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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
청산리대첩 이끈 독립군 영웅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명장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은 평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운동가였다. 1920년대 만주 항일투쟁의 중심에는 홍범도(洪範圖)와 함께 김좌진이 있었다.
김좌진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도 무력 투쟁을 통해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불패의 독립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명문가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마다하지 않고 조국 광복을 위한 기시밭길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김좌진은 독립군사령관으로 무장 투쟁에 앞장섰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사에만 주력하지 않았다. 그는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에도 남달리 눈길을 돌렸다. 그는 고향에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운 데 이어 독립투쟁을 하던 신민부(新民府)와 한족총연합회 시절 북간도에 50여 개의 학교를 세워 후세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만주 지역 동포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동포들의 영농법 개선, 실업 장려 등이 모두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향상을 위한 방안이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17세 때 노비 해방
김좌진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주군 고남하도면,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안동 김씨 김형규(金衡圭)와 한산 이씨(韓山李氏) 부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그의 집안은 대대로 홍성의 명문가였다. 그의 11대조는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자폭으로 순절한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이고, 김상용의 셋째아들 김광현(金光炫)이 홍주목사를 지낸 뒤 그대로 홍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892년 3월에 아버지 김형규가 불과 28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형 경진(景鎭)은 아홉 살, 좌진은 세 살, 동생 동진(東鎭)은 태어난 지 겨우 넉 달째였다. 그런데 형 경진이 족숙(族叔)인 김덕규(金德圭)의 양자가 되어 집을 떠났다. 그렇게 해서 좌진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야만 했다.
김좌진은 다섯 살 때부터 한문사숙에 다니면서 글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좌진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고, 글공부보다는 활쏘기와 말타기와 병정놀이를 즐겼다. 물론 대장은 언제나 좌진이 도맡아서 했다. 글을 배우고 나서는 책도 영웅호걸담과 병서를 즐겨 읽었다. 또 어렵고 약한 사람을 돕는 의협심도 남달랐다. 그는 타고난 장재(將材)였다.
그는 열세 살 되던 1902년에 해주 오씨(海州吳氏) 오숙근(吳淑根)과 혼인하였다.
그동안 나라 형편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가.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왕조는 쇄국의 빗장을 풀고 문호를 개방했다. 그것이 일제 침략의 서곡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 침략의 마수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896년에는 왕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렸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제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홍주에서도 그 이듬해에 의병이 일어났다. 전 우부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총수로 하여 일어난 홍주 의병은 홍성은 물론 예산 · 청양 등 충남 서북부로 들불처럼 퍼져나갔지만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 군경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홍성의병은 1905년 노일전쟁 이후 을사조약(乙巳條約)과 통감 무단정치에 항거하여 1906년에도 다시 일어났다. 당시 17세의 김좌진은 홍주성전투에서 의병들이 학살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김좌진의 가슴속에서 민족 자주와 독립의 의지가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김좌진은 열여섯 살 때인 1905년에 가노 해방을 단행했다. 노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이미 폐지되었지만 부유한 집안에선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좌진은 노비들을 모두 불러 모아 잔치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전답을 나누어주었다.
김좌진이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한 것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07년이었다.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신교육 실천과 민족 자강운동의 하나인 호명학교 설립에는 홍성의 안동 김씨 문중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인물은 전 판서 김병익(金炳翼), 전 참판 김병수(金炳秀), 전 홍성군수 김병원과 김선규 등이었고, 현임 군수 윤필(尹必)의 도움도 받았다. 김좌진은 호명학교 운영을 위해 가산을 정리했고, 또 80칸이나 되는 자기 집을 교사 건물로 내주었다.
그러고 나서 김좌진은 부인 오숙근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김좌진은 신문물을 접하고, 상투를 잘랐으며, 황성신문 기자로도 지내며, 우국지사들과 교유했다.
1908년 1월에는 기호홍학회(畿湖弘學會)를 조직하여 그 이듬해에는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의 해에 김좌진은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서울에 이창양행(怡昌洋行)과 영창양행(永昌洋行),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해 독립운동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 장차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일 자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김좌진이 일경에게 체포된 것은 1911년 3월이었다. 그는 5월 17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김좌진은 감옥에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만났다. 백범은 뒷날 <백범일지>에 김좌진을 만나 일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좌진 등 몇 사람이 애국운동을 하다가 강도죄로 징역을 받고 같이 수감되어 함께 고생했다. 김좌진은 침착하고 굳세며 용감한 청년으로 국사를 위하여 무슨 운동을 하다 투옥되었는데 친애의 정을 서로 표했다.’
