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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김해 향우회원들 제2의 경주 창녕에 가다
고향을 떠나 김해에서 생활 터전을 마련한 향우들과 같이 고향 창녕을 탐방한다. 어느 지역보다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내 고향에 대해 좀 더 알고자 여행 장소로 선정했다. 어떤 향우들은 고향은 자주 가는데 하면서 호기심을 갖지 않았고 회의를 통해 정한 일이지만, 약간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고장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고향 사랑도 하고 자랑도 할 수 있다. 제2의 경주라고 불리는 창녕은 역사적 자료가 많이 산재해 있다. 우리고장은 장마면 유리의 지석묘와 창녕읍, 계성면, 영산면에 흩어져 있는 고분군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조상이 살았던 것으로 본다. 기록에 나타나기는 1세기 전후의 시대로 삼국지에 변진 24국의 소개에 나타나 있는 불사국(不斯國)이 우리고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다른 이름으로 비화가야라고도 한다.
이 아름다운 고향에 2017년 5월 21일 김해대성동공원에서 우리들은 28인승 버스를 대절하여 출발하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우포늪이었다. 예정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한 우리는 창녕군청에서 나온 신○○ 계장님과 배○○ 해설사를 만나 안내를 받게 되었다. 그분들의 안내에 따라 우포늪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가는 길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고 하얀 찔레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찔레꽃 향기를 맡으면서 조금 걸으니 우포늪의 일부가 나타났다.
<우포늪으로 걸어가는 향우들의 모습>
전망대까지 가려고 했으나, 시간 관계상 가지 못하고 생태체험장 전시관에 들러 해설사로부터 ‘비봉리 유적 나무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산토끼노래 동산으로 이동하였다.
<비봉리 유적 나무배에 대한 해설사의 설명>
산토끼 노래 동산에 도착하여 안내를 받게 되었다. 이 노래는 이일래 선생님이 이방초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뒷산에 올라가 산토끼가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을 보고 작곡한 것이다. 1960년 4월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이 노래를 배웠는데, 그 당시 노래의 배경이 강원도 어느 산골인 줄 생각했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1984년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한글학회회원이 되어 이일래 선생님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다. 그때 저는 깜짝 놀랐다. 어릴 적에 생각했던 강원도 어느 산골이 아니고 내 고장 창녕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 고장이 그렇게 골짜기인가 하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이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각 고장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 고장에도 다른 지역에 알리고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는 소재를 찾아 만든 것이 산토끼 노래동산이다.
저도 처음 가 보았지만, 볼거리가 잘 되어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생생한 체험학습을 통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옛 시절을 잊지 못해 이일래 선생님이 강의하셨던 모습을 만들어 놓은 교실에서 회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일래 선생님이 강의했던 옛 교실 모습에서>
산토끼 노래 동산을 관람하고 성씨고가를 향해 버스는 달렸다. 대지면 석리 양파시배지 앞에 내렸다. 양파시배지라는 조형물 앞에 서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이 조형물 뒤에는 전부 마늘을 심어 놓아 어떤 분이 시배지 표지 뒤에는 양파를 좀 심어 놓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성씨 고가(일명 성혜림 생가)에 들렀다. 해설사의 안내로 전에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더 알게 되었고 건물도 여러 개를 구경하였다. 그 가운데 안방 옆에 화장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까닭을 해설사에게 물었더니 여성을 위한 배려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와송이 많이 자라나 있어 보기도 좋았다. 처음 가보는 사람에게는 잘 꾸며져 있는 정원이나 집의 규모를 보아도 추억을 만들 수 있다. 가기 전에 관리인에게 사전에 예약을 해 두어야 한다. 사유 재산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성씨 고가의 아석헌 앞에서>
성씨 고가를 관람하고 읍으로 들어와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우리는 교동 고분군에 가 해설사의 해설을 들었다. 이 고분이 가야시대의 것인가? 아니면 신라시대의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아라가야(함안군) 고분이나 소가야(고성군) 고분은 유네스코에 등재가 되었는데 유독 교동과 송현리 고분은 가야의 것이냐, 신라의 것이냐에 대한 논란 때문에 등재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은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언젠가 KBS 방송국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에서 밝힌 것인데 이곳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것이 있었다. 이것은 내 고장의 유물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비화가야의 화려한 유물들 중에는 창녕에서 도굴된 왕의 금관과 대왕의 보검, 금 신발 등 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어 반환 받을 길이 없어 안타까움만 더해 준다.
<교동 고분군을 답사하고 돌아가는 길>
<교동 고분군의 내부모습>
교동 고분군을 탐방한 후 우리는 만옥정 공원에 있는 국보 33호인 진흥왕 척경비를 보러 갔다. 중학교 역사 시간에 진흥왕 순수비라고 배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 비를 척경비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순수비와는 달리 비문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명(題名)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갔던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는데,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14년 2월 7일 창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橋本良臧)에 의해서였다. 현재는 창녕여중고병설유치원 밑 골목길로 들어가면 이 비석이 발견된 곳이 나온다고 한다. 이 비석은 글자가 조금 마멸된 곳이 있는데 세월의 흐름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이것이 너럭바위처럼 누워 있었기에 후대 사람들이 이곳에서 곡식을 찧으면서도 마멸되었을 것으로도 추정한다.
