 그녀의 기라도 죽는 게 아닌가 싶었고, 여차하면 대신 답변을 할까 하고 말꼬리를 잡으려 애를 썼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는 당황하지도 흐트러짐도 없이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여 또박또박 대응하였던 것이다.
문자 메시지가 울렸다.
‘장소는 정하셨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장소를 어떻게 알려 줄까 궁리 중이었는데 때 맞춰 물어 왔다.
‘M은행 골목 「추억만들기」에서.’
나는 서둘러 행사장을 빠져 나와 약속한 카페로 갔다. 카페 ‘추억만들기’는 지하에 있다. 담배 연기에 찌들고, 코를 찌르는 지하실 특유의 냄새로 두통을 유발케 하는 20평 남짓한 곳이다. 습한데다가 곰팡이 내가 물씬 배어 나 퀴퀴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아직 이른 시간 이어서인지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고, 들고뛰는 관광버스 안에서나 어울리는 메들리가 귀를 멍멍하게 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한 것은 아무래도 남자가 먼저와 기다려 주는 것이 도리상 맞는 순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칸막이가 있는 룸으로 자리를 잡고 주인을 불러 환기를 시켜 달라는 주문과 함께 조용한 음악으로 바꿔 줄 것을 요청했다. 가상공간에서는 친숙하게 지냈었지만 막상 현실 공간에서의 첫 만남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마침내 5시가 조금 넘자 그녀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뇨. 방금 전에 왔어요.”
생각보다 서먹하지 않았던 까닭은 낮 동안 멀리서나마 행사장에서 보아 왔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머리를 매만지며,
“제 꼴이 말이 아니죠?”
솔직히 말해 운동장에서 곧장 온 사람 같지 않게 머리며 옷차림이 단정하였고, 색 등불 아래라 그런지 화장한 얼굴도 화사하게 보였다. 보름 동안 멜로만 대하다가 막상 마주앉고 보니 기분이 새롭다. 낮에 행사 중에 있었던 잡다한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하는 동안 미리 주문한 맥주와 마른안주가 나왔다. 행사로 목이 말랐던가 보다. 주저 없이 한잔을 쭈욱 비웠다. 빈 잔을 다시 채워도 사양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시원하게 한잔 드세요.”하고 권했다.
“광고 건은 별 얘기 없던 것 같던데….”
“참, 미처 말씀 못 드렸었군요. 그 건은 저희 회장님이 잘 처리했어요.”
“그럼, 결국 김 기자의 관건은 협의회장 선거였나 보네요?”
“선거에 관해서는 저도 아는 바 없는데 주위에서 자꾸 저를 의심들을 하고 있나 봐요. 현 회장님에게 손을 들어주고 있다 나, 뭐 그러면서요.”
기본으로 나온 맥주 3병이 순식간에 동이나 3병을 다시 시켰다. 생각보다 그녀는 술을 잘 마셨다. 술을 마시고 취하는 건 당연한 이치. 취기가 도는 모양이다.
화장실을 다녀온 그녀가 오늘 치른 행사 사진을 보여 준다며 옆자리로 앉았다. 기록사진이라서 보나마나 뻔하겠지만 그래도 관심을 보이는 척이라도 해야겠기에 바싹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녀의 향기가 그윽하다. 내가 보기엔 하나도 우스울 것이 없었으나 그녀는 재미있는 듯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이 천진해 보인다. 어느 샌가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어깨를 통하여 숨결이 전해져 왔다. 눈만 건성으로 사진에 가 있을 뿐, 생각과 정신은 온통 어깨에 집중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화가 끊기고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슬며시 손등에 손바닥을 올렸다. 금세 회답하듯 손등을 뒤집어 손바닥으로 맞는다.
‘뭐랄까? 첫 경험 후 느꼈던 부끄러움, 그런 거였었습니다. 죽어도 얼굴을 대할 수 없을 것 같은 부끄러움. 정말,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당신 얼굴을 뵐까 두렵습니다. 다행히 집에 오니 아무도 없네요. 씻고 책을 읽을 예정입니다만 책이 잘 읽혀 질지요? 잘 주무세요. 이 글은 내일 아침에나 보시겠지요.’
