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안동분천리 영천이씨분강서원창원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22 15.11.05 23: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천이씨분강서원창원일기(汾江書院創院日記)

먼곳의종친과방계종친에게서원건립을알리다.

1699년 6월 2일에 이현보 선생의 서원 건립을 위한 공지문[通文]을 발송하였는데, 일단 인근 문중 사람들에게만 알렸다.
한 달 뒤인 7월 1일 귀목정(龜木亭)에 실무임원진이 모여 공지문[通文] 발송의 범위를 협의하였다.

이미 인근 문중 사람들에게는 보냈지만, 서원 건립이 인근 문중 사람들로만 성사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족보에 근거하여 그 부조의 범위를 정했다.
멀리 거주하는 영천이씨 문중이 많은 곳에 퍼져 있어서, 그들에게 보낼 공지문[通文]을 하루만에 작성할 수 없었다.

다음날 다시 모여 나머지 공지문[通文]을 만들어 외지에 사는 문중 일가에게까지 모두 발송하였다.

즉 풍기·순흥·문경·영해·예천 지역의 문중 일가와 영천·안동·영양 등 방계 종친들에게까지 공지문을 발송하였다.

 다만 외손인 대구의 양씨와 경주의 임씨 두 집안은 집안 재력이 넉넉하기 때문에 통문을 이날 발송하였다.
외족(外族)에게 보내는 공지문은 7월 11일에 내외의 문중들과 논의하여 발송하였다.

*******************

◆ 원문 번역
  1699년(숙종25) 6월 2일
문중 사람들이 애일당愛日堂에 모여 처음으로 정사精舍 창건을 발의하였는데, 자문을 구하며 의논하자, 다들 찬동하였다.

이틀 뒤 이장휘·이장희·이명하·이동필 등이 사천재사沙川齋舍로부터 도곡재사道谷齋舍로 숙소를 옮겨, 곧 이어 통문을 발송해서 문중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임원을 나누어 정하였다.

다음 날 일을 끝내고 돌아갔다.

 통문에 말하기를,
아, 우리 분천汾川 일대는 바로 선조 효절공孝節公께서 대대로 살아오신 옛 마을이니, 남아 전해오는 기풍과 향기가 잠시 머물다가 거쳐 간 보통 지역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위 기슭 위에 애일당이 우뚝 높게 서 있는데, 세대가 점차 멀어지고 자손이 날로 교체되어, 장차는 평천 서업緖業이 마침내 사라져 전해지지 못할 형편이 될 것이니, 이 어찌 후손들이 깊이 부끄러워하고 듣는 사람들이 다 함께 개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에 애일당 언덕에 알맞은 땅을 살펴 정사 하나를 창건해서 추모의 정성을 부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자손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또한 한미하여 제각각 생업을 제대로 꾸려가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아무 것도 없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어찌 크게 걱정하고 염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먼저 상의를 해서 다음과 같이 분담하기로 하고 감히 알려 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집안사람 모두가 한 마음으로 호응하여 기한 내에 거두어 본소로 보내주셔서 큰 일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누어 맡을 몫은 한 사람 당 돈 1냥, 쌀보리 1말[斗], 술 1동이[圓]이고, 집안 형편에 따라 조금 더하고 덜함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 가을걷이 때를 기다려 추가로 부담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원 도감은 이장희·이명하·이백업,

유사는 이동필·이기상·이성장,

기와 굽는 일은 이여필·이복·이기백·이필영·이감,

재목 공급은 이몽필·이명필·이숙·이성일·이중영·이언영·이문·이조·이우영·이성중·이성대·이기·이여백이 맡았다.
6월 그믐
가까이 사는 자손들이 각각 그 재력에 따라 보리를 거두어 왔다.

그 내용은 수합기收合記에 있다.
7월 1일
다들 귀목정?木亭에 모였다.

외지의 일가들에게 통문을 보내려고 족보를 가져다 살펴보았는데, 지파支派가 널리 퍼져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다.
7월 2일
애일당에 모여, 7월 11일 날 내외 후손들이 함께 모여 일을 의논하기로 날짜를 확정하였다.

외지에 사는 문중 일가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였다.

 풍기·순흥·문경·영해·예천 지역인데, 통문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

또 영천·안동·영양 등 방계 종친들이 살고 있는 곳에 통문을 보냈다.

 그 통문에,
엎드려 말씀드립니다.

 저희들이 선조 효절공을 위하여 애일당 언덕에 정사를 하나 창건하여 그 당시 거처하시던 곳이 백대 후에도 사라지지 않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에 큰일을 벌여 일을 성취할 단서가 없으니, 저희들의 깊은 걱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막중한 일을 시작하면서 우리 일가들 간에 알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이에 감히 통고합니다.
라고 하였다.

 또 대구와 경주의 외손인 양씨와 임씨 두 집안에 통문을 발송하였다.

그 통문에 말하기를 “조상을 위하는 정성이 친손인가 외손인가에 따라 차이가 없고, 선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멀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운운하였다.

시기;1699-06-02 ~ 1699-07-02

1699년여름 해뜨는곳을향하여地官이書院의터를잡다.

◆ 원문 번역
  1699년(숙종25) 7월 11일

아침 식사 전에 이백업이 왔다.

 아침 식사 후에 찰방 이극철 어른·예천 이고·김익달·이진표·김운·이관표·김주한·김○·윤상좌·김태국·박중환·이광·오시창·이재창·김도안·김두남·이두로·이규로가 왔다.

김중국이 지나는 길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갔다.

이동식은 날이 저문 뒤에 왔다.

다른 지역 외파에 글을 발송할 일을 좌중에 알렸더니, 한결같은 소리로 다 함께 찬동하였고, 내외의 자손들이 모두 그 통문에 서명하였다.

 그 통문에 말하기를,
조상을 위하는 정성이 내파인가 외파인가에 따라 차이가 없고, 선조를 존숭하는 마음이 멀고 가까움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아, 우리 선조 효절공께서는 대대로 선성의 분천리에 사셨고, 애일당은 바로 그 어버이를 즐겁게 봉냥하시던 곳입니다.

그 자서自序와 회재 이언적·퇴도 이황 두 선생과 주고받은 글에 근거해 보면 이런 사실이 이미 자세합니다.

효절공이 세상을 떠나신지 이제 100여 년이 되어, 세대는 점점 멀어지고 자손은 날로 바뀌어가건만,

 애일당에는 신령한 빛이 우뚝 서려있는 듯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를 갖추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그 유적을 돌아보며, 방황하고 배회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까지 하니, 그 후손된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이야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애일당 언덕에 정사를 하나 세워 옛 영당의 제도를 본받고자 한 지가 오래 되었건만, 여태껏 미루며 시작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근래에 내외의 자손들이 서로 더불어 함께 도모하여 비로소 이렇게 의견을 모았지만, 어려운 시절에 큰일을 벌여 일을 진행할 단서가 없을 듯하니, 이 어찌 내외 자손 된 자들이 함께 걱정하고 염려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감히 이런 사정을 멀고 가까운 곳의 외파에 알려드리니,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들께서는 한 마음으로 호응하여 각각 재물과 인력을 출연해서 조상을 위한 이 막중한 일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이양직 등 60여 명이 서명하였다.

통문 일곱 통을 베껴서 여러 고을에 나누어 발송하였다.

유숙한 사람은 찰방 이극철·이진표·이관표·이백업·이두로·김도안이었다.

모인 장소는 애일당이었다.

 지관 임기를 초청하여 애일당 남쪽에 터를 잡았으니,

곧 황응상黃應祥의 옛 터이다.

좌향은 건좌乾坐 손향巽向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