김좌진은 1913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 고향 홍성으로 돌아가 한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한 김좌진의 결심은 더욱 굳어져갔다.
1915년 7월 15일에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체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서울과 경북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김좌진은 일제의 집요한 추격에 만주로 건너갈 결심을 굳혔다. 서울에서 만난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은 김좌진으로 하여금 광복회 부사령 자격으로 만주로 건너가게 했다.
독립군 이끌고 불멸의 청산리대첩
1917년 8월에 북간도로 망명한 김좌진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3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 김동삼 ․ 김약연 ․ 이동휘 ․ 이승만 ․ 안창호 ․ 신채호 ․ 박은식 등 민족지도자 39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상용 ․ 유동열 등이 결성한 무장 독립단체 길림군정서의 참모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이어서 그해 8월에는 서일(徐一) 총재의 초청으로 대한정의단에 참여하여 사령관으로서 군사 부문을 맡았고, 12월에 대한정의단이 대한군정서로 개칭함에 따라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었다.
1918년 박상진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실현은 하지 못했다.
1919년 초 대한정의단 등을 기반으로 하여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그 본거지를 왕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어 북로군정부의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이 되었다. 마침내 장군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겠다는 필생의 숙원사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1919년 북로군정부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동년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부라는 이름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바꾸어 총사령관이 되고 임시정부가 지원해 준 돈 1만원으로 사관양성소를 설립, 스스로 교장이 되었다. 이어 1,600여 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기관총 7문을 입수하고 바로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소장이 되었으며, 사관훈련과 무기류 구입과 입수에도 힘썼다.
1920년 9월 사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고 이어 북만주 주둔 일본군의 이동 소식을 접하고 청산리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홍범도 장군 등의 부대와 연합하여 협곡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10월 20일부터 10월 23일에는 청산리 80리 계곡으로 일본군을 유인, 유인되어 골짜기로 들어온 일본군과 교전, 북로군정서 참모총장 나중소(羅仲昭), 부관 박영희(朴英熙),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백운평, 천수평, 마록구 등지의 야산에 숨어 있다가 골짜기로 들어온 일본군과 3회에 걸쳐 교전, 일본군 3,300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부대를 이동, 흑룡강 근처로 주둔지를 옮겼으며,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21년 말 그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독립군을 인솔하고 북간도를 떠나 낯선 시베리아 땅으로 이동하게 됐다. 시베리아로 이동하자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그는 처음부터 시베리아로 가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시베리아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가서 보니 과연 소련 공산당의 독립군 원조는 속임수였다. 결국 군사를 이끌고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흑하(黑河)에서 소련 공산당군의 기습을 받았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무사하였으나 다른 많은 독립군은 소련군의 포탄과 기습공격 등으로 사살되거나 재판정에 끌려가게 되었다. 다시 간도로 되돌아온 그는 옛날 발해의 수도였던 영고탑(발해진)에서 군사단체의 조직과 재건에 착수한다.
1925년 군사단체 신민부(新民府)를 창건하고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의 신민부 · 참의부 · 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였고, 바로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했고, 교민 사회의 통합 단결을 위해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김종진 등과 함께 조직하였다.
공산당원에게 암살당해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그는 아울러 황무지 개간과 문화계몽사업을 추진하였고 강연 활동을 통해 독립정신 고취와 한인 교민 사회의 단결, 단합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은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공산당원 박상실(朴尙實) 이 쏜 총탄을 맞고 피살되었다.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장례식은 한족총연합회와 현지 교포들에 의해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 그의 아들 김두한(金斗漢)은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친일파의 손에 암살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1933년 경성에 있던 부인 오숙근이 일제를 피해 그의 시신을 찾으러 만주로 다시 가서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위장하여 반입,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한 뒤 1957년 김두한에 의해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이듬해 사망한 부인 오숙근은 남편 김좌진과 함께 합장되었다.
광복 후 1947년 김좌진을 추모하는 추모회가 열렸고,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74년 보령시에서 김좌진의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이와 동시에 그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계승코자 매년 10월 22일에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나중에 이범석은 이렇게 회고했다.
“김좌진 장군은 칠척 거구에 만인을 위압하는 태산과 같은 위엄과 형형한 안광 그리고 도도한 웅변력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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