이튿날 아침 열어 본 메일이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귓불에 느껴졌을 입김과 그 뜨거운 가슴….
그날 이후 우리는 그 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물론 업무를 핑계로 한 만남이다. 첫날 술을 많이 마신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두세 잔 하는 것이 고작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절제하는 쪽이었다. 우선 운전을 한다는 이유였지만,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 술 냄새를 피우지 않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으리라. 횟수가 잦아지면서 만남에 익숙해지고, 갈수록 점점 아린 그리움 같은 것이 싹터 갔다.
“큰일 났어요. 김 기자가 지난번 여성대회 정산서를 요구해 왔거든요.”
“하지만 겁낼 게 뭐 있어요? 정산서야 사실대로 보여주면 되지요. 그런데 도대체 그 작자 의도가 뭔지 모르겠네. 광고 문제도 해결됐고 선거는 시작도 안됐는데….”
“그러게요. 속내를 모르겠어요.”
김 기자 건으로 그날 저녁 다시 만났다. 샛강이 내다보이는 레스토랑이다. 새까맣게 수면을 덮은 오리 떼가 일제히 날아오르고 내려앉는 풍경은 장관이다. 그 많은 숫자가 무리로 움직여도 부딪치는 일조차 없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듯하나 분명 저 속에는 질서 유지를 위한 나름대로의 규칙 같은 게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수많은 무리 속에서도 제짝이 있어 한번 맺으면 영원토록 변치 않고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게 놀랍거니와, 제짝을 잃으면 과부로 홀아비로 산다니 그 또한 여간 신기로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저 오리 떼 중에 유난히 한 쌍이 짝지어 다니는 저 새가 원앙인가요?”
“그러네요.”
“예로부터 원앙을 혼례 때 전안으로 썼다지요?”
“그렇기는 한데, 조류 학자의 관찰 결과 짝을 잃으면 홀로 살았던 것이 아니었대요. 오히려 제짝을 놔두고 외도까지 하더라나요. 하하하.”
여자들은 분위기에 뿅 간다고 했던가? 깨끗하고 조용한 레스토랑도 그러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샛강의 아름다움에 그녀는 시종일관 흥분의 도가니에서 빠져 나올 줄 몰랐다. 포도주를 곁들인 바다 가재 요리보다도 분위기에 취한 것 같았다. 만난 이유가 김 기자 문제였음에도 아예 생각 밖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다. 이상스러울 만큼 우리가 만나는 날은 비가 오곤 했다. 강변을 따라 목적지도 없이 마냥 차를 몰아 달리고 있었다. 윈도우 브러쉬가 반기며 손을 흔들어 주는 듯하면서도 또 다른 의미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음에 가슴이 쓰리다. 마치 ‘안돼요. 안돼. 가정으로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는 양.
얼마를 달렸을까. 사방이 캄캄하여 전조등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게 날이 저물고 있었다. 강둑이 끝나는 산모롱이의 외딴 길에서 차를 세웠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다. 그녀가 가만히 어깨에 얼굴을 기대 왔다. 보드라운 머리칼을 만지던 손이 어깨로부터 가슴과 허리에 닿아도 그녀는 조금도 거부하는 기색이 없었다. 얇고 헐렁한 생활 한복의 촉감은 몸 의 곡선이 쉽게 전해져 왔다. 의자 등받이를 뒤로 넘겨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황홀한 밤이 점점 깊어 갔다.
‘솔직히 두려운 마음과 환희가 교차하면서 제 생활의 리듬이 깨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무섭고 겁이 덜컥덜컥 나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이제는 안 보고는 못살 것 같으니 어쩌면 좋을는지요. 지금 이대로 영원하기를 기도합니다.’
시간만 나면 종종 야외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처음엔 가까운 강가의 고정된 코스를 잠깐씩 돌아오는 정도에서 멀리 외곽의 장거리로 조금씩 조금씩 늘려 나갔다. 그러는 동안 이젠 제법 짙은 농담을 해도 전처럼 쑥스러워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모텔을 지나치다가 슬쩍 지나가는 말로,
“저기 한번 들어가 보면 안 될까?”