이 비는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개석(蓋石)이나 대석(臺石)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한 면을 간 다음 바깥 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一行)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만옥정 공원에 있는 진흥왕 척경비>
척경비를 둘러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내려와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를 보았다. 사진으로는 보았지만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내 고장의 중심부에서…….
아래쪽에 있는 건물이 하나 있는데 해설사가 질문을 하였다. 얼른 떠오른 생각으로 영빈관이라고 대답을 했다. 영빈관이 아니고 손님을 맞이하는 객사라고 한다. 객사 옆에는 많은 비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역대 현감들의 사적을 적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보물 제310호인 석빙고를 탐방했다. 석빙고 앞에서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석빙고는 경주, 현풍, 안동, 청도 등에 있는데 구조형식은 같다고 한다. 원리는 차가운 공기는 밑으로 가고 더운 공기는 위로 가게끔 만들어 놓았다.
<보물 310호 창녕 석빙고의 모습>
이어서 국보 제34호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답사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이 탑은 우리가 보와 왔던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누군가가 아는 것만큼 느낀다고 하였던가. 탑에 대한 지식이 없는 우리들로서는 해설자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내 고장에 이렇게 아름다운 탑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처럼 처음 와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 탑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전문가들이 써 놓은 글들을 읽어 보고 여기에 옮겨보았다. 술정리 동 석탑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하층기단의 덮개돌이 5매로 이루어져 있고 탑 전체에 곡선이 이루어진 곳이 두 곳이라는 점이다. 석가탑이 귀마루마저 직선인 점을 감안한다면, 하층기단 윗면 굄대의 하나를 공글린 것과 처마와 귀마루의 끝을 아주 가볍게 뽑아 올린 것은 석가탑보다 진보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 삼층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의 절제미를 갖추면서도 곡선의 우아한 맛을 살린 독자적인 탑이 되겠다.(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여기서 약 1Km 떨어져 있는 보물 제520호 술정리 서 삼층석탑은 일정상 다음에 와서 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관룡사로 옮겼다.
<국보 제34호 술정리 동 삼층석탑의 기품 있는 모습>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는 관룡사는 통일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경치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 갑자기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 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1816호로 지정된 '관룡사 대웅전 뒤편에 있는 관음보살 벽화'는 보타락가산에서 설법하는 유희좌(遊戱座·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다른 한쪽 다리는 가부좌로 앉은 모양)의 관음보살을 벽면 전체에 걸쳐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보타락가산을 그리면서 특징적인 물가 표현을 생략하는 등 색다른 표현 형식이 의미가 커서 보물로 지정됐다고 한다.
<관룡사 대웅전의 모습>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
약사전은 보물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사전은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으나 대웅전을 등지고 있는 서남향한 자세인데, 이런 까닭에 대웅전에서 약사전으로 가려면 반드시 약사전의 뒷모습을 보며 측면으로 돌아가도록 돼 있다. 이런 배치는 약사전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갖는 대단한 자부심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약사전은 정면과 측면과 뒷면, 사방의 모습이 아름답고 지붕과 벽체의 비례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뛰어나 작지만 당당한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게 되는 조선 초기의 건축물이다.(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안타깝게도 약사전의 사진은 준비를 못했다. 약사전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고려 후기의 불상으로, 두껍게 회칠한 탓에 얼굴 표정이 살아 있거나 온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보물 제519호로 지정돼 있다.
보물 제295호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곳에 와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관룡사 서쪽의 봉우리인 용선대 마루에 동향(東向)하여 앉힌 여래좌상으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똑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불상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답사는 이번에도 놓치게 되었다. 여러 명이 답사하는 관계로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실제로 올라가는 길도 잘 몰랐다. 이번 여행을 정리하면서 용선대로 가는 길을 알게 되었다.
명부전과 요사 사이로 난 좁고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15분쯤 걸어 올라가면 용선대와 화왕산성 갈림길이 나온다. 용선대로 이어진 왼쪽 길을 택해 큰 바위무더기를 조금만 타고 넘으면 골짜기를 끼고 깎아지른 듯 불쑥 몸을 내민 거대한 바위 산마루를 만난다. 용선대이다. 반면 오른쪽 화왕산성 길을 택하면 몇 걸음 안 가서 곧바로 용선대를 전망하기 썩 좋은 자리가 나선다. 용선대의 불상을 먼저 만나느냐 아니면 용선대 불상을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전경을 바라보느냐 잠시 망설여지긴 하지만 어느 길을 선택하든 오래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두 코스 모두가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를 숙독하면서 꼭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을 보러 혼자라도 갔다 와야 하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외에도 창녕에는 가볼 곳이 많다. 부곡면 비봉리 패총전시관, 영축산성, 장마의 지석묘, 박진의 전쟁기념관 등 산재해 있는 문화재 및 관광지를 찾아볼 수 있다.
부족한 부분은 심사숙고하여 재정리하도록 하겠다. 이번 여행을 안내해 주신 창녕군청의 체육계장님과 해설사 배여사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일을 추진한 사무국장님, 재무국장님, 사무차장님께도 감사드린다.
2017. 05. 29.
첫댓글 잘 감상했습니다^^
서툰 글을 읽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셨네여~
여행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후기 쓰기는 싫은데 모처럼 써 보았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