“좋아하지 말아요. 이 이상은 안돼요. 혹시 십 년을 기다려 준다면, 그땐 몰라도. 호호호.”
야근을 하는 날이다. 밤 10시쯤에 메시지가 울렸다.
‘속리산입니다. 워크숍 왔거든요.’
‘워크숍? 그런데 지금 밤 열 시가 넘었는데…’
‘아, 일박 이일이에요.’
그렇다면 집은 안심해도 되고 사무실 현장만 잘 피하면 메시지를 마음 놓고 주고받을 수 있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그럼 허락된 날이네요?’
‘네-’
‘내가 그리로 갈까?’
‘아유! 거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래도 간다면.’
‘몰라요. 용기 있음 마음대로 하세요. ㅎㅎㅎ’
대충 일을 끝내고 속리산으로 달렸다.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메시지나 실컷 주고받는다는 게 이렇게 발전되었다. 2시간이나 실히 걸려 속리산에 도착하였고, 호텔 앞에서 전화를 거니 깜짝 놀라며 농담 인줄 알았단다. 그곳까지 가 준 호의에 감동된 나머지 쩔쩔매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들어갑시다.”
“안돼요. 아는 사람 천지인데 어쩌시려고요.”
“그럼, 다른 호텔로 가지요 뭐.”
“그것도 안돼요. 조별로 방 배정을 했기 때문에 빠지면 체크돼요.”
“그럼, 이대로 돌아갈까요?”
“어쩜 좋아요?”
차를 탔다. 조금만 함께 있다 가자 하기에 호텔을 빠져 나와 한적한 곳에서 차를 세웠다. 밤이 깊었으므로 오가는 이도 차도 없다. 좁은 차안의 공간은 작은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고 서로의 마음이 밀착되었다. 긴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이따금 교대로 어깨에 기대기도 하고 다리를 베고 눕기도 하였다. 호텔로 돌아갈 생각 같은 건 새까맣게 잊고 차안에서 밤을 꼬박 보냈다.
‘물론,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좋은 기회였지만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당신이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솔직히 당신을 원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 맘을 저도 모르겠습니다. 미안해요. 정말 정말 사랑하고요.’
그날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날이 궂으면 더욱 활기를 친다. 정신 이상자들이 비 오는 날이면 증세가 도지는 현상도 있다. 그런 맥락일 것이다. 솟구치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업무를 구실 삼아 그녀의 사무실을 찾았다. 2층 창가에서 비 오는 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노크 소리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혼자였다. 살며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안았다. 그녀의 감미로운 따스한 온기가 몸을 녹이는 듯했다. 어젯밤 메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보고 싶다는 말을 열 번쯤 하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줄 알았습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열 번을 하고 나니 보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배로 늘어나고, 내 몸 전체에서 보고 싶다는 단어가 사방으로 튀어나옵니다. 보/고/싶/어/보/고/싶/어.’
오랜 포옹이 전화벨 소리로 인하여 우리를 떨어지게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한다.
“저희 회장님이신 데…” 말끝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음성이 떨려 있다.
“그런데요?” 불길한 마음에 나는 다그쳐 물었다.
“방금 전에 여기 오셨다가 우릴 봤대요”
“예?”
가슴이 쿵 하고 무너져 내린다. 들어올 때 닫지 않았었는지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아차-”
몸이 만길 아래로 무너져 내린다. 세상이 온통 노래지는 것 같고 머리가 씀벅거렸다. 그녀는 책상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무슨 말로도 위로 할 말이 없다. 마음도 달래 줄 겸 강가의 레스토랑을 가지로 했다.
레스토랑을 다 갔을 낭떠러지가 있는 급커브 지점이다. 회장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해 있어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미처 앞에서 커브를 돌아 나오는 차를 보지 못했고 황급히 핸들을 꺾었으나 충돌하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병원이었다. 아내와 딸이 와 있었다. 아내의 눈초리가 분노에 차 있었는가 하면 늘 내 편이었던 딸아이마저도 원망의 눈빛이 가득했다. 그녀도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아빠. 그 여잔 누구 에요? 거긴 왜 간 거지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만날 수가 없었다. 나보다 부상이 경미했던 그녀는 이미 퇴원 한지 오래 라고 했다. 몇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도 답장커녕 멜을 열어 보지도 않았다. 휴대폰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것마저도 응답이 없었다. 가슴을 옥죄어오는 불안의 나날이 바로 지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일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한쪽에서 스며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자주 가던 카페 ‘추억 만들기’를 들러 보았다. 쓸쓸히 홀로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 오셨나?” 김 기자였다.
“…”
“혼자라면, 잠시 앉아도 될까?”
손수 맥주를 따라 목을 축이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실은 이 술집 내가 하는 거야. 저 여자가 내 와이프거든.” 마담을 턱으로 가리킨다.
“그럼…?”
“알고 있었지. 자네와 그 여자의 관계에 대하여. 뭐 요즘 애인 없는 사람이 있나. 그리고 또 너무 놀라지 말게. 여성단체협의회장이 바로 우리 이모야.”
내가 잔뜩 긴장을 하고 진지한 모습을 보이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맥주 잔을 비운 김 기자는 말을 계속하였다.
“참 멍청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래,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려면 개인 멜을 만들어서 사용을 하든지…. 그 여자의 멜은 사무실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멜이었다네.”
“아니, 그렇다면…?”
“그렇지만 실제로 그 멜을 사용하는 사람은 이모와 간사인 그 여자뿐이었다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야. 이번 일로 그 여자 출근도 안 하던 모양이던데. 담당이니 그 일이야 물론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곧 있을 회장 선거에 이모는 출마하지 않겠다니 머지않아 여성 단체를 떠날 것이고, 그 여잔 계속 근무할 수 있어. 이모한테는 내가 입 다물라고 다짐을 받아 뒀거든. 안심해도 돼. 그리고 소문은 나쁘게 났지만 그 여자 남편은 업무 차 만났다가 사고가 난 걸로 알고 있어. 자네 가족에게나 변명 잘해 놓게.”
아!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엮어 온 줄만 알았던 둘만의 밀회가 송두리째 드러난 것이다. 온 세상이 다 캄캄해졌다. 황당한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였고 그야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고 싶었다. 그 동안 비밀스레 가슴을 활짝 열 수 있었던 밀폐된 우리만의 공간이라 굳게 믿었던 곳이 아니던가? 그리고 아무리 메일이 들통이 났기는 했으나, 그 사실을 하나만으로 출근을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업무 관계로 교통사고가 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왜 남편이 의심하지 않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혼돈해진 나는 김 기자와 늦도록 술타령을 하였다.
‘내가 당신을 만나는 게 두려운 것은 누군가에게 들켜 당신이 곤란해질까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그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이 빨리 빛을 다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당신을 만나는 게 두려운 것은 나의 어리석음을 당신에게 들켜 당신의 사랑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당신과 팔베개를 하며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은 어인 조화인지요.’
사건이 있기 얼마 전 보내 왔던 메일들을 다시 한번 열어 본 중에 아직 삭제하지 않았던 그녀의 편지다.
평소 그녀와 자주 갔던 샛강으로 달려갔다. 강물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도도하기만 하다. 강줄기는 어느 곳도 똑 같이 흐르는 곳은 없다. 여울을 만나 세차게 흐르다가 소용돌이도 만나고, 때론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도 치고, 드넓은 곳에 이르러 어머니 가슴처럼 고요히 흐르는 강물. 갈대가 홀로 흔들리지는 않는다. 구름이 홀로 떠가지는 않는다. 강물 또한 바람 때문에 물결이 일듯이 나로 인하여 떠나가야만 했던 그녀.
외로운 물새 한 마리가 저녁노을 속으로 쓸쓸히 날아가고 있다.
저/피 토하며 꺼져 가는/운명을 보라/애절함이 분노처럼 끓어 넘치는/차라리/황홀하고도 아름다운/장엄한 이별.
저토록/처절한 아픔을 어이하리/저토록/처절한 사랑을 어이하리/해질녘/붉은 물결에/꽃그늘로 지는 강.
나는 시 한 수를 읊고 쓸쓸히 샛강을 등으로 하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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